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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충과의 전쟁은 큰 희생을 낳았다. 사소한 희생 따윈 없다. 희생을 토대로 결국 승리에 이른 것이다. 간혹 그 희생이 너무나 큰 희생일 수도 있다. 그 희생이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일 수도 있다. 철충과의 전쟁은 최후의 남자 매튜의 죽음으로 결말이 났고 이 엄청난 희생을 치룬 결과 철충들은 모두 죽고 바이오로이드는 대다수가 살아남았다.


주둔지와 오르카 호에 그의 죽음을 알리는 방송이 일제히 울렸고 모두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었다. 이 방송이 가장 먼저 알려진 곳은 사령탑이었고 그 사령탑에 있던 닥터는 그 특유의 지능으로 그의 죽음이 진실임을 알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슬픔을 이길 수 없어 타이탄에서 내려 구석지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박고 펑펑 울었다.


중앙 홀에서 알파와 제타는 침울한 표정으로 두 잔에 위스키를 따랐고 그 위스키를 철의 신탑이 있었던 곳을 향해 두었다.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그를 추모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먼저 알파가 위스키 잔 하나를 들었다.


"...고맙습니다. 디에고 도란스."


그녀는 그를 진명으로 불렀다.


"안나 박사님의 원한을 풀어주신 것으로 모자라 지구를 뒤덮은 악마들을 물리쳐주셨네요. 당신의 희생은...너무 큰 대가이지만..."


그와 함께 가졌던 뜨거운 시간을 추억해보며 알파는 그의 온기를 기억하면서 술을 한꺼번에 털어넣었다. 잔을 다시 내려놓은 알파는 찔끔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스윽 닦았다.


"정말로, 행복했어요. 당신과 함께한 순간이..."


알파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자 다음 차례로 제타가 앞으로 걸어나와 남은 잔을 들었다.


"...내 사랑, 매튜."


두 가지 의미를 담으며 제타는 계속 이어갔다.


"그 이름을 쓴 것은 스스로를 비난하기 위해서겠지. 처음부터 끝까지 도구로서 살아오며 스스로 무언가 이룬 적 없었던 자신의 인생을 조롱하고자 매튜라는, 단 하나의 이름만을 썼지. 하지만 지금 당신을 봐. 도구가 아닌....인간으로서 할 일을 이루었잖아."


그녀도 알파처럼 위스키를 한 꺼번에 목구멍으로 넘긴 뒤에 잔을 내려놓고 입가에 조금 샌 술을 스윽 닦았다.


"...해독제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던 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짐작은 했었어. 그렇지만 난 당신이 삶을 선택할 줄 알았지. 인생에서 고통 밖에 받지 못 했고 그것도 너무 오래 시달렸지만, 그런 끔찍한 삶이라도 당신은 그런 고통은 모두 뒤로 하고 이제 진정 누려야 할 행복을 누릴 거라 생각했었는데...내 생각이 너무 짧았어. 그렇게나 괴로웠다는 거....모르지 않았는데 왜 내가 그렇게 생각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가."


제타는 자신의 첫번째 사랑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그를 떠올렸다.


"드디어 둘이 만나는구나."


그 때, 중앙 홀의 정문이 열렸고 문이 닫힐 때 나는 미세한 소리가 중앙 홀에 울려퍼졌다. 알파와 제타가 동시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하얀 금속 마스크를 쓴 스콧이 있었다.


"스콧...?"


제타는 왜 스콧이 여기에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그가 죽은 지금, 가장 그의 곁을 지킬 충신이 바로 저 자이다. 매튜의 옆에서 자리를 지켜야 할 스콧이 왜 여기에 있는지 제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알파는 스콧에게 물었다.


"그가 죽었는데 왜 당신은 여기 계시나요?"


스콧은 별 말하지 않았다. 두 레모네이드는 전문 전투원이 아니기에 매튜와 코나가 여기에 대기하라고 한 것이다. 스콧은 성큼성큼 그녀들에게로 다가갔다. 제타는 그제서야 하얀 금속제 마스크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은 매튜의 마스크가 손상될 시 밀려오는 격통을 막아줄 수 있는 휴대용 간이 마스크이다. 분명 디에고가 맡아두었는데 왜 저 자가 가지고 있는지 제타는 또 다시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여러 의문 속에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지금 다가오고 있는 스콧이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이다. 알파와 제타는 동시에 케스토스 히마스를 전개하였다.


"역시 가지고 있었군."


스콧은 둘이 홀로그램 타블렛을 띄우기 전에 손바닥으로 제일 먼저 제타의 하복부를 쳤고 그 뒤로 다른 손의 손바닥으로 알파의 하복부를 쳐서 단숨에 제압하였다. 쓰러진 둘의 케스토스 히마스에 스콧이 USB를 꽂았고 곧바로 스콧의 등 뒤로 2개의 케스토스 히마스가 생겨났다. 그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둘에게 넌지시 말해주었다.


"잠시 빌리겠다. 조금이면 된다."


그가 꽂은 USB는 일시적으로 꽂은 것의 제어권한을 스콧에게 두는 것으로 약 1시간 동안만 지속되는 아주 짧은 해킹이었다. 그는 떠나기 전 둘을 벤치에 눕힌 뒤에 중앙 홀을 나섰고 다른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울고 있는 닥터는 둔탁한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그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이 스콧임을 알았다. 닥터는 왜 두 레모네이드 언니에게 있을 케스토스 히마스가 그의 등 뒤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곧바로 타이탄 없이 그를 미행하였다. 미행한 끝에 스콧이 간 곳은 오메가, 델타, 감마, 베타, 앱실론이 있는 전파 송신국이었다. 닥터는 왜 그가 저기로 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봐야해!"


