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리콘이 있었다. 그리고 여느 날처럼, 전장은 그녀와 상관 없이 시끄럽고 잔혹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터가 그들의 죽음을 잠시 유예하고, 그들이 이 세상을 위해 조금이라도 쓸모있는 일을 할 시간을 주었다. 


당번병 바이오로이드들이 강변에서 빨래를 하느라고 바빴다. 평평한 돌 위에다가 빨래를 올려두고, 몽둥이로 퍽퍽 내리쳤다. 체중을 실어 밟으면 땟국물이 배어나왔지만, 이제 됐다 싶어 전투복을 꺼내보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물 속에 처박았다. 하지만 물 속에 몇 번을 담궈도, 몇 번을 밟아도 전투복에 배인 전쟁의 흔적은, 겨우 그딴 것으로 자기를 없애려 했느냐며 그들을 조롱하기 바빴다. 세탁비누로 빡빡 문질러도 변화는 없어서, 세탁비누는 전투복 위에 옅은 우윳빛 피막만 입혔다. 그마저도 땟국물은 건드리지도 않고, 물 속에 박으면 물거품을 희게 물들일 뿐 본연의 목적인 세탁은 달성하지 못했다.


 "제기랄..."


 "이거 땟물 빠지긴 하는거냐?"


  안 해! 못 해! 세탁 담당을 맡은 바이오로이드들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들은 주인(과 그 주인의 명령권을 일부 위임하는 시스템과 위임받은 상관들)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게 설계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능력 선에서 절대 수행할 수 없는 명령들, 예를 들어 대통일 이론을 완벽하게 정리하고 규명하여 초등학생의 지성으로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교양서를 펼쳐내라고 한다던지, 돌멩이와 막대기만 가지고 삼안산업의 수괴 김지석을 살해하고 라비아타를 납치해 오라고 한다던지, 그리고 뒤에는 선혈이 앞에는 진흙이 배인 더러운 전투복을 완벽하게 세탁하라 한다던지, 하는 명령을 수행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거 안 되겠는데?"


 "이 쯤이면 된 거야. 이 정도면 냄새는 안 날걸? 아마...도."


 "아 몰라. 보급탈취제 쓰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기에 바이오로이드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이 명령을 "현실적으로 수행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하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명령에 대해, 바이오로이드들이 취하도록 설계된 행동을 취했다. 할 수 있는 대로 하기. 그리고 바이오로이드들은, 옷 한 벌 빨자고 다섯 번이나 비누를 문지르고, 20분이나 몽둥이로 두들겨패고, 열 번이나 물 속에 처박았다 빼면 '할 수 있는 대로 하기'에 해당할 것이라 판단하고는 그것을 넘기기로 했다.


 "다 됐습니다. 레프리콘 상병님!"


 "...네."


 세탁 담당 바이오로이드들이 다시 잔뜩 쌓인 세탁물들과 싸우는 동안, 다른 당번병 바이오로이드들은 각자 할 일을 했다. 바이오로이드 두 명이서 전투복을 붙잡아서 꽉 비틀어서 물을 최대한 짜내고, 그렇게 물기를 쏙 뺀 세탁물을 빨랫줄에 건다. 얼핏 보면 쉬워보이지만, 전투복을 납품하는 회사가 전투복이 물을 쉽게 퍼먹고 나서는 절대 놓아주지 않고 최대한 물을 저장하는 재질로 전투복을 만들었는지 물이 쉬이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로자는, 물을 짜내느라 고생하는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나, 둘!"


 서로 반대 방향으로 전투복을 돌리자, 물을 맞아서 시든 전투복이 밧줄처럼 비틀어지며 물을 토해냈다. 촤아아, 촤아아, 바닥의 조약돌을 때리는 물소리가 시원했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지 짜도 짜도 마치 물이 빠져나오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끝이 없이 쏟아지는 물에 점점 질려갔다. 하지만 빨아도 빨아도 땟국물이 빠지지 않는다는 변명은 몰라도, 물이 짜도짜도 계속 나온다는 변명이 군대에서 설 자리는 없었으니, 그들은 한 방울까지 짜는 수밖에 없었다.


 "읏... 차!"


 로자는 스크류바처럼 배배 꼬인 전투복을 펼쳐서 빨랫대에 걸었다. 빨랫줄에 물 먹은 전투복으로 무게를 더하자, 빨랫줄이 점점 아래로 축 늘어짐과 동시에 팽팽해졌다. 촌로가 내준 공터는 정말로 넓어서, 알파 중대 전원의 빨랫감을 널어도 충분했다. 로자는 빨래를 다 널었다. 하지만 빨래를 널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타냐 중사는 '인간의 육신이 편하면 타락의 온상이 된다'는, 간부로서는 완벽하지만 병사들에게는 악마나 다름없는 신념을 품고 있었고, 오늘은 그 신념을 유감없이 발휘할 생각이었기에. 로자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함께 공터를 내준 촌로의 집으로 갔다.


 "야! 똑바로 해라!"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젊은 색시들이 일도 참 잘하는구먼. 두 발로 걷는 황소 같아."


 "별 말씀을요. 저 년들, 사람 죽이는 거 말고는 할 줄도 몰라서 제대로 할 지가 걱정인데... 그런데, 혹시 더 필요하신 건 없습니까?"


 "내가 힘이 없어서, 지하에 창고에 감자 포대를 넣어놨는데, 옛날에는 세르게이 도움을 받았는데 이 친구가 군대를 갔지 뭐유. 그것도 좀..."


 "아, 예. 야! 들었지? 거기 너! 너! 너! 지하실에 들어가서 감자 포대 꺼내라!"


 타냐는 유창한 러시아어로 촌로와 이야기를 나누며 촌로가 부탁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다. 공터 빌려준 값치고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하지만 타냐 중사는, 일을 시킨다는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과하다'는 개념은 잠시 접어두고 있었다. 아무리 블랙리버 군대가 총을 든 쪽이고, 촌로는 해봤자 산탄총 한 자루였으니 블랙리버가 힘의 논리에 따라 물자는 전부 가져가도 되었고, 땅도 마음껏 차지해도 뭐라 할 이들이 없었다.


 하지만 블랙리버의 앙헬 리오보로스를 비롯한 높으신 분들이 도적떼보다는 '군대'라는 칭호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 현지 주민들에게 용역이나 물자를 요구하면 그에 납득할 만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지시를 내렸기에, 그들은 촌로가 제공한 부지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리고 촌로는 지붕을 고칠 물자와 지붕을 고치는 용역을 원했다. 


 땅! 땅! 땅! 지붕으로 올라간 로자가 망치로 못을 마구 두들겼다. 못이 판자에 완전히 박혀 들어간 뒤에도, 중력과 힘을 실어 망치로 판자를 두들겼다. 다른 이들이 적당히 끝낼 때, 로자는 못을 여러 개 더 박았다. 그런데도 작업 속도는 다른 이들보다 더 빨랐다. 지붕 위에 올라가서 혹시라도 농땡이 치는 브라우니 있나 감시하던 타오 소위는, 감시하려던 브라우니에게는 눈길도 안 주고 로자, 레프리콘-47183을 바라보았다.


 "레프리콘 상병님! 여기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네."


 브라우니가 두꺼운 마대천을 덧대고, 다른 브라우니가 그 위에 판자를 덧댄다. 그러면 레프리콘-47183은 못을 대고 땅, 땅, 땅! 계속 박았다. 전동드릴이 아니라 망치로 처박는 무식한 방법으로, 그것도 대충 날림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하는데도 속도가 빠르니, 타오 소위는 신기해서 그 쪽을 계속 바라보게 되었다. 꼼꼼히 하느라고 속도가 느린 거면 너무 FM으로 하지 말고 적당히 하라고 빈말이라도 던지겠는데, 속도까지 빠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마치 머릿속에 못을 박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같았다.


