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링크는 여기. - https://arca.live/b/lastorigin/33838913


일상물이고 많이 잔잔한 이야기라 읽다보면 졸릴지도 모름. 



한참 시간이 지나 겨울이 되고 오르카에서는 사령관의 바이오로이드들을 위한 깜짝파티를 만들어주겠다는 계획과 그 계획을 역이용해서 사령관을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는 바이오로이드들의 계획이 맞물려 행복이 가득한 축제의 날들이 지나갔다. 슬슬 축제 분위기도 사그라들 무렵. 비번인 포티아는 즐거운 발걸음으로 수복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다프네 씨."

"어머, 포티아 양. 어서오세요~"


포티아가 부상을 입고 수복실에서 치료를 받았던 날 이후로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져갔다. 착하지만 소심한데다가 남을 대하는 것에 부담감을 크게 느끼는 포티아와 상냥하고 남 돌보기를 좋아하지만 타인을 대할 때 늘 조심스러워하는 다프네는 은근히 궁합이 잘 맞았고, 둘은 어느 새 마음을 어느 정도 터놓고 가슴 속에 숨겨둔 이야기를 조금씩이나마 나눌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이번에도 자신을 바꾸고 싶어하는 포티아의 이야기를 듣던 다프네가 도와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보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끝에 포티아는 알렉산드라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했고, 다들 알다시피 알렉산드라의 비범한 수업을 통해 기회와 자신감을 얻은 포티아는 사령관과 잠자리까지 가지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사령관과의 좋은 일을 겪은 포티아를 다프네는 진심으로 축하해주었고, 그 후로도 포티아는 쉴 때마다 종종 간식거리를 조금씩 들고 수복실에 놀러오게 되었다. 다프네 역시 최근에는 중상을 입고 입원하는 환자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기쁜 마음으로 포티아를 맞이하여 오늘도 둘만의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후후훗. 그러고보면 포티아 양도 꽤 많이 바뀌셨구나...'

"우응? 다프네 씨? 제 입가에 뭐 묻었나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후훗. 아니에요. 포티아 양이 오늘 가져오신 스콘 너무 맛있네요. 정말 대단해요."

"헤헤헤. 감사해요. 요새는 간단한 디저트용 과자들도 배우고 있는데 너무 재미있어요."


전에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할 때 눈을 마주치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던 포티아. 항상 시선을 땅으로 향한 채 말을 조금씩 더듬으며 말하던 그녀였지만, 알렉산드라의 교육과 사령관에게 받은 애정은 그녀의 자신감을 대폭 증가시켰다. 이제는 다프네와 눈이 마주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생긋 웃을 정도의 여유를 보이는 그녀를 보며 다프네는 마치 귀여운 동생이 훌륭하게 성장한 모습을 보는 기분이 들어서 무척 기뻤다. 열심히 노력해서 스스로의 콤플렉스를 해소한 포티아를 꼬옥 끌어안고 잔뜩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 주제넘은 일인 것 같아서 그저 따뜻한 미소만을 보이는 다프네. 그런 다프네의 미소를 바라보던 포티아도 처음에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곧이어 해맑은 미소를 돌려주며 수복실 안에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중상자 발생.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수복실 문이 열리며 스팅어가 부상입은 이그니스를 후송한 채 나타나자 다프네는 눈 앞의 포티아를 잠시 잊어버리고 날듯이 이그니스에게로 향했다. 자리를 잡고는 서둘러서, 하지만 침착함은 잊지 않은 채 이그니스의 상세를 파악하기 시작하던 다프네는 다행히도 최악의 사태는 면한 상태라는 것을 금세 알아낼 수 있었다. 배가 탄알에 의해 관통당하며 내장에 손상이 있었지만 상처에 비하면 출혈량도 적고 이그니스의 숨소리도 작지만 안정적이었다. 아마도 부상 직후 마취제 투입과 지혈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 같았다. 이 정도라면 빠른 시간 안에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다프네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스팅어 씨, 마취제를 투약한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일단은 복부에 총격으로 인한 관통상이 보이는데, 혹시 다른 부위에도 부상이 있나요?"

"부정합니다. 이동 중 확인 결과 복부 외 부상 이력 없음."

"다행이네요. 그러면 이그니스 양을 수복기로 옮기는 것을 도와주시겠어요?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 같지만 치료는 빠를 수록 좋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이송 작전 재개."


전투원보다는 주방인원으로 활동한 기간이 훨씬 길었던 포티아는 피범벅이 된 이그니스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멍해져버렸다. 그런 그녀가 잠시 후 일종의 쇼크 상태에서 회복했을 무렵, 그녀의 눈에 평소보다도 깊게 가라앉은 푸른 눈으로 부상자를 훑어보며 스팅어에게 부탁하는 다프네가 들어왔다. 주의 깊게 이그니스를 훑어보다가 이 정도면 큰 문제는 아니라는 듯 생긋 미소짓는 다프네와 그녀를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짓는 포티아. 포티아가 눈을 돌리자 다프네는 스팅어와 함께 수복기로 향해 이그니스의 몸을 조심스럽게 수복기에 옮기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전투복을 제거해 알몸이 된 이그니스를 원통형 수복기에 넣자 바이탈 체크가 진행되는 동시에 치료용액이 그녀의 몸을 감쌌고, 다프네는 수복기에 표기되는 이그니스의 바이탈 상황을 보면서 재확인을 시작했다. 기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정상일 때 이그니스의 바이탈과 현 상태의 바이탈, 그리고 이그니스의 부상 상태를 감안해서 추가적인 문제나 놓치고 있는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은 다프네의 전문영역. 수복기를 진지하게 바라보던 다프네가 잠시 후 가볍게 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스팅어의 시야에 비치는 그녀의 얼굴에 맺힌 미소는 이그니스의 수복이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마 24시간 정도면 외상은 모두 나을 것 같아요. 추가로 안정하면서 회복하는 기간이 필요하겠지만요. 그런데 이그니스 양의 부상은 어쩌다가...?"