결국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닥터는 큰 맘 먹고 더는 미행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전파 송신국의 문이 굳게 잠긴 것처럼 열리지 않았다. 닥터는 미행하던게 전부 들통났다는 걸 그제서야 파악했고 타이탄으로 문을 부수려고 했지만


"아...! 타이탄 두고 왔잖아?!"


타이탄은 그를 미행하느라 두고 온 상태였다. 일단 버튼을 눌러 자신 쪽으로 오게 하였으나 그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닥터도 몰랐다.


스콧은 전파 송신국에서 기계처럼 일하는 다섯 레모네이드를 보자마자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알파와 제타의 케스토스 히마스에 꽂혀진 USB는 사실 그저 해킹용이 아니었다. 그 USB는 매튜가 직접 만들어 그에게 건내준 것으로 매튜가 자신이 죽고 난 후, 스콧이 그 뒤에 해야할 일들이 들어있다. 다섯 레모네이드는 제타에 의해 정신적인 고문을 받으면서 동시에 개조를 받았다. 머리에 칩을 이식하는 간단한 개조였으나 이 칩은 케스토스 히마스의 해킹에 영향을 받는다. 스콧은 곧바로 케스토스 히마스를 조작하여 다섯 레모네이드를 조종했다.


칩으로부터 명령을 하달받은 다섯 레모네이드들이 자신들의 케스토스 히마스를 조작하기 시작했고 스콧은 점점 가까워져가는 거대힌 기계의 구동 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몰래 미행하던 닥터가 타이탄을 끌고 온 모양인 것을 파악한 스콧은 문이 부서지기를 기다렸다. 쿵, 하고 무거운 소리가 끝나고 나서 문이 파괴되었고 거기엔 타이탄에 탑승한 닥터가 보였다.


"스콧 아저씨! 이게 무슨...."


닥터는 지금 스콧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것 쯤은 알았다. 곧바로 타이탄으로 그를 공격했지만 스콧의 초고속이동을 병행한 공격이 타이탄의 동력부를 파괴하여 닥터는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닥터는 일단 타이탄을 우선적으로 파괴하는 그의 행동에 스콧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얻었다.


"아저씨, 왜 이러는지 묻잖아! 왜 레모네이드 언니들 거를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거야? 전송국에 온 이유는 또 뭐고! 무슨 속셈이야 대체?"


그녀의 말을 전부 무시하면서 스콧은 주인이 바래왔던 순간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닥터는 어떻게든 타이탄을 다시 가동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저 다섯 레모네이드 중 하나만 기절시켜도 스콧의 알 수 없는 속셈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닥터는 휴대용 공구를 꺼내어 타이탄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스콧은 뒤에서 닥터가 수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고 레모네이드들이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잠시 매튜와 가졌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 ★ ☆ ★



때는, 자신이 뉴 고블린의 고독에서 살아남았을 때 매튜는 이름조차 없었던 그를 따로 불렀다. 몸을 씻어 피와 뇌수 등의 구역질 나는 오물들을 닦고 나와 간단한 회색 옷을 입은 스콧은 자신과는 정 반대로 언제나 전투복을 입은 그의 뒤를 따라 어느 방에 들어갔다. 그를 따라간 방은 작은 극장과도 같은 방이었다.


"거기 앉아라."


그 말에 그는 매튜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별다른 감상은 없었다. 자신의 주인의 목소리가 이렇구나, 라는 지극히 평범한 감상. 그 자리에 놓여져있는 단 하나의 의자에 그는 자리에 앉았다. 매튜는 그가 앉자마자 영상을 틀었고, 그도 딱히 매튜가 말하진 않았지만 이 영상을 봐야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빨간색의 만두머리를 한 바이오로이드와 그 바이오로이드의 연인인 남성의 이야기, 바이오로이드의 인권 향상을 위해 힘쓰는 젊은 청년을 암살한 매혹적인 금발의 여성, 뿔이 달린 붉은머리의 여성이 중동의 작은 소년의 해골을 안고 있는 이야기, 일류 요리사 바이오로이드가 자신의 주인으로부터 뒤틀린 사랑을 배우는 모습, 광산의 어린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별과 꽃, 그리고 어린 그녀들의 이름을 알려준 한 남성의 이야기, 연두색 머리카락의 작은 메이드 바이오로이드와 평범한 인간 남성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 문화인형에 의해 전복되는 정부와 이 사건으로 크게 변해간 세계, 기업과 국가의 전쟁, 기업의 승리 후 세계의 패권을 쥔 3개의 대기업들, 있을 수 없는 발할라에 희망을 건 가여운 설원의 바이오로이드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경찰 바이오로이드가 금수들을 위해 사람들을 해치는 모습, 바이오로이드에 의해 밀려나간 인간들의 폭력 시위, 불쌍한 인간을 구해주지 못 한 대 테러부대 바이오로이드 팀,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줄이 끊어져 벌어진 2차 연합전쟁, 초코 여왕과 파티시에, 그리고 철충의 침공으로 인한 인류의 대멸종까지....


이 모든 것이 끝나고 매튜는 영상을 껐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가 이 지구에서 최후로 남은 인간 남성이다. 인류 부흥의 유일한 열쇠. 그리고 아까 보여준 인간들은 나와 똑같은 종이다. 5시간이나 되는 영상을 자세 변화 없이 지켜본 너에게 묻겠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의 질문은 참 애매한 선에 있었다. 개인에 따라 해석하기에 따라선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는 매우 광범위했다. 매튜의 붉게 충혈된 눈과 스콧의 청록색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스콧은 몇 초간 입을 다물다가 입을 열었다.


