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철충에 맞서 오랜만의 대승을 거둔 기념으로 술판이 벌어졌다.


저항군 총사령관인 남자는 부하들이 권하는 술을 모두 받아 마셨다. 원래 술도 약하고 거의 마시지도 않는 그였지만, 모처럼 호기를 부린 것이었다.


"각하, 스틸라인을 대표해서 한잔 올리겠습니다."


"사령관 덕분에 우리 자매도 무사했어. 고마워, 사령관. 한잔 받아."


"괜찮다면 소장도 한잔 올리겠소."


"오랜만에 나도 한잔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각 부대의 대장들은 물론이거니와 정예 대원들까지 나서서 술을 권할 지경이었다. 그만큼 부하들은 남자가 이끌어준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는 전쟁에 능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노예였던 바이오로이드들을 인격체로 대우해 주는 드문 인간인 것이다(이제는 인간이 그 혼자뿐이라서 유일했다). 그러니 바이오로이드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날 완전히 만취한 남자는 경호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침소까지 돌아왔다. 그리고는 옷 갈아입을 틈도 없이 누워선 곧장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 * *



남자는 눈을 뜨자마자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시점이 평소보다 한참 낮아지고 몸의 근력도 줄어든 것 같았다. 얼른 들여다본 두 손은 아이처럼 작아져 있었다.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덜컥한 그는 두 뺨을 만졌다. 당황해서 얼른 거울을 찾으려는데, 방문이 열리고 장신의 위풍당당한 금발 미인이 들어왔다.


"아, 깨어나셨군요. 각하."


그녀는 남자의 측근이자 스틸라인 대장 마리였다.


신임하는 마리를 보고 남자가 얼른 말했다.


"마리! 큰일났어. 내 몸이……."


"아. 알아차리셨습니까."


"……어?"


마리가 빙긋이 웃었다.


"제가 각하를 소년의 몸으로 바꾸어드렸습니다."


"뭐라고?!"


남자는 귀를 의심했다.


"취하신 틈을 타서 직접 새로운 몸으로 만들어드린 겁니다."


그는 잠시 기가 막혔다. 마리가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특이한 성벽을 갖고 있음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선을 넘는 성격은 아니란 것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하늘같이 모시는 남자에겐 더욱.


"정말……이야? 농담하는 거 아니야?"


"저는 각하께 농담 같은 건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 당당함에 오히려 남자가 어처구니없을 지경이었다. 남자는 정색하고 마리를 질책했다.


"마리.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야."


"그야…… 제가 각하를 위해 오랫동안 봉사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 정도 요구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마리는 씩 웃으며 남자를 뒤에서 껴안았다. 남자가 당황해서 외쳤다.


"이거 놔. 명령이야! ……리리스, 페로! 구해줘!"


"어허. 앙탈 부리지 마십시오."


남자는 힘껏 버둥거렸지만, 어린아이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었다.


"포기하십시오. 그녀들도 제 요구에 협조했으니. 참, 하는 김에 누나라고 한번 불러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마리가 음흉한 얼굴로 남자를 침대에 눕혔다.


"……왜 이러는 거야. 마리, 너답지 않아. 대체 왜."


그러자 마리의 얼굴이 순간 정색을 띄었다.


"저다운 게 뭡니까?"


"……."


"언제나 제 욕구를 참고, 각하를 먼발치서만 바라보는 게 저다운 모습입니까?"


"그건……."


"저를 인형이나 노예가 아니라고 하신 건 각하가 아니십니까? 저도 한명의 여자로서 지금 각하를 독점하고 싶어서 이런 겁니다."


"!"


그가 흠칫하고 놀랐다. 마리의 손이 그의 파자마 단추를 풀려는 순간 그는 화들짝 눈이 다시 뜨였다.


얼른 정신을 차려 보니 마리는 온데간데 없고, 몸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래도 악몽을 꾼 모양이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는데, 함장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그의 전속 요리사인 소완이었다.


소완은 쟁반에 그릇을 담아 받치고 다가왔다.


"주인. 숙취가 심하신 것 같아서 특별히 내왔사옵니다."


"응, 고마……."


소완이 올린 그릇에는 주사기가 놓여 있었다.


그가 뭐라고 하려는 찰나,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그의 목에 주사바늘을 찔러 넣었다.


"어…… 소완? 이게 지금 뭐 하는……."


남자는 손쓸 틈도 없이 의식이 멍해져 갔다.


전에는 분명 약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인데. 예전에 소완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남자는 또 한번 약물에 당하고 말았다.


"소첩은 그동안 불철주야 주인의 배고픔과 미각을 담당해왔사옵니다. 허나, 주인께선 소첩을 언제나 경계해 

오셨지요. 그러니 이제는 소첩도 참지 않으려고 하옵니다."


말씨는 공손해도 눈빛은 먹이를 탐내는 짐승 같았다. 이것도 예전과 똑같았다.


그녀가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는데, 어째서.


약기운에 취한 남자는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까딱하지 못했다.