"본기와 작전 중 적의 기습 발생. 이그니스 개체의 보호로 본기의 피격 방지. 해당 과정 중 이그니스 개체의 부상 발생."

"아...스팅어 씨는 괜찮으신가요? 포츈 언니에게 연락을 해두는 편이 좋을까요?"

"본기의 피격률 제로. 이그니스 개체에게 감사 의도 전달을 소망합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이그니스 양이 깨어나시면 꼭 전해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다프네 개체, 감사합니다."

"후훗. 이것도 제 일이니까 너무 마음쓰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수복기에서 잠든 채 상처를 치료받고 있는 이그니스를 배경으로 천천히 이야기하는 다프네와 스팅어. 스팅어가 감사를 표하고 수복실을 나가는 걸 배웅하고서야 자신이 포티아를 내버려두고 환자에게만 매달렸다는 것을 깨달은 다프네는 미안함을 느끼며 포티아에게 말을 걸었다.


"아...포티아 양. 죄송해요. 환자가 생겨서 순간적으로 거기에 집중하는 바람에..."

"아니에요. 다프네 씨. 굉장히 멋있었어요."

"네에...? 아이...부끄러워요..."


자신이 신경쓰지 못했던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약간 존경의 눈빛마저 담아 멋지다는 말을 해주는 포티아. 그녀의 맑은 눈을 본 다프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잠시 부끄러움에 몸을 꼬던 다프네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다른 이야기를 꺼냈고, 포티아도 그런 다프네의 의도를 이해했는지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다프네 양은 내가 다쳐서 수복실에 왔을 때에도 저렇게 치료해줬겠네...그러고보니 나...치료해줘서 감사하다는 표시도 제대로 못 했던 것 같은데...'

"어머...? 포티아 양? 뭔가 물어보고 싶으신 게 있으신가요? 고민하시는 것 같은 표정이라..."

"아...그...이그니스 양이 24시간 뒤에 치료되는 거면 지금부터 24시간은 신경 안 쓰셔도 되는 거죠?"

"아아...메뉴얼 상으로는 그렇기는 한데...메뉴얼은 멸망 전에 만들어진 거고...아무래도 조금 걱정될 때가 있어서요, 보통은 6시간에 한 번씩 바이탈 체크를 한답니다."

"와아...밤에도요? 너무 힘드신 거 아니에요?"

"별로 힘든 일이 아니라 괜찮아요. 시간별로 치료가 잘 되고 있는지, 치료 부위 외에 다른 부분에서 이상징후가 관찰되지는 않는지만 확인하면 되거든요. 아직까지 오르카에서 그런 적은 없지만 중간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닥터 양과 함께 검토해서 어떻게 치료할지 정하기로 돼 있어요."


한창 대화가 오가던 와중, 불현듯이 자기가 다프네에게 지난 번의 일을 제대로 감사했던가 하는데까지 생각이 닿은 포티아.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아무래도 나중에 한 번쯤 다프네에게 제대로 감사를 표현하는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포티아의 의중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평소에 이야기하듯이 포티아의 궁금증을 해소해줬다고 믿은 다프네는 생긋 미소지었고 포티아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잠시 더 화기애애하게 대화가 이어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포티아는 다프네에게 인사를 하고 수복실을 떠났다.


'으음...그러면...이그니스 양이 완쾌되려면 3일 정도는 필요할테니까...그 동안 수복실에서 잘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다.'


다프네는 평소처럼 입원 환자가 있는 동안 밤에도 환자를 챙기기 위해 수복실에서 3일간 묵기 위한 준비를 마쳤고, 늘 그렇듯이 수복기는 밤에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작동하며 이그니스의 외상은 순조롭게 치료되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수복기에 표기된 24시간이 지나고 기기에 표기되는 바이탈 기준으로도 이그니스가 완벽하게 치료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를 보고 수복기 내의 치료용액을 빼낸 뒤 이그니스의 옷을 환자복으로 갈아입히고 수복실의 침대에 눕히는 다프네. 이제 마취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할테니 아마 30분에서 1시간 사이에 이그니스가 정신을 차리리라. 그리고 현재 시각은 오후 2시. 통상적으로 치료가 끝난 대원들이 첫 식사를 할 수 있을만큼 회복되는데는 4~6시간 정도가 걸리니 오후 8시까지는 간단한 죽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다프네는 수복실의 전화기를 들었다.


"어머? 다프네 씨? 주방의 포티아에요. 어떤 일로 연락하셨나요?"

"아, 포티아 양. 수복실의 다프네에요. 어제 입원하신 이그니스 양의 환자식 준비 때문에 오후 7시 정도에 주방 설비를 잠시 빌릴 수 있을까요?"

"이그니스 씨가 벌써 깨어나셨나요? 그러면 오늘 저녁의 환자식은 제가 준비할게요."

"아..아니에요. 그냥 장소만 빌려주시면 제가 가서 만들게요."

"헤헤헤...이것도 전부 요리 연습의 일환이니까요. 7시 쯤에 다프네 씨가 오셔서 환자식 만드는데 주의할 점만 알려주시면 돼요. 어머, 소완 주방장님이 부르시네요. 그럼 이따 봬요."

"포...포티아 양?"


오후 2시라고는 해도 주방에서는 아직 설거지 등의 잔일이 남아있어 길게 통화하지 못하고 먼저 끊어버린 포티아. 다프네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섞인 얼굴로 조용히 혼잣말했다.


"감사한 일이지만...너무 폐가 되는 거 아니려나...?"