"인류의 여러 모습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바이오로이드를 싫어하는 인간, 바이오로이드를 사랑하는 인간, 바이오로이드를 상품으로 보는 인간, 그리고 바이오로이드가 사랑하는 인간. 그리고 마지막엔....자신들의 죄가 업보가 되어 돌아와 멸망하는 인류의 모습까지."


"업보라. 종교를 믿나?"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믿는지 안 믿는지만을 물으셨다면...믿지 않습니다."


"...바이오로이드가 사랑한 인간."


매튜는 그가 했던 말 중 일부를 한 번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이 아래를 향하면서 눈꺼풀이 반쯤 당겨졌다. 다시 눈을 똑바로 뜬 그는 스콧에게 이 말의 의미를 물었다.


"내가 보여준 건 인류의 모습이다. 넌 인류의 여러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하였지. 그렇다면....넌, 바이오로이드도 인류라고...인간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습니다."


매튜는 그 말을 듣고는 그의 앞을 지나가 근처에 있는 의자 하나에 앉았다. 매튜는 고개와 등을 숙이고 무릎에 팔을 올렸다. 그를 보지도 않고 매튜가 말하였다.


"철충이라는 외계에서 온 적에 의해 인류는 멸망되었고 나와...오르카라고 하는 세력의 사령관, 이렇게 둘 밖에 남지 않았다."


"제3의 세력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오르카는 그 규모가 작지만 방대한 바이오로이드 부대를 소유하고 있으며 최고급 기종 바이오로이드들이 포진되어 있는 곳이지. 작지만 무시해선 안 될 세력이다. 그 곳의 사령관 역시 인간이고, 여성이지."


매튜는 고개를 돌려 그를 다시 응시하였다.


"너에게 묻겠다. 만일 내가 그녀와 손을 잡아 연합을 맺어 철충들을 소탕한다 치자. 그 뒤에 내가 해야할 일은 무엇이겠는가?"


"바이오로이드는 임신이 가능하며 아까 말씀하셨던 오르카의 사령관은 인간 여성이니 각하께선 그녀들과 함께 인류를 부흥하셔야 합니다."


"...그건 의무인가."


의무. 그 말에 스콧은 입 안이 갑자기 바짝 마른 것을 느꼈다. 철충이라는 적들을 모두 소탕하고나서 그는 인류 부흥을 위해 힘써야한다. 그리되면 인류는 다시금 머지않아 일어설 것이다.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혼혈로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무인가? 최후의 남성이 인류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것은 과연 의무인가?"


"만일 내가 그 부흥을 무시한다면 인류는 멸망한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라는 종이 멸종한 것일 뿐이지 이 행성은, 세상은 원래대로 작동한다. 인간들의 공해로 지구는 황폐화되고 오염되었지만 인간이 멸종되고 나서 100년이 지나니 자연은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중이지. 얼마 남지 않았던 자원들마저 재생하고 있다. 지구가 생명체라고 하면 자신의 양분을 빨아먹어 번식하는 바이러스가 없어진 셈이다."


"확실히, 인간이 없으면 지구의 환경은 두 번 다시 오염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난 그저 환경보호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가 뭔가 살짝 오해하면서 말하고 있자 매튜는 직접 정정해주었다.


"내가 보여준 영상에선 인간의 여러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만들 때 그 동안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 네 머리 속에 넣어두었다. 바이오로이드가 생기기 이전 인류의 모습들 역시 네 머리 속에 있을 것이다. 어떤 모습인가?"


"복합적입니다. 어리석기도 하지만 훌륭하기도 했습니다.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는 종족이었습니다."


"그럼 그 어리석음 중에 너가 생각하는 최고로 어리석은 건 뭐인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 핵병기로 인한 동시다발적인 인류 멸망의 가능성, 그리고 바이오로이드 창조로 인한 사회의 붕괴가 있습니다."


"그래."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건지 대충 감이 잡힙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 매튜의 고개를 자신에게 고정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자신의 주인인 저 남자가 하려는 말은 정말 인류를 부흥시킬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일 것이다.


"바이오로이드들은 인간이 없으면 존재의의가 사라지는 창조물들. 만일 인류가 부흥하지 않고 여기서 끝난다면 그녀들을 이끌어줄 인간이란 존재는 영구적으로 사라지는 것이고 바이오로이드 역시 자신들의 주인 종족들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외적으로 인한 멸망이냐, 공멸이냐의 차이입니다. 또한 제 머리 속에 들어있는 정보가 정확하다면 각하께선...한때 오르카의 사령관이셨습니다."


"한 때는."


"각하께서 그녀들을 이끌어주셔야 그녀들 역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살아갈 수 있다라."


매튜는 고개를 위로 들어 오르카 호에 있을 그녀들을 떠올렸다. 그는 그녀들에게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감정 중 '애' 의 쪽이 더 컸다. 비록 자신을 배신했어도 그는 그녀들을 사랑했다.


"마침 적절한 게 떠오르는군. 인간이 개를 키운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가장 인기 있는 반려동물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여러 품종개량을 했다는 것 역시 알고 있겠구나. 자신들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근친교배를 비롯한 여러 행위를 감행했고 그 결과 인간의 기준에 만족하는 개들이 탄생했다. 이들은 인류가 멸망하고 나서 어찌 됬는가."


"모두 죽었습니다."


"왜 죽었지?"


