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리콘이 있었다. 그리고 여느 날처럼, 전장은 그녀와 상관 없이 시끄럽고 잔혹했다.


 미궁 요새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쟁은 갑자기 닥쳐오지 않고,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합쳐지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징후들로 찾아왔다. 첫번째는, 불규칙적인 시간으로 밤마다 쏟아붓는 로켓 공습이었다.


 "로자 상병님. 근무를..."


 "벌써 4시에요? 제기랄..."


 "맞습니다. 3시 30분이니까 45분까지 준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느 날은 새벽 1시, 2시 40분, 5시, 그런 식으로 로켓이 쏟아졌다. 한 번 로켓을 쏘면 한두발만 쏘는 것도 아니었다. 포병장교가 캄차카 반도의 그 누구도 잘 수 없는 불타는 밤을 선물하겠다는 꿈을 품은 걸까. 지난 날에는 해봤자 한두발이었는데, 이제는 수백발의 로켓이 하늘을 소음으로 가득 채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파중대 주둔지까지 느껴지는 진동으로 알파중대의 모두를 깨웠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전능하신 아자젤이시여, 제발 잠이라도 편히 자게 해 주시옵소서... 시바알..."


 귀마개를 쓰지 않은 이들은 얼얼해진 고막 때문에 애먼 귀를 비비며 어둠 속에서 귀마개를 찾았다. 귀마개를 낀 이들은 골전도 이어폰의 원리를 뼈를 뚫고 내이로 직접 들어와 청각신경을 건드리는 포성으로 깨달았다.


  "어차피 다 뒤진다는데, 잠이라도 편히 자게 해주면 안 된답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농담 그만 해라."


 "예? 타냐 중사님?"


 그리고 평소보다 신경이 더 날카로워진 간부들을 통해, 무언가 일이 일어나기 직전임을 알게 되었다. 타냐 중사는 예전 같으면 너네 다 뒤졌다, 이 중에서 절반도 못 살아남는다에 내 봉급 건다며 내기를 했을 것이지만, 이제는 내기는커녕 부하들이 뭔가 농담을 하려 하면 바이오로이드건 인간 간부건 평등하게 박살을 내버렸다. 


 그리고 좋은 소식은 헛소문이 아니라 간부가 직접 확인한 사실이어도 전부 헛소문이 되고, 나쁜 소식들은 아무리 헛소문이라도 무조건 들이맞는 게 전쟁이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소식은, 알 수 없는 헛소문으로 시작해서, 중대본부에서 테일러 중위와 함께 일하는 행정병, 통신병들의 그럭저럭 믿을 만한 '정보'까지 모였다.


 "내 동기 중에 의무대대에서 일하는 애가 있어. 실키 모델인데... 걔가 그러더라고. 할 일이 없대. 부상자 후송도 중상자가 있어야 하는데, 다 죽어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던데. 응? 의무대대 실키랑 최근에 어떻게 얘기했냐고? 어... 그런 게 있어! 아무튼!"


 "그거 들었어? 페트로파블롭스크에 러시아 놈들이 핵배낭을 설치했다는데."


 "개소리 말고 확실한 얘기나 들어. 대대장님이 테일러 중위한테 명령한 게 있어. 일주일 내로 대대가 출동할 테니까 준비하라고..."


 "말은 똑바로 하자. 사흘 뒤야."


 "야, 야스민 소위님?!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뭘 죄송해. 빨리 준비들이나 해."


 그리고 몇몇 정보는, 일개 바이오로이드들보다 더 핵심 정보에 가까운 인간 간부들에 의해 확인되기도 했고, 알파중대 2소대장인 야스민 소위는 사흘 뒤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실제로는 바로 다음날이었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적외선 연막이 걷히고 드러난 교외의 광경이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의 먼 광경에서 눈을 돌려, 가까운 곳을 바라보았다. 포탄이 대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긴 자리에는 외계의 행성처럼 수천개의 크레이터가 남았고, 이곳이 지구임은 수많은 죽음, 다른 행성에서는 애시당초 있지도 않았을 수만의 죽음과 수만의 탄생으로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살아서 나가기는 글렀군."


 1소대 1분대 단차에 탑승한 타오 소위가, 전쟁의 아가리에 삼켜진 이들을 보며 자신의 운명을 짐작했다.  단 하나의 죽음만으로도, 어쩌면 아슬아슬하게 피한, 일어나지 않은 죽음만으로도 그 무게에 짓눌리는 게 인간이다. 혹자는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고,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라지만, 그것도 눈 앞에서, 곧 자신이 어떻게 될  지 보여주는 수많은 죽음들 앞에서는 그런 알량한 회피도 허용되지 않았다.