하지만 이미 통화는 끝나버렸고 계속 멍하게 있을 수는 없는 상황. 다프네는 깨어날 이그니스를 위해 간단한 문진표와 이그니스의 바이탈 체크 결과를 다시 확인한 뒤, 이그니스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그녀의 상태를 바라보았다. 다프네가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떨림과 함께 이그니스의 눈꺼풀이 들어올려졌고, 이그니스는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여기는......?"

"이그니스 양. 깨어나셨군요. 부상을 당하셔서 수복실로 오셨어요. 기분은 괜찮으신가요?"

"아...다프네 씨..."


아직 잠에서 막 깬 듯이 멍한 표정을 짓는 이그니스를 차분하게 안심시키고는 그녀의 부상과 현재 상태에 대해서 천천히 설명해주는 다프네. 이그니스는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침대에 누워서 다프네의 말을 들었고, 정신은 금방 멀쩡해졌는지 무리없이 다프네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문진을 겸해서 이그니스에게 통증을 느끼는 부위는 없는지, 다른 불편사항은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지나갔다.


"후훗. 상처는 모두 나았지만, 마취가 완전히 풀리고 몸이 정상 컨디션이 될 때까지는 앞으로 하루 정도는 더 걸릴테니까 불편한 게 있으시면 부담 갖지 마시고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아시겠죠?"

"네...감사합니다. 다프네 씨."

"아, 맞아. 그러고보니 스팅어 씨가 이그니스 양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이그니스 양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고요."

"그냥...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고작 그런 걸로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하실 것 까지는 없는데..."

"저도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뿐인걸요. 하지만 이그니스 양은 방금 전에 저에게 감사하다고 하셨었죠?"

"후후훗...듣고 보니 그렇군요. 스팅어 씨의 인사...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중상을 입고 실려온 환자들은 쉘 쇼크가 됐든 PTSD가 됐든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는 경우가 많다. 바이오로이드는 이에 대한 저항력이 인간에 비해 높게 만들어지지만 혼자서 자신이 부상을 입은 경과를 곱씹다보면 어느 순간 공포심이나 불안감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다프네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환자들을 위해서 다프네가 선택한 것은 가볍게나마 말을 나눌 수 있는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 평소의 자신보다 텐션을 조금 더 끌어올려서 대화를 나누며 상대방의 긴장을 풀어주는 동시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시켜서 불안감을 덜어주는 것이 그녀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원래부터 남의 말을 듣는 것은 잘해도 이것저것 말하는 것에 능숙하지는 않은 다프네답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주제를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혼자서 말할 만한 화제가 떨어져서 살짝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본 이그니스는 다프네가 마음쓰는 것을 눈치채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힘내서 대화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아...그러고보니...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아, 네! 얼마든지 물어봐주세요."


다프네의 마음을 읽은 이그니스의 질문에 할 이야기를 떠올리느라 고민하던 다프네는 기쁜 표정으로 화답했다. 그런 다프네가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이그니스는 입을 열었다.


"이후의 일정 쪽을...좀 더 자세하게 여쭤보고 싶어요. 먼저...퇴원까지는 얼마 정도 걸릴까요...?"

"음...아마 퇴원은 이그니스 양의 회복 상태에 따라 달라지겠지만...빠르면 내일 낮 정도, 늦으면 모레 저녁 정도로 예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주인님의 명령으로 이그니스 양에게 1주일 휴가가 주어진 건 말씀드렸죠?"

"아아...그렇군요. 약 같은 건 따로 먹을 필요 없을까요?"

"네. 약은 안 드셔도 돼요. 아, 그리고 식사는 아마 오늘 저녁쯤부터 드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방1귀가 나오시면 저에게 꼭 말씀해주세요. 방1귀가 안 나오면 내장이 덜 회복된 거라서 식사하시면 안 되거든요."

"아...으음...네에...알겠어요."


그렇게 다프네의 마음에 화답하던 이그니스는 갑작스러운 복병을 만나 얼굴이 발그레하게 변한 채 조용해져 버렸다. 다프네나 포티아도 한 부끄러움 하지만 이그니스 역시 수줍음 많은 인원들 중 하나. 여자들끼리라고는 해도 방1귀라는 단어를 듣자 자기도 모르게 부끄러워져 말을 멈춘 것이다. 다프네 역시 이를 눈치채고는 말을 좀 돌려서 했어야 했나...하면서 고민했지만 그녀는 의료 담당 인원. 이그니스의 반응을 보며 자신이 여성스럽지 못한 발언을 해버렸나 싶어서 얼굴을 붉힐지언정 환자의 오해를 막기 위해 명확한 표현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어...음...조금...덥네요..."

"아하하...어...샤워 시설도 수복실에 있는데 씻으시겠어요? 몸에 힘이 안 들어오셔도 제가 부축해드리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그렇게까지 부탁드리기는 죄송해서..."

"괜찮아요. 이그니스 양은 지금 환자시니까, 제게 원하는 걸 마음껏 말씀해주셔도 괜찮답니다."


뻘줌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진 이그니스였지만 다프네는 그녀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보고는 진지하게 답했다. 솔직히 좀 미안하기는 했지만 원래 이그니스는 땀이 많이 나는 만큼 샤워를 즐긴다. 마음 한 구석에서 부탁하고 싶은 욕구와 미안한 마음이 줄다리기를 하다가 다프네의 사근사근한 말과 함께 승패가 갈렸다.


"그...그러면...부탁드릴게요...아직 다리에 힘이 없어서..."

"네. 걱정 마세요. 저도 바이오로이드니까 여성 한 분 정도를 드는 일은 쉽답니다~"


이그니스의 욕망을 따른 결정은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불러왔다. 다프네에게 샤워하는 것까지 도움받고는 개운해진 채 침대로 돌아온 이그니스는 어느 새 다시 자연스럽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에 빠져서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고 있을 무렵. 이그니스의 표정이 살짝 무너졌다.


