레프리콘이 있었다. 그리고 여느 날처럼, 전장은 그녀와 상관 없이 시끄럽고 잔혹했다.


 베링 섬에서 떠나기 바로 전 날의 마지막 근무날. 로자는 마지막 근무에 대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수많은 "의외"들과 마주했다. 의외로 아무 관심도 없을 것 같던 올가 대위는 재미있었다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다. 의외로 마지막이니까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압박도 없었다. 그리고 의외로, 책도 잘 읽혔다. 마지막이자, 제일 놀라웠던 의외의 일이라면, 로자는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레인처럼 손목에다가 칼을 찍어서 동맥을 찢어버릴 생각을 할 정도로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는 게 그랬다.


 "그래서 로자. 넌 죽고 싶냐?"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전쟁터는 가고 싶어?"


 "가고 싶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잘 아네."


 올가 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가 대위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제일 미친 것 같던 환자 이야기, 계급빨로 찍어 누르려다가 정신질환자 판정을 받고 계급을 몰수당한 채 미국 본토로 쫓겨나서 해고당한 장군 이야기, 생산공정에서의 문제로 뇌가 덜 자라서 지능 발달이 7살 아이에서 멈춘 브라우니 이야기까지. 로자는 말없이 그런 이야기들을, 세상에는 그런 인간 군상과 바이오로이드 군상도 있구나, 생각하며 들었다. 그러다가 타냐 중사의 이야기에, 그러려니 하며 듣던 태도를 버리고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타냐 카레니나... 그 년은 성격이 아주 더러운 년이야. 아마 내 편지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화를 주체하지 못할 게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 년은 그런 년이지.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 년이 공이랑 사는 확실하거든.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 알려주마... 큼! 큼!"


 큼! 큼!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올가 대위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로자를 노려보더니 굵은 목소리를 냈다. 로자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관등성명을 댔다.


 "그래. 이 년아. 베링 섬에서 꿀 잘 빨다 왔냐?"


 "상병 레프리콘-47183! 아닙니다!"


 "빨거 다 빨았으면서 빼는 거 보게. 그건 됐고, 기념품은 있냐?"


 "...타냐 중사님?"


 저 표정도, 목소리도, 로자는 순간 자신이 다시 미쳐버려서 올가 대위를 타냐 중사라 착각한 것인지 혼란에 빠졌다. 올가 대위는 험악한 표정으로 로자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싸매는 모습을 보고는 껄껄 웃더니 표정을 풀고 목소리를 원래 그녀의 그것으로 되돌렸다.


 "어때. 꽤 잘 따라했지?"


 "정말로, 타냐 중사님인 줄 알았습니다."


 "하필 닮아도 그 년이고, 하필 성대모사를 할 줄 알아도 그 년인게 참 끔찍하다. 저 년이랑 내가 같은 가족이라는 게... 뭐 어쨌든, 타냐는 뭐 이런 식으로 말을 할 거고, 그러면 넌 나한테 받은 편지들을 타냐한테 넘길 거다. 그러면 타냐의 표정이 썩어들어가고, 널 보면서 이렇게 말할 거야."


 한번 더, 올가 대위가 사라지고 타냐 중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로자도, 타냐 중사를 마주치고는, 베링 섬에는 타냐 중사가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그녀의 눈 앞에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관등성명을 또 댔다.


 "이 년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가지고..."


 "상병 레프리콘-47183! 죄송합니다!"


 "뭐 대충 이럴 거야. 그런데, 아마 거기서 끝날 거다. 어차피 그 년도, 너한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거고, 내가 알기로 그 년이 성격이 좆같이 더럽기는 하지만, 의미도 없이 화를 내는 병신은 아니거든. 그러니까, 너한테 화내는 건 거기서 끝날 거다. 그러면 네 임무는 거기까지. 그러면 끝이야."


 "정말 그걸로 괜찮겠습니까? 올가 대위님?"


 "괜찮냐고?"


 하! 올가 대위가 피식하며 코웃음을 쳤다. 올가 대위는 타냐 중사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주었다.


 "그 년은 항상 주변에 관심이 없었지. 자기만 아는 년이었어. 단순히 이기적인 게 아니라, 주변에 딱히 관심이 없었거든. 그런데 그 편지 때문에 그 년이 화난다면? 그러면 내 30 평생에, 드디어 그 년을 화나게 하는 게 되는 거지. 이런 말 들어봤나? 내가 이 사람을 화나게 했다. 나는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무슨 맥락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그래. 알 것 같으면 그렇게 좀 해줘라."


 "네. 알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나는 회진을 가봐야 해서... 시발, 얼마나 전쟁을 더럽게 하면 사방이 정신병자 투성이냐?"


 올가 대위가 일어났다. 로자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5시였다. 로자는 6시가 되면 더 있고 싶건 말건, 의무적으로 하던 일을 전부 멈추고 보조사역병 겸 환자들이 머무르는 생활관으로 돌아가야 한다. 올가 대위의 말대로, 베링 섬은 "정신병자 투성이"였으니, 그녀가 몇 명만 회진을 돌아도 6시는 분명히 넘길 게 뻔했다. 


 이게 마지막이다. 그렇게 생각한 로자의 목울대가 울리며, 마지막으로 올가 대위를 불렀다. 정신병동에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올가 대위의 발걸음이 멈췄다.


 "저... 올가 대위님."


 로자가 불운아건, 행운아건, 바이오로이드의 삶에 올가 대위를 다시 만날 일은 없으리라. 만약 로자가 다시 끔찍한 부상을 입었지만, 운 좋게 살아남고, 더 운이 좋아서 장기적출 처분 대신 생체 정비창(야전병원) 입고 처분을 받는다면, 그리고 더더욱 운이 좋다면 올가 대위를 만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중상을 입어야 하는, 운이 좋은 것도 아니고 다른 대부분의 군인들처럼 운이 나쁜 것도 아닌, 참으로 괴상한 불운아이자 행운아가 되어야 하는, 애매한 확률에 기대야 했다. 