소완은 남자를 눕히고는 고운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섬섬옥수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손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두렵기만 했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이 없는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뭐 해? 구두를 핥는 포상에 몸 둘 바를 모르겠어?"


난데없이 소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장 레오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부하이자 마리의 후배 대장인 바이오로이드였다.


난데없이 나타난 레오나는 거만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깨닫고 보니, 어느새 그의 목에는 개목걸이에 목줄까지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레오나가 그 목줄을 쥔 채였다.


엎드려 있던 남자는 질린 표정으로 레오나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그 표정은. 포상이 마음에 안 들어?"


레오나는 목줄을 확 잡아당겼다. 사정없이 당기는 손속에 남자는 숨이 막혔다.


"컥. 레오나, 대, 대체 무엇을."


"뭐 하긴. 포상이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이러는 거야."


"왜냐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고 그녀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사령관, 왜 나만 바라보지 않는 거야? 나만큼 유능한 대장이 알바트로스 말고 또 누가 있다고."


남자는 침을 삼켰다. 올려다 본 레오나의 눈빛에는 섭섭함과 원망이 가득했다.


"뭣보다, 나만큼 사령관을 좋아해 주는 여자도 없어. 안 그래?"


"그, 그건……."


"아니면 혹시, 내가 '여자'가 아니라 바이오로이드라서 그런 거야? 노예 주제에 건방지게 굴어서?"


그 말에는 남자가 저도 모르게 맞받아쳤다.


"무슨 소리야.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이것은 꿈이다. 그러나 꿈도 이런 고약한 꿈이 없었다.


그가 화나서 외치자 레오나는 깔깔 웃더니, 이윽고 라비아타, 앨리스, 샬럿, 레모네이드 같이 그가 신임하는 여인들의 모습으로 이리저리 변했다.


"주인님. 저 싫어하시죠? 아무리 제가 충성하는 것처럼 보여도, 제가 다시 반역을 일으킬까봐 속으로 걱정하고 계시지 않나요?"


예전에 오해 때문에 그에게 칼을 들이댄 라비아타가, 다시 큰 칼을 목에 대고 비웃듯이 따진다. 그녀의 이글거리는 기세에 겁먹은 남자는 대답조차 못하고 침을 삼켰다.


그러자 라비아타는 냉소와 함께 비서 레모네이드 알파로 변했다.


"주인님. 주인님은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제가 다 처리할게요, 후후…… 이젠 주인님께서 거꾸로 제 노예가 되시는 겁니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도 맞장구 치듯이 말한다.


"그래요. 이제는 주인님이 저희들의 노예가 되실 차례라고요. 설마 이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셨나요?"


"사령관님은, 저희가 없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자아, 이제…… 누가 노예지요?"


계속, 계속 바이오로이드들이 나타나서 남자에게 막말이나 행동을 쏟아냈다.


주종관계의 역전, 매도와 고문과 역강간으로 쥐어짜이는 지옥은 기본이요, 질투심과 독점욕 때문에 바이오로이드끼리 서로 다투고 죽일 듯이 싸워대는 모습도 보았다.


이것은 단순한 꿈인가, 아니면 그녀들의 욕망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어느 순간부터 겁에 질려서 아예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남자는, 연신 쏟아지는 광경에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니들 뭐야, 대체…… 뭐냐고. 그만해, 그만!"


그가 머리를 움켜쥐고 외치자, 모두가 사라지고 경호실장 리리스가 나타났다. 그녀는 그의 최측근 중 한명이자 불멸의 연인이었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넌, 진짜 리리스야?"


"후후, 그럼요. 주인님의 착하고 예쁜 리리스랍니다."


리리스는 이상하리만치 태연해 보였다.


"리, 리리스. 날 좀 구해 줘. 애들이 이상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어. 모두들, 모두들 전부……."


남자는 다급히 리리스에게 다가가다가, 그만 넘어져 버렸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서 그녀의 다리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그만큼이나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러자 리리스는 웃으며 그를 일으켜 주더니, 이렇게 말했다.


"다들, 이럴까봐 불안하지?"


남자가 흠칫했다. 리리스의 목소리가 아닌, 어딘지 친숙한 남성의 목소리인 것이다.


"……뭐?"


눈을 깜박이는 찰나 리리스는 남자 자신의 모습으로 변했다.


남자는, 거울에 비친 것처럼 자기 자신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너, 넌?!"


"어때, 애들이 자유로워진 모습은."


"……."


또 하나의 그는 여유만만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 하던 그의 표정이 점차 굳어져 갔다. 어떤 곡절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눈앞의 존재가 이 일의 원흉임을 직감했다.


"너지? 이런 악몽을 꾸게 만든 게."


상대방이 웃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난, 너야. 난 그저 네 두려움을 보여준 것 뿐이라고."


"뭐……라고?"


"알잖아? 네 안에 있는 거 말야. 그녀들이 언젠가 네 통제를 벗어날지 모른다는 불안, 두려움 같은 거."