"후후훗. 그래서 지난번에는...앗..."

"이그니스 양? 아..."


다프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그니스의 내장이 꿈틀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그니스에게 어떤 충동을 선사했다. 그 충동에 의해 살짝 무너졌다가 발그레하게 달아오르는 이그니스의 표정. 눈치빠른 다프네는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쉽게 알아차리고는 최선의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그니스 양. 저...잠시 화장실에 다녀와도 될까요?"

"아...그...다녀오세요..."


애초에 이미 부자연스러운 상황이지만 가능한 자연스럽게 이그니스가 혼자 있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다프네. 화장실로 향해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다프네를 맞이하는 이그니스는 여전히 발간 얼굴이지만 표정 한 편에서는 후련함이 느껴졌다.


"시간이 벌써 7시네요. 저녁 준비를 할까 하는데...식사해도 괜찮으시겠어요?"

"아...네...말씀하신대로...회복은 끝난 것 같아요..."

"후후훗. 다행이에요. 그러면 잠시 식사를 준비해 올게요. 혹시 화장실 가시고 싶으시면 지금 함께 가시겠어요?"

"아...아니에요.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아...그리고......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

"후훗. 이게 제 일인걸요. 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이그니스에게 인사를 마치고 주방으로 향한 다프네는 조심스레 식당에 있는 인원들을 체크했고, 대부분 식사를 마친 상태라 주방에 여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주방으로 연결되는 문을 열었다.


"아...저...안녕하세요..."

"다프네 씨 오셨어요? 마침 여유가 생긴 참인데 잘 됐네요~"

"포티아 양, 안녕하세요. 소완 주방장님은...?"

"주방장님은 오늘 주인님이 저녁식사를 따로 하셔서 그 쪽에 가셨어요. 아마 1~2 시간 정도는 안 오실 거에요."

"아아...그렇군요."

"어제 이그니스 씨가 치료받으셨으니까...오늘 메뉴는 죽으로 하면 되나요?"

"아...네. 하지만 포티아 양도 피곤하실텐데 제가 하는 편이..."

"괜찮아요! 요리하는게 너무 즐거워서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거든요. 후후후~"


다프네의 말에도 밝은 미소를 돌려주며 가볍게 조리기구들을 챙기기 시작하는 포티아. 주방에서의 그녀는 바깥에서의 그녀보다도 훨씬 더 생기넘치고 자신감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포티아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쉰 다프네가 조용히 그녀의 옆으로 향했다.


"음~ 환자식으로 주의해야 할 게 있을까요? 저염식으로 만들어야 한다든가...?"

"아...바이오로이드는 소화능력도 인간님들보다 뛰어나고 영양을 과다 섭취해도 문제가 없는 편이라서...사실 환자식으로 염분을 제어할 필요는 없어요. 매운 것처럼 내장에 자극을 강하게 주는 게 아니라면 다소의 양념은 괜찮아요."

"어~ 그러면 죽처럼 부드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면 아무거나 괜찮은건가요?"

"네. 아직은 위장이 완벽하게 기능하지 않을테니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이면 돼요. 소금이나 설탕, MSG같은 조미료가 조금 들어가는 정도는 상관없답니다."

"으음~ 그러면...아, 다프네 씨는 저녁 드셨어요?"

"어...아뇨...저도 아직 안 먹기는 했는데...여기서 남은 걸 간단하게 먹고 가도 괜찮..."

"그러면 다프네 씨와 이그니스 씨, 저 셋이서 같이 나눠먹을 수 있는 걸로 만들게요~ 저도 금방 마무리하고 병문안 겸 같이 가보고 싶거든요. 헤헤헤~"


다프네는 포티아가 재료를 챙기는 것을 보면서 어떤 음식을 만드는지 짐작해보려 했지만, 원래부터 기본적인 솜씨는 괜찮은 수준이라도 음식에 대한 지식이 넓지 않은 그녀다. 그녀의 견문으로는 완성품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운 재료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찹쌀가루는 죽으로 만들면 소화에 정말 좋은 재료이니 이해가 가지만...죽을 만드는데 우유는 왜...? 라는 느낌으로 바라보던 다프네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포티아가 방긋 웃으며 그녀의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타락죽이에요. 환자에게도 좋은 음식이고, 소금이랑 설탕을 따로따로 넣어서 먹어보면 맛도 질리지 않을거에요."

"타락...죽이요...? 처음 듣는 음식이에요. 굉장히...이름이 신기하네요."

"후후후~ 생각하시는 단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음식이에요. 음~ 그 이야기는 너무 길어지니까 일단 만드는데 집중할게요~"


다프네가 의아함을 담아 포티아를 바라보자 포티아는 이름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일단은 타락죽 만들기에 집중했다. 섬세하게 불을 조절하며 찹쌀가루가 전부 노릇노릇하게 익어갈 수 있도록 볶아가는 포티아. 그녀의 장기인 불조절이 빛을 발하며 고소한 향기가 점점 퍼져나갔다. 찹쌀가루가 완전히 볶아졌다 싶자 물을 넣어서 찹쌀가루를 풀어주며 천천히 풀어내는 포티아. 찹쌀이 뭉치지 않고 세세히 풀어지자 포티아는 다프네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시면 잠시 동안 눌어붙지 않게 저어 주실래요? 아무래도 환자식이니 원래 레시피보다 조금 더 길게 끓이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저는 그 사이에 설거지를 조금 하고 올게요."

