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령관이 아니다.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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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오르카의 함장실. 그곳에는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은 사내가 있었다.

그 기분 좋아 보이는 사내는 오르카의 첫 번째 인간이자 사령관.

그런 그의 곁에는 오늘의 부관인 금발에 붉은 모자가 특징인 소녀와도 같은 모습의 바이오로이드가 있었다.

 

“어, 티 많이 났어?”

 

“예. 이제 그만 업무에 집중 하시지요.”

 

“아, 응. 아침부터 해야 할 게 많아 보이니까. 이제 집중해야지.”

 

집중한다고 말하기는 하나 사령관의 손은 느릿하기 그지없었다.

 

“…….”

 

“…….”

 

“폐하, 좀 더 빨리 손을 움직이셔야 합니다. 오늘 내로 일을 끝내시려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르망. 이것도 제법 빠른 거라고?”

 

“손님이네요.”

 

느릿느릿 손을 움직이는 사령관의 변명을 한 귀로 흘린 채 오늘의 부관- 아르망 추기경은 주섬주섬 사령관의 집무용 책상을 정리해 주었다.

 

“손님?”

 

똑- 똑-

 

사령관이 손님이라고 말하자마자 들려온 노크소리.

그러나 그 손님은 노크만 할뿐. 문을 열고 그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어, 누구야? 들어와.”

 

의아함에 들어와도 괜찮다며 의문의 손님을 들이기로 한 사령관.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손님은 고개부터 빼꼼 내밀어 들어왔다.

 

“저기... 사령관아 그, 잠깐 시간 좀 내줘라.”

 

말에 힘이 부족한 오늘의 손님은 오르카의 두 번째 인간이었다.

한곳에 점잖게 있지를 못하는 시선에, 잔뜩 움츠러든 등. 마치 무언가 잘못을 한 사람 같은 모습.

평소 같으면 획획 문을 열고 들어왔었겠지만 오늘의 그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어...”

 

사령관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 것 이라고.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지만 오늘은 괜스레 아르망의 눈치가 보였다.

 

“음...”

 

사령관은 여러 서류의 산을 둘러보고 조용히 곁의 부관을 바라보았다.

그의 부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한숨도 쉬었던 것 같지만 말이다.

 

“시간이야 넘쳐나지, 들어와.”

 

“응, 고맙다...”

 

유일한 인간친구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령관과는 달리 남자는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역시 그런 남자의 모습은 충분히 사령관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뭔 일 있어? 너답지 않게 기운 없어 보이네.”

 

“응. 있어... 그, 일단, 응. 말 할 테니까, 화가 난다면 미안.”

 

“내가 화를 낸다고? 뭔데 그래?”

 

“그, 그게...”

 

우물쭈물 거리며 힘들게 고갤 든 남자는 눈앞의 사령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레오나랑 해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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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숨소리가 들린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아, 물론 내가 내는 건 아니다. 그럼 누구의 숨소리냐고 묻는다면...

 

힐끔-

 

작은 숨소리의 주인을 살짝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이불 속에 머리만 내민 채 파묻혀 있는 바이오로이드.

얼굴은... 나와는 반대인 벽 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지만,

간간히 보이는 어깨의 상하 운동으로 그녀가 아직 잠들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 계속 이렇게 누워있으면 언젠가 그녀- 레오나가 깨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응. 어찌 되어버릴지 모르겠다. 생각하기도 싫다.

그러니 그 전에 내가 이 방을 나서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다.

사실 그냥 빨리 어디론 가로 도망치고 싶을 뿐이지만.

 

‘튀자-’

 

시선은 레오나에게 고정한 채 최대한 조용하게 천천히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바로 이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역시, 그냥 가면 안 되겠지.’

 

내가 비록 방바닥에서 누워서 자긴 했어도, 아니, 사실은 자다 깨는 것을 반복해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서 잤다고 하는 게 맞는 게 모르겠지만.

일단 레오나에게서 담요와 베개를 건네받았기 때문에 적어도 이것들을 개고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잘도 이런 상황에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응. 왠지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하는 거다. 진짜 왜 하는 거지?

 

‘이 정도면 뭐 괜찮겠지.’

 

이부자리를 제법 보기 좋게 정리 하고 꽤나 딴 길로 셌지만 이제 정말로 방을 떠나기로 했다.

가끔 와본 레오나의 방 이었지만 이렇게 하루를 보낸 적은 없었다.

 

“...”

 

마지막으로 이 방을 나서기 전에 레오나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레오나는 어째서 그런 일은 한 걸까. 지금 생각해 봐도 어제의 일들은 너무 정신이 없었다지만, 이해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들이어서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다.

 

여기서 머릴 굴려 봤자 좋을 게 없으니 그냥 일단 나가자.

