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오르카호 저항군의 총사령관인 남자는 부하들과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좀 있으면 추석인데, 다들 제사라도 지내지 않을래?"


"제사…… 말입니까?"


"제사가 뭐야?"


바이오로이드들은 본래 인간의 기념일 같은 걸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남자가 신경써준 덕분에 생일과 명절 같은 각종 기념일을 배워 나가고 있었다.


"음. 나도 최근에 배운 건데, 이 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추석 때 한자리에 모여서 죽은 자의 혼을 위로했다나 봐. 일종의 추모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


"추모……."


"그러니 너희도 각각 부대끼리 모여서 추모식을 갖는 게 어떨까 해서."


그러자 부하 몇몇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치만, 추모하라고 해도…… 우린 이제까지 사망자가 없었잖아."


"맞아. 사령관의 뛰어난 지휘를 받은 뒤론 우리 자매들은 한 명도 죽지 않았으니까."


남자는 부하들의 아부가 싫지는 않은 듯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뭐, 그래도 내가 오기 전엔 전사자가 있었을 테니 말이야. 멸망 전쟁 때 죽은 바이오로이드도 많았을 거고."


남자의 말에 부하들도 그제서 고개를 끄덕였다.


인류가 멸망하고 남자 단 한명만이 남아 있는 암울한 시대라고는 해도, 기념일은 무언가 특별한 느낌을 주기 마련이었다.


남자의 애인이자 경호실장인 리리스도 추석이 다가오자 들떴다. 작년부터 남자 덕분에 추석을 지내게 된 이래로, 동생들과 명절 음식도 해먹고 같이 노는 시간을 보내느라 즐거웠다.


게다가 이번에는 특히 컴패니언의 추모식을 준비하게 되었으니 느낌이 새로왔다.


그리하여 그녀는 동생들에게 제사 이야기를 했다.


"……알겠지? 그러니까 우리 컴패니언도 제사라는 걸 지내보자."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준비하겠습니다."


점잖고 깐깐한 고양이귀 소녀 페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하치코가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런데 저희는 어떤 분들을 추모해야 할까요? 저희 중에 죽은 자매는 이젠 없잖아요."


"……음, 멸망 전쟁 때 철충들한테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선대 컴패니언 분들이라던가……."


리리스가 둘러대듯이 말하는데, 눈치 없는 펜리르가 끼어들었다.


"아, 맞다. 주인님이 사령관 되기 전에 전사한 동생들이 있댔지? 걔네 제사 지내면 되겠네."


"……."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리리스는 지금도 그렇지만 남자가 나타나기 전에도 자신의 부하이자 동생들을 무척 아꼈는데, 안타깝게도 그녀들 대다수가 전사했던 것이었다. 그녀들 중 살아남은 건 지금의 페로와 하치코 정도였다.


그러니 그 생각을 떠올린 리리스는 새삼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리리스가 순간 입을 다물자 다른 동생들도 말을 삼갔다.


하여간 눈치 없긴. 페로는 이를 드러내며 펜리르의 옆구리를 쳤다. 펜리르는 깨갱하며 입을 내밀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으려 하자 막내 스노우 페더가 얼른 나서서 화제를 돌렸다.


"맞다, 이번에 음식은 뭘 만들까요? 역시 전 같은 게 낫겠죠?"


그러자 눈치를 보던 자매들도 한마디씩 하고 나섰다.


"이번엔 슈퍼 디럭스 미트파이 만들어용."


하치코의 말이었다.


"어휴. 추모식에 무슨 미트파이니?"


"맞아. 치킨 정도는 올라와야지."


"차라리 그냥 고기를 굽는 게 어때?"


방 안이 다시금 활기를 띠었다. 침묵하던 리리스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그런 자매들을 지켜보았다.


얼마 뒤 추석 당일이 되었다. 바이오로이드들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소속 부대에 따라 제각기 추모식을 올렸다.


남자도 멸망한 인류를 위해서 향을 피우고 기도했다. 과거 인류는 윤리가 파괴된 듯이 행동했지만, 개중에는 무고하고 선한 인간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는 인류와 인류의 노예였던 바이오로이드 모두를 위해 명복을 빌었다.


남자가 추모사를 읽는 것을 들으며 몇몇 부하들은 눈물을 짓기도 했다. 백여년 전부터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의 대립을 알고 있는 쪽에서 듣자니 감개가 무량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남자는 또한 직접 각 부대를 돌아 보기로 했다. 오르카호의 거의 모든 부대가 자기네 식으로 추모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다. 덕분에 고소한 기름 냄새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오르카호 곳곳에 가득찼다.