 너무 분위기가 무거운 나머지, 타오 소위가 잠깐 눈을 돌린 순간, 중대장 테일러 중위도 곧 죽을 사람이 된 심정을 만끽하며 중대원 전원에게 감정적인 전언을 남겼다.


 "불해머 101이 전 단차에 알린다. 그러니까 시발... 그동안 참 많이도 죽었고, 좆같은 꼴도 많이 봤지만, 거 시발, 지옥에서 보자."


 "테일러 중위님. 오늘 감성 터지셨습니까? 하하, 하하하하."


 타냐 중사가 장난스레 받아넘겼지만, 노이즈가 잔뜩 낀 무전으로도,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로자는 장갑차 상부 해치로 고개를 내밀어, 간부들이 보고 있을 광경을 보았다. 


 "...으음."


 미궁 요새에서 지옥이 그저 단어임을 깨달았다면, 익곳에서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떤 단어로도, "지옥"을 지칭할 수조차 없음을 깨달았다. 흰색 장막이 바람에 쓸려나간 자리는, 온갖 미물의 온상이요, 까마귀들의 연회요, 죽음의 총합이었다.


 굳이 세보지 않아도 백 대가 넘는 장갑차와 전차, 워커, AGS들이 도로, 진창, 구덩이에서 숨을 영원히 멈췄다. 불타서 그슬린 전차, 기름이 뚝뚝 떨어져 불타는 워커, 지뢰라도 밟았는지 밑판이 전부 박살난 채 뒤집어진 장갑차들이, 크레이터 가득한 이곳이 외계의 행성이 아닌 현세임을, 그렇기에 더 끔찍함을 주지시켰다.


 수많은 강철 관짝 옆에는 이 지옥 속에서 그나마 형체를 유지하고 죽은 이들의 시신이 널부러졌다. 그마저도 못 되는 팔다리들은 마네킹 조각이라 믿고 싶었지만, 파리가 웅웅대며 이 팔다리들은 제 것이라 주장하니 믿을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진짜다. 전방에 다시 내리는 희뿌연 적외선 연막 구름을 보며, 로자는 침을 삼키고 상부 해치를 닫았다.


 "불해머 101이 전 단차에 알림. 현 시간부로 간격 유지해서 출발할것."


  콰아아아아, 전기를 마구 퍼먹으며 모터로 울부짖는 강철 짐승의 회색 내장 안에서, 바이오로이드들이 취하는 태도는 다양했다. 니트릴은 포탑에 앉아있는 타오 소위의 앞, 그리고 엔진룸 뒤편에 앉아서 평정을 유지했다. 이프르와 아이스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껌을 잔뜩 입에 넣고 짝짝 씹었다. 러너와 유리의 표정은 평범했지만, 그 얼굴에는 땀이 비 온 뒤의 땅처럼 물줄기를 이루고, 다리도 벌벌 떨리고 있었다.


 "..."


 로자는 주변을 흘깃 쳐다보았다. 타오 소위는 포탑을 조종하고, 광학장비로 외부를 확인하느라 바쁘다. 니트릴은 타오 소위의 정강이를 보느라 바빴고, 다른 이들은 제 정신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프르와 아이스는 못 씹은 껌이 한스럽고, 유리와 러너는 못 살게 된 삶이 한스러웠다. 그리고 로자는 로켓 포격 때문에 못 잔 잠이 한스러워 눈이라도 감고자 했다. 


 "하으윽... 으윽..."


 하지만 바로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브라우니가, 수면조차 못 되는 휴식을 방해했다. 소총을 부적 삼아서 꼭 붙잡고 벌벌 떨었다. 게다가 눈을 감으려는 순간에, 장갑차가 돌을 밟으니 차체 후면으로 쏠리며 안쪽 승무원들의 무게에 짓눌리고, 구덩이에 들어가니 앞으로 쏠리며 남을 짓밟는지라, 눈을 감는 여유조차 금지하니, 로자는 좀 더 "이타적인" 일을 해보기로 하고 브라우니의 머리의 손을 올렸다.


 "로, 로자 상병님?"


"브라우니. 다 괜찮을 거에요."