"네. 포티아 양. 다녀오세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포티아의 손놀림을 신기함 반 대단함 반의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다프네는 포티아에게서 냄비를 넘겨 받아 찹쌀이 늘어붙지 않도록 천천히 휘저었다. 페어리 중에서는 가장 요리 솜씨가 좋은 그녀이고 가끔씩이지만 환자식도 담당했던 만큼 죽을 만드는 기본 스킬 정도는 마스터한지 오래. 다프네가 천천히 죽을 끓이는 사이에 빠른 몸놀림으로 식사를 마친 인원들의 식기를 정리하던 포티아가 어느 새 돌아왔다.


"휴우~ 대충 마무리됐어요. 아, 죽도 꽤 좋은 느낌이네요. 이 정도면 소화에는 아무 문제도 없겠어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이 다음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아, 저에게 넘겨주시면 제가 마무리할게요. 후후후후~"


다프네에게 죽을 넘겨받아 우유를 부으며 타락죽을 완성해나가는 포티아. 역시 적절한 불조절로 타락죽의 맛을 최대한 살리면서 마지막으로 소금을 살짝 첨가해 죽을 마무리한 포티아가 다프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럼 갈까요? 다프네 씨?"

"아...네. 그런데 주방을 비워도 괜찮을까요?"

"저녁식사는 끝났고, 주방장님이 오실 때를 대비해서 쪽지를 남겨뒀어요~ 한 시간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이미 만전의 준비를 끝낸 포티아와 함께 식당을 나서는 다프네. 식사를 하던 인원들도 모두 사라지고 식당 불을 끄고 수복실로 향한 두 사람은 이그니스를 위해 만든 타락죽을 그릇에 덜어서 가져갔다.


"이그니스 양, 저녁 가져왔어요. 포티아 양이 만들어주신 타락죽이에요."

"이그니스 씨, 몸은 괜찮으세요? 면회 겸 해서 뵈러 왔어요."

"포티아 씨? 안녕하세요. 조금 힘이 없지만 몸은 멀쩡해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친한 듯 사이가 먼 듯 약간 애매한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다프네가 셋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누워있는 이그니스의 자세와 식탁을 조절해주었다. 곧이어 의자를 가져와 이그니스의 양 옆에 앉은 다프네와 포티아.


"이그니스 양? 혹시 드시기 힘들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니에요. 죽 정도는 혼자서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게다가...그 정도까지 도움받기는 너무 부끄러워서..."

"후후훗...이그니스 씨도 부끄러움을 타시네요. 이런 모습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그렇게 셋 모두 자리를 잡은 뒤 포티아의 특제 타락죽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취향에 따라 소금과 설탕을 적당히 추가해서 먹으면 된다는 포티아의 말에 몇 번 먹으면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조합을 찾아낸 다프네와 이그니스는 정말 맛있다는 칭찬을 연발하며 타락죽을 비워나갔고, 포티아 역시 흐뭇하게 웃으면서 죽그릇을 비웠다. 아직은 내장 상태를 신경써서 식사량을 적당히 조절하는 이그니스와 늦은 저녁식사를 맛있게 즐기는 다프네&포티아. 세 사람은 포티아가 준비한 타락죽을 깔끔하게 비웠고, 다프네는 포티아의 면회 시간도 확보해줄 겸 식사를 준비해준 포티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식기들을 설거지하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그니스 씨, 사실 수복실에 오셨을 때 저도 우연히 다치신 걸 봤었는데 그 때는 전혀 도움이 못 되어 드려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저는 멀쩡히 나았고, 포티아 씨가 피 보는 걸 싫어하시는 건 예전에 말씀해주셔서 알고 있는걸요. 전혀 죄송하실 것 없어요. 오히려 오늘 저녁식사를 준비해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포티아와 이그니스는 이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오르카 내에서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 1급 상담원인 이그니스. 남에게 비밀을 흘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용히 말을 들어주고 꼬옥 끌어안아서 용기를 북돋아주는 그녀는 본업과는 관계없이 우수한 카운셀러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신체의 부상치료를 겸해서 다프네에게 상담을 청하는 케이스도 있지만, 한창 전투로 바쁘던 시절의 오르카에서 수복실은 둘만의 비밀 이야기를 하기에는 적당한 공간이 아니라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기에 바빠서 늘 자리에 없는 익스프레스와 룸메이트인 이그니스의 방은 사실상 오르카의 공공 상담실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리고 포티아 역시 한창 자존감이 낮던 시절에는 이그니스에게 신세를 지던 멤버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래도...이그니스 씨에게는 많이 신세를 졌었는데...이럴 때라도 보답해드리고 싶어서 식사나마 준비해봤어요. 하지만 뭔가...이 걸로는 좀 아쉽네요."

"아...그러면...포티아 씨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제게 부탁하실 게 있나요? 얼마든지 말해주세요! 저도 이그니스 씨에게 은혜를 갚고 싶어요!"

"후후훗. 제가 그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해드리지는 않았으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사실은...다프네 씨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


다프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포티아에게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이그니스. 포티아 역시 어제 생각했던 다프네에게 고마움을 전할 기회가 생각보다 금방 왔다는 사실에 이그니스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다프네가 돌아온 뒤에도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내일의 저녁 약속을 다시 되새기는 그녀들. 다프네는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두 사람의 말없는 의사소통을 바라보고는 둘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하고는 캐묻지 않고 다음 일을 준비했다. 늘 그렇듯이 입원한 환자의 상태 점검과 멘탈 케어를 위해 이그니스가 잠들 때까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돌보고, 잠든 후에도 정신적 충격 때문에 악몽이라도 꾸지 않을까 싶어 이그니스의 침대 옆에 앉아서 졸아가며 그녀를 간호하는 다프네. 이그니스 역시 눈치채지 못한 척 했지만, 잠들었다가 밤에 살짝 의식이 돌아왔을 때,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와 그녀의 옆에서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는 다프네의 존재를 느끼고는 한 번의 악몽도 꾸지 않고 푹 잠들 수 있었다.