일단은 여기서 나가고 그 뒤에는 천천히 생각하자.

 

조용히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좋아. 복도에는 일단 아무도 없다. ...아마도.

나는 조심스럽게 나왔다. ...하아 내가 왜 이런...

 

방을 나서서도 왠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된 달까?

두리번거리면 왠지 더 수상해 보일까봐 평소대로 걷기로 했지만.

 

그렇게 어슬렁거리다가 한 가지 알아낸 게 있다면 지금은 아침인 것 같다.

뭐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른 아침도 아니고 일과가 시작하고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지나가면서 여러 바이오로이드들을 보고서 어색하게 그녀들의 인사를 받아주고 있자니,

불안감은 오히려 더욱 커져 갔다.

 

그도 그럴게 나름 오르카의 영향력 있는 바이오로이드를 강간할 뻔 했으니까...

그저 분위기 탓으로 돌리기엔 내가 생각해도 그건 너무 했다고 생각했다.

먼저 유혹한건 레오나다! 라고 말하기엔 말 같지도 않은 상황이었으니,

상심한 여자가 꼬드긴다고 못 말릴 것도 아니었는데...

 

씨발. 모르겠다.

레오나가 급발진 한 것도 그렇고, 거부하지 않은 나도 그렇고.

처음 오르카에서 눈을 떴을 때의 내 다짐은 어디로 간 걸까?

 

사령관과 바이오로이드들과 잘 어울리며 오르카에서 문제가 되지 않고 살아가고 싶었는데...

어쩌지...

 

불안감을 안고 그저 목적 없이 걸었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내 발길이 닿은 곳은 함장실이었다.

일이 더 터지기 전에 스스로 자수라도 하라는 건가.

함장실의 문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자 안쪽에서 조곤조곤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른 아침부터 두 사람은 오르카를 위해 일해 주는 모양이다.

 

“...”

 

모두가 오르카를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래 그냥 시원하게 말하자. 레오나랑 해버렸다고.

 

이후에 분노한 사령관에게 멱살을 잡히든 오르카에서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져 버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을 빨리 알리고 속죄하자. 응. 어쩔 수 없어. 내가 잘못 했는걸...

오르카의 불화가 되어버리는 것들은 바로바로 없애지 않으면 이 세계의 유일한 희망인 사령관이 잘 못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것만큼은 보기가 싫은걸.

 

마음을 굳게 먹고- 사실 무서운 건 여전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눈앞의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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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다 할 변명도 못하겠다.

사령관은 분명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을 억누르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나도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각오한 바가 있으니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

 

“...?”

 

이상하다. 자기 여자를 덮친 남자가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데도 사지를 찢어 버리겠다는 분노도 없고 오히려 ‘그래서?’ 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만 있다니! 이게 무슨!

환장할 것 만 같은 나를 두고 사령관의 뒤이어진 질문은 더 황당했다.

 

“그게 다야?”

 

“응... 이게 다이긴 한데...”

 

멍청하게 이게 다라고 말하니 사령관은 미묘한 헛웃음을 지으며 어이없어 했다.

뭔데, 왜 웃는 건데...

 

“너, 그거 자랑 하려고 나 찾아 온 거야?”

 

“?”

 

“나. 레오나랑 했다니까? 아니 정확하게는 본방까진 안 갔는데...”

 

응,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야스까지는 안했다.

하고 싶어서 미칠 뻔 했지만 그래도 더욱 악화 되는 걸 싫었으니까.

 

“뭐야, 그게, 그럼 어디까지 갔는데?”

 

“아니, 이게 무슨...”

 

나는 당황해서 근처에 있던 아르망에게 도와 달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머리 좋은 그녀라면 이 혼란스런 상황을 보기 좋게 설명해 주겠지.

 

“폐하. 아무래도 이 분은 남의 여자를 탐했다고 생각해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폐하께 찾아 온 것 일 겁니다.”

 

“남의 여자? 누구? 레오나가?”

 

“응. 너랑 레오나랑 그... 응.”

 

아르망의 간단명료한 설명에 사령관은 놀라고 있었다.

슬슬 이제 터질 때가 될 것 같아서 우물쭈물 그의 대답에 답해주었다. 

 

“어... 나랑 레오나랑은 일단 아무 사이도 아닌데?”

 

“어?”

 

사령관의 대답에 나는 그만 벙찔 수밖에 없었다.

응. 아무런 사이도 아니시란다. 하하, 다행이네!

근데 잠깐, 그럼 레오나 혼자 짝사랑 한 건가?

 

“아, 아니, 그, 뭐냐. 그래도 걔는 너 좋아하고 있었을걸... 아마도.”

 

“에이, 그럴 리가. 너 이상한 착각한 거 아냐? 내가 봤을 땐 오히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정이라도 든 건가.