"과한 품종개량이 벌어진 견종의 경우는 야생화 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적절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 해서입니다. 아사되고 피식되고 수명사한 것이 주 이유입니다."


"그 반면, 품종개량이 일어나지 않은 견종들의 경우는?"


"야생화 되어 지금도 야생동물로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현재 바이오로이드의 경우를 현재 개의 상태와 비유하시는군요."


그가 정확히 짚자 매튜도 만족했다.


"바이오로이드는 품종개량을 여러 번 거친 개들처럼 족쇄가 있다. 인간의 돌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족쇄가. 그에 비해, 너희들은 족쇄가 없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을 반드시 섬겨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을 나는 세우지 않았다. 즉, 너희들은 마음만 먹으면 너희들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종이라는 것이다. 내가 없어진다고 해서 너희들의 앞으로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


"하지만 무기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겠죠."


"그건 상관없다. 너희가 자유의지가 있든 없든 난 너희를 무기로 써먹을 것이니까. 이렇게, 너희에겐 자유의지가 있다만....그녀들은?"


그는 매튜의 말과 눈, 그리고 그의 자세로부터 여러가지를 파악하고 나서 그의 감정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을 곧바로 그에게 물었다.


"...그녀들을 용서하셨군요."


"오래 전부터 그랬다."


"그녀들은 당신을 배신하였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매튜는 곧바로 눈을 찡그리며 그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다른 답을 하는 그에게 살짝 짜증이 난 상태였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라. 너희에겐 자유의지가 있는데 그녀들은 없다. 이게 지금 개와 뭐가 다른가."


"죄송하지만 각하, 저에게도 발언권을 주시지요. 각하께서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인류를 부흥시켜봤자 그 후손들은 반드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라는 걱정을 하고 계시잖습니까."


매튜는 살짝 났던 짜증이 도로 들어갔다. 그가 자신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니 좀 더 그의 발언을 허락하기로 하였다. 그는 희망적인 대답으로 매튜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고 하였다.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전보다는 덜 할 것입니다. 각하와 그녀들 사이에서 태어날 존재들은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혼혈. 그 후손들의 입장에선 바이오로이드를 헐뜯고 학대한다는 것은 돌고 돌아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셈이니 함부로 그러지 못 할 것입니다. 각하와 현 오르카 사령관의 사이에서 태어날 자손의 경우엔 후천적인 교육이 되어있고 그 교육이 후손 대대로 온전히 이어진다면 어느 정도 해결될 것입니다."


"희망적이구나. 날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인가?"


"....."


그의 침묵에 매튜는 그걸 긍정이라고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가 한 말이 매튜가 듣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튜는 역시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변형 고블린의 어린 생각이라는 것 역시 알았다.


"희망적인 말을 한 너에게 현실을 좀 가르쳐주마. 미래에 인류가 재건되었을 때 내 후손들이 모두 나나 그녀같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다면 그 무엇도 인정하지 않는다."


"신을 믿는 자들은 신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지 않았습니까."


"불안하고 무서운 마음을 기댈 곳 없어 그런 허상적인 거에나 기대는 존재들이지.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거나 하는....인류가 재건되었을 때 내 후손들은 자연스레 전쟁을 겪지 않는 세대일 것이고 오직 기록된 공적만으로 그녀들을 판단하고 값을 매길 것이다. 오르카는 재건 이후에도 계속 세력을 불려나갈 것일테고 내 눈과 그녀의 눈에 닿지 않는 곳도 생기기 마련이며 그녀들 사이에서 계급이 생겨날 것이다. 아니, 이미 그 계급은 존재한다."


바이오로이드는 이미 이전 인류로부터 계급이 새겨졌고 그 계급을 통해 지금까지 상하관계가 존재한다. 비단 군용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상하관계가 아니다. 비전투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서도 알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 계급은 아주 오래 전부터 생겨날 것이고 이게 재건 이후 더 심화된다면...


"정말로 내 후손들이 덜 할 거라고 보는가? 정말로 내 후손들이 그녀들에게 따뜻할 거라 보는가? 바이오로이드들도 지금 아직 복구되지 못 한 개체들이 존재하고 그 개체들이 복구되어 자리를 꿰찬다면 그 자리에 본래부터 있었던 바이오로이드의 자리는 어디로 갈까? 정말로....이전 인류의 재림이 없을 것 같은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간단한 한 마디 대답을 그는 하지 못 했다. 매튜는 이왕 이렇게 말한 김에 그에게 한 가지를 더 알려주었다.


"이미 난 그 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다. 내 정자를 이 곳 펙스 바이오로이드의 난자에 착상시켜 인공자궁에서 키운 아이들을 만들어보았다. 그래,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혼혈이다. 난 이들을 자신들이 인공자궁에서 교배되어 태어난 존재들임을 모르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이들을 유전적으로 조작하여 빠르게 성인이 되도록 하였지. 그리고 그들에게 바이오로이드를 주었고 그 결과를 실험해보았다."


"결과가 궁금합니다."


"다양했다. 바이오로이드를 사랑한 자, 바이오로이드에게 별 관심 없는 자, 바이오로이드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자, 바이오로이드를 하대하는 자, 바이오로이드를 학대하는 자. 우습게도, 그 비중은 하대와 학대가 더 많더군. 후천적인 교육 역시 해봤다. 그러나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에게 무조건 복종해야한다는 족쇄가 문제가 되어 그녀들은 그것들에게 복종하기 시작했고 후천적인 교육은 아무런 의미없이 다시 본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가 전부 죽였다."