 우는 아이를 잘래는 것처럼, 로자는 브라우니를 꽉 껴안았다. 사람 크기의 마사지기를 안은 것처럼 몸이 부르르 떨렸지만, 이내 떨림이 잦아들었다. 브라우니는 말없이 로자의 허리에 양 팔을 걸었다.


 "로자 상병님. 무서웠습니다..."


 쾅! 쾅! 펑! 포성과 폭음이 장갑차를 강타하고, 적외선 연막로자를 안은 그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딱딱하고 두꺼운 방탄복이 로자의 몸을 조이고 있었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로자도 브라우니를 진정시키려고 더 세게 안았다.


 로자는 브라우니의 선임이다. 다만 그뿐이다. 로자는 이 모든 지옥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줄 능력을 가진 신도 아니었고, 휴전을 주선할 정치적 수완이 있는 바이오로이드 회사의 CEO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공세를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재량권조차 없었다. 괜찮아질 거라는 말도, 따뜻한 격려도 관점에 따라서는 말잔치에 불과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말잔치조차 없이 버려진 브라우니가 안타까워서, 뭐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 괜찮을 거에요. 어떻게 되건, 다 잘 풀릴 거에요. 그러니까..."


 "야! 로자! 지역방송 꺼라!"


 "죄송합니다!"


 이런, 로자는 헬멧 무전기를 켜 둔다는 걸, 송화 기능까지 켜놓고 말았다. 장갑차 소리에 묻힐까 빽빽 질러대는 타오 소위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타오 소위는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


 "1분 뒤 하차한다. 레이저 포인터로 적 보이는 대로 지향하고, 300m 이내로 접근 가능할 때까지는 지정사수랑 기관총 사수 빼고 사격하지 마. 괜히 위치 다 들ㅋ..."


 로자는 수십 초 같은 1초 동안 몸이 붕 뜬 감각을 체험하고, 이내 딱딱한 장갑차 시트와 닿으며 온 몸의 무게를 허리로 받아냈다. 


 "씨발... 씨발... 대체 뭐야?!" 


 "야! 상황 보고해!"


 눈을 떠 보면, 장갑차 안은 매캐한 연기와 이리저리 뒤집어진 승무원으로 가득했다. 흐릿하게 일렁이는 시야에는 깜빡이는 붉은 등이 보였고, 마치 다른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말소리가 웅웅댔다. 눈을 깜빡이면 몇 분이 흐르던 세상은, 바로 옆에 있던 브라우니의 재촉에 깨졌다.


 "허억?!"


 "로자 상병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로자는 온 몸을 만져보았다. 입 안에서 피비린내가 잔뜩 올라왔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몸은 "아직은" 멀쩡했다. 로자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위아래로 빠르게 까딱거리며, 주변을 확인했다. 매캐한 연기가 가득한 장갑차 안쪽을 눈을 찡그려서 최대한 살폈다.


 "쿨럭... 쿨러억!"


 "앞... 앞이 안 보여... 앞이!"


 씨발... 입술이라는 댐이 터진 것처럼, 욕설이 홍수처럼 터져나왔다. 장갑차 조종수석은 폭발에 반응한 전지가 뿜어내는 화염을 그대로 맞으며 구워졌고, 니트릴은 자신의 자리에서, 목에 파편이 박힌 채 축 늘어져있었다. 타오 소위도 고통스러운지 포탑에서 앉은 채 머리를 부여잡고, 다른 이들도 목숨은 붙어있었지만 상태가 영 아니었다. 작게는 새끼손가락이 꺾인 병사부터, 심하게는 시력을 잃어버린 이들까지.


 "로자 상병님?! 어떻게 해야..."


 "나가요! 일단 나가!"


 로자는 귀찮게 달라붙는 브라우니에게 당장 나가라고 명령했다. 연기가 너무 심해서 안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숙인 허리를 펴서 상부 해치를 밀어제껴서 열었다. 그리고 바이오로이드들을 붙잡고, 빨리 탈출하라고 윽박질렀다.


 "당장 나가요! 나가라고요!"


 "로자 상병님! 앞이! 앞이 안 보입니다!"


 이름 없는 브라우니가, 빨리 나가라고 어깨를 흔드는 로자의 손을 잡고 앞이 안 보인다고 우는 소리를 했다. 로자는 나가려던 러너의 방탄헬멧을 툭 치고 브라우니를 그 쪽으로 밀었다. 러너는 브라우니지만 상황 파악은 제대로 했는지, 브라우니를 붙잡아서 상부 해치 쪽으로 밀었다. 로자는 바이오로이드들을 제끼고 장갑차 안으로 들어가서 타오 소위를 살폈다.


