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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란 물건은, 그러니까 일종의 약속이라 하겠다.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물건 자체의 가치 이상을 대표할 수 있게끔 합의한 물건. 그것이 실제 금이건, 종이조각이건, 조개껍데기건, 합의가 끝난 시점에서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합의가 되지 않은 시점에서 화폐란 쓰레기나 다름없다. 그것은 그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녀는 오랜만에 손님을 맞은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을 부른 것을 후회했다.

   

“몇 번을 말하는데, 이거론 못 바꿔드려요.”

“아, 치사하게 왜 그러심까. 요즘 세상이 바뀌어서 이거 하나면 할 수 있는게 무진장 많지 말임다?”

   

대충 30분 정도는 지나지 않았을까.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한지는 대충 15분 정도. 관자놀이가 딱딱 아파오는 감각에 여자는 몇 십년만에 단어 하나를 떠올렸다. 이거 개 진상이네. 기억을 되짚어보면 사건이 터지기 전에도 이런 사람은 제법 있었다. 동전 몇 개 정도 가격이 어때서 그러냐며 에누리를 요구하던 사람은 애교 수준이었고, 심하게는 어디서 용케도 비둘기나 참새를 산 채로 잡아와서 김밥과 바꿔달라는 손님도 본 적이 있었다. 쓸데없이 사람만 좋은 사장 대신 그런 진상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다 수십년 전의 이야기였다. 강산이 몇 번은 바뀔 시간이 지난 셈이다. 그녀에게는 예전만한 말재주도 없었고, 나름 사근사근했던 성격은 세월에 썩어 문드러진지 오래였다.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하필이면 참치캔이라니.

   

“이보세요, 참치캔은 여기도 널렸단 말이에요. 왜 이미 쌓여있는 물건을 새삼스레 또 교환해줘야 하는데요?”

   

아닌게아니라, 백 년간의 재고순환 과정에서 그녀의 편의점에 남은 것은 대부분 캔 통조림이었다. 유통기한이 긴 상품이 그 뿐인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상품은 그 유통기한을 발휘하기 위해 냉동고를 필요로하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다른 통조림이었다면 받아줬을지도 모른다. 편의점이란 모름지기 다양성이 중요한 법이니까. 그렇지만 참치캔은 절대 안 된다. 그녀는 여보란 듯 카운터 뒤에 쌓여있는 선물세트 상자들을 가리켰다. 참치, 참치, 참치. 대부분은 참치캔이었다.

   

“지금 업종을 편의점에서 참치마요 전문점으로 변경해도 될 판인데, 새삼스레 무슨 참치를 또 쌓으란 말이에요? 하다못해 다른 통조림 갖고 오던가, 이건 못 받아요.”

“아니, 지금 자기 부자라고 살림살이 자랑하는검까? 거 고집부리지 말고 담배 하나 파십쇼. 우리 아니면 또 누구한테 팔려고 그렇게 쌓아놓슴까?”

   

이 년이 내가 지금 빵 굽고 편의점 보는 여자라고 우습게 보이나. 명치에서 열기가 후끈 올라왔다. 지금은 재료도 오븐도 없고 마지막으로 디저트를 만든 것이 백 년 쯤 전의 이야기라는 것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대머리에게 헐값에 팔리기 전, 그러니까 한창 삼안 산업의 쇼케이스 바이오로이드로 활동하던 시절엔 이딴 양산형 총알받이 계집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을. 진상의 손이 슬금슬금 소총의 권총손잡이로 향하는 모습이 시야 한구석에 비쳤다. 결국엔 이 꼴인가. 치미는 짜증에 여자는 카운터 아래에서 또 담배를 꺼내물었다. 

   

“아, 됐고, 요즘 세상에서 담배 구하기가 쉬운 줄 아나? 내가 총 맞아 죽었음 죽었지 참치캔엔 담배 못 바꿔줘요. 내가 다 피워서 없앨 거야. 안 팔아.”

“아 거 말하는 꼴이 진짜……, 윽!”

   

이게 만화였으면 꽝, 하는 소리가 효과음으로 적혔을 것이다. 바깥에서 어정거리더니만 어느틈엔가 매장 안으로 들어온 빨간 머리의 여자였다. 자기 손도 아프다는 듯 진상 여자의 머리를 후려친 주먹을 흔들며, 빨간 머리는 매대에 지폐 몇 장을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여자는 지폐를 확인했다. 돈 냈으면 손님이고, 손님은 왕이다. 요즘같은 세상에선 좀 더 왕 해도 되겠다. 진상만 아니라면 말이다. 어디보자…….

   

“네, 거스름돈 500원 되시겠습니다. 현금영수증……, 은 안 하시겠고?”

“……예, 그냥 주십시오.”