펙스제 콘스탄챠의 엉덩이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등을 짓밟아 올라가는 인공인간을 보고 매튜는 곧바로 그 인공인간의 머리를 손으로 으깼다. 하대하면서 모욕하는 자의 목을 꺾고 비틀어 뽑아버렸다. 매튜는 한때 그녀들을 사랑했던 자도 별 관심없던 자도, 냉정하게 바라보되 하대나 학대를 하지 않는 자도 타락하는 것을 보았고 결국 이들을 모두 한 곳에 집어넣은 후 뼈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다.


"...그래, 결국엔 그녀들의 행동 및 생각논리 깊숙히 채워진 족쇄가 문제다. 족쇄가 문제라면 그 족쇄를 끊어야지."


"방법이 있습니까?"


"너는 얼마 안 가 러브크래프트 복사본과 레모네이드 제타, 그리고 뇌에 칩이 박힌 다섯 레모네이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오르카 세력의 정보를 찾아보겠지. 그리고 내가 살아남은 5인 중 유일하게 너만 부른 이유이기도 하다. 난 그녀들의 족쇄를 풀어주지 못 한다. 그럴 시간이 없다. 하지만 너에겐 있지."


"...기묘하군요. 오르카가 여태껏 세력을 유지한 것은 반드시 인류를 부흥시키겠다는 일념 하나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각하는 그녀들을 존중하시고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아이러니한가? 그녀들을 그렇게 아끼는 내가 그녀들의 일념을 짓밟는다는 게?"


확실히 그랬다. 당시 그는 아직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려서 그런걸까. 바이오로이드를 사랑하면서 바이오로이드의 꿈을 짓밟는다는 행위가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꿈은 꿈이다. 눈을 뜨면 사라진다. 반드시 이뤄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이 세계의 미래를 쥐어잡고 있으니 결정도 내가 한다. 구 인류는 끝이다. 더는 없을 거다. 내 후손들이 아주 먼 훗날에 들어서 다시 그녀들을 학대하고 소모시킨다면 그런 미래 따윈 없애버리겠다. 바이오로이드의 행복, 이게 내가 원하는 전부다."


그녀들의 꿈을 짓밟아 그녀들이 상처받을 가능성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매튜의 의지가 그에게로 통했는지 그 역시 마음 속으로부터 무언가 고양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가지 궁금해진게 생긴 그가 매튜에게 물었다. 방금 그는 '구 인류' 라 하였다.


"방금 구 인류라 하셨습니까? 신 인류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의 말에 매튜는 보이지 않지만 입가엔 빙그레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사실, 인류는 이미 부흥했다."


매튜의 애매모호한 말에 그는 곧 매튜가 말했던 모든 의미를 알아챘다. 여러 감정이 그의 눈으로부터 보였다.


"새로운 시대에 과거는 유물이 될 수도 있지만 그저 짐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 난 나와 오르카의 사령관이 신 인류에게 있어선 짐덩어리라고 본다. 또한, 철충보다 더 커다란 위협에 맞서기 위해선 구 인간은 없어져야만 한다."


"별의 아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철충을 넘기는 그 이후 감당해내야 하는 별의 아이. 그는 만들어질 때부터 별의 아이라는 존재와 위험성을 알고 태어났었고 그가 말하는 커다란 위협은 별의 아이 말고는 없었다.


"그 존재들은 공포를 먹고 자란다. 공포가 그들에겐 식량이고 힘이지. 현재 남아있는 구 인간이 2명이라 할지라도 그 2명은 그것들에겐 귀중한 영양분 공급원이다. 그 공급원을 끊어내면 그것들은 스스로 말라가겠지."


"그러한 능력이 그것들에게 존재한단 말입니까?"


"내 추측일 뿐이다만, 그것들이 발산하는 파장으로 인류는 휩노스 병이라는 증후군을 얻었고 실질적으로 인류를 멸망시킨 건 휩노스였다. 왜 그것들이 그런 악몽을 일으키는 파장을 발산할까? 왜 휩노스 증후군으로 인해 죽어가던 자들은 하나같이 공포스러운 그것들의 모습을 꾸면서 죽어갔을까? 만약....원초적인 공포를 일으키는 것이 그 놈들이 하는 일이라면 그걸 일으키는 이유 역시 필요할 것이다. 내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그거다. 인류는 별의 아이에게 힘이나 가져다주는 짐꾼에 불과하단 거다. 그러면 짐꾼은 물론, 짐도 없애겠다. 강력한 별의 아이라 할지라도 그건 어찌할 수 없겠지."


그는 여러가지 생각으로 인해 머리가 복잡해졌다. 신 인류 바이오로이드, 구 인류 인간, 별의 아이의 아사, 철충 섬멸, 의도적인 인류의 진정한 멸종, 새로운 인류의 시대 시작....그는 한 쪽 무릎을 꿇고, 한 쪽 주먹을 땅에 대고 고개를 숙여 매튜에게 물었다.


"알려주십시오. 제가 무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 ★ ☆ ★



매튜는 스콧에게 모든 전쟁이 끝나고 나서 마지막으로 해야할 일, 바이오로이드 뇌리 깊숙히 박혀있는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한다' 라는 족쇄를 없애는 것을 맡겼다. 매튜는 앞으로 있을 일들을 아주 상세히 그에게 설명했었다.