 사실상 다시는 못 본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턱없이 낮은 확률에 기대기보다는, 100%에 수렴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확실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현실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택하기로 했다. 로자는 한낱 바이오로이드다. 것도 정말로 흔해빠진 레프리콘 모델 바이오로이드다. 그런데도, 아무리 돈 받고 하는 일이라도, 자신의 시간을 로자를 위해 써 준 그녀가 고마웠다.


 "그동안 절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올가 대위님이 아니었다면... 지금 제가 어떻게 됐을 지 모르겠습니다."


 "...이 녀석, 마지막에 감성 터지는 거 보게?"


 올가 대위는 우두커니 멈춰 있다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돌렸다. 감성 터졌다며, 로자의 진심이 담긴 말을 무시하는 듯했지만, 로자는 올가 대위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올가 대위가 남긴 마지막 말로, 로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뭐... 그렇게 말하면 나야 고맙지. 이런 말이 도움이 될 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건강하게 복무해라."


 올가 대위가 나가고, 로자는 올가 대위 대신 침묵이라는 동료와 함께하게 되었다. 침묵이 로자에게 말하고 있었다. 넌 내일 전쟁터로 갈 거야. 너가 죽을 곳으로. 너가 가야 할 곳으로. 


 자신을 "레인"이라고 부르던 노움-19113이, 드디어 정비를 마치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처럼, 로자라고 불리기를 바라는 레프리콘-47183도 그녀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도 로자는 올가 대위 덕분에, 그녀가 알고 있었던 사람인 레인에게, 마지막 인사는 남길 수 있었다. 로자는 역장 속에 갇혀있는 레인에게 찾아가서 말을 걸었다.


 "...자신을 잃어버린 건 아니기를 바라요. 레인. 그리고... 정말 고마웠어요."


 전쟁터, 또는 고기분쇄기, 어쨌든 로자가 끔찍한 것을 마주하기 전날 마지막 밤. 기분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미묘한 상태에서, 전장에 대한 공포와 빨리 잠이나 자고 싶다는 귀찮음이 대립했다. 미소 양강이 차갑게 대립한 냉전처럼, 두 큰 생각들이 부딪치며 그 사이사이에 여러 끔찍한 생각들이 피어올라 잠을 못 자게 막았다.


 "..."


 로자는 자신의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았다.


 로자보다 먼저 도착해있던 브라우니-541116.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거부하고 가만히 있다가 끔찍한 광증을 보였지. 결국 타냐 중사에게 잔혹하게 얻어맞은 끝에 기절당해서 베링 섬으로 '반품'당했고. 바이오로이드 주제에 통제되지 않는 광증을 보이며 반항하는 게 제 주인의 시선을 끌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연구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미궁 요새에서 로자의 부사수 역할을 브라우니 레키. 그녀는 로자를 도와주려고 중기관총 조준경을 가리는 철판을 열다가, 로자가 받아냈어야 할 총알을 대신 맞고, 뒷걸음질치다가 결국 온 몸이 갈려나갔다. 게다가 레키가 쓰러졌을 미궁요새의 터널은 완전히 무너졌으니, 로자가 살아있을 때, 아니, 블랙리버와 미 합중국이 이기던 삼안산업과 유라시아 공동전선이 이기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고깃조각 하나라도 수습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레인, 노움-19113은 죽으러 돌아간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손목을 찢어버렸다. 이제는 영혼이 빠져나가서,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봐도 레인을 쳐다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레키랑 리나도, 중상을 입은 채로 지나가듯 들은 바로는 그들도 로자만큼은 아니지만 치료가 필요한 중상을 입었다고 들었다.


 "후우..."


 천장에 마치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아, 로자는 옆으로 누워서 다시 눈을 감았다. 로자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언젠가, 로자에게 저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날이 올까.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로자가 살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적당히 봉급을 받고 적당히 사는 삶은 누릴 수 없는 걸까. 지금이 아니라면, 적어도 십 년 뒤라도, 아니면 백 년 뒤라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착잡해져서, 로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천장에 떠오른 익숙하지만 살아서는 못 볼 얼굴들이나 바라보기로 했다.


 "기상! 기상!"


 그들의 얼굴을 보던 것에서 기억이 끊기고, 다시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떠보니 생활관이었다. 로자는 벌떡 일어났다. 다음번에 이 자리에서 눕고 일어날 이를 위해 최대한 침구류를 정리했다. 그리고 로자의 짐을 챙겨서, 생활관 바깥으로 나갔다. 로자와 비슷한 처지의 바이오로이드들이 모여 있었고, 그 앞에 새 전투복과 전투화 세트가 놓여 있었다. 


 "모델별로 정리해놨으니, 각자 전투복을 가져가서 즉각 환복 실시해라!"


 임펫 중사가 명령하자 바이오로이드들이 각자의 모델에 따라 전투복을 받았다. 로자는 전투복에서 올라오는 좀약 냄새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모두가 다 지켜볼 수 있는 곳에서 환자복을 벗고 전투복으로 갈아입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로자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도 더더욱, 로자의 개인적인 의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환자복을 벗고, 가슴을 가리며 주변을 보다가, 수많은 레프리콘들 사이에 숨어 바지를 먼저 올리고, 셔츠를 걸쳤다. 그 다음에 다른 옷들을 챙겨 입었다. 허둥대며 옷을 입는 로자의 귓가에, 타냐 중사의 말소리가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야, 하기 싫은 거 다 알아. 내가 병신도 아니고 그걸 모르겠냐? 그런데 중요한 건 그거지. 너네가 하기 싫다는 건, 작업을 배정하는 데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거. 너희들도 알지?'