 "으... 이런 씨발! 씨발!"


 "타오 소위님. 괜찮으십니까?"


 쿨럭! 쿨럭! 타오 소위의 기침 소리가 두꺼운 방탄 헬멧을 뚫고 둔탁하게 들려왔다.  대답을 하기는커녕 로자의 말소리를 들을 상황도 아닌 것 같아 방탄헬멧의 바이저를 위로 올렸다. 얼굴에 피가 잔뜩 묻어있는 타오 소위가 보였다. 타오 소위는 정신을 못 차리고 기침을 해대며 로자의 얼굴에 핏물을 토했다.


 "으으..."


 바이저가 열린 뒤에야 로자의 말소리가 똑바로 들린 걸까, 타오 소위는 눈을 뜨고 로자를 바라보았다. 타오 소위는 눈을 끔뻑이며,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그리고 로자도 죽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고 로자를 붙잡았다.


 "케흑... 쿨럭! 씨발... 씨발... 단차에 무전기 탈거하고, 젠장... 나가서 상황 보고해! 그리고 단차 외부에도 소화기 있으니까 챙기고. 씨발... 이 장갑차는 끝났어."


 "네. 알겠습니다!"


 로자는 타오 소위의 명령에 따라 장갑차 좌측에 붙어있는 무전기를 붙잡았다. 무전기에 걸려있는 나사들을 손으로 돌려 빼내고, 장갑차 전자장비와 연결하는 전선을 뽑았다. 타오 소위도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축 늘어진 니트릴의 양 어깨를 붙잡는 순간, 


 "으아악! 흐악!"


 "적 공격! 적 공격!"


 상부 해치로 기어나가던 눈 먼 브라우니가 총탄을 맞아 장갑차 안으로 다시 떨어지고, 장갑차 전면부가 깨지며 생겨난 파편들이 타오 소위를 덮쳤다. 로자가 깜짝 놀라서 장갑차 바닥에 닿기도 전의 찰나에 바람 찢는 소리가 찾아왔다. 아까 전처럼 거대한 폭발은 아니었기에 금방 충격에서 회복해 타오 소위를 찾았다.


 "타오 소위님? 괜찮으십니까? 타오 소위님?"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 다시 타오 소위에게 가까이 간 로자는, 아랫턱이 날아간 타오 소위를 마주했다. 눈이 어떻게든 초점을 잡으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한듯 의미없이 떨리는 동공마저 멈추고 눈을 감았다. 타오 소위는 죽었다, 로자는 그 사실을 '일단' 받아들인 상태로 장갑차를 빠져나왔다.


 "젠장..."


 "로자 상병님! 장갑차 왼쪽 궤도가 날아갔습니다. 이거 못 씁니다! 지금 나온 사람들 중에서는 한 명이 실명했고, 세 명이 경상입니다!"


 로자는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일까, 감사해야 하는 걸까,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로자는 지금 살아있었고, 전쟁터의 쥐새끼가 아닌 군인이었기에 싸워야 했다. 로자는 브라우니의 도움을 받아 무전기를 등에 묶고, 헬멧에 무전기 전선을 연결했다. 



"여기는 불해머 101! 불해머 111 응답하라! 불해머 111! 그쪽에서 폭음이 들렸다! "



테일러 중위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지만, 그렇게 감정을 터뜨리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야! 타오 이 새끼야! 너 생명신호 끊겼다고!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격앙된 목소리에, 로자는 황급히 1소대 1분대 장갑차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했다.


 "불해머 111이라 알리고! 소대장과 분대장, 조종수 사망하였고, 그 외 1명 실명, 3명 경상!"


 "뭐...? 야, 너 누구야! 로자야?"


 "불해머 111! 맞다고 알림!"


 니미 썅, 무전 너머에서 욕설이 들려오고, 테일러 중위가 명령했다.


 "불해머 101이라 알리고, 현시간부로 불해머 112 차장이 1소대장 임무 수행하고 불해머 111은 남은 병력 모아서 1차 집결 지점으로 이동할 것. 이상."


 확인 완료. 로자는 무전기의 송화 기능을 끄고, 졸지에 분대장이 된 채로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적외선 연막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라, 마치 둥둥 뜬 머리들이 로자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 숙이고, 최대한 엄폐하면서 간격 유지해서 남쪽으로 가세요. 연막이 언제 걷힐 지 모르니까..."