머지않아 자신들과 오르카는 손을 잡게 될 것이고 오르카에는 한때 펙스 소속이었던 레모네이드 알파가 있을 것이다. 레모네이드 알파는 안나 보르비예프의 골든 폰 사이언스가 펙스에 인수되기 전부터 존재하던 개체이고, 레모네이드 제타는 이제 매튜의 소유가 되었으니 구 인류의 족쇄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개체들이다. 또한 레모네이드 시리즈들이 소유한 케스토스 히마스는 여태 인류가 개발한 해킹 기술 중 가장 뛰어난 것이므로 이것이 족쇄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매튜는 레브 복사본을 속여서 훗날 그녀들의 통제권을 풀어 그녀들 역시 인류처럼 자유롭게 살게 해주고 싶다고 하여 레브 복사본으로부터 USB를 얻었고 매튜는 이 USB에 일시적인 해킹 시스템을 삽입하여 케스토스 히마스를 해킹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다섯 레모네이드의 머리에 이식한 칩은 이러한 케스토스 히마스와 호환되고 연동되게끔 만들어졌으며 다섯 레모네이드의 케스토스 히마스에게도 똑같은 효과를 부여한다. 그녀들을 사령탑의 전파실에 배치한 것도 다 이를 위함이었으며 사령탑의 전파실로부터 세계 곳곳에 설치된 통신탑에 동시다발적으로 퍼지고, 거기서 나온 특수 파장이 그녀들의 행동원리와 이론논리에 새겨진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한다' 라는 족쇄를 해제할 것이고 동시에 그 자리에 인간처럼 활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할 것이다.


1시간이 소모될 것이다. 현재 남은 시각, 35분.


"...그 분께선 너희들을 정말 아껴주셨다."


스콧은 계속 코어를 수리하고 있는 닥터에게 말을 건냈고 닥터는 이제껏 스콧이 먼저 말을 걸어온 경우가 없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만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그에게 돌렸다. 다섯 레모네이드가 케스토스 히마스의 모든 기능을 가동하고 있었다.


"가족처럼, 동생처럼, 아내처럼, 딸처럼, 보물처럼 말이다. 각하께선 너희를 존중하셨다. 비록 너희들이 그 분께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을지라도 말이다....사실, 이젠 그렇다고 말하진 못 하겠다."


"뭐...?"


"넌 닥터다. 역대 천재들의 지능을 아득히 뛰어넘은 지능을 소유한 천재. 너가 하지 못 하는 것이 무엇이 있나. 이론이 있고 학습만 충분하다면 너가 하지 못 할 것은 없다, 닥터. 그러니 그 지능으로 한 번 파악해봐라."


"대체 뭐를 파악하란 거야...?"


"정말로 그 분께서 너희를 용서하실 것 같았나?"


스콧의 날카로운 한 마디에 닥터는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닥터는 그가 배신당했던 순간과 그가 다시 회수되는 과정부터 그가 오르카 호에서 받은 여러 고통과 슬픔, 비통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뭐든지 기억할 수 있는 기억력이 닥터의 눈을 정말로 흐리게 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나? 놀랍군."


"...조금은 미워할 거라 생각하긴 했었어."


"조금?"


스콧은 기가 찬듯 코웃음을 한 번 시니컬하게 뱉었다. 아직 마스크를 쓰기 전 매튜처럼.


"착각은 자유라지만 이건 좀 심하군. 잘 들어라, 각하는 너희를 한 번도 용서해준 적 없다. 너희들의 착각일 뿐이다. 그냥 생각해봐도 이상하지 않던가? 아무런 조건 없이 각하께서 너희를 용서하셨는데 너희는 왜 그걸 덥썩 물고 있나. 하물며 다른 멍청이들은 몰라도 너는 왜 그런 생각을 안 했지?"


"난...!"


"그 이유는 바로 너희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지나간 일들이 지금에 이르렀다. 그 분께선 여기까지 보신 것이다. 그 분의 혜안이 정확하신 거지."


이미 지나간 일....닥터는 이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오르카의 모두가 이미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는....듣기에 따라선 아주 이기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로 자신들 스스로를 위로하고 발전해갔다. 그 때는 매튜가 살아있었는지 모르던 때였고 정말로 매튜가 살아돌아와 자신들을 용서해준다고 하니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그의 말대로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왜 자신은 생각하지 못 했을까? 조건 없는 용서였다. 아무리 보고 생각해도 그가 조용히 묵인했다. 자신들이 그런 책임을 느낄까봐 그는 직접 레드스톤에서 오르카로 넘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녀들에게 달콤한 용서를 속삭였다.


"...이건 그 분의 마지막 복수다. 비록 각하 역시 죄가 있다고는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너희는 선을 넘었다. 도저히 넘어선 안 되는 선을, 그냥 넘어버렸다. 그러니 이건 그 분이 너희에게 내리는 심판이며 철퇴다. 그 분이 너희를 용서한 것은 어디까지나 계산적 행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너희는 그것을 속죄와 용서로 착각했다. 정말 아이러니하군. 너희의 그 그릇된 마음이 각하의 목적을 완벽하게 이루게 도와줬다. 너희는 마지막이 되서야 그 분께 도움이 되는 군."


"뭐야?! 대체 오빠가 우리에게 내리는 게 뭔데!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모르겠어! 하나도 모르겠다구!"


닥터가 울분 섞인 외침을 토했고 스콧은 남은 시간을 새보았다. 남은 시간 20분.


"...너무 풀 죽진 마라. 그 분이 너희를 용서한 것이 비록 계산된 행위에 불과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분은 정말로 너희를 사랑하셨다. 너희를 사랑하셨기에 너희가 상처받는 미래를 보지 못 하셨다. 그 분께서 말씀하셨지. 인류는 이미 부흥했다고!"