  맞는 말이었다. 알죠, 알고 말고요, 로자는 속으로 곧 볼지도 모르는 타냐 중사에게 대답했다. 로자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군말 없이, 임펫 중사의 명령에 따라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흰색 환자복을 임펫 중사 옆에 모인 카트에 던져 넣었다. 임펫 중사는 바이오로이드들을 데리고 헬리콥터 착륙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넓은 베링 섬 활주로 끝에, 수많은 H자가 그려진 곳에 가서 무전기를 들었다.


 "스타포트. 여기는 카우보이 알파. 감자포대 전량 입검 완료했다고 알림."


 "카우보이 알파. 양떼가 시야에 잡혔다. 5번 패드에 감자포대 전량 반입 허가한다. 교신 종료."


 무전기 너머 상대방이 교신을 끊자, 임펫 중사는 바이오로이들에게 따라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로자를 비롯한 바이오로이드들은, 5번 패드라는 곳까지 따라갔다. 의외로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베링 섬은 넓었고, 헬리패드들도 대형 헬리콥터의 착륙을 염두에 둔 것인지 크고, 그 사이사이의 간격도 넓어서 그곳까지 가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로자는 처음에는 산들바람처럼 약하던 바람이, 어느새 먼지와 티끌이 날리는 용오름이 되고, 용오름 같던 바람이 로자의 붉은 머리칼을 깃발처럼 휘날리게 하는 태풍이 되었다.


 "으윽...!"


 지평선에도, 가까이에도 폭풍 따위는 없었고, 하늘도 쨍쨍하게 맑았기에, 절대 자연현상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굳이 소거법 같은 머리 아픈 이야기를 꺼낼 것도 없이, 고개를 들기도 힘든 이 바람의 진원이 그녀의 머리 위에 있는 헬리콥터일 것임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로자는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자신의 눈 앞을 가리는 거대한 것과 마주했다.


 "우와... 진짜 크다."


 "가까이서 보니 더 큰데?"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헬리콥터의 자태를 보고는 감탄과 경악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것은, 날아다니는 콘크리트 주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늘이 바다라도 된 것마냥 헤엄치는 회색의 강철 고래도 아니었고, 군것질을 너무 해서 살이 통통하게 찐 흑룡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헬리패드에 사뿐히 발을 내리는 저것을 부르는 좀 더 간결하고 확실한 명칭으로 "CH-171", 좀 더 군살을 붙이면 "미합중국 국군의 군용 헬리콥터 중 가장 큰 헬기" "PMC 블랙리버의 가용 헬리콥터 중 가장 큰 헬리콥터" 를 알고 있었다.


 "구경 났냐? 빨리 와! 앞에 보고! 너네는 길이 하늘에 나 있냐!"


 "네, 네! 알겠습니다!"


 바이오로이드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금방 착륙한 CH-171 근처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눈으로 보는 그 크기가, 귀로 듣는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그리고 온 몸을 강타하는 폭풍이 그들의 마음을 일순 뺏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로자는, 그 강철 고래 겸 날아다니는 주택 겸 초고도비만 흑룡의 뒷문이 열리고 나서, 그 안의 진실과 목도해야 했다. 로자가 한때 처했던, 그리고 운이 좋으면서도 나쁘면 다시 처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한 이들이 잔뜩 쌓였다는 진실을. 


 "욱... 으윽..."


 "으윽..."


 "우욱은 무슨 우욱이야. 빨리 안 빼?"


 "...네! 알겠습니다!"


 임펫 중사의 닦달에, 로자를 비롯한 레프리콘들이 앞장서서 들어가고, 노움과 브라우니들이 슬금슬금 그 뒤를 따랐다. CH-171의 내부는 로자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심각했다. 차라리 이 안에 쌓인 시체를 빼는 상황이라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캠프 베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두 발로 걸으실 수 있는 분은 일어나서, 저를 따라와주세요."


 "대가리 깨진 깡통 선생님. 댁이 뵙기에 여기까지 헬기 타고 실려온 애들 팔다리가 멀쩡할 거 같습니까?"


 "캠프 베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두 발로 걸으실 수 있는 분은 일어나서, 저를 따라와주세요."


 베링 섬에 처음 왔을 때나 떠날 때나 도와주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램파트가 자기 할 말만 주절거리고, 임펫 중사가 램파트에게 갈 곳 없는 분노를 담아 정제되지 않은 욕설을 퍼부었다. 그 둘의 콩트를 뒤로 하고 바이오로이드들이 중상자들을 바깥으로 빼냈다. 로자는 중상자들의 모습을 보니, 차라리 시체를 나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아아..."


 "아... 아으으으으...!"


 로자는 등 뒤에서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이곳에 왔다. 아마 진단명이 다발성 골절, 척추 손상, 폐 출혈, 두개골 균열, 10곳 이상의 내출혈. 뭐 그런 것이었을 게다. 그리고 로자가 보기에, 지금 로자가 내리고 있는 이 중상자들은 로자만큼이나, 어쩌면 로자보다도 더 심한 꼴을 당한 상황이었다. 


 두 눈알이 사라진 브라우니의 눈구멍 대신, 양 팔이 허우적거리며 주변 상황을 확인했다. 노움의 부서진 아랫턱에 핏물이 고이고, 통제를 잃은 침샘이 붉은 호수에 비를 뿌린다. 이프리트가 누워있는 들것을 들자마자, 들것 바깥쪽에 놓인 사지와 안쪽의 몸을 연결해주던 작은 힘줄 하나가 끊어지며 팔다리가 동강동강 떨어져나갔다. 