 다시 시작된 포격에, 폭발음이 앞쪽에서 들려왔다. 그나마 뇌에 내장된 제어 칩이 방향이라도 알려주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왔던 곳에서 반대쪽으로 도로 걸어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다시 밟았다.


 안개 속에서, 수많은 강철 잔해에 손을 댄 채로 걸어갔다.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그들을 찾고 있을 총구들, 로자가 타고 있던 장갑차의 위치를 알아낸 총구들이 두려웠다. 적외선 연막이 그들의 움직임을 가려주고 있었고, 포격이 다시 시작되었으니 저들은 숨어들기에 바쁠 것이다. 하지만 로자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적만 조심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쾅! 아주 가까이, 왼쪽에서 들려오는 폭음에 반사적으로 몸을 던졌다. 로자는 구덩이에 몸을 던지고 무전으로 물었다.


 "여기는 로자! 무슨 일이에요?!"


 로자는 그렇게 물었지만, 곧 질문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말했다. 저 폭음이 만약 분대원을 집어삼킨 폭발에 의한 것이라면, 그 분대원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일 테고, 다른 사람들은 누가 죽었는지도 모를 테니.


"이프르 병장님?"


 "이프르. 살아있어. 아직은."


 "아이스 병장님?"


 "아이스. 나도 살아있어."


 "유리?"


 "유리. 예. 살아있어요."


 "러너?"


 러너는 혼자 답이 없었다. 그 다음으로, 브라우니들은 대답한 것으로 보아, 폭발에 휘말린 재수없는 영혼은 러너인 모양이었다. 로자는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그런데, 바닥에 딱딱한 게 잡혔다.


 "응? 이런 맙소사."


 로자가 깔고 누운 바닥에 포탄이 누워있었다. 로자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엉덩이를 뒤로 끌어 물러났다. 구덩이 비탈에 등을 대고, 상황을 살폈다. 포탄은 최소 5개 이상에, 각각 인계철선과 연결되어 있었다. 로자는 자신도 러너의 뒤를 따라갈 수 있음을, 미궁 요새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중상을 입고,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음을 예견했다. 


 "하나... 둘..."


 하필 구덩이도 좆같은 곳으로 골랐다. 땅은 딱딱해서 발이 박히지 않았고, 돌무더기를 잡으면 개미지옥의 함정처럼 자갈돌들이 쏟아져 로자를 잡아끌었다. 깊이가 1.5m밖에 되지 않는 비탈일 텐데, 자욱하게 깔린 연막 때문에 무저갱에 갇힌 것처럼 느껴졌다.


 "윽... 으으윽!"


 로자는 온 몸을 비탈에 붙이고 살금살금 기어 올라갔다. 자갈이 떨어졌지만 아까 전보다는 나았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딛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발자국을 박차며 짱돌이 구덩이 안으로 날아들고, 인계철선을 건드렸다.




 쾅!!!!




 로자는 폭압에 몸이 위아래로 뒤집히다가, 진창에 처박혔다. 그 위에 흙과 자갈로 된 이불을 덮어쓴 로자는, 패닉에 빠져서 몸부림쳤다.


 으악! 흐아아악!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다가, . 타냐 중사님! 절 버리지 마십시오! 테일러 중위님! 전 살아있습니다! 전 살아있다고요!


 공포에 잡아먹힌 정신은 이성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허우적거리다 겨우 빠져나와서는 남쪽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잔해에 부딪쳐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멈추지 않았다. 도망치던 로자를 끝내 막은 것은 개머리판이었다.


 "꺄악!"


 "뭐야 이 새끼?"

.

  눈 앞이 번쩍였다가, 다시 눈을 뜨니 로자는 누워있었다. 눈 앞에는 뭉툭한 총구가 보였고, 그 총구 가늠자 너머에는... 생존성 강화 키트를 장착한 타냐 중사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어? 로자 상병님 아닙니까?"


 "로자? 야, 근데 너 분대원들은 어따 두고 니 혼자 거지꼴로... 응?"


 로자는 울음을 터뜨리며 타냐의 양 다리를 붙잡았다. 무서웠다고, 살려달라고, 온갖 맥락 없는 어리광을 부렸다. 타냐 중사는 로자를 걷어차려다가, 한숨을 쉬고는 제 신세를 한탄했다.


 "시발, 이제는 내가 애새끼를 보네. 다음 주까지 살아남으면 기저귀도 갈겠다."


 레프리콘이 있었다. 그리고 여느 날처럼, 전장은 그녀와 상관 없이 시끄럽고 잔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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