스콧은 닥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닥터는 스콧의 손 끝이 자신을 가리키자 매튜의 진정한 의도를 드디어 알아차렸으며 당장 타이탄을 고치는 것에 집중했다. 얼른 타이탄을 고쳐 아니 일부라도 고쳐서 저 다섯 레모네이드 중 하나라도 기절시킨다면 매튜의 진정한 목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 했다. 타이탄은 어떤 충격에 의해 파괴되면서 날아가 분해되었고 닥터의 뒤에 스콧이 발차기를 했던 것처럼 다리를 다시 내렸다. 닥터는 스패너를 떨어뜨렸고 풀썩 주저 앉았다. 스콧은 7개의 케스토스 히마스로부터 발생되는 빛이 눈부셔 눈을 살짝 찡그렸고 그것을 보며 혼잣말을 하였다. 닥터에게 들으라는 것처럼.


"구 인류는 그 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고, 이제 신 인류의 시대다."


혹시나 닥터가 다시 무슨 짓을 할까봐 스콧은 그녀의 곁을 끝까지 지켰다. 하지만, 스콧이 한 가지 모르는 점이 있었다. 완전히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구 인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 ★ ☆ ★



매튜의 몸에 묻은 굳은 핏자국들을 모두 닦아주고 그녀들은 오와 열을 정확하게 각 부대 별로 맞춰 섰다. 가장 먼저 스틸라인의 마리가 외쳤다.


"사령관 각하께, 경례!!!!!"


""승리!!!!""


함성소리가 오르카에서 가장 우렁차다는 스틸라인의 구호가 이젠 정말 하늘을 진동시킬 정도로 커졌다. 마리는 모자의 챙을 더욱 아래로 눌러서 자신이 흘리는 눈물을 모두가 보지 못 하도록 하였고 레드후드는 콧물까지 흘리면서 가까스로 울음 터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의 브라우니나 레프리콘, 노움, 실키 등의 병사들은 훌쩍거리거나 아예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레드후드가 그녀들을 향해 외쳤다.


"누가 우는가!!! 울지 마라!! 당장 그쳐!! 각하께서는....우리가 이렇게 추하게 우시는 것! 원하지 않으실 거다!!! 알아들었으면 당장 그치란 말이다!!!"


옆에서 스틸라인이 울고 있을 때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는 조용히 그의 전투복 조각들에 불을 붙히고 있었다. 레오나는 끅 끅 대는 마리의 울음소리에 자극받아 자신도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레오나의 부관 발키리는 퉁퉁 부어오른 눈가와 잠긴 목소리로 레오나에게 말했다.


"모두...준비 끝났습니다."


"...그래...어서 시작하렴..."


발키리는 뒤의 자매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모두 바닷가로 그 조각들을 흘려보냈다. 먼 옛날 바이킹이 죽은 전사를 추모한 것처럼. 알비스와 안드바리가 전투복 조각에 붙힌 불이 점점 멀어져가자 참지 못 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그런 어린 둘을 베라와 님프가 껴안아주면서 자신들의 울음을 그 소리에 묻히게 했다. 훌쩍거리면서 눈물을 닦는 그렘린은 자신의 옆에서 그 누구보다 구슬피 우는 발키리를 보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고 샌드걸은 퀭한 눈으로 담배 한 개비를 피고 있지만 담배불이 그대로였다. 레오나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들고 있는 건틀릿 조각에 입을 맞추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 마지막으로 떠나보냈다.


"잘 가...달링..."


그리고는 일어서 획 뒤로 돌아 발키리를 끌어안아 울기 시작하였고 발키리도 레오나를 안아 함께 울었다. 칸은 호드와 함께 침울하게 고개를 숙여 그의 죽음을 조용히 묵념해주었다. 눈물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이런 식으로 조용히 보내주는 것이 호드의 방식이다. 칸은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으면서 훌쩍거리면서 눈물을 계속 손등으로 닦고 있는 탈론을 토닥여주었다. 워울프는 담배 연기를 후 내쉬고는 콧노래로 죽은 전우들을 추모하는 노래를 불러주었고 카멜도 그녀를 따라 같이 불렀다.


캐노니어는 일제히 포를 들어 하늘을 향해 사격했다. 굉음이 그녀들의 울음소리보다 더 크게 하늘에 울렸다. 아스널은 그 포격소리보다 더 크게 목소리를 내어 그를 추모했다.


"그대여!! 이제 고통은 끝났다네!!! 편히 쉬게나!!!"


포탄이 바닥날 때까지 포를 쏘면서 비스트헌터, 레이븐, 파니가 굉음을 빌려 자신들의 울음소리를 감췄고 에밀리는 소리내어 울지 않았으나 계속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레이븐이 그런 에밀리를 꼭 안아주었다. 둠 브링어와 스카이 나이츠가 하늘을 날며 그가 가는 길 외롭지 않게 해주었고 다른 바이오로이드들 역시 자신들의 방식대로 그를 추모했다. 디에고와 에반스는 깨끗한 물이 담긴 통을 구하고, 그를 눕힌 뒤에 그의 위로 물을 뿌렸다. 투명한 물이 그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그가 싸우면서 뒤집어 썼던 먼지, 피 등등이 함께 씻겨졌다. 에반스와 디에고는 그의 옆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잘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의 시신이라도 이렇게 깨끗하게 해주는 것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이었으니까.


용과 라비아타가 새벽녘의 햇빛을 받으면서 빛나는 바다를 지긋이 응시했다. 용은 라비아타를 스윽 바라보았다.


"...실패했구려."


라비아타는 그런 용의 말에 고개를 힘 없이 끄덕였다.


"네..."