 "레프리콘-47183?"


 "네! 상병 레프리콘-47183!"


 "아, 아니다. 손 안 다쳤냐? 계속 해라."


 "네! 알겠습니다!"


 로자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 앞 백 길은 보아도 사람 마음 한 길은 모른다지만, 이번만큼은 타오 소위가 로자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보았다. 로자는 자신을 버리고, 못 박는 기계로서의 자신이 되었다. 마치 자아를 망치를 든 손에 넘긴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팔목을 따라 동맥을 그어버린 레인도, 미쳐도 제대로 미쳐서 실험실에 끌려간 브라우니-541116도, 미궁 요새에 잡아먹힌 레키도. 


 지금의 그녀는 못을 생각했다. 이 못은 이 판자에 적합할까, 지금 이거, 제대로 꽂은 거 맞나, 힘을 얼마나 줘야 할까, 내가 망치를 제대로 잡았다. 그리고, 힘을 줘서 내리치면 다섯 번 여섯 번에 못이 박히고, 못이 판자와 마대천을 뚫고 들어가서 마대천 너머 다른 판자에 물릴 때까지 계속했다. 그렇게 작업이 끝나고, 로자는 아래로 내려와서 물이 새는지 지켜보는 임무를 맡았다.


 "야. 이제 양동이 올려라!"'


 그렇게 작업이 끝나자, 타냐 중사는 병사들을 시켜 물이 든 양동이를 올리게 했다. 지붕 위에 있던 병사들은 물이 든 양동이를 받아서 지붕에다가 쏴아쏴아 쏟았다. 시원한 물소리가 지붕 너머에서 들렸다. 하지만 집 안에 들어와서 지붕만 바라보는 로자에게, 지붕 위 물소리는 마치 지붕과 분리된 다른 세계의 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지붕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병사들이 몇 번이고 같은 곳에다 여러번을 쏟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자, 로자는 바깥으로 나와서 타냐 중사에게 보고했다.


 "타냐 중사님. 확인 결과 이상 없습니다."


 "그래. 애썼다. 이 똥강아지야. 어르신! 얘가 말한 대로, 지붕 문제는 해결됐을 겁니다."


 "아이고, 고맙네. 고마워. 한동안 물그릇 받치고 살 일은 없겠구먼."


 촌로는 고맙다면서 연신 고개를 숙이고, 타냐 중사는 당연한 일이라며 겸양했다. 로자는 말없이 둘을 바라보다가, 타오 소위와 타냐 중사 앞으로 집합하는 1소대 병사들의 행렬에 동참했다. 촌로가 수많은 병사들이 달라붙어 고친 새 집을 마음에 들어하며 들어가자, 타냐 중사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빼고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고생 많았다! 소대 막사로 돌아가서 쉬고 있어라. 괜히 쉬지도 못했는데 또 일 시킨다면서 징징대지 말고, 남들 눈치 보지 말고 쉴 수 있을 때 최대한 쉬어라.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해산! 타오 소위가 박수를 짝짝 치자, 1소대원들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 그리고 간절히 바랬던 곳으로 향했다. 로자의 경우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생각을 쳐낼 수 있었기에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명령은 명령이니 따르기로 하고 막사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그녀의 발걸음이 막혔다. 난데없이 접시를 든 타냐 중사가 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냐 중사님?"


 "너 나 좀 보자."


 로자는 그렇게 타냐 중사를 따라갔다. 타냐 중사는 로자를 여러 곳으로 데려갔다. 중대 탄약고에서 기관총과 탄약을 받으며, 로자는 주인이 죽었는데 어떻게 기관총이 멀쩡했는지에 대한 알고 싶지 않았던 상세한 정보를 얻게 되었고, 시체 무더기에서 멀쩡한 부품들을 골라 중대 수준에서 가용한 정비 능력으로 최대한 복구한 재생 군장의 온갖 핏자국들을 보며 더더욱 알고 싶지 않았던 군장에 얽힌 내력을 알게 되었다. 


 "군장 다시 한번 확인해봐라. 방탄판은 새 거라서 문제 없겠지만, 군장이 너덜너덜하다던지, 찢어졌다던지 그런 게 있을 수 있어."


 "이상 없습니다."


 "그럼 따라와."


 네, 알겠습니다. 힘있게 대답한 로자는 타냐 중사의 뒤를 따랐다. 타냐 중사는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중대 주둔지 방벽 바깥으로 나가서, 저 멀리 km 단위로 뻗어있는 도로 주변 공터까지 로자를 끌고 나갔다. 강가에는 모래자루 더미 위에 테일러 중위와 타오 소위가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돌이나 던지고 있었다.


 "그동안 차별을 너무 받았습니다. 제기랄, 제가 제 기수 대표 생도로 선발되기 직전까지 갔는데 탈락했습니다.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제 찢어진 눈이 문제랍니다! 그때 실컷 총기난사라도 했어야지..."


 "타오. 좆같은 건 알아. 하지만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아시아인이 쿼터제에서 차별을 받는 건... 그래. 부정을 못 하겠다만, 이 전쟁은 말이지.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러시아 쪽에 있는 바닐라랑 콘스탄챠가 나 같은 흰둥이 남자들에 대고 열 발을 쏠 동안, 타냐 중사는 백인이지만 여자니까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해서 다섯 발 감해서 다섯 발만 쏘고, 우리 타오의 경우는 아시아인이니까 인종적 감수성에 따라 세 발, 그리고 게이니까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의미에서 세 발 빼서 네 발, 그리고 옆 소대의 야스민은 흑인 여성이니까 여자 다섯 발, 유색인종 쿼터로 네 발 빼고 한 발만 쏘냐? 하면 그건 아니잖아."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더 좆같습니다. 어차피 총알은 차별이 없는데, 왜 저 같은 아시아인들만..."


 "해결책을 알려주지. 살아남으면 돼. 솔직히 말할까? 나도 알래스카 전역부터 참전한 짬찌란 말이야. 하지만 내가 미네소타에서 모범장교로 복무하면서 쌓았던 진급 점수보다 전장에 일주일 있으면서 쌓은 점수가 더 많았어. 심지어는 중대장한테 우리 다 죽일 거냐고 대놓고 지랄했어. 중대장한테 한 대 쳐맞고 우리 소대 바이오로이드들한테 결박당하면서, 진급은 틀렸구나 싶어서 아주 막나갔거든? 아니, 그 다음 날에 중대장이 죽으면서 진급 점수고 뭐고 새로 보내줄 중위도 없다면서 소대장 중에 최선임자던 나를 그냥 중대장으로 임명해주더라고."


 로자는 타냐 중사 옆에 서서 잠자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타오 소위는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미국 사회에서 받는 유무형의 차별에 대해 아주 불만이 많은 것 같았고, 테일러 중위는 화나라고 하는 말인지, 힘내라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쏟아내며 타오를 '위로'하고 있었다. 타냐 중사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이내 로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로자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의 모래자루 더미에 기관총을 거치하라며 그 쪽을 가리켰다. 로자는 타냐 중사의 말대로, 양각대를 펼친 다음 모래자루에 기관총을 올렸다.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제가 테일러 중대장님 뵙고 나서 죽은 소대장만 해도 몇 명인지..."


 "긍정적으로 생각해! 너 빼고 남들 뒤지고 또 뒤지다보면, 우리 타오가 아마 못해도 대대장 보통은 연대장쯤 됐을 거다 이 말이야. 그 상태에서 러시아군 총 뺏어서 니 무릎 쏴버린 다음에, 진단서 끊어서 후방 부대로 가. 너한테 그딴 개소리 하면서 대표생도 자리를 뺏어간 그 대안우파 책상물림 새끼가 아마 해봤자 중령일건데, 군대는 사람이 아니라 계급장한테 경례하는 곳이니까 그 새끼 군생활을 아주 박살내 버리라고!"