 "으윽..."


 "아줌마. 빨리 하고 끝내죠."


 "으으. 네... 이 노움 아줌마 들어야겠네요."


 그리고 노움을 들자,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까뒤집은 눈을 보이며 기침을 뱉었다. 

 "쿨럭! 쿠훌럭! 커커억!"


 숨을 쉬려고 헐떡일 때마다, 흉부를 압박하는 붕대 사이로 분수처럼 울컥울컥 피가 새나왔다. 온 몸이 벌벌 떨렸다. 로자와 함께 들것을 들고 있던 브라우니가 그 모습을 보고 표정을 굳히다가...


 "쿠워어억!"


 "꺄, 꺄아악?!"


 "브라우니!"


 노움이 폐에 남은 마지막 숨을 모아 뱉어낸 기침이, 화산의 폭연처럼 브라우니의 얼굴에 적중하며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고, 브라우니는 깜짝 놀라서 주저앉아버렸다. 기침을 뱉은 노움은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져서 머리를 처박고, 브라우니는 울어버렸다.


 "으, 흐아아아앙..."


 "아줌마. 빨리 일어나요. 빨리!"


 "이 년아! 너 뭐 해!"


 임펫이 주저앉아서 펑펑 우는 브라우니의 뒤통수에 손바닥으로 불벼락을 날리며 빨리 일어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다가, 브라우니가 한두방으로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로자에게 고개를 홱 돌리더니 쏘아붙였다.


 "야, 너 뭐 해? 이 새끼 실성했으면 다른 애들이랑 같이 해야 할 거 아냐!"


 "죄, 죄송합니다!"


 로자는 다른 이들 사이에 끼어들어가서 들것을 들었다. 임펫 중사의 불호령이 싫었지만, 오히려 이제는 차라리 나았다. 텅 비어서 그녀의 영혼을 눈알 대신 넣으려는 눈구멍을 봐도, 점점 핏물이 차서 익사해가는 폐로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발버둥치다 제 얼굴에 피를 뱉는 이들을 봐도, 아예 반으로 갈라진 흉부 사이로 쿵쿵 뛰는 심장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중상자를 봐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야! 일어나라고!"


 "네! 브라우니-138711!'


 "이 년 아주 빠졌지? 너 뒤질래? 죽고 싶어?"


 "아닙니다!"


 바이오로이드들이 들것을 다 내리고, 베링 섬에 남아있던 보조사역병들이 들것을 들고 들어간다. 임펫 중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던 브라우니를 걷어차서 강제로 CH-171 안으로 밀어넣고,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을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외쳤다.


 "당장 탑승해!"


 """네! 알겠습니다!"""


 로자는 임펫 중사의 불호령에 시트를 확인할 새도 없이 앉았다. 그리고, 앉아마자 속으로 욕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것 같았다.


 "아, 시발..."


 "야, 뭐라고 했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CH-171의 플라스틱 커버가 씌워진 딱딱한 시트. 그 위에 앉은 로자의 첫 감상은 "축축하다"였다. 그리고 방금까지만 해도 죽은 자를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있을 중상자들을 잔뜩 싣고 있던 이 헬기 안에서, 시트에 고였을 만한 액체의 정체는... 알면 그렇게 유쾌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로자는 이를 악물고, 타냐 중사의 말을 생각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거지. 너네가 하기 싫다는 건, 작업을 배정하는 데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거.


 로자는 이를 악물고, 머릿속으로 나는 도구다, 나는 도구다, 나는 도구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안전벨트를 맸다. 로자는 자신을 도구로 칭하고, 쓸모있는 연장쯤으로 취급하고, 브라우니보다 조금 더 나은 바이오로봇 정도로 취급하는 시선들이 싫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코로는 피비린내와 배설물 냄새, 엉덩이로는 핏물 내지는 오.줌의 축축함, 눈으로는 슬래셔 영화의 한 장면처럼 피비린내가 된 헬기 내부를 바라보고 있자니, 차라리 감정을 버리고 싶었으니까.


 "...우욱..."


 임펫 중사가 무전기로 뭐라고 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CH-171의 안과 밖의 통로였던 뒷부분의 램프가 올라가며 닫히고, 어두워진 헬기 안에서 붉은색 등이 켜졌다. CH-171의 엔진소리가 맹렬해지고, 동체의 진동이 심해지다가, 어느 순간 시트에 앉은 엉덩이와 기댄 등에, 중력을 거스르는 대가로 무게가 전해졌다. 창문 너머를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진짜로 베링 섬을 떠나게 된 모양이었다.


 "윽..."


 "이게 뭐야..."


 그리고 악마같은 임펫 중사가 없어지자, CH-171에 탑승한 바이오로이드들은 거침없이 욕지거리를 내뱉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여기에 탑승한 이들 중에는 장교는커녕 부사관 계급장을 단 이들조차 없었다. 병사들 간의 위계를 적용한다고 해도, 어차피 다들 한번도 본 적 없고, 대대나 연대는커녕 사단마저 다를 수도 있는 이들이었기에, "다른 부대 아줌마"들이라 서로 통제가 될 리도 없었다.


 "씨발, 씨발, 씨발... 그때 그냥 자살을 하는 거였어...!"


 "욱... 우우욱...!"


 "아줌마. 토할거면 여기 봉투 줄 테니까 여기다 해요. 욱... 아, 시발..."


 누군가는 헛구역질을 하고, 누군가는 이게 뭐냐면서 이 상황을 욕한다. 누군가는 그래도 같은 병사고 같은 편에서 싸우는 전우들이라고, 양 옆에 사람들이라도 챙겨주려고 한다. 로자는 그들 사이에서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흑... 흐으윽... 으윽..."