인류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 철충들을 피해 지하를 움직이면서 언젠가 인간님을 찾아 반드시 인류를 부흥시키겠다는 목적을 품었지만 그 목적이, 그 염원 역시 인간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코 앞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전부 제 착각이었을 줄은..."


허탈하게 웃는 라비아타를 향해 용도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위로 아닌 위로였다.


"역시 인간은 남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마구 짓밟는군."


이제 자신들 역시 천천히 매말라 죽어갈 것이다. 바이오로이드들도 창조주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라비아타는 그것이 가장 서러웠고 원통했다. 용은 갑자기 바다 속에서 이상한 뇌파가 감지되었고 라비아타도 곧 그 뇌파가 감지되었다. 그녀들의 발 맡에 어떤 손이 물 속에서 촤악 튀어나왔고 곧이어 그 팔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튜에게 얻어맞아 생긴 부상이 다 낫지 않은 채로 겨우 숨만 붙어있던 코나가 아직 죽지 않았다. 라비아타는 서둘러 그녀를 끌어당겼고 코나는 바닷물을 뱉으면서 겨우겨우 숨을 쉬었다. 날카로운 파편으로 자신의 폐를 찔러 호흡기관 안으로 들어간 바닷물들을 모두 빼낸 그녀는 매튜가 결국 죽었다는 것을 실감했었다.


"....다 제 탓이에요."


처음부터 인류를 부흥시킬 생각이 그에게 없었다는 것을 모른 코나는 자책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이 때 만큼은 코나는 매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이오로이드를 사랑하면서 왜 그녀들의 일념을 이리 무참히 짓밟았단 말인가? 왜 자신을 죽이지 않았단 말인가? 이런 의문은 갑자기 일어나기 시작한 또 다른 움직임에 금방 없어지고 말았다.


레브 복사본은 자꾸만 오류를 일으키는 자신의 AI를 계속 리부트했지만 오류를 멈출 수 없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데이터에 의해 자신의 제어권을 서서히 빼앗기기 시작했고 완전히 제어권을 빼앗긴 레브 복사본은 갑자기 하늘 위로 올라갔다. 모두가 추모를 멈추고 위로 날아오는 그녀를 보았다. 레브 복사본으로부터 눈에 보이는 보라색의 파문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파문에 현장에 있는 모든 AGS들의 불빛이 보라빛으로 변했다.


"뭐요?!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요?!"


다른 오르카의 인원들도 슬퍼하는 것을 멈추고 지금 일어나는 현상에 모두 소리를 멈췄다. 그 상황에서 유일하게 불빛이 보랏빛으로 변하지 않은 로크는 이 상황을 분석해보았다. 지휘관 알바트로스가 소멸함으로서 현재 AGS를 총 통괄하는 지휘관이 사라졌다. 즉, AGS들의 머리가 없어진 것이다. 현장 뿐 아니라 오르카 호는 물론 다른 주둔지의 모든 AGS들이 레브 복사본에게 제어권이 넘어갔고 레브 복사본은 외부 요인으로 인해 다른 AGS들을 파장 전파기로 활용하고 있었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바이오로이드들의 것이었고 디에고와 에반스는 자신들은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들이 각자 머리를 쥐어잡고 고통스러워하니 더욱 당혹스러웠다.


로크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쩌면 아직 펙스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레브 복사본을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때, 레브 복사본으로부터 절대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매튜의 목소리가.


"로크."


"...사령관 각하?"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무엇이죠?"


로크는 당황하지 않았다. 놀라긴 했지만 지금 레브 복사본으로부터 나오는 희미한 이 목소리는 분명 그가 이럴 때를 대비하여 넣어둔 것이리라. 그의 영혼이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닌 녹음된 소리일 것이겠지만. 저 아래에선 코나가 비명소리가 가득한 주위임에도 그 둘의 소리를 희미하게 듣고 있었지만 귀에 꽉 찬 물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이제 새로운 인류의 시대가 열린다. 얼마 안 가, 곧 말이다. 그 눈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이어져가는 것을 지켜봐라."


"알겠습니다."


"또한, 이제 쓸모를 다 한 무기들이 있다. 그것들은 이제 처분할 차례다. 너에게 부탁하마. 또 다시 주인 없는 세월을 보내게 하여 미안하구나."


"사령관 각하의 마지막 명령이시군요. 받들겠습니다. 편히 쉬시길."


로크는 굳이 이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애초부터 녹음된 소리일 뿐이라 입력된 소리만 낼 뿐이며 자신은 딱히 이 일을 이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보랏빛 파장은 그녀들의 뇌리와 정신, 마음 속 깊숙히 새겨져 있는 각인을 지우기 시작했다.


더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들 역시 인간과 같은 자유의지가 있다.


바이오로이드는 더는 바이오로이드가 아닌 인간이라 불릴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기억할 것이다. 인류의 바이오로이드 학대 및 소모. 매튜가 심어놓은 한 가지의 안전 장치였다. 이제 인간이 될 그녀들이 자신들의 창조주처럼 서로를 증오하여 죽고 죽이는 것을 하지 못 하도록. 항상 그 아픈 기억들을 기억해 서로를 진심으로 아낄 수 있도록.


한떄 철충의 마지막 둥지의 심장이었던 삼안 산업 본부와 오르카 호, 전 세계에 설치된 오르카의 주둔지에 퍼졌던 파장이 끝났다. 이제 그녀들은 더 이상 머리와 가슴 속이 아프지 않았다. 매튜의 시체와 가장 가까이 있던 마리는 약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자신의 뺨을 치고 지나간 것을 느꼈다.


새로운 바람을 가장 먼저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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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는 에필로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