 "큼! 큼! 승리!"


 응?! 테일러 중위와 타오 소위는, 난데없이 뒤에서 들려오는 타냐 중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테일러 중위와 타오 소위는 일어나서, 타냐 중사에게 맞경례를 했다. 타오 소위는 뒤로 물러나고, 테일러 중위는 웃으면서 물었다.


 "타냐 중사. 무슨 일 있습니까?"


 "다른 건 아니고, 며칠 전에 돌아온 레프리콘-47183 돌아왔지 않습니까, 감 안 죽었나 좀 보러 왔습니다. 가볍게 50발 정도만 쏠 겁니다."


 아, 47183! 테일러 중위와 타오 소위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로자가 기관총에 탄을 물리고 자세를 잡자, 타냐 중사는 강가로 내려가서 접시를 한 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로자에게 명령했다.


 "47183. 접시 던질 테니까, 그걸 조준해서 바로 쏴 버려라. 할 수 있지?"


 "예, 알겠습니다!"


 "못하면 너 상병 떼는 거야!"


 타냐 중사가 짓궃게 말하면서 접시를 하늘 위로 던지고, 로자의 두 눈이 목표를 포착하고는 가늠쇠를 접시의 진행 방향으로 돌려서 바로 쏴버렸다. 파삭! 깔끔하게 관통한 자국을 중심으로 금이 간 접시가 하늘 위로 비산하며 반짝였다. 그 다음 접시는 냇가 위로 낮게 날았지만 역시 기관총탄을 맞고는 산산조각이 났다. 뒤에서 지켜보던 두 장교가 타냐 중사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문제 없는 거 같은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세 번만 더 해보겠습니다."


 타냐 중사는 다시 접시를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목에 변칙적으로 힘을 줬는지, 로자가 이쪽으로 갈 거라고 예측한 궤적이 크게 꼬였다. 당황한 로자가 황급히 가늠쇠를 옮겼지만, 마음이 너무 앞선 나머지 접시 하나를 부수려고 10발이 넘는 총알이 허공을 가르고, 개천 너머의 애먼 관목과 유령목들이 총탄을 맞고 넘어졌다. 어떻게든 접시를 깨부쉈지만 로자는 아직도 접시가 두 개나 더 남아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위로, 위로 올라가나 싶더니 아래로. 타냐 중사는 부메랑도 아닌 접시를 패턴과 궤적을 예측할 수 없는 변칙적인 비행경로를 그리도록 던졌고, 로자는 UFO마냥 더럽고 끈질게 날아다니는 비행접시를 어떻게든 깨뜨렸다. 타냐 중사는 마지막 접시가 접시가 부서지며 바닥에 자기 조각을 흩뿌리는 광경을 보고, 허허 웃더니 로자에게 다가와서 어깨를 툭툭 쳤다.


 "감 안 죽었구만. 아니, 더 좋아진 거 같은데?"


 "레프리콘-47183! 감사합니다!"


 그리고 테일러 중위와 타오 소위는 둘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타냐 중사가 군대에 들어오기 전에 바이오로이드와 능히 겨룰 수 있는 묘기 재주로 먹고 살았다는 게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레프리콘-47183, 로자에 이르면, 고작 기관총 사수 겸 분대장 역할이 고작인 하급 바이오로이드가 스키트 사격을, 그것도 변칙적인 궤적을 그리는 클레이 피전 대용 접시를 정말 잘 깨부수는 것을 보니 왜 인간이 밀려가는지 알 수 있었다. 타냐 중사는 모래자루 옆에 앉아서, 탄을 빼고 있는 로자에게 말했다.


 "좋아. 잘 했다! 레프리콘, 너도 알겠지만 소부대 전투에서 너 같은 레프리콘만큼 중요한 대보병전 자산도 없거든. 그리고 이렇게 잘 쏘는 거 보면... 아주... 아주 고맙지."


 "당연한 임무입니다."


 그동안 타냐 중사는 삶과 죽음에 대한 끔찍하고 반인륜적인 농담을 즐기고, 바이오로이드의 가치를 쓸모로 재는 인간상인 줄 알았다. 그리고, 지금 하는 말도 분명 로자의 쓸모를 보고 하는 말일 텐데도, 듣기에는 거슬리지 않았다. 눈 앞에 있는 것이 캄차카 반도의 타냐 카레니나 중사가 아니라, 베링 섬의 올가 카레니나 대위인 것 같았다. 


 올가 카레니나 대위. 올가 대위.


 그에, 로자는 눈을 크게 덨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로자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레프리콘-47183으로서, 비록 전투와 상관없는 사적 지시기는 명령이니까 반드시 수행해야 했던 명령이 있었다. 타냐 중사는 로자의 굳은 얼굴을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야, 너 뭐냐? 뭐 잘못 먹었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로자는 방탄복 방탄판 삽입부를 가로막은 똑딱이단추를 뜯었다. 분명 여기 있을 텐데. 여기다 넣어놨을 텐데. 로자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자신을 저주했다. 그나마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올가 대위의 편지를 눈 앞에 보이는 냇가에 던져버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결국 방탄판 뒷편에 숨은 편지봉투를 발견한 로자는, 그 편지를 꺼내서 타냐 중사에게 건넸다. 


 "이건 뭐냐?"


 타냐 중사는 이게 뭐냐면서 신기한 얼굴로 봉투를 바라보았다. 테일러 중위와 타오 소위도, 아무리 흔한 봉투라도, 그 안에 무슨 흔하지 않은 것이 들었을까 호기심에 옆으로 슬금슬금 와서 구경했다. 하지만 로자가 그 봉투에 담긴 게 무엇인지, 그 봉투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자...


 "베링 섬 야전병원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있는 올가 카레니나 대위님을 만났습니다. 타냐 카레니나 중사님의 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타냐 카레니나 중사님께서 편지를 도통 받지 않는다고, 가는 길에 살아있다면 전해달라고..."


 "이런 시발."


 "타냐 중사. 이거, 이 레프리콘은 잘못이 없으니까..."


 타냐 중사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로자를 죽일 듯 일그러졌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테일러 중위와 타오 소위도 타냐라는 폭탄의 심지에 붙은 불을 꺼보겠다고 수습에 나섰다. 아직 봉투는 로자의 손에 들려 있었고, 타냐 중사는 받지 않았다. 테일러 중위는 빨리 치우라고 눈치를 주는데, 타냐 중사는 로자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명령했다.


 "그거 버려."


 "잘 못 들었습니다?"


 "버려."


 "하지만, 이건..."


 로자는 실수를 했다. 분명 올가 대위도 타냐 중사가 로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테니, 좋게 말할 때 치우라고 조언했건만, 가족애라는 그녀와 상관도 없는 개념에, 윤리라는 참으로 우스운 개념에 사로잡혀, 상관은 명령하고 부하는 복종한다는 매우 당연한 군대의 미덕을 깨버렸다. 그리고 미덕을 깨버린 대가를,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를 칭찬하던 타냐 중사에게 멱살이 잡혀서 죽일 듯한 눈빛으로 반협박 반설교를 듣는 것으로 지불하게 되었다.


 "레프리콘-47183. 내가 명령할게. 그걸 니 똥 닦는 휴지로 써도 좋고, 불태워도 좋고, 강물에 던져서 묵혀도 좋고, 아니면 쓰레기통에 버려도 좋고, 니 보지에 생리대 대용으로 처 박아도 좋아. 그런데 내 눈앞에서 그 씹것 다시는 보이지 않게 해라! 아니면 니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제발 전장에 나가서 죽게 해달라고 싹싹 빌 때까지 지옥을 맛보게 해줄 테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타냐 중사는 멱살을 잡은 손을 앞으로 떠밀어서 로자를 밀쳐버렸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로자를 씩씩대며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테일러 중위와 타오 소위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감정이 너무 앞섰습니다."