"으음..."


그렇게 다음 날의 아침이 밝았다. 눈을 뜬 이그니스는 옆에 다프네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조심스레 수복실을 청소하고 있는 다프네의 눈가에 살짝 거뭇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고는 아침이 될 때까지 자신을 돌봐줬다는 것을 눈치챘다. 기존에 함께 전투에 나갔던 다른 인원들에게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다프네의 극진한 간호를 받고 나니 정말이지 고마움으로 가슴이 가득 차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행복한 기분으로 천천히 자신의 몸 상태를 체감해보는 이그니스. 생각보다 회복이 빨랐는지 솔직히 지금 당장 퇴원해도 문제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그러기에는 자신이 생각했던 계획과는 조금 달라져버린다. 원래는 오늘 밤에 제안하려 했던 계획을 조금 수정하기 위해 이그니스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맑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어머, 이그니스 양.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딘가 아프시거나 불편하신 부분은 없으신가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다프네 씨. 아픈 곳도 없고 기분도 괜찮아요. 거의 다 나은 것 같은 느낌이네요."

"후후훗. 다행이에요. 하지만 오늘까지는 무리하지 마시고 수복실에서 쉬시는 게 좋아요. 음...혹시 수복실에서 지내시는게 불편하시지는 않으시죠...?"

"다프네 씨가 많이 도와주셔서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아...후훗~ 부디 맡겨주세요~"


다프네가 가져온 아침식사를 마친 뒤 이그니스는 다프네의 도움을 만류하고 혼자서 샤워를 했다. 어제 내내 누워있어서 몸이 굳은 느낌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컨디션은 정상에 가까웠다. 아마도 오늘 밤까지 수복실에서 보내면 다프네는 또 하룻밤을 힘들게 보낼 거라는 생각에 포티아에게 부탁했던 저녁식사를 마치고 저녁에 퇴원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그니스는 조용히 침대로 돌아왔다. 물론...그냥 돌아오기만 한 것은 아니고, 그녀가 계획하고 있던 나름대로의 보답을 준비한 채로.


"저...다프네 씨?"

"네? 혹시 어딘가 불편하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아니에요...실은 조금 더 잠을 자는 편이 회복에 좋을 것 같은데...왠지 잠이 잘 안 와서...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요."

"아, 그러면 따뜻한 차 같은 거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드시고 나면 긴장이 풀려서 잠이 오는 걸 돕는 효과가 있는데..."

"그...제가...무언가를 끌어안고 자는 걸 좋아해서......괜찮으시면 다프네 씨가 침대에 같이 누워주셨으면 좋겠어요..."


마음먹고 준비했지만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과 부끄러움이 더해져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말을 이어가는 이그니스. 하지만 그런 이그니스를 보고도 다프네는 의외의 제안에 조금 놀랐을 뿐, 오히려 귀엽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의 요청에 대답했다.


"아...그...침대가 너무 좁지 않을까요? 저는 괜찮지만...이그니스 양이 주무시는데 불편하실 것 같은데..."

"아니에요. 저는 괜찮으니까...다프네 씨만 괜찮으시면 옆에 누워주셨으면 해요."

"그러면...잠시만요. 하던 일만 빠르게 마무리하고 올게요. 30분 안에 돌아올테니 기다려주세요."


자신의 말대로 수복실의 아침 일과를 모두 마무리하고 돌아온 다프네. 오늘은 리제가 도와주러 오는 날이니 잠시 뒤에 리제가 오면 수복실 현황 전달을 해야겠지만, 그 정도는 이그니스가 잠들고 나면 조용히 빠져나와서 하면 되겠다고 생각한 다프네는 밝은 얼굴로 이그니스에게 돌아왔다. 물론, 이그니스의 계획대로라면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저...그러면...여기에 누우면 될까요? 이그니스 양?"

"네. 부탁드려요."


이그니스가 침대의 한 편으로 몸을 살짝 옮기고 빈 공간이 생기자 조심스레 침대에 올라가는 다프네. 잠시 후, 둘이서 한 베개를 베고 이그니스가 다프네를 꼬옥 끌어안는 자세가 되자 다프네 역시 손을 멍하게 두기는 약간 애매하다는 생각에 이그니스의 몸에 팔을 둘러 서로 꼬옥 끌어안은 자세가 되었다. 여자끼리 안고 있으려니 살짝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환자의 요구사항을 충실히 들어주기 위해 이그니스가 푹 잘 수 있도록 조심스레 몸에 힘을 빼는 다프네.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예상과는 정 반대로 돌아갔다. 어쨌든 푹 잠들었던 이그니스와는 달리 의자에 앉아서 쪽잠을 자느라 피로했던 다프네. 거기에 아침에 나름대로 일을 한다고 움직이기까지 했던 그녀의 몸은 침대에 누운데다가 따끈하고 푹신한 이그니스의 몸을 끌어안기까지 하자 급격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노곤하게 풀어지는 몸과 수마가 조금씩 달라붙어 멍해지기 시작하는 머리. 그런 그녀의 얼굴을 눈 앞에서 보며 조금씩 눈이 풀려가는 것을 확인한 이그니스는 다정하게 다프네에게 말을 걸었다.


"다프네 씨. 어제 하루 종일 고생하셨어요. 감사를 표하고 싶었는데...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나서...부디 잠시라도 편안하게 주무세요."

"아......이그니스 양.......안 돼요...저는 간호사고...이그니스 양을 돌보는 게 당연한데...제가 돌봐지는 건......."

"아니에요. 다프네 씨가 함께 계셔야 저도 깊게 잠들 수 있는걸요. 그러니...잠시 주무시면서 저를 잔뜩 돌봐주세요."

"우우.....이그니스 양....치사해요오........아아.......점점........졸려서.........머리가...................."