어째서 내가 레오나의 마음을 대신 전해주고 있는 걸까.

그나저나, 왜 날 보는 거야. 사령관아. 흐뭇한 미소 멈춰-!

 

“딱히, 상관없지 않아? 서로 좋아서 한 거 아냐?”

 

“아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레오나랑 내가 좋아서 한 거라고? 걔가? 나랑?

그렇게 싫은 티 팍팍 내는데 좋아 할 리가 없었다.

어제도 잔뜩 부려 먹히다가 그렇게 되어버린 거니까.

 

“헛, 설마, 너어... 덮치고서 억지로 한 거야?”

 

“아, 아냐, 오히려 처음엔 내가 덮쳐진 거라고!”

 

눈썹을 잔뜩 찌푸리면서 그럴 줄 몰랐다는 듯이 말하는 사령관을 두고 한껏 쫄아버린 나는 사실을 이야기 했다.

응. 뭐 처음에 덮쳐지긴 했으니까.

 

“와, 레오나 개 쎄게 나왔네.”

 

뭘, 감탄하고 있는 거야. 이 새끼는.

그거 때문에 정신 나가는 줄 알았는데.

 

“하아... 진짜 뭐냐, 이게... 난 존나 쫄렸는데....”

 

평소대로의 사령관과 다름없는 부질없는 대화처럼 실없이 대하니까 이쪽의 긴장이 다 풀린다.

너무 풀려 버려서 오히려 억울한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진짜 아무나 붙잡고 내 이야기 좀 들어 보라며 신세 한탄이나 하고 싶어 졌다.

 

“내가 오르카를 망가뜨릴까봐 걱정했는데, 심지어 너한테 맞을 거 각오하고 이렇게 온 거라고.”

 

“응. 나는 바쁜데 다짜고짜 레오나랑 했다고 자랑질 해서 때릴 뻔 했어.”

 

웃지 말라고 시발-

이쪽은 존나 진지했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기운 없는 나와 달리 한껏 들뜬 사령관은 쿡쿡 거렸다.

 

“그래서 그거 가지고 그렇게 안절부절 못 한 거야?”

 

“...응.”

 

“뭐야, 이젠 조만간 다른 애들이랑 할 때 마다 나한테 보고 할 거야?”

 

이제 안 할 거야. 나쁜놈아. 놀리니까 재밌냐.

애초에 아스널 말고 다른 애들이랑 해본다는 건 지금처럼 될까봐 생각도 못해봤다고.

 

“서로 맘에 들고 좋아하면 그냥 해버려. 괜히 이렇게 찾아오지 말고.”

 

“그, 그래도 그 레오나라고? 나도 당황할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그렇게 싫은 티를 팍팍 내던 거 너도 봤잖아. 응?”

 

“으음, 그 왜, 미운정이 애정으로 변한다고들 하잖아. 난 둘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뭐라는 거야? 나랑 레오나가 어울린다고?

무슨, 레오나한테 너무 관심 없었던 거 아니냐. 사령관아.

 

“그리고 레오나는 약간 뭐랄까... 으음...”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지 대가릴 굴리는 사령관 옆에서 나름 조용히 있던 아르망이 입을 열었다.

 

“츤데레 이지요.”

 

뭐라는 거야. 아르망... 너도 왜 그래.

 

“응. 맞아. 츤데레. 그거야.”

 

레오나가 츤데레라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거야 둘 다.

데레가 없다고 걔는. 내가 걔랑 지내면서 데레 라는 걸 본 적이... 있나?

 

“그렇게 말해도 나는 나 나름대로 복잡하다고.”

 

“그럼 만나서 솔직하게 대화해봐. 저번에 아스널이랑도 그렇게 해서 잘 됐잖아.”

 

“그때보다 난이도가 더 어렵다고 이번에는...”

 

그때도 아스널이랑 어색한 상태로 꽤나 정신이 없었던 건 사실이다.

근데 이번일은 저번 일과 비교해 봐도 꼬인 게 너무 많아서 어렵다.

애초에 레오나가 갑자기 벗기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다.

 

“으음,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해 줄게 없는데... 뭐, 잘해봐. 힘내!”

 

“...나는 이제 갈란다... 생각한 거랑 달라서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어.”

 

“어, 조심히 들어가.”

 

뒤통수 쪽에서 들려오는 사령관의 목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함장실을 걸어 나왔다.

들어갈 땐 걱정도 많았고 잔뜩 긴장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얼굴로 레오나를 만나 대화를 하라는 건지...

 

터벅터벅 걸을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큰 문제들 중 하나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혼란함이 메꾼 것 같다.

응. 일단은 내 방에 가서 생각을 좀 정리해 보자.