 "엄마... 엄마아..."


 "엄마 그만 불러요... 우리가 엄마가 어딨다고... 씨바알..."


옆을 바라보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수많은 얼굴들이 보이고, 앞을 바라보자니 가뜩이나 불안정한 얼굴들에 학살극처럼 노골적인 혈흔들이 붉은 조명과 합세해 살인 현장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아래를 바라보면? 누군가 소중히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잃어버린, 다리라는 '분실물'이 놓여있었다. 그 다리가 보기 역겨워, 로자의 발로 쿡쿡 찔러서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로자는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댄 업보를 바로 청산받았다. 


 "어, 이... 이거 뭐야!"


 "어... 시발! 시발!"


다리를 옆으로 밀어버리자, 그 다리에 깔려있던 얼굴 살점이 드러났다. 브라우니의 부릅뜬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바닥에 붙어있는 살점이, 로자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로자의 옆에 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로자도 이대로 가다가는 저 살점이 말할까, 천장으로 고개를 올렸다. 


 코로 숨을 쉬면 짙은 피비린내와 중상자가 흘린 배설물 냄새, 적절한 처치를 받지 못해 썩어버린 살내를 완벽하게 섞은 칵테일이 콧구멍을 통로 삼아 들어왔다. 마치 그녀의 뇌가 붉은색 연무에 가두어져 속까지 훈연되는 기분이었다. 피비린내가 싫어서 입으로 숨을 들이마시면, 폐로 가야 할 공기가 마치 위장을 공격한 것처럼, 한번 숨을 쉴 때마다 가슴에서 역겨움이 올라왔다. 게다가 청각으로도 붕붕대는 파리 소리와 울음소리, 욕지거리, 비명이 들려왔다. 촉각은? 로자가 앉은 바닥의 그것이, 게으른 정비사가 흘린 마운틴 듀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신에게 시트 바닥의 액체가 구토가 아니기를, 핏물이 아니기를 기도했지만, 시트 바닥의 액체는 전쟁이 그러하듯 로자를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쩌랴, 로자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을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를 버릴 수밖에. 로자는 고개를 최대한 위로 꼿꼿하게 치켜들고, 붉은 불빛을 받아서 붉게 빛난다는 것을 빼면 이상할 것도,불쾌할 것도 전혀 없는 천장을 보는 것에 집중했다. 그 덕분일까? 다른 이들이 구토를 하는 동안, 로자는 "토할 음식물이 없으면 구토도 없다"는 지론을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실천하는 동안 버틸 수 있었다.


 로자의 머릿속 생체시계가 울렸다. 비행을 시작한 후, 시계를 보면 안 그래도 안 가는 시간이 더 안 갈 것 같아서 생체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궁금한 나머지, 로자는 생체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대학살 현장에 묶여있은 지 겨우 1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진실과 대면하고는 실의에 빠졌다.


 "맙소사."


차라리 기절하면 좋을 텐데. 어쩌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어차피 이 피바다 속에서 살아있어 봤자, 죽었다고 판단할 것 아닌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로자는 참기로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로자는 바이오로이드다. 블랙 리리스나 소완처럼 돈 많은 주인의 총애를 받는 최고급 바이오로이드도 아니고, 라비아타처럼 모두가 아는 속 편한 전시품도 아니다. 로자는 군용 바이오로이드였고, 이 좆된 세상 속에서 제일 좆된 바이오로이드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바이오로이드는 도구고, 도구의 불평은 허용되지 않았다. 


 딱 유일하게 허용되는 때가 있다면, 컴퓨터가 문제가 생기면 오류가 생겼다고 보고하는 것처럼, 바이오로이드 자신의 신체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보고하고 조치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리고 피비린내가, 이 피바다가, 이 살인 현장이 역겹다는 불만은, 당장 들어줄 이들도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들어줄 리도 없었다. 그런 씁쓸한 생각을 모두가 공유한 모양인지, 우는 소리도, 불평하는 소리도, 욕지거리도 점점 잦아들었다. 하지만 로자는 저들이 진짜로 로자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그럴 생리적 여력조차 사라졌는지 궁금했다.


 그 질문에 답해주겠다는 듯, 요새 같던 CH-171의 동체가 크게 흔들렸다. 어지간한 진동은 신경도 쓰지 않던 로자도, 이 뇌와 두개골이 박치기를 하는 듯한 충격에는 정신이 확 깰 수밖에 없었다.


 쾅!


 "으악?!"


 "아아악! 으아악!"


 "뭐! 뭐야!"


 끔찍한 환경 속에서, 바이오로이드들이 비명을 질렀다. 앞쪽으로 기울었다가, 왼쪽으로 기울었다가, 기우는 방향을 따라 안전벨트에 묶인 바이오로이드들의 몸이 기울고, 얼마나 웃긴 이야기를 들었는지 잘린 다리가 데굴데굴 굴렀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다리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공포에 질린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다가가고, 처음 겪어보는 충격에 비이성적인 공포가 피비린내보다도 빨리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 퍼질 때쯤, 한번도 울리지 않던 스피커가 울리며 조종사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충격에 대비해라! 추락한다! 추락한다! 충격에 대비해라! 추락한다!"


 "뭐?! 추락한다고?!"


 "그, 그게 뭔 개소리야!"


 다른 이들이 패닉에 빠질 동안, 로자는 가만히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우... 길게 내쉰 한숨. 로자는 말없이 상체를 숙이고 양 팔로 무릎과 머리를 싸맸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경보음이 한번 울릴 때마다, 로자가 처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이 떠올랐다.