 "...이해해요. 들어가서 좀 쉬시죠."


 "감사합니다. 승리!"


 타냐 중사는 성큼성큼 알파중대 주둔지로 걸어 들어갔다. 테일러 중위와 타오 소위는, 자세한 내력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타냐 중사의 가족에 대한 증오가 보통 수준이 아님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타오 소위는 뭐라도 말해보려다가, 행여나 타냐 중사가 들을까 마음 속으로 꾹 삼키고 로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가만히 누워있던 로자는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방탄복에다가 다시 봉투를 숨겼다. 기관총의 양각대를 접고 어깨에 맸다. 다른 이들처럼 더러웠고 다른 이들처럼 힘이 빠졌다. 그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정말로 처량했다. 테일러 중위와 타오 소위는 그 모습에, 아무리 바이오로이드라도 안쓰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둘 다 그녀에게 감사했던 것이 있던지라, 레프리콘-47183, 로자에게 한 마디 얹으려 다가왔다.


 "야. 너가 레프리콘-47183이었지?"


 "상병 레프리콘-47183! 예, 맞습니다!"


 테일러 중위는 레프리콘-47183, 로자를 위아래로 쭉 노려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로자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몰라 멀뚱멀뚱히 서서 테일러 중위의 웃음소리를 받아내다가, 그 웃음소리에 섞인 진의를 듣게 되었다. '하드코어한 미친년'에 대한 테일러의 뒤늦은 감사를 받을 차례였다.


 "미궁 요새에서 그렘린 병신 새끼들이 빵꾸낸 폭탄 다시 연결한 게 너라면서? 그것도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걸."


 "상병 레프리콘-47183. 맞습니다."


 "아주 하드코어한 미친년일세. 잘 했다! 너 아니었으면 미궁 요새에서 못해도 한 개 연대가 더 갈려나갔을 건데 너 덕분에 잘 막았다."


 "감사합니다."


 하드코어한 미친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하드코어, 격렬하거나 과격하다, 빡세다는 뜻일 테고, 미친년은... 뭐 미쳤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테일러 중위는, 로자가 그 '하드코어한 미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미궁 요새에서 일어났을 일을 설명해주었기에, 로자는 그것을 테일러 나름의 걸쭉한 칭찬이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타오 소위도 테일러 중위의 칭찬을, 좀 더 순화된 언어로 거들었다.


 "안 그래도 중대장님께서 건의를 했고, 대대장님께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너한테 블랙리버 공로훈장을 주려고 했는데... 뭐, 이번에는 아쉽게도 안 됐더라. 그래도 너무 걱정 마라. 네가 그런 대단한 일을 했다는 게, 우리들 사이에서 입소문으로만 도는 게 아니라, 공식적으로 블랙리버 전산망에 남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타오 소위는 하지만에서 말을 끊었다. 칭찬 잘 하다 말고 갑자기 하지만, 을 이야기하길래, 혹시 로자는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나 생각해보았다. 로자 그녀가 생각하기로는 딱히 징계사유가 될 만한 잘못은 저지른 적이 없었는데. 그런 몽상의 와중에 타오 소위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로자는 자신이 헛다리를 심하게 짚었음을 알게 되었다. 


 "넌 1소대 1분대에 배치될 건데, 아마 분대장은 너가 아니라 다른 애가 하고 있을 거다. 너 오기 전에 충원이 어느 정도 되어서, 다른 부대에서 분대장급 할 만한 애들도 어느 정도 들어왔거든. 분대장은 노움이고... 우리가 곧 페트로파블롭스크 시가지에 투입될 건데, 각 소대마다 한 분대씩 화력이랑 기동력을 집중한... 충격 분대를 만들기로 했거든. 거기에 너가 기관총사수 명목으로 들어갈 거다. 거기 가서 애들 이름 익혀놓고."


 "네, 알겠습니다."


 넌 잘 할 수 있을 거다, 그때처럼만 해라, 그런 평범한 덕담들이 끝나자, 이번에는 테일러 중위가 나오더니 로자에게 말했다.


 "그리고... 네가 무슨 마음으로 그 편지를 전해주려 했는지는 알겠는데,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타냐 중사가... 야, 뒤에 타냐 중사 안 보이지? 그래. 어쨌든... 타냐 중사가 가족 얘기를 엄청 싫어해. 집에 두고 온 가족 얘기만 나오면 입을 꽉 다무는 건 예사고, 전술적으로 문제만 없으면 아예 자리를 뜨기도 하고 그래. 왜 그렇게 가족을 싫어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더럽게 싫어하니까, 그 점은 처신을 잘 하는 게 좋을 거야."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가 봐."


 승리! 로자는 경례를 하고 나서, 테일러의 명령대로 막사로 복귀했다. 타냐 중사의 그 끔찍한 표정을 보고 나니, 아직도 1소대 부소대장인 그녀와 군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걱정은 아무 것도 해결해줄 수 없었기에, 로자는 그녀와 함께 군생활을 할 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1소대 막사로 향했다. A 1-1 이라고 팻말이 붙어있는 곳으로 가서, 입구를 가리는 천막을 펼쳤다.


 "중대장님 요리 진짜 잘하더라. 그 뭐냐, 연어튀김 먹는 데 진짜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 와, 나 완전 요리 잘하는 남자가 내 취향인데 말이야...."


 "실전이란 건 뭐, 정말로 간단할 대도 있어. 도망치기 바쁜 년들 뒤통수에 총알 박아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 년들이 도망치는 대신에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기로 했다면 귀찮아지는 거고, 걔네들 중에 기관총을 든 년이 하나라도 있다면..."


 "야, 타냐 중사님 오기 전에 빨리 바닥 닦아 놔. 그리고 너! 과자 바깥에서 먹으라고!"


 예상한 바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로자, 레프리콘-47183, 미궁 요새에서 후송된 병사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1소대원들이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누군가는 신병들에게 정신교육 명목으로 겁을 잔뜩 주고, 분대장으로 보이는 노움이 말 안 듣는 브라우니를 떽떽거리며 계도하고. 격렬한 전투의 막간에도, 전쟁은 결국 인간들이 하는 것임을 증명하듯 다들 각자의 이야기를 하며 사람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저곳에는 로자, 레프리콘-47183, 미궁 요새에서 떠났던 유령이 들어올 자리는 없을 것 같아서 가만히 입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때, 한 노움이 브라우니의 목덜미를 붙잡고 나가면서 접점이 생기게 되었다.


 "으악! 레나 상병님! 잘못했습니다! 레나 상병님!"


 "레나...?"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앙칼진 목소리로 브라우니를 꾸짖던 노움. 그 노움에게 붙잡힌 브라우니는 분명 노움을 레나라고 불렀다. 레나, 레나라고? 로자는 비켜주는 것도 잊은 채, 입구에서 눈을 크게 뜨고 노움을 바라보았다. 노움은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다가, 눈 앞에 있는 레프리콘을 보고 말했다.


 "레프리콘 상병? 어쩌다 막사로 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켜줘야 할 것 같은데..."


 "레나?"


 "...음?"


 레나는 눈 앞의 로자를 바라보았다. 자기 이름을 부르고는 우두커니 멈춰 있는 저 사람. 레나는 레프리콘들 중에 자기를 저렇게 계급을 안 붙이고 편하게 부르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나 생각해보았다. 그건 너무 많아서 특정이 불가능했기에 이번에는 저렇게 부르고 놀라서 가만히 서 있을 사람. 이건 아예 0명이었다. 


 "아니, 잠깐..."