   

그녀딴엔 나름 회심의 접대용 농담이었지만 반응은 그저 그랬다. 돈이 있었으면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했으면 됐을텐데, 괜한 시간 낭비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담배 사란 말을 하질 않았을 것을. 오랜만에 사람 목소리를 들어서 조금 들떴던 모양이다. 여자는 진열대에서 소보루 레드를 하나 꺼내 건네었다. 요즘 군바리 짬찌는 양담배도 피나? 이제는 그 부분까지는 관리를 하지 않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부디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부디 저 진상 계집이 자대에서 저 양담배로 말미암아 지독하게 혼쭐이 나기를. 두 군인은 어느새 주섬주섬 그녀가 갈무리해둔 짐을 챙겨들었다. 유류품 취급이라 다 회수해야 한다나. 여담으로, 군장 안에 전투식량 같은 건 없었다. 아쉽게도.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유류품 보관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삐이걱. 진작 떨어진 도어벨을 대신하여 낡은 문짝이 손님을 배웅했다. 여자는 한숨을 쉬고 간이 세면대 뒤편 거울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이놈의 민트색 머리가 문제인가?

   

*

   

“레프리콘 일배임, 저거 완전 미친년 아님까?”

   

갈색 머리가 담배 비닐을 벗기며 투덜거렸다. 비닐과 종이쪼가리가 아무렇게나 날아가는 모습에 레프리콘이 눈살을 찌푸렸다.

   

“13670번 브라우니, 그만하세요. 애초에 제가 구 화폐 챙기라고 미리 얘기했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므름드, 그느므 그 흐프느 쓰드드 으느드…….”

“브라우니, 담뱃불 붙이면서 말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요? 나중에 선임분들 앞에서도 그러려구요?”

   

레프리콘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가 빼도박도 못할 사고뭉치인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부대 외 인물에게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죄송함다. 아무튼, 그놈의 구 화폐는 쓸데도 없지 말임다? 그냥 종이 쪼가리 아님까. 차라리 참치캔 받으면 먹기라도 할 것을, 왜 거기 그래 집착하는검까?”

“그렇죠.”

“저희 입장에서도 말임다, 쓰지도 못할 종이쪼가리 좀 갖다주고 참치캔이나 담배 사면 완전 이득이지 말임다? 모처럼 마음 써주려니깐…….”

   

브라우니에게 불을 건네받은 레프리콘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다지 유쾌하진 않은 이야기다. 분명 대외활동 나가기 전에 교육받은 내용일텐데, 새삼스레 설명하려니 더욱 그랬다. 매뉴얼이란 그녀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걸까. 그래, 브라우니에게 뭘 바라겠어. 단순무식한 얘들 사람 노릇하게 도와주는게 내 일이지. 레프리콘은 한숨 대신 담배연기를 푹 뱉어냈다.

   

“……생존 바이오로이드 사이에선 흔한 일입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마찬가지에요. 인간 님이 정해놓은 방식을 멋대로 바꿀 자유따윈, 우리에게 없잖아요?”

“어, 이상함다. 저희 사령관님은 그럴 땐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셨잖씀까.”

“멸망 전의 바이오로이드는 그런 대우 못 받았어요.”

   

따지고 보면 우리 사령관님이 조금 특이한 경우고. 그녀가 덧붙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브라우니는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다. 사실 레프리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살면서 본 유일한 인간이 사령관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교육자료에서 본 과거의 이야기는 그냥 지식일 뿐이었다. 물론 사령관이 사라지면 당황하긴 할 거다. 어쩌면 유일한 희망이 사라졌다며 절망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미 사라진 인간의 명령을 죽을 때까지 지키는 것은 어떨까. 이치도 도리도 무시하고서, 날로 색이 바래만 가는 목소리에 계속 복종하려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사고방식을 가져야만 했을까. 멸망 후의 바이오로이드인 그녀는 앞으로도 자신이 그녀들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냥 새로운 명령을 받지 못해서 그런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죠.”

   

레프리콘은 찌그러진 하수구 구멍에 가래를 탁 뱉어냈다. 이상한 이야기다. 단순한 자료로만 접해도 과거의 이야기는 끔찍했건만.

   

“거기에 스스로 갇혀서 나오지 못하는 이들도 종종 있으니까.”

   

어째서 거기에 그리도 집착하는 것일까.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무언가가 그렇게 많았던 것일까. 슬픔 뿐인 과거 어딘가에 그리도 소중한 추억이 있단 말인가.

   

“일단 보고는 해야겠죠. 유휴 바이오로이드 아우로라 1개체 발견, 이라고.”

   

그녀는 부대에 복귀하면 잠시 상담을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 스스로가 궁금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리라. 무엇보다, 앞으로 그곳에 볼 일이 더 있을 것 같았다. 간판도 다 찌그러져가는, 취급품이라고는 통조림과 담배뿐인 그 편의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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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전 화에 브라우니를 레프리콘으로 적었더라. 수정해놨음.


근데 아직도 부대에 양담배 안 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