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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설정 있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최소 몇백년은 유지되야만 할 동면이 해제됐다는 사실에 반신반의하며 동면 후유증으로 말이 아닌 몸을 간신히 동면 포드에서 일으킨 난 기지개를 쭉 펴며 몇십년일지, 몇백년일지 모르는 기나긴 세월 끝에 포드가 위치한 동면실에서 일어났다.


지하를 빽빽하게 체운 수백 수천개, 아니 수만개가 넘어갈지도 모르는 엄청난 양의 동면포드들, 휩노스와 그 존재들 그리고 철충을 막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길은 우리 스스로를 꿈 없는 기나긴 잠으로 밀어넣어서 우리의 도구들이 모든 것을 끝내는 그 순간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동면한다, 철충이던 별의 존재들이던 서로 치고박고 죽이며 우리가 만든 우리의 생각할 줄 아는 하인들이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일때까지.


팩스의 사장들은 고의적으로 레모네이드 개체들을 동면시키지 않고 유지해뒀다, 그들이 한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서 우리가 만들어낸 하인들이 인류의 적을 죽이고 자멸하던가 우리가 다시 돌아올 기반을 깔도록.


"메인 AI, 내가 동면에서 해제된 이유를 설명하도록. 그리고 제반사안까지."


대답은 들리지 않았고, 나는 동면에 들기 전 키득거리며 준비해놨던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한잔 따라서 마시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커피포트로 다가갔다.


바이오로이드들도 동면에서 깨어나지 않은데다 철충 감염을 피하기 위해 AGS 역시 모조리 동면시켜놓은 상황, 결국 웬만한 일은 내가 다 처리해야 했는데 그 메인 AI까지 먹통이라니. 미치고도 환장할만한 상황이었다.


"메인 AI?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뭣보다 지긋지긋한 그놈의 속삭임과 매 순간마다 다가오는 망상과 환각, 그리고 21세기 초반에 유행했고 VR에다 가상현실까지 수십번 이식된 데X스페X스 시리즈의 디멘시아 현상처럼 진득하게 인간을 괴롭히던 그 빌어먹을 휩노스의 증상이 사라졌다.


"접속 권한이 부족합니다, 타입 X-00B."


"관리자 권한으로 나에게 명령권을 하달하라."


사람의 얼굴을 형상화한 홀로그렘이 튀어나와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뭣보다 이 블랙리버의 기술력이 총망라된 바이오로이드의 몸체를 얻어서 갈아타기는 했다만 남성과 여성에서 나오는 차이뿐만 아니라 겨우 160cm정도뿐인 이 빌어먹을 짧디막한 몸은 모든 행동을 방해했다.


"모세가 팔을 바다로 뻗치자, 야훼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바람을 일으켜 바닷물을 뒤로 밀어붙여 바다를 말리셨다."


"1단계 인증이 확인됐습니다."


"바다가 갈라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걸어갔다."


"2단계 인증이 완료됐습니다, 최종 인증 과정이 남았습니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주었다."


"최종 인증 확인됐습니다, 기상을 환영합니다 XXX."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게, 그냥 이 모델의 이름으로 부르도록. 그 이름은 우리 인류가 다시 세상의 지배자가 됐을때 다시 부르도록 하자고."


"알겠습니다, 니드호그. 최고 관리자 권한을 위임합니다, 방주총관제AI 모세가 니드호그에게 인사드립니다."


"복잡한 과정은 다 뒤로 두고, 가장 중요한 내용부터 말하게. 날 깨운 이유가 단도직입적으로 뭔가? 그 전에 상황을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상황 설명은 기가 막히다면 기가 막히다고 해야할련지, 아니면 빌어먹을 정도로 생생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뭔 잘나신 영웅 나으리가 우리보다 먼저 동면에서 일어났는지, 아니면 우주개발을 진행하던 팀 쪽에서 영웅놀이가 하고 싶으셨는지 지구 궤도로 낙하해서는 바이오로이드 저항군을 이끌고 저항활동을 하고 있단다.


연결체 다수를 처리했고 심지어 사상자 전무라는 말도 안되는 기록을 세우고 있는데다 한 마리 잡는데 블랙리버의 높으신 분들이 몰래 삥땅쳤던 메이 모델 수 기를 소모했던 별의 아이까지, 아무리 그 별의 아이가 유성체에다가 '네스트'와 교전을 치른 상황에서 기습으로 처리했다고 해도 이 일 자체가 말이 안됐다.


여기에다가 팩스와 전면적인 적대를 하고 있고, 철의 교황이라던가 뭐시기라던가 하는 또라이랑도 싸우며 완전히 3파전을 하고 있다는 말, 아니 별의 아이들 앞에서는 다 공평하게 한방이니 포식자 둘을 상대로 먹잇감 둘이 먼저 잡아먹히지 않겠다며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란 참.


하늘빛 치렁치렁한 푸른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긴 나는 그 보고를 들으며 샤워를 끝내고 여성의 몸이라는 사실에 조금 신기해하면서도 티아멧 모델을 위해 준비된 옷을 차려입을까, 아니면 과거의 나처럼 평소에 입던 연구복을 입을까 고민하다 연구복을 선택했다.


어차피 저 복장은 전투가 있으면 차려입으면 되겠지, 어께에 새겨진 바코드를 조금 글쩍인 나는 니드호그 모델의 체형에 맞춰진 옷을 차려입었다, 남자의 자존심으로 치마는 당연히 거절했고.


"명령 내리실 내용 있습니까?"


"일단 관망한다, AGS들과 일부 바이오로이드들을 깨우도록, 그리고 세레니다를 가동할 준비를 하게."


하필이면 저런 또라이가 저항군을 이끈다니, 바이오로이드는 도구였다. 스마트폰과 차와 같은 도구, 인간에게 활용당하고자 만들어진 그녀들은 사람인가? 사람이 아닌가? 이 주제는 수없는 토론이 이루어졌지만 난 바이오로이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도구의 연장선이라는 쪽이었다. 생각하고 감정이 있는 도구, 그저 AI와도 비슷한 존재들.


"그가 수복을 앞당긴다 하더라도 인류에게 반한다면 덜어내야만 하겠지, 지구는 인간의 것이니까."


그렇다면 인류의 적을 쓰러트리는 처형인을 꺼내들 시간이었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과 동일한 지성을 가졌더라도 바이오로이드는 바이오로이드이며,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가진 생명체지만 결국 인외의 존재이므로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기어오르려는 존재들은 모두 다 사라져야만 했다, 그런 사상에 물든 존재들까지도. 그녀들은 인간의 충실한 도구이면 충분했으니까.


팩스 사장과 델타에게는 유용 가능한 전력이 즉시 증발해버리는 꼴이니 미안하게 됐지만 결국 그녀들을 꺼내게 되는군.


지직저리는 화상이 머리를 가다듬는 유리창 앞에서 열렸다.


[여기는 세리디나 명령을.]


"아, 넬슨인가. 명령을 하달한다 수평선을 무너트려라.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말살하라."


"알겠다 즈베즈다, 의무를 다하겠네. 본관의 부하들도 의무를 다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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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있던 세리디나 전대의 백스토리 같은 느낌? 대충 주인공은 구인류급의 인성파탄은 아니지만 바이오로이드는 도구라고 주장하는 사람. 오히려 어떤 의미로는 기원전부터 내려온 인류 문명의 마지막 투사고.


더 써본다면 오히려 사령관+저항군을 적대하는 제3자 느낌에서 이벤트의 기록들을 지켜보는 느낌으로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