 완전 0명은 아니지. 레나는 로자, 레프리콘-47183이 요양을 마치고 베링 섬에서 알파중대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레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눈 앞에 서 있는 레프리콘의 가슴팍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레나는 레프리콘의 가슴팍에 박혀있는, 분명한 47183이라는 숫자에 화들짝 놀라서 브라우니를 놓쳤다.


 "...로자?"


 "...레나." 


바이오로이드는 가족이란 게 없다. 어쩌다가 주인의 마음에 들었다면 아내, 딸, 엄마 같은 역할을 부여받고 가족놀이에 낄 수도 있지만, 어지간해서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영양액 주입기요, 어머니는 배양기이고, 앙헬 리오보로스가 그들의 할아버지 겸 할머니 겸 주인이라는 역할을 전부 맡고 있으니. 하지만 그들은 비록 가족이 없더라도, 가족이라는 개념에 익숙한 인간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것이라. 그들은 함께 싸우고 죽는 바이오로이드 자신들을 은연중에 가족이라 생각했고, 노움은 특히 더 그랬다.


 "로자! 정말 보고 싶었어요! 죽은 거 아닐까, 살아는 있을까 걱정했는데..."

 "레나가 죽은 건 아닐까 걱정했어요. 그래서 미안했어요. 레나는 지금 고생하고 있을 텐데, 나는 베링 섬에서..."


 소대원들은 엄격한 레나가, 누군지도 모를 레프리콘과 살갑게 대화하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궁 요새, 포인트 폭스트롯 알파 같은 그들은 모르고, 알 필요도 없는 이야기들이 계속 들려왔다. 하지만 로자와 레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기에 바빴다. , 레나는 로자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그리웠는지를 이야기했다.


  "레나. 우리 미궁요새 와서 처음 자고 일어난 날에, 브라우니-541116이라고 기억해요? 우리 분대에 있던 브라우니였는데, 포격 때문에 미쳐서 난동 부렸던 그 브라우니."


 "아... 기억하죠. 그런데 그 브라우니는 왜요? 설마..."


 "그 브라우니를 봤어요. 정신병동에 감금되어 있었어요. 정말로... 심한 꼴을 당했더라고요."


 "그런..."


 로자는 베링 섬에서 있었던 온갖 기기묘묘한 일을 말했다. 로자가 그곳에서 어떤 수술을 받았는지, 그곳에 있던 노움 레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제일 중요하고, 레나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브라우니-541116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말로 어두운 이야기에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보려고 했지만, 레나의 이야기도 어둡기는 매한가지였다. 로자는 이야기를 듣다가, 이대로는 초상집 분위기 말고는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사람으로 화제를 돌렸다.


 "애들한테 정을 안 줬어요. 내가 죽건, 쟤가 죽건, 아니면 둘 다 죽건, 어차피 며칠 뒤면 또 전투에 투입될테고, 그러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타냐 중사님이 처음에 우리한테 했던 말,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그... 그러면, 리나는 어디 있어요?"


 "아, 리나... 리나는 잘 있어요. 아마 근무 지금 끝났을 건데, 얘가 왜 이렇게 안 오지?"

레나는 엉덩이를 끌어서, 자기 침상 바닥에 걸린 근무표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근무표를 보려는데, 그 순간 천막이 걷히며 절그럭거리는 군장 소리가 들려왔다. 세 명 정도 되어보이는 바이오로이드 병사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중 제일 앞장서 들어온 바이오로이드가 한 침상에 걸터앉았다. 방탄헬멧과 야간투시경, 복면으로 얼굴을 칭칭 가렸지만, 방탄헬멧 아래로 삐져나온 갈색 머리로 브라우니임은 알 수 있었다. 로자가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는데, 레나가 마침 잘 왔다면서 그쪽을 향해 외쳤다.


 "리나! 리나!"


 "레나 상병님. 저 오늘 좀 힘들지 말입니다. 경계근무 내기는..."


 "리나, 로자가 왔어요! 로자!"


 "예?! 아니... 잘 못 들었습니다?! 레프리콘-47183 상병님 말씀이십니까?"


 그에 브라우니가 방탄헬멧을 벗고 복면을 빼서 집어던지더니 로자 쪽을 바라보았다. 리나는 로자 앞으로 다가와서, 아까 전에 레나가 그랬던 것처럼 로자의 가슴팍에 박힌 번호를 보았다. 그리고는 너무 좋아서 표정에서 기쁨을 크게 터뜨리고는, 참지 못해 로자를 꽉 껴안았다. 방탄복의 딱딱함과 군장의 무거움이 쇄도했다.


 "로자 상병님! 보고 싶었슴다!"


 이제는 리나까지. 소대원들은 저 로자 상병이라는 바이오로이드가 대체 뭐 하던 사람인지 진지하게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리나와 레나, 그리고 로자 세 명이 완성되었다. 간부들을 제외하면 미궁 요새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중대원 셋. 그들은 그들을 지금까지 살려둔 행운에 감사하기로 했다.


 "베링 섬에 갔다고 들었는데, 거기는 어떻슴까?"


 "음... 뭐라고 해야지? 기계가 할 수도 있는 것들은 전부 바이오로이드한테 맡기고, 인간이나 바이오로이드한테 맡겨야 할 것 같은 일들은 전부 기계가 맡더라고요. 뭐, 수술은 기계가 하고, 그런데 환자 후송은 사람이 하고..."


 "정말 고생 많으셨슴다. 저도 진짜 죽고 싶은 날 많았는데, 로자 상병님이랑 레나 상병님 생각하면서 견뎠지 말임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하하."


 "그런데 레나, 리나.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아, 그게... 뭐, 얘기는 해 두는 게 좋겠네요."


 "레나 상병님. 미궁요새 나간 뒤에 어디로 갔는지 기억 나심까? 제가 알기로는 노브시스코예였는데..."


 "거기는 확실히 아닐 걸요? 그런 데가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어쩌다보니 화제가 알파 중대에서 있었던 일이 되었다. 로자는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어서 어쩌나 하는 차에, 레나와 리나는 서로 기억을 맞춰보면서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미궁 요새에서 벗어난 뒤에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죽음도 계속 그들을 뒤따랐다. 캄차카 서부 해안으로 진격할 때는 알파 중대에 피를 원하는 악마가 붙었나 궁금할 지경이었다. 새로 충원해도 충원해도 계속 죽어나갔다. 하이류조바 강변을 따라 하이류조보를 공격할 때, 미궁 요새에서 완편된 중대원들의 절반이 죽었다. 원래 바이오로이드는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생각할 권한 따위는 없지만, 그래도 바다와 모래사장으로 나뉜 황량한 마을조차 못 되는 몇몇 집의 집합을 점령하자고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안도로의 거점을 확보했고,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 과정에서 중대가 새로 충원되었지만, 하이류조보 다음 차례로 이친스키를 포위할 때는 중대 병사들이 두 번이나 물갈이를, 아니 피갈이를 당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더 나아가서 크루토고로프스키예에 다다랐을 때는, 간부와 바이오로이드를 막론하고 전투에 투입 가능한 인원만 추리면 소대는커녕 분대건제조차 유지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내려앉았고, 결국 후방으로 후퇴해서 재편성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타냐 중사가 관리하는 소대에서, 전투라는 걸 해본 바이오로이드는, 1소대 1분대에 있던 노움 레나, 그리고 브라우니 리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들에게 급한 대로 분대장을 맡겼지만, 로자는 언제 올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재편성 불가 판정을 받을 정도로 완전히 붕괴된 대대에서 전출된 바이오로이드들은 실전 경험이 있으니 그들에게 분대장 견장을 주었고, 계속 신병과 타대전출자가 들어오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설명해주었다.


 "...이해가 돼요?"


 "...레나. 리나. 둘 다 너무 고생 많았어요."