물론 말도 안 된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면 어떻게든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기에는 다프네의 몸이 너무 피로했고 동시에 이그니스의 온기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겨울의 쌀쌀한 날씨에 온 몸을 감싸는 포근한 따스함은 인간의 의지력을 무너뜨리는 특효약. 어디까지나 환자를 상냥하게 대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한 다프네는 그 매혹적인 유혹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스스로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이그니스의 품에 안겨서 몸에서 힘이 빠진 채 꿈나라로 향해버리는 다프네. 그런 다프네를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운 채 바라보던 이그니스도 왠지 점점 졸려지는 느낌과 함께 꿈 속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리제를 사고뭉치에 예측불가능한 폭탄으로 생각하지만, 적어도 리제 본인이 생각하기에 주인님이 관계없는 일에서 그녀는 냉철하며 이성적인 바이오로이드다. 다프네가 어제부터 환자를 돌보기 위해 수복실에서 숙식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녀는 오늘 낮은 다프네가 많이 피곤할테니 좀 더 신경써서 자신이 적극적으로 간호업무를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출근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환자와 함께 한 침대에서 곤히 잠든 다프네. 환자도, 다프네도 따스한 미소를 띄운 채 잠든 걸 보니 어쨌거나 둘 다 만족하는 것 같아 보였고, 늘 그렇듯이 어젯밤에는 제대로 잠을 못 잤을 다프네를 생각해서 리제는 조용히 수복실의 접수대로 향했다. 침대에서 두 여인의 곤한 숨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리제는 귀여운 여동생을 위한 메모를 하나 남겨두고 조용히 접수대에서 일과를 보내기 시작했다. 


곤히 잠들었던 다프네가 깨어나서 시계를 봤을 때는 이미 시간이 오후 3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점심도 거른 채 잠들어버린 자신을 책망하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는 다프네. 다행히도 이그니스 역시 푹 잠들었는지 색색거리며 숨을 내쉴 뿐, 깨어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몸을 빼서 접수대로 향한 다프네를 리제가 맞이해주었고, 미안함에 사과를 반복하는 다프네에게 웃으며 환자도 없었고 상비약을 보충하러 온 사람들만 몇 명 있었다는 말을 전해준 리제는 자신이 적어둔 메모를 생각해내고는 약간 뻘줌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어머...? 리제 언니? 어딘가 불편하신데 있으세요? 진단 한 번 해보실래요?"

"아...아냐. 그냥 갑자기 뭔가 생각나서. 다프네. 나 오늘 좀 먼저 나가봐도 돼?"

"네. 지금까지 저 대신 모두 챙겨주셔서 고마워요 언니. 남은 건 저 혼자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으...응. 그래. 그러고 저기 메모지에 뭐가 있기는 한데...지금은 보지 말고 꼭 조금 이따가 봐야 돼. 알겠지?"

"네...? 메모요? 그러면 빨리 보는 편이..."

"다프네. 언니 말 믿지? 꼭 이따가 봐야 돼! 나는 먼저 갈테니까. 절대 지금 보면 안 돼. 알겠지?"

"아...으...네에...그러면 다른 것들 체크하고 30분 정도 뒤에 볼게요."

"응. 그래. 착하지 우리 다프네. 그럼 내일 봐."


말을 할 수록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얼굴을 살짝 붉히던 리제가 나간 뒤, 다프네는 그래도 리제 덕분에 별 문제 없이 잘 돌아갔구나 하는 생각으로 수복실을 둘러보고는 접수대에 앉았다. 그러자 리제가 말했던 메모가 바로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 귀여운 잠꾸러기 여동생에게 -


너, 어제도 밤에 제대로 못 잤지? 환자 몸만 생각하다가 네가 먼저 병 걸릴까봐 걱정이니 좀 자기 몸도 생각해가면서 일해. 네가 잠든 사이에 수복실은 내가 문제 없이 운영할테니 걱정하지 말고. 오늘 저녁도 어차피 수복실에서 잘 테니까, 내일은 네가 좋아하는 찻잎이나 준비해 놓을게. 내일 저녁에는 차만 마시고 곧장 자게 만들거니까. 딴데로 새지 말고 곧장 페어리 숙소로 와.


P.S. 너 어제 입었던 옷이랑 속옷은 내가 가져가서 빨아둔다. 없어진 거 아니니 걱정 마.



"아이...언니도 참......"


리제의 메모를 보고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부끄러워하는 다프네. 자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본 것 같은 리제의 지적에 부끄러워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리제의 자매애가 은근히 마음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기분이 좋아졌다. 평소에는 자신이 리제를 챙기는 경우가 많지만 가끔 이렇게 리제에게 챙김을 받을 때마다 정말이지 행복한 기분이 드는 다프네. 다음번에는 리제 언니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뭔가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싱글벙글하던 다프네는 곧이어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이그니스 양이 푹 주무시는 건 좋지만...그래도 두 끼 연속으로 끼니를 거르는 건 안 좋으니까...슬슬 저녁을 준비해야...'


그 때 갑자기 울리는 수복실의 전화기.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은 다프네는 익숙하지만 의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놀랐다.


"다프네 씨, 주방의 포티아에요."

"어머, 포티아 양. 어쩐 일로...?"

"오늘 저녁도 이그니스 씨에게 대접할 겸 제가 만들어 갈게요. 주방장님께 허락받았으니까 7시까지는 갈테니 다프네 씨도 식사하지 마시고 기다려주세요~"

"아...정말 감사합니다. 포티아 양."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그럼 이따 봬요~"


포티아의 말과 함께 전화가 끝나고 다프네는 잠시 할 일이 없어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샤워도 하고,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치자 6시가 되었고 깨어난 이그니스에게 포티아의 이야기를 전해주자 이그니스도 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7시에 함께 식사를 하기로 이야기가 끝났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아, 포티아 양. 어머, 너무 많이 가져오신 거 아닌가요? 도와드릴게요."


