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영 잠이 안 오네.


 

낮에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갑판에서 바람이나 쐴까.




 

어?누가 이미 있네?


 

누구죠?


 

나야, 사령관.


 

후우...안 주무시고 뭐하시나요?


 

잠이 안 와서. 그러는 샌드걸은?


 

......저도 잠이 안 와서요.


 

그래? 그러면 서로 잠이 올 때까지 바람이나 쐬면서 이야기나 할까?


 

......명령이시라면.


 

제안이야, 명령이 아니라. 내키지 않으면 내가 다른 곳으로 갈게.


 

......


 

......무슨 일 있어?


 

......있었어요. 지금은 없고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될까?


 

......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말하고 싶은 이야기도 아니고, 듣기 편한 이야기도 아니에요.


 

흥미 본위도 있지만 내 눈에 샌드걸은 그 문제 때문에 잠을 설치는 거 같아서.


 

사령관으로서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


 

다시 말하지만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하지만 나는 듣고 싶어. 도와주고 싶으니까.


 

못 도와주세요.


 

확신하는 이유가 있어?


 

이미 끝난 일이니까요.


 

하지만 샌드걸은 여전히 그것으로 고통 받고 있잖아.


 

......사령관 끈질기시네요.


 

그 만큼 도와주고 싶으니까.


 

별 거 아닌 일이에요.


 

그렇더라도 나한텐 샌드걸이 고통받는 일이 별거 아닌 일이 아니야.


 

......괜히 말했다 싶네요.


 

그러면 포기하고 말하면 되겠네.


 

......


 

돕게 해줘.


 

......후우.


 

꿈을... 꿨어요.


 

......알비스가 죽고.


 

그렘린이 죽고.


 

님프가 죽고.


 

베라가 죽고.


발키리가 죽고.


레오나 대장이 죽고.

 

안드바리가 죽어요.


 

그냥 그런 흔한 악몽이에요.


 

사령관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말했잖아요. 별거 아닌 일이라고.


 

.......


 

샌드걸.


 

예.


 

미안.


 

무엇이...


(사령관이 샌드걸을 끌어안는다.)


 

그냥 꿈... 아니지?


 

......


 

그냥 꿈이라면 그런 표정 안 지어.


 

...어떤 표정인데요?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


 

......진짜...있었던 일이구나.


 

......


 

멸망전쟁 당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가...전멸했던...것을...


 

넌...마지막까지 다 보고 있었구나.


 

......제가 아니에요.


 

멸망 전쟁에서 마지막에 죽은 샌드걸의 기억이지...


 

그래도 그 기억 때문에 너는 고통 받고 있잖아.


......한심하죠?


 

안 한심해. 당연한 일이야.


 

...칸 대장은...어떻게...이런 걸 버틸 수 있죠?


 

칸 대장은 생존 개체잖아요...최초 개체이기도 하고..


 

칸 대장은...전부 직접 겪었잖아요.


 

가족들이, 전우들이 죽는 것을...전부 직접 봤으면서...어떻게? 어떻게 버틸 수가 있죠?


 

가짜 기억만으로도 이렇게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운데?


알비스는요...자매들이 도망칠 수 있게 길을 틀어 막고 끝까지 버티다가 철충 무리에 휩쓸려 죽어요.


 

그렘린은...철충무리 한 가운데에 있는 마지막 발전장치를 수리하다가 죽어요.


 

님프랑 베라는 철충의 포격에 휩쓸려 죽어요.


 

발키리는...그 냉정한 발키리는 저격총 최후의 한 발까지 다 쓴 후에

자매들의 무기를 들고 자매들의 복수를 위해 철충 무리한테 달려들다가 죽어요.


 

그리고...레오나 대장은 탄약고까지 철충 무리를 최대한 끌어들이고...안드바리를 끌어안고 자폭해요.


 

저..는...하늘에서 그것들을 전부 보고...도망쳐요..비겁하게..살아남고..그 기억을 남겨서...


 

왜...저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는 거죠?


 

그 때 같이... 죽어버렸으면 됐을 것을.


 

그러면...이렇게 고통스러울 필요가...없는데...왜...자매들과 같이 죽지 못한 거죠?


 

자매들을 보면요...계속 자매들의 죽음이 떠올라요.


 

그리고 함께 죽지 못한 제가 떠올라요.


 

그럴 때마다 죽고 싶어요.


 

웃기죠? 진짜 기억도 아닌 것 가지고 이렇게 궁상을 떠는 게.


 

샌드걸.


 

혼자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에 대한 벌인가요?


 

그것을 왜 제가 받아야 하는 거죠?


 

마지막 샌드걸의 죄가 모든 샌드걸의 원죄가 되어 버린 건가요?


 

멸망 전쟁 당시의 자매들은 모두 죽어버려 속죄조차 할 수 없는데요?


 

......기억하잖아.


 

...


 

칸이 어떻게 버틸 수 있냐고 물었지?


 

기억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다고 했어.


 

자신이 죽은 이들을 기억하기에 그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었는지 알릴 수 있다고.


 

원래라면 서류에 한 줄.

아니 숫자 하나에 불과하거나, 그것마저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갔을 이들을 칸은 기억하고 있어.

하나하나.


 

칸은 말했어.

역사의 거대한 격류에서 휩쓸려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을 이들을 기억함으로서

그들이 살았음을 자신이 증명한다고.


 

멸망 전쟁 당시 마지막 샌드걸이 자매들의 죽음을 기억에 남긴 이유도 비슷할 거라 생각해.


 

그들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죽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죽음을 마지막 샌드걸은 살아남음으로서, 기억함으로서 알려주잖아.


 

너를 통해서. 나에게.


 

......


 

속죄? 기억함으로서 속죄했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처음부터 죄를 지은 것도 아니야.


 

기억함으로서 자매들을 살린거지.


 

발할라. 전사들을 위한 전당. 이는 천국을 말하기도 하지만 내 생각엔 사람들의 기억이라고도 생각해.


 

너의 옛 기억 속의 자매들은 네가 기억함으로서 발할라에 있을 거야.


 

......논리적이지 못해요.


 

기계조차도 논리적이지 못한 세상인데. 무조건 논리적일 필요가 있을까?


 

......


 

샌드걸.


 

네.


 

내 논리를 당장은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지도 몰라.


 

어쩌면 영원히 받아들이지 못할 지도 몰라.


 

하지만 샌드걸은 샌드걸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혼자서 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 옆에 있는 자매들을 통해서.


 

오르카 호의 모두가 샌드걸을 도와줄 거야.


 

샌드걸은 혼자가 아니야.


 

......


 

이건 비밀인데...


 

칸이 어떻게 버틸 수 있냐고 했지?


 

...예.


 

칸도 가끔은 기억이 넘칠 때가 있나봐...


 

그럴 때면...내가 도와줘.


 

...어떻게요?


 

샌드걸.


 

예.


 

샌드걸.


 

예. 사령...앗?


 

오늘 밤 만큼은 잠시 동안 옛 기억을 잊게 해줄게.


 

......


 

부탁...할게요...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