 이야기가 끝나자, 로자는 둘을 꽉 안았다. 로자가 없는 동안 일을 설명한다고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로자는 알고 있었다. 무덤덤하게 말하는 물갈이, 피갈이, 전멸, 손실, 그런 단어 속에, 얼마나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을지 알 수 있었으니까. 그들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닥쳤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겪었을 비통함, 비참함, 두려움, 절망감은 로자가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나와 리나는, 그런 로자를 보고는 피식 웃더니 등을 툭툭 쳤다.


 "로자를 보니까, 이 개고생이 보답받은 기분이네요."


 "로자 상병님. 너무 그러실 필요 없지 말임다."


 셋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뒤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큼! 큼! 기침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한 임펫이 로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백의 머리칼에 대비되는 검붉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로자는 상대가 하사, 즉 자기보다 높은 계급임을 눈치채고 바로 일어나서 경례했다.


 "승리!"


  "그래. 그리고 레나. 리나. 오랜만에 아는 얼굴 봐서 기쁜 마음은 이해하는데... 레나 너는 2분대장이고, 리나 넌 3분대장이지? 그리고 난 1분대장이니까... 1분대장 된 입장에서 내가 1분대에 배치받기로 한 병사랑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맞습니다."


 "맞습니다."


 레나와 리나는 임펫의 이야기에 금방 수긍했다. 리나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레나는 엉덩이를 뒤로 끌어서 물러났다. 그렇게 교통정리가 끝나고 나서 임펫은 로자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바라보던 임펫은 미소를 짓고 손을 내밀었다.


 "임펫-13322 하사야. 니트릴이라고 불러. 넌 이름이 뭐지?"


 "상병 레프리콘-47183! 로자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로자. 얘기는 몇 번 들었어. 너가 그 미궁 요새에서 그렘린 대신에 폭탄 설치했다는 걔지? 잘 부탁해. 곧 페트로파블롭스크로 들어간다는 이야기 있으니까, 빨리 애들 이름 다 외워두는 게 좋을 거야. 게다가... 우리 분대가 외울 애들 이름이 많아. 나까지 포함해서. 야, 1분대! 집합!"


 임펫의 명령에 바이오로이드들이 하던 일도 멈추고 임펫과 로자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다들 1분대원들이었고, 모르는 얼굴들뿐이었다. 로자가 그들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그들도 로자를 멀뚱멀뚱 바라보는데 임펫이 말했다. 


 "우리 분대에 기관총 사수가 없었는데, 이번에 들어왔지? 얘는 레프리콘-47183이고, 로자라고 하는 애야. 아마 부분대장을 맡을 거야. 얼굴이랑 이름, 직책 외워야 하니까, 각자 소개해라. 그래 너. 이프르부터 소개해."


 "병장 더치-4876이라고 해. 이프르라 불러."


 "나는 이프리트-4877. 박격포 사수야, 아 맞다... 이름은 아이스.."


 "상병 노움-87123, 유리입니다."


 "브라우니-183091. 소총수임다. 다들 절 러너라고 부름다. 잘 부탁드림다!"


 로자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려고 했다. 바이오로이드들은 대부분 비슷하다고 하지만, 다들 모델의 차이 이외에, 분명한 차이들이 보였다.


 이프르는 눈 한쪽이 죽어 있었고 더치 걸 특유의 작은 체구를 극복하기 위함인지 다리와 팔에 외골격을 달아서 키를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만큼 키웠다. 아이스는 제조과정에서의 이상인지 머리카락에 푸른색 브릿지가 들어갔다. 유리는 머리카락을 단발로 잘랐고, 러너는 다리에 보행기를 달고 있었고 눈 아랫부분을 철가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승리! 브라우니-790102입니다!"


 "승리! 브라우니-900112입니다!"


 "어? 이 브라우니들은 이름이 없습니까?"


 로자는 이름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그러자 브라우니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니트릴은 브라우니들 대신 그들이 이름이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해봤자 2주도 못 견디고 죽을 애들한테 이름 붙여줄 필요가 어디 있어. 로자 너도 전쟁터에 있었던 시간은 다 해서 2주도 안 될 테지만... 네가 미궁 요새에서 한 일은 모두가 아니까, 넌 이름을 가지더라도 다들 수긍할 테지. 하지만 쟤네들은 아냐."


 "...네, 알겠습니다."


 "만약 짧게 불러야 할 일 있으면, 1소대 브라우니 1, 1소대 브라우니 2 라고 불러. 너네들은 운 좋은 줄 알아. 너네는 일주일만 있어도 니네 이름을 얻을 수 있지만, 난 내 이름 얻으려고 3달을 있었어. 그것도 실제로 전투에 끼었던 날만 골라서!"


 로자는 쓴 웃음을 지으며 브라우니들을 바라보았다. 니트릴이 그렇듯, 로자가 그렇듯, 그리고 알파 중대의 모든 바이오로이드들, 블랙리버와 삼안산업 양군의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 그렇듯 저들은 도구다. 하지만 저들은, 오래 살아남을 가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이름으로 불릴 권리조차 사라졌다는 게 안타깝게 느껴졌다. 전쟁은 인간의 사정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지만, 전쟁에 참가한 같은 바이오로이드들조차 저들의 사정을 신경쓰지 않는 게 뭔가 로자까지 서글퍼지게 만들었다.


 "어? 로자 상병님? 저희한테 하실 말씀 있습니까?"


 "아뇨.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드디어 로자는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온 기분을 만끽했다. 며칠, 늦어도 몇 주 뒤 로자가 끌려갈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라는 지옥의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그녀가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편했다. 베링 섬에서는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로자가 있어야 할 곳은 훈련소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포트 베닝이건 웨스트포인트건 그저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살인 병기들을 잠깐 동안 맡아두는 임시 보관소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령부가 로자가 있어야 할 곳도 아니었다.  알래스카에 위치한 유라시아 동부전구 사령부 경비병들은, 남들이 보급이 끊겨서 굶고 탄약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동안 고작 케이블이 끊겨 TV 못 보는 것을 걱정하는 찔찔이들의 집단이었으니. 그리고 베링 섬 역시도, 로자가 그곳에서 매우 안락한 생활을 보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그곳도 병신이 된 몸을 수리하러 들어가는 곳일 뿐, 영원히 있을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됐다. 


 로자는 이곳에 있어야 했다. 누워서 눈을 감은 로자는, 한쪽 눈을 뜨고 막사를 바라보았다. 총알도 막히는 것 아닐까 논할 정도로 두꺼운 천막이 세월을 못 이기고 솔기가 터지고, 이리저리 좀먹은 자국을 보였다. 입구를 가리는 천막은 동그란 총알구멍이 여러개 나서, 그 천막이 수습되기 전에 있었던 끔찍한 사고의 내력을 증언했다. 침낭 아래의 바닥은, 차갑고 딱딱할 뿐만 아니라 울퉁불퉁해서 미궁 요새의 콘크리트 바닥만 못했다. 그리고 천막 너머에서, 페트로파블롭스크를 향해 날아가는 수많은 로켓들의 하늘을 찢는 비명소리, 고막과 등허리를 동시에 두들기는 수많은 셀주크들의 포격. 좋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로자는 편했다. 그것이 로자를 기다리는 운명이었고, 로자는 그것이 아주 편했으니까. 거기에 로자와 함께,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 운명을 짊어진 전우들이 있는 것도 좋았다. 곧 전투가 시작되면, 눈 앞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나가는 이들 중에 로자가 섞여있을 수도 있겠지. 레인은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했고, 브라우니-541116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 정도로 끔찍한 처지가 되었지만, 로자는 그것을 받아들이니 편했다. 