오늘 포티아가 가져온 것은 여러 반찬과 밥, 그리고 그녀가 최근 심혈을 기울여 익히고 있는 그녀만의 시그니처 요리였다. 강한 화력에 능숙한 그녀답지 않게 선택한 음식은 바로 찜. 고기의 부위를 마음대로 구하기 힘든 오르카에서 힘줄이 많아서 구워먹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부위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매력적인 맛을 자랑하는 그녀의 찜요리가 자태를 선보이자 다프네가 당황해서 말했다.


"포...포티아 양?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닌가요? 이 정도면 제가 함께 도와드렸어야..."

"후후훗. 오늘 요리는 고기 치고는 소화도 잘 될 뿐만 아니라, 다프네 씨에게 고맙다는 뜻을 전해드리기 위해 만든 특식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다프네 씨. 지난 번에 간호해 주신 것도, 다른 여러 것들도요."

"사실...어제 저와 포티아 씨 모두 다프네 씨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서 계획을 짜봤거든요. 제 표현은 아까 받으셨으니...이제 포티아 씨의 성의를 받으실 차례네요."

"아...아이 참...그런 걸로 고마워하시지 않으셔도 되는데...정말...제가 더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정말 고마워요 포티아 양...이그니스 양..."


오늘 하루만에 이그니스, 리제, 포티아의 따스한 마음을 접하자 감정이 북받쳐올랐는지 눈에서 눈물을 보이는 다프네. 그리고 나머지 둘은 그런 다프네를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포티아는 최근 이런저런 감동을 통해서 극적으로 변화한 케이스였고, 이그니스 역시 상담을 해주면서 감동의 눈물을 보이는 다른 인원들을 본 경험이 있어 지금의 다프네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손을 뻗는 포티아와 이그니스. 두 사람에게 한 손씩을 잡힌 다프네가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그녀들에게 향하며 사과했다.


"아이 참...너무 기쁜데 왜 자꾸 눈물이......죄송해요. 정말로 기쁜데..."

"사람은 감동을 받으면 눈물이 나는 경우도 있다더군요.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후후훗~ 이럴 때는 잠깐 안아주면 좋았던 것 같아요. 이그니스 씨 부탁드려요."

"앗...포티아 양...이그니스 양..."


더 이상 말은 필요없다는 듯 다프네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두 사람. 잠시 넘쳐 흐른 감정의 물결에 휩쓸려 어쩔 줄 모르던 다프네는 자신을 감싸오는 따스한 체온에 점점 마음이 안정되어가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자신이 굉장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실감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나머지 두 사람 역시 다프네의 생각까지는 몰라도 그녀가 안정되어가는 것은 알아챘다. 그렇게 다프네가 충분히 안정됐다고 느껴질 무렵. 포티아가 장난스럽게 한 마디를 던졌다.


"그나저나...너무 오래 이러고 있으면 기껏 만든 음식이 식어버려요? 자, 이제 어서 저녁식사를 하도록 해요~"


그렇게 작은 소란이 마무리되고 포티아의 음식을 맛본 두 사람은 달콤하고 짭짤한 맛의 완벽에 가까운 조화와 오랜 시간 끓여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힘줄의 관능적인 매력을 즐기며 포티아의 음식을 잔뜩 칭찬했다. 포티아 역시 자신이 요즘 많이 노력한 요리가 대호평을 받는다는 것을 기뻐하며 즐거운 식사시간이 이어졌다. 식사가 끝나고 잠시 여자 셋이 모여서 수다를 떨다가 너무 늦지 않게 포티아가 먼저 돌아갔고, 이그니스 역시 굳이 내일까지 있을 필요 없이 저녁에 퇴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마지막으로 진단을 마친 뒤 퇴원절차를 밟았다. 그렇게 예상보다 하루 더 일찍 페어리의 숙소로 향하게 된 다프네는 숙소에서 리제를 꼬옥 끌어안고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고, 리제는 부끄러워하면서도 틱틱거리며 '아 내일 온다며! 왜 오늘 와서 쪽팔리게...!' 라는 등의 말을 내뱉으며 페어리끼리도 친목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다프네는 이전보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애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고, 자매들을 향한 스킨십도, 포티아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이전보다 좀 더 적극적이게 되었다. 포티아 역시 지금껏 다프네와 친해지기는 했어도 서로를 배려하느라 유지하던 거리를 무너뜨리고 더욱 더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종종 다프네에게 요리를 가르쳐주거나 다프네에게 응급처치 방법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받는 등, 두 사람은 점점 단짝같은 사이로 발전해나갔다.


- 끝 -


이번 이야기에서 메인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도 살며시 깔아놓은 부분을 봐줬으면 싶은 건 어느 정도 친해졌어도 아직 벽을 남겨두고 있던 다프네와 포티아가 그 벽까지 무너뜨리며 더욱 가까워지는 부분이야. 실제로 얼마나 가까워지는지는 아마 다음 화가 나와야 구체적으로 나오겠지만 일단 이야기 전개상 이번 편에서 더 친해져.


이 시리즈는 전체적으로 따끈따끈한 느낌의 이야기가 목표임. 근데 짧게 쓰고 싶어도 어째 조절이 잘 안 되네. 원래는 6천자 이하가 목표였는데 스토리 하나를 닫고 가려다보니 어느 새 2만자가 되었음. 다음 화가 나와도 기조는 비슷하게 따뜻한 이야기가 될 것 같고...분량은 나도 잘 모르겠어.


아니 근데 방1귀가 왜 금지어야? 나름 귀여운 장면이었는데 이렇게 표현하니까 좀 이상하잖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