한편, 컴패니언 자매들도 명절 음식을 만드느라 아침부터 바빴다. 어차피 자기네가 먹을 것이기는 했지만, 가족끼리 같이 모여서 만든다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의외로 가사 솜씨가 좋은 포이를 중심으로 페로와 페더가 음식을 만들었다. 보조인 펜리르는 주로 뺏어 먹다가 쥐어박히는 역할이었다. 하치코는 친구들과  더불어 오르카호 내부를 쏘다니며 다른 부대의 음식들을 맛보기에 바빴다.


"펜리르, 고기산적 좀 그만 먹지 못하겠습니까.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페로가 요리 도구를 흔들었다.


"씨잉. 자기도 하나 먹었으면서. 포이도 자꾸 먹는다고."


페로와 같은 고양이귀인 포이가 가슴을 쭉 펴고 대답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다옹. 애초에 오늘은 내가 요리사니까, 난 먹어도 된단 말씀."


스노우 페더가 웃었다.


"자꾸 그러면 주인님하고 큰언니 드실 게 없어질지도 몰라요."


"앗. 주인님 오신다고 했어?"


"네. 같이 제사 지내러 오신다고 하셨거든요."


펜리르는 먹던 걸 급히 뱉어냈다.


"야!"


그렇게 명절 분위기 속에서 자매들이 요리를 마칠 즈음, 때맞춰 남자와 리리스가 같이 들어왔다. 임무에 충실한 리리스는 그날도 남자의 호위를 맡고 있던 참이었다.


자매들은 얼른 일어서서 인사했다.


"추석 복 많이 받으세요, 주인님."


"응. 너희도."


곧 컴패니언 자매들은 미리 차려놓은 제사상에 모여서 묵념했다. 촛불들 뒤에 컴패니언 마크 사진이 담긴 액자가 꽃으로 장식되어 상에 모셔져 있었다.


리리스가 죽은 자매들의 영전에 술을 따랐다. 별다른 사진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동생들이었다.


남자는 리리스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과거 자매들이 거의 다 전사한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죽은 컴패니언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녀들의 희생이 모두를 위해 도움이 되었길 바랬다. 그리고 리리스가 앞으로도 지금의 자매들과 잘 지내길 바랬다.


다른 자매들도 경건한 마음으로 리리스를 따라 술을 올렸다.


추모가 끝나자 리리스가 표정을 고치고 손뼉 쳤다. 기운을 차리려는 듯이 다분히 의식적인 모습이었다.


"자! 그럼 이번엔 주인님께 인사 올려야지. 다들 순서대로 절하렴."


"아, 뭐 그런 걸 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상석에 앉았다. 아직 젊은 사령관 자격으로 바이오로이드들의 절을 받다 보니 부쩍 나이를 먹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인님, 복 많이 받으세요.""


"쥬인님, 복 받으세용. 두 번 받으세용."


하치코가 두번 절하자 다들 흠칫하고 놀랐다. 리리스가 주의를 주었다.


"하치코. 절은 한 번만 하는 거예요."


남자도 웃었다.


"그래. 두 번 절하는 건 죽은 사람한테 하는 거야."


"엥- 절 두 번 하면 세뱃돈 두 배 주는 거 아닌가요."


페로가 태클을 걸었다.


"애초에 명절에는 세뱃돈 안 주거든?"


"쫌생이네용."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니?"


하치코 덕분에 모두들 웃었다.


그 와중, 포이는 문득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귀 바이오로이드가 끼어서 절하는 것을 보고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나저나 히루메 넌 왜 여기서 절해? 배틀 메이드 자매들이랑 제사 지내야지."


"그야…… 명절엔 핏줄을 찾아가는 거라 들었다. 절은 거기서도 했고."


천향의 히루메는 본래 블랙 리리스의 유전자를 기반으로 구미호처럼 만들어진 존재로서, 엄밀히 말해 컴패니언 자매라고 할 수 있었다.


"흥. 뭐 먹으러 왔겠죠."


"아…… 아니다. 첩은 딱히 먹으러 온 게……."


페로가 히루메를 쫓아내려는 걸 남자와 리리스가 말렸다.


"냅둬. 먹으면 어떠니…… 주인님도 간단하게 뭐라도 드시고 가세요."


"그럴까? ……오오. 많이도 만들었네."


"그러게요. 이제 제 동생들도 가사에 능숙해진 거 같아요. 후후."


리리스가 기특하다는 듯이 말했다.


덕분에 남자는 아점을 잔뜩 얻어먹고 나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다른 곳으로 가 볼까."


"아."


리리스가 경호를 위해 뒤따라 일어나려니까, 남자가 손을 들어 만류했다.


"리리스는 오늘은 이만 하고 쉬어."


"예?"


"명절이니까 동생들하고 보내도 돼."