 "로자 상병님? 뭐 안 좋은 일 있으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표정을 찡그린 로자에게 이름 없는 브라우니들이 이유를 물어왔다. 하지만 로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대답을 거부하고 눈을 감았다. 편한데도 웃을 수 없어서, 표정을 찡그렸다. 결국 로자는 죽기 위해 태어났고 이곳에서 개처럼 죽을 것이라는 게 기쁘지는 않았다. 사람을 베이스로 태어난 이상, 기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편하면서도, 또한 우울한 감정으로 잠에 들려는 그 때, 타냐 중사가 들이닥치고, 니트릴을 비롯한 1소대 분대장들이 일어나서 칼같이 경례했다. 


 "승리! 1소대 막사 이상 없습니다!"


 "그래. 없어야지. 분대장 부분대장 전원 나와라."


 """네! 알겠습니다!"""


 바이오로이드들이 일어나며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자는 자기가 부분대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그저 분대장들과 '부'분대장이라는 알 수 없는 보직을 가진 이들만 좀 고생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니트릴이 로자 위에 발을 올리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니트릴 하사님?"


 "뭐해. 일어나야지."


 "잘 못 들었습니다?"


 "너 부분대장이야. 아까 못 들었어?"


  "이프리트 병장님은..."


 "걔는 화기잖아. 빨리 나와!"


 그렇게 해서 로자는 막사 밖으로 끌려나왔다. 생각해보니 니트릴이 로자를 소개할 때 "부분대장"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분대장이면 분대장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어차피 브라우니로 대표되는 소총수는 셋밖에 없는 곳에서 그런 걸 나누나 싶었다. 하지만 어쩌랴, 로자는 부분대장이었고, 타냐 중사가 부분대장까지 나오라 했으면 나와야지.


 로자는 니트릴 옆에 서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주변에는 경계근무를 나가는 병사들이 군장이 딱딱 부딪치고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사방에 뿌렸고, 중대의 그렘린들이 헤스코 방벽 뼈대를 설치하고 모래자루를 안으로 던져넣고 있었다. 그리고 당번인지 벌칙인지 아무튼 잡일을 하는 병사들도 보였다. 그리고 다들 치느라 개고생했을 웅장한 36인용 텐트 위 하늘에, 텐트뿐만 아니라 빌딩조차 초라해보이게 만들 수많은 로켓들의 비행운이 하늘에 구름을 칠했다.


 "와..."


 "로자. 신병 딱지 뗀 게 언젠데 아직도 포격을 보고 좋다고 헤벌레거리냐?"


 "아, 죄송합니다!"


 타냐 중사가 로자를 지적하자 주변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타오 소위도 타냐 중사 뒤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타냐 중사는 웃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을 한번 쳐다보더니, 짧게 "웃지 마!"라고 말했다. 그리고 타오 소위마저도 계급을 잠시 접고 입꼬리를 아래로 쭉 내렸다. 


 "타오 소위님. 시작하시죠."


 "아, 알겠습니다."


 타냐 중사가 군기를 한번 바짝 잡고 나서, 타오 소위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타오 소위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교육을 시작했다. 지금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그리고 곧 알파 중대와 1소대에 일어날 일, 그리고 그들이 해야 할 일들 순서로 설명했다.


 "너네들도 눈 멀쩡하고, 목 멀쩡하니까 지금 하늘 위에 저 로켓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고 있겠지.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를 지금 몇 달째 두들기고 있단다. 게다가 우리 해군도 그 일대를 차단하고 화력을 쏟아붓고 있어. 하지만 문제가 있어. 그걸로는 부족해. 그것도 아주 많이."


 타오 소위는 대열의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빙글 돌아 걸어다니면서 온갖 전투들의 이름을 대며, 왜 포격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는지, 결국 깃발을 꽂기 위해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죽어야 하는지 간접적으로 말해주었다.


 "파스샹달, 포격으로 마을이 돌무더기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전투가 끝나지는 않았다. 스탈린그라드, 폭격 열심히 했지만 고기분쇄기에 흠집 좀 내고 끝났지. 신장 폭동, 뭐... 덕분에 짱깨놈들 자기네 쪽수 너무 많다고 징징대더만 그 쪽수를 백만 명 정도 줄였고.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뭐냐. 결국 우리가 가서, 죽어야 한다는 거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로자의 얼빠진 모습에 실실 웃던 바이오로이드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정말 많이도 죽을 거다. 아마 한둘 죽는 게 아닐 거야.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는 몇 안 되는 캄차카의 대도시고, 부동항이야. 그리고 거기를 탈환하면 쿠릴 열도 일대를 장악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우리 모두 블랙리버가 제공하는 공짜 일본 여행권을 받게 될 거다. 그러니까 러시아 놈들이랑 삼안산업 군대는 이번에는 다 죽는 한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다들 여러 일을 당해봤겠지만 이번에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을 참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테고. 뭐, 그래도 불평하지는 마라. 어차피 인간 간부들도 똑같이 다 죽을 거거든. 이번에 상급부대에서 시뮬레이션으로 예상한 알파중대의 예상 손실률이... 음... 몇 퍼센트였더라? 타냐 중사, 혹시 기억나십니까?"


 타오 소위가 뻘쭘한 표정으로 타냐 중사를 바라보았다. 타냐 중사는 소대장 기 죽는 꼴을 막으려고 그때 보았던 수치를 그대로 말해주었다.


 "간부들 전원을 포함해서, 146%입니다."


 "예? 146%요? 한 90%라 들었던 거 같은데."


 "90%가 아마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 시가지 진입 이후로 계산한 수치고, 최종 예상 손실률은 146%가 맞을 겁니다."


 90%, 146%, 로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둘 다 좋은 숫자는 아니었다. 146%면, 물론 개중에서도 살아남는 이들은 있겠지만 대충 계산해보면 아주 끔찍한 수치였다. 중대장까지 포함한 알파중대 전원이 한 번 죽고, 그리고 다시 완편해도 그 중에서 절반 가까이가 죽는다는 말 아닌가. 게다가 그마저도 죽는  타오 소위는 정확한 수치를 받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 나나 타냐 중사가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의 보도블록을 살아서 밟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하지만 간부들이 죽었다고 하면 뭐 어쩔 거냐.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산 사람들은 싸워야 할 거 아냐. 맞지? 안 그래?"


 "예! 맞습니다!"


 "그런데 소부대 전투사례를 보면... 인간 간부들이 전사하니까 그 밑에 바이오로이드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다니다가 해볼 만한 싸움, 아니, 적어도 적을 존나게 많이 죽이고 갈 수 있었는데도 실패한 사례들이 있었어. 우리한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예를 들어서 나랑 타냐 중사가 전사했는데, 분대장이란 새끼들이 소대장 부소대장 인계 안 하고 계속 바쁜 차상위 지휘관 명령만 찾는다면? 그러면 전장 상황을 판단할 머리가 없어지고, 한참 전에 주어진 더 이상 의미 없는 명령이나 쫓다가 뿔뿔이 흩어지면서 죽게 되겠지."


 "..."


 로자는 타오 소위와 타냐 중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둘 다 진지했다. 타오 소위는 말 한마디 한마디 사이에 입을 다물 때마다,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가고 눈에 힘이 들어간 것이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뒤에서 타오 소위의 말을 듣는 타냐 중사는 딱히 긴장하지는 않았지만, 저기서 몇 명이 죽었다 너네들 다 죽는다 그렇게 죽음으로 농담 따먹기를 하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대 간부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로자는 한번도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곳에서 분명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임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너희들에게 말해두는데, 상관이 죽었다고 얼타거나 쳐 울지 말고, 우리가 죽었으면 죽었다는 사실을 중대장님한테 보고하고, 사전에 정해진 서열대로 순차적으로 지휘권 잡아라. 내가 죽었으면 타냐 중사가 소대장을 맡을 거고, 그 다음에는 니트릴 니가 부소대장 직책을 수행하는 거야. 그리고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약에... 중대장님까지 전사하고, 간부급들도 싹 다 죽는다면... 그럼 생존한 애들 중에 최선임자가 중대장을 맡아야지. 알았나?"