 추락과 동시에 생긴 폭발로 고통 없이 오리진 더스트 결정이 되거나, 온 몸이 찢겨나간 채로 하늘을 바라보다 숨이 끊기거나, 아니면 숨이 붙었는데 온 몸이 끼어서 헬기와 함께 산 채로 불타거나, 또다시 장애인이 되어서 베링 섬으로 반송되거나. 마치  브라우니-541116이 그랬고, 로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참으로 비이성적인 바람이지만, 가능할 수도 있는 상황이 하나 더 떠올랐다.



 그리고ㅡ




 말키노 온천을 향해 난 입구는 전쟁과 어울리지 않게 푸르렀다. 이글이글 끓어서 수증기가 푹푹 오르는 온천 너머, 캄차카에 들러붙은 블랙리버-미합중국 합동군을 내려다보는 산을 똑같이 올려다보며, 타냐 중사는 의미없는 중대의 '상황'이라는 것을 보고 있었다. 테일러 중위가 옛날 생각 난다며 타오 소위를 끌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서 연어를 낚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갑자기 울리는 무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당소 포틀럭이라 알리고, 전방 200m 지점에 야생곰 나타났다고 알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적당히 위협사격해서 쫓아낼것. 이상."


 팡! 파파팡! 파팡! 무전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총성이 여러 발 들려왔다. 타냐 중사는 동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가, 말카 마을 근처에 펼쳐진 산과 부딪쳐 서쪽에서 울리고, 북쪽에서 울리는 것을 듣고는 안락의자 등받이에 눕듯이 기댔다. 로자는 하는 김에, 양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렸다. 딱 타이밍 좋게, 근무 교대자들이 찾아왔다. 


 "타냐 중사님. 근무교대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가 봐라."


 로자는 바이오로이드들을 교대하라고 손을 휘휘 저어 내보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미궁 요새 이후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그 일이 지금 중대에 무슨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어느 사단의 어느 연대의 어느 대대 어느 중대가 안 그렇겠냐만, 알파중대는 숙련병이 너무 부족했다. 그건 다, 너무 격렬한 전투 탓이었다. 미궁 요새에서는 51명이 죽었고, 31명의 중상자 중에서 5명은 의사 얼굴도 못 보고 사망, 10명은 폐기처분, 나머지 15명은 치료를 받고 복귀했고 하나(자기를 "로자"라 부르던 레프리콘-47183)는 베링 섬으로 입고되었다. 


 처음에는 미궁 요새 소탕전과 방어전에서만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전투를 겪어봤다는 바이오로이드들도, 너무 격렬한 전투 앞에서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같이 고기분쇄기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똑같이 갈려나가기를 반복했다. 미궁 요새에서 살아남았던 이들은, 그 지옥 같은 콘크리트 동굴 속에서 제 운을 희망 없는 도박에 탕진한 모양이었다.


 타냐 중사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암울해서, 그 생각은 잊고 자기 영달에나 힘쓰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자기 영달만 생각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일단 좆같은 것. 쉬는 날에 잠깐 강변을 따라 걷다가, 연대장이라는 작자가 제가 명백히 블랙리버 자산인 군용 바이오로이드들을 끼고 강변에서 참 더럽게 생긴 고추를 흔들어대는 걸 본 게 좆같았다. 그리고 하필 어젯밤에 한 카드 내기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탓에, 상황 근무 며칠치를 로자가 다 몰아서 서게 된 게 참으로 좆같았다. 그리고 그 상황에, 분명 이틀 전에 오기로 되어있었던 년들이 소식도 없다는 게 타냐 중사의 분노에 점을 찍었다.


 그나마 나았던 점 두가지. 상황 근무라고 해 봐야, 그냥 막사에 앉아서 가만히 눈 뜨고 앉아있거나, 눈 붙이고 자다가 누가 무전하면 잠깐 대답이나 하는 게 전부였다는 것이 그나마 나았다. 그리고 이 인근의 러시아 민간인의 오두막집에서, 통조림 5통을 대가로 안락의자를 사온 것도 좋았다. 등받이가 접이식이라 여차하면 흔들침대로도 쓸 수 있어서 나았고, 테일러 중위랑 타오 소위가 없으니 마음 놓고 두 다리를 책상에 쭉 뻗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제일 좋은 건, 말카 마을은 워낙에 작은데다가 전술적 가치도 없어서, 철인대대 알파중대 주둔지만 있었기에 뜬금없이 대대장 연대장이 머리를 내밀 일도 없었다.


 "당소 오토닉이라 알리고, 현시간부로 근무교대 완료하였고 각종 기자재 및 탄약 이상 없다고 알림."


 "네. 네. 흐음... 조온나 심심하네..."


 타냐 중사는 너무 심심한 나머지, 다리를 쭈그려서 양 발을 모았다. 그리고 양 발을 손 삼아서 탁자 아래 서랍 손잡이를 잡고 잡아당겨서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먼지 먹은 옛날 알파중대 연명부가 누워있었다. 미궁 요새에서 터널 방어전 직전을 마지막으로 갱신이 끊긴 연명부였다. 로자는 그 연명부를 꺼냈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대부분 사라진 이름들이었다. 


 2소대 부분대장 존 바실론 하사, 자기는 100년 전 베트남전 참전용사 존 바실론처럼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라 자부했지. 틀린 게 있었다면, 존 바실론은 2차대전 참전용사였고, 이오지마 전투에서 끝내 전사했지만, 어쨌든 존 바실론 하사는 옛날의 존 바실론을 따라갔다. 그리고 노움 레나와 브라우니 리나, 로자 이후에 들어온 레프리콘들이 영 아닌데다, 실전을 경험해본 바이오로이드와 그렇지 않은 바이오로이드의 차이가 현격한지라 분대장을 달아줬다. 