그는 남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불안하지? 애들이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언제 어디로 튈 지 몰라서."


"……."


"주인이 된다는 것, 노예를 부린다는 건 그런 거야."


"……난 불안하지 않아. 노예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흐음. 과연 그럴까? 지구의 마지막 노예주인 네가 노예주가 아니라니."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녀들을 노예로 생각한 적 없어. 그런 걸 원하지도 않고."


거듭된 부정에도 또 다른 남자는 물러서지 않고 다시 말했다.


"글쎄…… 네가 그녀들을 노예로 삼지 않았다고 믿는 건, 오히려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두렵다고?"


"혹시라도 노예가 거역할지도 몰라. 노예의 마음 속을 알지 못해서 불안해. 그녀들에게 의존해서 거꾸로 노예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넌 지배자의 책임과 스트레스를 피하고 싶으니까, 아예 그녀들을 너와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믿는 거야. 그렇지 않아?"


그는 어디까지나 빙글빙글 웃을 따름이었다.


"지배란 스트레스의 연속이거든. 주인과 노예의 관계란 항상 불안한 거야. 언제나 감시하고, 언제 바뀔 지 모르고,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사이인 거지."


그 자신이 그렇게 으스대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자기 자신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난, 그녀들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그녀들을 아끼고 좋아하기 때문에 잘해 주는 거야. 그 뿐이야."


그러자 또 하나의 자신이 피식했다.


"과연 그럴까.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게 아니고?"


"……넌 그럴지 몰라도, 난 아니야."


그런 고민은 이미 충분히 했다고. 남자는 속으로만 대답하고는, 놈에게서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말이 없자 인기척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네가 언제까지 그 위선을 가지고 갈 수 있나 지옥에서 보고 있겠어. 하하하.


남자는 놈이 이죽이는 소리를 한귀로 흘려 보냈다. 대신, 부디 이 꿈에서 깨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 * *



남자가 다시 퍼뜩 눈을 뜨자, 그녀들이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꿈일까봐 지레 겁먹고 눈만 깜빡거리고 있으려니, 리리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남자를 끔찍히 아끼는 리리스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의 말을 필두로 바이오로이드들이 제각기 걱정을 쏟아냈다.


"사령관. 괜찮소?"


"주인님…… 혹시라도 죽으신 건 아닐지 조금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했어요."


"각하. 괜찮으신 겁니까?"


모두의 걱정스런 눈빛이 느껴졌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서 두리번거렸다.


"저기. 이거, 꿈 아니지?"


"혹시, 무슨 악몽이라도 꾸셨나요? 안 그래도……."


리리스의 설명에 따르면, 남자는 과음하고 잠들었다가 꼬박 이틀을 깨어나지 못했단 것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꿈이었구나, 그 모든 게.


익숙한 곳,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남자는 그제야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악몽을 꾸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를 진찰하던 의사 닥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저께부터 FAN파가 강해졌었거든. 오빠가 악몽을 꿨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FAN파란, 해저 속 미지의 존재인 '별의 아이'가 주기적으로 내보내는 파장으로, 인간에게 악몽을 유발시키고 영원히 잠들게 만드는 파장이었다. 그 FAN파야말로 수십년 전에 인류를 멸망시킨 주범인 것이다.


바이오로이드는 FAN파에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남자는 뇌를 제외한 몸을 남성형 바이오로이드처럼 만든 고로, FAN파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이번처럼 가끔 악몽을 꾸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남자가 지구의 마지막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것도 오로지 그 덕분이었다.


"그냥, 오빠는 오늘도 좀 쉬면 될 거라고 생각해. 취해서 악몽을 더 심하게 꾼 걸 거야."


"으응."


"앞으로는 웬만해선 만취하지 말고. 경호하는 언니들한테 알코올 해독제 달라고 해."


닥터의 진단으로 남자는 그날 하루를 더 쉬게 되었다.


부하들 중에서도 남자를 특히 좋아하는 몇몇은 일도 제쳐두고 남자 곁에 머물렀다. 남자는 그녀들의 연인이자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에게는 이미 주인 이상의 존재인 것이었다.


역시 그가 보았던 일들은 한낱 악몽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들을 보며 다시금 안도하던 남자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저기, 있잖아."


"?"


"당분간, 다들 날 편하게 불러보지 않을래? 주인님이나 각하, 사령관이란 호칭 대신."


"편하게……요?"


그녀들은 잠시 서로 마주보더니, 무언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곧 정답게 그를 불러 주었다.


"네, 여보."


"서방님. 갑자기 무슨 일로……."


"그, 그럼…… 동생 각하. 뭐든지 말해 보십시오."


"부군……."


새삼스러운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모두들 평소 부르고 싶었던 대로 부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남자는 그녀들을 둘러보며 미소지었다. 역시, 꿈 속에서 들었던 헛소리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들은 그가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노예가 아니고, 아니게 될 것이며, 아니어야 했다.


그는 그녀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모두를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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