 """네, 알겠습니다!"""


 바이오로이드들이 일제히 대답하자, 타오 소위는 만족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타냐 중사가 짧게 말할 차례였다.


 "너네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따로 교범이 다 있어. 임펫은 대대, 레프리콘이랑 노움은 추가적인 판단능력 관련 시술이 없어도 2주 교육만 수료하면 중대장 역할 수행이 가능하고, 이프리트는 소대장, 브라우니는 분대장 임무수행이 가능해. 참고로 이건 원활한 임무 수행 기준이고, 너희들도 중대장 대대장을 못 한다는 법은 없지. 그렇고 말고. 너네가 아니라 초등학생이 와도 할 수는 있어. 너희 위가, 나까지 포함해서 전부 뒤진다면 말이야."


 타냐 중사가 자신의 목을 엄지손가락으로 그었다. 옛날이라면 낄낄 웃으며 말했겠지만 지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잠깐, 해봤자 10초의 침묵이지만 서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에게는 10년 같은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이 저 하늘 위를 날아가는 또다른 로켓 세례에 깨지자, 타냐 중사는 하늘을 흘겨보다가 말을 맺었다.


 "어쨌든... 잘 하자. 이게 잘 한다고 잘 해지는 건 아니지만. 해산!"


해산! 그 두 글자에 바이오로이드들이 1소대 막사로 발길을 돌렸다. 로자도 니트릴의 흩날리는 은빛 머리칼을 따라 막사로 돌아가려는데, 타냐 중사의 말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47183, 넌 잠깐 얘기 좀 하자."


 "예! 상병 레프리콘-47183!"


  "너가 로자 맞지?"


 "...맞습니다!"


 로자는 전투화 신은 발로 땅을 짓밟으며 정렬하고 꼿곳이 섰다. 타냐 중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로자는 그 모습을 보고 혹시라도 타냐 중사가 올가 대위의 편지를 가지고 또 로자를 제재하려는 것인지 걱정했다. 그래서 걱정하는 마음에 침을 꿀꺽 삼키려는 목울대가, 타냐 중사의 말에 멈췄다.


 "아까 있던 일은 미안했다. 내가 원래도 좀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미친 싸이코긴 하지만, 그 년 이야기가 나오면 주먹이 아니라 총이 나오는 년이거든. 그래서 내가 좀 이성을 잃고 너한테 지랄을 했는데... 그래. 내가 좀 그런 년이니까, 그건 좀 이해하고. 미안하게 됐다."


 "...아닙니다."


 "가봐. 개인정비 끝내고 푹 쉬어라. 좀 있으면 그것도 못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로자는 막사로 돌아갔다. 다들 휴식을 겸해 총을 닦고, 곧 있을지도 모르는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소총이면 소총, 기관총이면 기관총. 탄띠에 물린 총알들을 하나하나 점검하며 공이가 찍히지는 않았는지, 탄두가 구부러지지는 않았는지 점검했다. 아무리 닦고 닦아도 그래도 전쟁터에서 구른 총들이라 더러웠지만, 노리쇠, 총열, 급탄부 같이 중요한 부분은 강박적인 깨끗함을 유지하려고 했다. 로자도 그들의 대열에 끼어서 기관총 상태를 점검했다.


 "급탄부, 이상 없고... 노리쇠... 닦아야겠네."


 로자는 노리쇠를 분해해서 하나하나 닦기 시작했다. 아까 전에 총을 쐈는데 그새 탄매가 많이 끼었다. 원래 총기는 닦아도 닦아도 검댕이 묻어나오지만, 자기 일에서는 강박까지 느껴지는 레프리콘 모델의 특성 때문인지 그런 것도 일부러 잊은 채 총기수입에 몰두했다. 


 "이봐. 로자."


 "네. 상병 레프리콘-47183."


 "야, 그냥 로자라고 불러. 어차피 이제 간부님들도 적당히 짬 찬 애들이나 일 잘하는 애들은 이름으로 부른다고. 저기 있는 저 브라우니 둘 같은 짬찌는 제외하고."


 "아, 네. 알겠습니다..."


 니트릴은 로자의 옆에 앉아서 자신의 장비들을 꺼내들었다. 니트릴은 정비해야 할 게 참 많았다. 40mm 쌍총열 유탄발사기, 돌격소총. 그걸 닦는다고 끝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 무거운 간부 사양 군장까지 점검해야 했다. 


 로자는 간부사양 군장을 보았다. 온갖 필수 장기가 뭉친 흉부와 상복부는 유선형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금속성의 흉갑으로 보호받았고, 하복부와 사타구니, 허벅지 부위는 흉갑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두꺼운 섬유 방탄복이 가렸다. 그리고 어깨와 무릎, 발 부위도 전부 보호받고 있었고, 헬멧은 아예 투구처럼 머리를 완벽하게 가리고, 바깥을 보기 위해 뚫어놓은 폴리카보네이트 바이저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대신 바깥을 더 확실하게 볼 수 있게 안면부를 위로 열어제낄 수 있었다.


 "오..."


 로자는 흉부가 불룩 튀어나온 금속성의 흉갑을 신기하게 보다가, 레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니트릴이 입은 것과 비슷한 것을 입고 있었다.


 "왜? 너도 이거 입고 싶냐?"


 "그, 그건 아닙니다."


 황급히 부정하는 로자를 보고 니트릴이 깔깔 웃었다. 로자가 알기로는 간부용 생존성 강화 키트는 인간 간부와 대대장급 이상 바이오로이드만 입는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분대장급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입고 싶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튼튼한 것은 타냐 중사의 흉갑에 잔뜩 난 탄흔과 파편흔을 보고 진작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 군장도 충분히 무거운데 저걸 입으면 움직이기나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 뭐, 너무 걱정 마라. 너가 분대장 달면 너도 하나 받을 테니까."


 "..."

 "그리고, 우리가 서로 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잘 부탁한다."


 "네. 알겠습니다."


 로자는 니트릴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레나와 리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혹시 성격이 더러울까 걱정했는데, 그런 유형은 아닌 모양이었다. 니트릴은 무기를 정비하면서 로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미궁 요새에서 정말 심하게 다쳤다고 들었어. 나도 허리가 부서져서 야전병원 신세를 좀 지긴 했지만,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데."


 "목 아래로는 못 움직이는 상태로 후송됐습니다.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래서 베링 섬으로 가서 수술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 베링 섬이라. 거기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거기를 진짜로 간 사람을, 그것도 인간도 아니고 바이오로이드를 만날 줄은 몰랐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니트릴과 대화를 하면서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니트릴이 북극에서 싸웠다던지, 니트릴은 원래 알래스카 사령부 경비소대장이었다던지, 같은 사소한 것 말고 중요한 것. 니트릴도 꽤나 괜찮은 상관이었다는 것. 그녀도 사람이라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서 총을 닦는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닦다 보니 타냐 중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 전쟁 끝날 때까지 총만 닦고 있을 거냐? 30분 내로 끝내!"


 """네! 알겠습니다!"""


  타냐 중사의 명령에, 바이오로이드들이 일제히 총을 다시 조립하고, 군장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총을 정리하는 소리가 사라지고 불이 꺼졌다. 로자는 한숨을 쉬고, 침낭 안으로 들어가서 눈을 감았다. 당장 내일은 아닐 것이다. 며칠 뒤지, 당장 내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마치 당장 전투가 시작될 것처럼 온 몸에 긴장이 들어왔다.


레프리콘이 있었다. 그리고 여느 날처럼, 전장은 그녀와 상관 없이 시끄럽고 잔혹했다.

//25010자. 

15327+25010=40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