"하지만, 그렇게 하면 경호 로테이션이……."


경호 계획을 총괄하는 리리스는 갑작스런 스케줄의 변경에 당혹스러워했다. 이런 기념일엔 주인을 노리는 위험(여러가지 의미로)도 커지기 마련인 것이다.


남자는 리리스의 마음을 헤아려 이렇게 말했다.


"음, 그럼 히루메가 임시로 해 주면 되겠네. 그렇지, 여우야?"


산적을 한입 가득히 물고 있던 히루메가 흠칫하고 놀라더니,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크, 크흠. 물론이다. 명절이니만큼 특별히 첩이 그대를 지켜 주겠노라."


"히루메. 주인님한텐 컨셉 잡지 말라고 했죠? 호위 철저히 해야 돼요."


리리스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히루메는 얼른 태도를 공손하게 바꾸었다.


"알아…… 맡겨두라고."


늘상 허세 부리던 히루메는 리리스와 라비아타 앞에선 얌전해지곤 했다.


자신의 동생인 히루메라면 실력에 문제는 없을 것이다. 또, 동생인 만큼 남자를 유혹하는 것도 어느 정도 용인할 심산이었다.


히루메와 남자를 배웅하고, 배도 부르자 하치코가 신이 나서 말했다.


"우리 윷놀이 해요! 추석엔 윷놀이 하는 거랬어요."


"음? 스틸크래프트 하는 거 아니었어?"


"윷놀이 끝나고 하면 되죠."


컴패니언 자매는 하루를 같이 노는 것으로 명절을 보냈다. 늘상 번갈아 가며 남자의 호위를 서고 이런저런 임무도 맡느라 같이 모일 시간이 많지 않은 그녀들이었다.


리리스도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동생들과 즐겼다. 도중에 친하게 지내는 대원들도 찾아와서 같이 놀고, 서로 음식도 교환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한나절이 지나가려고 했다. 슬슬 자리를 치우는 동안 페로가 리리스에게 다가왔다.


"벌써 오후네요."


"그러게. 놀 때만 시간이 빨리 가지."


페로는 리리스의 옆얼굴을 보더니 문득 물었다.


"……혹시 아까 전에, 옛날 자매들 생각하셨나요?"


"응."


"조금, 슬퍼 보이셔서요."


이번의 제사는 사실, 예전에 죽었다는 컴패니언 선조들보다는 저항군 활동 중에 죽은 자매들의 넋을 위로하는 의미가 강했던 것이다.


리리스는 하던 일을 계속하며 덧붙였다.


"맞아. 그애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다 내 부하이고 너희 같은 동생들인데."


"네……."


"난 아직도 그애들을 기억해. 그리고 물론, 그 애들 못잖게 너희도 소중하단다."


근처에서 돕거나 놀던 자매들도 조용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리리스가 잠시 뒤에 다시 말했다.


"언니가 더 강하거나 운이 좋았다면, 더 많은 자매들이 살아남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녀들은 이제 없어. 기억해 주는 사람도 주인님과 라비아타 언니 빼면 거의 없고. 그냥 내 등과 가슴에 하나 되어 살아갈 뿐이야."


"……."


"그러니까 다들 살아 있어야 해. 페로, 하치코, 펜리르, 페더, 포이……. 모두들 큰일 없이 살아줘서 고마워. 오늘 하루종일 같이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단다. 내년에도, 내후년도, 아니, 그 뒤로도 계속…… 같이 명절을 보냈으면 해."


리리스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쩐지 목이 메어왔다.


자매들도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하나 둘씩 모여서 안겼다. 다같이 부둥켜안은 채로 말없이 서있기만 했다.


아가씨들은 눈을 감고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얼마나 지났을까, 리리스가 문득 정색하고 말했다.


"포이 너, 또 목욕 안했지?"


포이는 순간 질겁했다.


"헉. 언니, 감동적인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감동을 방해하는 게 체취라고. 주인님이 너 근접 경호 받다가 냄새난다고 하시면 어쩌려고 그래?"


페로는 눈치를 보며 도망가려다가 덜미를 잡혔다. 씻기 싫어하는 고양이의 습성을 가진 탓이다.


"자. 모처럼의 추석이니까 모두들 모여서 목욕이야."


"으으. 평소에도 목욕 시키면서."


"그럼 안 하니? 펜리르 넌 어디 도망가? ……그렇지. 히루메도 불러서 씻겨야겠네."


목욕을 좋아하는 하치코와 스노우 페더만이 웃으며 같이 자매들을 붙들었다.


그렇게 리리스와 오르카호의 추석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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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특선


별건 아니지만 '사령관을 격려하는 리리스' 이전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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