 레나는 분대장이 된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래도 상병 계급장을 헛으로 단 게 아닌지 꽤 빠르게 적응해서 분대급 지휘자로서는 손색이 없는 수준으로 올라왔다. 리나는 브라우니의 설계상 한계 때문에 필요한 정보들을 제때 주입받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 많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고, 타냐 중사는 그 년의 어깨에 달아준 녹색 견장을 뜯어버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브라우니 모델치고는 수율이 좋은 개체였는지, 시간이 지나자 차마 눈 뜨고 못 봐줄 꼴은 벗어났다. 그리고 연명부에 1소대 1분대장으로 기록되어 있는 레프리콘-47183, "로자"는...


 "이 년 언제 와?"


 타냐 중사는 한숨을 쉬었다. 지난 전투들에서 너무 심각한 피해를 입고 후방으로 돌려진 후, 계속 보충병들을 충원받으며 중대 전력을 복원할 수 있었다. 지금도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로 통하는 길목이 아니라, 그 길목에서 북쪽으로 빗겨나간 작은 마을을 지키는 임무 같지도 않은 임무나 맡고 있었다. 


 하지만 아예 부대가 대대 단위로 전멸해서 철인대대로 전출당한 몇몇을 빼면 알파 중대로 오는 대부분의 병사들이 신병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전투를 한 번이라도 해본 놈들의 존재가 참으로 절실했다. 그런데 온다던 로자는 안 오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며 욕지거리를 뱉는데 갑자기 테일러 중위의 머리가 빼꼼, 하고 막사 입구에 튀어나왔다.


 "타냐 중사?"


 "아, 중대장님!"


 타냐 중사는 깜짝 놀라서, 책상 위에 올려놓은 다리를 확 아래로 내렸다. 테일러 중위는 손을 휘휘 저으면서 그럴 필요 없다고 말렸다. 하지만 타냐 중사는 이미 일어난 상태였다. 테일러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기름지게 튀긴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타냐 중사. 별 일 없습니까?"


 "이상 없습니다. 중대장님."


 "힘들 텐데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 타냐 중사. 연어인지 뭔지 잡았는데, 취사반에 동기랑 얘기 잘 해서 좀 튀겨본 건데, 한번 드셔보십쇼."


 "아이구, 뭐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로자는 멋쩍게 웃으며, 테일러 중위가 탁상 위에 올려둔 연어 튀김을 집었다. 바삭하게 씹히면서, 기름과 섞인 생선의 육즙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생선살을 어떻게 다 발라 버렸는지 거슬리는 가시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튀김은 전투화 튀김도 맛있을 테지, 라 생각하며 아무 생각 없이 집은 타냐 중사는 깜짝 놀랐다. 비좁은 강변에서 잡은 물고기치고는 꽤 살졌고, 배식표에도 없던 걸 "짬"의 논리를 앞세워 야매로 튀긴 것치고는 꽤 맛이 좋았다.


 "맛 좋죠? 안 그렇습니까?"


 "테일러 중위님. 군대 오기 전에 식당 하셨습니까? 군대에서 이런 걸 먹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뭐. 쉐프를 꿈꿨는데 뭐... 네. 싼 맛으로 일하자니 포티아한테 밀렸고, 높으신 분들 전속으로 들어가자니 소완... 네. 뭐."


 "...유감입니다."


 유감은 무슨! 테일러 중위는 피식 웃더니 책상에 다리를 올렸다.


 "당소 오토닉이라 알리고, 3871 1372 트럭 들어왔다고 알림."


 "네. 네."


 테일러 중위는, 타냐 중사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웨스트포인트 출신이라길래 별 걸 가지고 다 군기를 잡을 줄 알았다. 하지만 소위 배속 첫날부터 전장에서 무슨 군기냐고 아주 빠진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서 이 놈이랑 같이 싸우면 뒤지겠다 생각했는데, 꽤 잘 싸워서 놀라웠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전투와 직결되는 게 아니면 편했던 데다가, 옛날에 일했던 경험을 살려 뭐라도 챙겨주는지라 편했다.


 "타냐 중사님. 편하게 있으시지 말입니다. 어차피 여기에 사단장이 옵니까 대대장이 옵니까."


 테일러는 타냐 중사의 다리를 가리키고는, 책상을 탁탁 쳤다. 타냐 중사는 그에 멋쩍게 웃으며 다리를 올렸다. 그리고 타오 소위는 어디로 갔냐고 물어보려는데, 중대 지휘소 막사 앞에 한 바이오로이드가 섰다. 이프리트였는데, 알파중대에 이프리트는 결원이니 중대 소속은 확실히 아니었고, 철인대대 소속으로 보이지도 않는 바이오로이드였다. 로자는 그것을 보고 말을 걸었다.


 "소속부대에서 낙오됐니?"


 "승리! 4보충대대 이프리트-6761 하사입니다. 47보병연대 1대대 알파중대에 보충병 수송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보충병! 상부에서 보내는 수많은 것들(정찰 명령서, 협조공문,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그 외 기타등등 강조사항, 결산보고서 작성 명령 등) 중에서 유일하게 반가운 것이었다. 보충병은 가서 죽으라고 내보낼 수도 있고, 와서 일하라고 데려올 수도 있는 존재니까.  로자는 웃으면서 보충병을 데려온 이프리트의 뒤를 따르고, 테일러 중위도 아무리 비번이라도 중대장의 위치와 직급이란 게 있는지라, 그 뒤를 설렁설렁 따랐다.


 "보충병? 해체부대 전출자냐? 아니면 신병이냐?"