나는 아직 레오나를 만날 준비가 안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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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까 어제 오늘 아주 대가리가 아프다 못해 터질지도 모르는 일들만 일어난 것 같다.

내가 오르카에서 조용히 지냈다고 는 할 수 없고 그동안 사고도 많이 쳤다지만 지금보단 덜하면 덜했지 더하진 않았다.

진짜 레오나의 급발진 때문에 장르가 후회물이 되어 버릴까봐 얼마나 쫄렸는지 생각하면 아니, 생각하기 싫다. 응.

 

일단은 침대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미쳐 다 못잔 잠을 자든지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

 

“늦었군. 그것도 밤을 세서. 지금 들어오다니, 어떤 기분인가?”

 

“뎃?”

 

나는 다시 문을 닫았다.

문은 거짓말처럼 부드럽고 천천히 닫혔다.

 

응, 나는 아무것도 못 듣고 못 봤다.

잔뜩 언짢아 보이는 아스널이 내 침대에 앉아 다리를 꼬고 노려보고 있다거나 그런 거.

팔짱에 힘이 들어가서 당장에라도 내 목을 조르려거나 하는 그런 거.

 

하하, 아스널이 그럴 리가 없잖아.

그 아스널이라고?

 

“문을 닫는다고 문제가 해결 되진 않는다. 그대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방의 주인인 내가 가만히 문 앞에서 서있으니 안쪽에서 다시 아스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의 달콤한 목소리가 아닌 평탄하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어째서 아스널이 내방에서 대기를 타고 있는 걸까?

우둔한 머리로 천천히 생각하고 있으니 어제 레오나랑 있었던 일들이 있기 전에 내가 무얼 했는지 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아스널이랑 야스를 했었다. 응.

그것도 나름 격렬하고 달콤하게 말이다.

그리고 그대로 아스널을 두고 레오나를 따라갔지.

응. 내가 나빴네. 내가 개새끼가 맞네.

 

“방의 주인이 밖에 있으면 쓰나, 들어와라.”

 

높낮이가 전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안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들어오라고.”

 

“...네.”

 

안 들어간다니 내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

오늘은 어째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거에만 이렇게 신중해 지는 걸까.

그리 신세를 한탄하면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 방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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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잠시 돌려. 보고 있는 것은 함장실.

방금 전까지 소란스러웠던 함장실은 한 남자의 퇴장과 함께 다시 조용해 졌다.

 

“...아르망, 어떻게 생각해?”

 

그 고요함에 지친 듯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바삐 손을 움직이던 사령관이었다.

입을 연 것과 동시에 바삐 움직이던 손은 멈추었다.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부관인 아르망을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후우, 다 알고 있잖아. 내가 뭘 듣고 싶은지.”

 

깍지를 끼고 손을 높게 들고 하품을 한번 하고는 목을 좌우로 기울인 사령관의 목에서는 우드득 우드득 뼈와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곤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옆을 흘낏 바라보았다.

 

아르망은 그런 사령관을 빤히 바라보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분도 만만치 않게 망가지신 분입니다. 정신적으로 많이 불안한 것 역시 사실이고, 가끔 보이시는 기행 역시 불안을 감추다가 일어난 것 들... 이겠지요.”

 

“하하, 그리고? 할 말 하나 더 있지?”

 

이쪽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자신만만하다는 듯 사령관은 웃었다.

 

“폐하께서 생각하신 것 보단 상태가 나쁩니다... 그분은 도망치는 것 밖에 못하시는 것 같으니.”

 

“에이, 멸망한 세상에서 망가지지 않은 게 이상한거지, 인간이든 바이오로이드든 뭐든.”

 

사령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잠시 먼 곳을 응시했다. 그 눈에는 무엇이 비추었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피로해 보였다.

 

“폐하...”

 

“그래도 걔 덕분에 한시름 놨다고 해야겠지. 그치?”

 

“...”

 

아르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서있을 뿐이었다.

 

“오르카에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손이 멈추셨습니다.”

 

아르망은 눈을 뜨고 사령관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미묘하게 눈썹이 올라간 것이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한 것 같다. 

 

“히잉...”

 

사령관은 나약한 소리를 내곤 다시 서류의 산들과 눈싸움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집중력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르망.”

 

“예, 폐하.”

 

“조금만 쉬면 안 될까?”

 

어색하게 웃으며 사령관은 아르망을 바라보았다.

꽤나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그걸 바라보는 부관의 생각은 전혀 바뀔 마음이 없었다.

 

아르망은 아랫입술을 잠시 깨 물고는 한동안 이 오르카의 함장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됩니다.”

 

“...”

 

“...”

 

그 뒤로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저 사락사락 스쳐 움직이는 종이들의 요란함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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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해피추석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