 중대 지휘소 막사 바깥으로 나갔다. 말카 마을의 공터에 주차된 트럭에서 병사들이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정말로 깨끗한 새 군복을 입고 있었고, 누군가는 거지떼마냥 헝클어진 머리에 오랫동안 씻지 못한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레프리콘, 브라우니, 노움 등 모델도 다양했다. 이프리트는 그들을 타냐 중사 앞에 세우고 나서 보고했다.


 "배속 대상자 총원 30 중 17명 타대 전출자, 12명 신병, 1명 본대복귀자입니다. 이상 없습니다."


 "...그래? 야, 타대전출자 이쪽, 신병 이쪽, 본대복귀자는 이쪽으로 서라."


 """네! 알겠습니다!"""


 타냐 중사의 명령에 보충병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였다. 타대전출자들, 중대가 전멸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아예 대대 단위로 전멸하고 간부들까지 포함해도 2-3명밖에 남지 않은 곳에서 온 이들. 대대가 그 정도로 내려앉으려면 보통 전투를 치른 게 아닐 테니, 다들 완전히 개판이 나 있었다. 군복을 나름대로 깨끗이 세탁한다고 세탁했을 텐데, 검게 묻은 핏물이랑 진흙은 빼지 못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눈동자에서는 영혼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육신은 격렬한 전투에서는 살아남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그러지 못한 것 같았다.


 쯧쯧, 타냐 중사는 혀를 차며 그들의 부서진 영혼을 추모했다. 그들 중 하나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신병들을 바라보았다. 두려움, 기대, 희망, 피로가 섞인 복잡한 감정을 각이 잡힌 자세로 파묻었다. 전투화는 그동안 걸어온 길의 색깔로 물들었지만 전투복은 깨끗했다. 저 초록색과 갈색, 군청색이 섞인 전투복. 저 전투복은 진흙과 키스하며 갈색으로 물들고, 도시의 콘크리트 먼지가 내려앉으며 흐릿해지고, 핏물이 배여 검붉은색이 되리라. 타냐는 모두를 위해, 그들이 전투복이 더러워질 때까지라도 살아남기를 기도했다.


 "자아, 그리고... 야, 너 타대전출자 아니냐?"


 타냐 중사는 홀로 서 있는 본대복귀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링 섬까지 갔다 왔으니 분명 전투복도 말끔한 것으로 받았을 테고, 샤워도 맨날 했을텐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레프리콘의 붉은 머리칼은 진흙을 먹어 어두워졌고, 그 위에 흙먼지와 돌가루가 내려앉아서, 그녀의 존재를 전쟁터의 음울한 색채로 덧씌웠다.


 "...상병 레프리콘-47183. 복귀를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레프리콘, 그리고 47183. 스스로 칭하기를, "로자".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시리얼 번호였고,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타냐 중사는, 분명 베링 섬에서 호의란 호의는 다 입어보고 호식이란 호식은 다 맛보았을 녀석이, 장애인이 아니라는 것만 빼면 미궁 요새에서 후송될 때와 다를 바가 없는 꼴이 되었음을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레프리콘-47183. 너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게... 그게 말입니다..."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로자를 비롯한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을 실은 CH-171이 추락했다. 다행히도 바다가 아닌 숲 속 공터에 추락했기에 발버둥도 못 쳐보고 물고기밥이 되는 사태는 피했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은 죽거나 크게 다친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야생동물들까지 몰려왔다. 큰 소리가 야생동물들의 청각을 자극하고, 헬리콥터 짐칸에서 퍼져나오는 피냄새가 후각을 자극했으니 당연한 결과. 로자는 사망한 조종사의 권총을 뺏어 굶주린 불곰 세 마리와 목숨을 건 결투를 치렀다. 화약의 짧은 불호령 앞에 불곰 세 마리가 한번에 쓰러지는 모습을 본 늑대들은 알아서 도망갔지만, 이제는 저체온증과 싸워야 했다. 로자는 다시 한번 목숨을 걸고 헬리콥터의 연료탱크에서 새어나오는 기름을 손으로 모으고, 그것으로 불을 지펴서 견뎠다. 그러다가 헬리콥터의 추락 위치를 마침내 파악해낸 상부에서 수색대를 보냈고, 그것 때문에 늦게 된 셈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된다. 긴 말이 어렵다면, 헬리콥터가 추락해서 늦었다고 하면 된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려고 해도, 억울함이, 서러움이, 그 짧은 시간 동안 겪은 고통이 응어리져서 입을 잔뜩 막았다. 말을 할 틈이라곤 하나도 주지 않았다. 그, 그게, 그러니까... 로자는 뭐라고 입을 떼려고 했지만 의미없는 군말만 반복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윽... 으으으..."


 로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흐르며 검댕과 흙때가 묻은 얼굴을 지우고, 흑갈색의 눈물이 거울이 되어 더러운 얼굴을 비추었다. 신병들은 갑자기 우는 로자를 보더니, 기껏 맞춘 줄을 깨고 옆으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 옆에 서 있던 타대 전출자들은, 로자도 (질적으로 완벽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그들과 비슷한 지옥을 겪었으리라 어렵지 않게 추측했기에, 가만히 서서 속으로 로자가 겪었을 운명을 동정했다. 그리고, 혹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로자의 영혼을 추모하며 침묵을 지켰다.


 "고생 많았다. 이년아."


 타냐 중사는 말업싱 로자를 안았다. 바이오로이드가 죽건 말건 신경도 안 쓰는 강심장 내지는 냉혈한이었지만,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로자의 상태가 영 아니었기에. 로자의 호된 전입신고가 그렇게 끝났다.


 레프리콘이 있었다. 그리고 여느 날처럼, 전장은 그녀와 상관 없이 시끄럽고 잔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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