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뽀끄루와 봉봉 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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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의 도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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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유령들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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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 오르카 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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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플레이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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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주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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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아닌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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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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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잎 밟는 소리와 벌레 우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나뭇잎 틈새 사이로 저 멀리 까마득히 높아 구름에 닿을 것만 같은 거대한 나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울창한 숲에 들어서자 티에치엔은 내게 난색을 보였다.


  "또 얼굴 달린 거미가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얼굴 달린 거미는 없겠지만 거미는 있겠지."


  "헤엑."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는 티에치엔을 무시한 채,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마키나와 메리가 반딧불이가 가득한 호수를 구경하러 간다고 자리를 비우고, 리앤이 과자를 집어 먹으며 내게 물었다.


  "어디를 먼저 갈 거야?"


  앞으로 가야 할 곳은 닥터가 있는 라퓨타를 제외한다면 브라시타, 이그드라실, 예체프 세 곳. 예체프를 마지막으로 하라는 탈론페더의 말을 생각했을 때 적절한 선택지는 브라시타와 이그드라실. 


  "이그드라실이지. 가장 남쪽이니 이그드라실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예체프와 라퓨타로 향할 생각이야."


  "흐음~."


  리앤이 비밀을 감추고 있는 소녀처럼 샐쭉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그드라실에 있는 보스는 [지키는 자]야.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 봐."


  "지키는 자?"


  "정식 명칭은 아니고, 그냥 설명하기 쉽게 말한 거야. 큰 힌트니까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구?"


  리앤은 그 외에도 앞으로 만날 보스의 대략적인 정보를 알려주었다. 보스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정보는 아니지만,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그것조차도 큰 도움이 된다.


  그것과 더불어 내 스킬에 대해 몇 가지를 알려주었다. 그중에서도 게이트, 그러니까 공간 마법에 대한 팁이 도움이 많이 됐다.


  우선 공간 마법은 워프와 게이트 두 개로 나뉜다.


  워프의 경우는 별거 없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나와 접촉해 있다면 생물이던 비생물이든, 파티원이든 아니든 함께 워프할 수 있다. 접촉해 있어야 한다는 제약이 크지만.


  재미있는 것은 게이트다. 게이트는 워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다.


  첫 번째. 게이트는 파티원만 통과할 수 있다. 몬스터나 파티원의 소환수는 물론이요, 칸이나 용 같은 NPC 판정의 캐릭터도 게이트를 사용할 수 없다.


  두 번째. 마법이나 화살 같은 공격은 피아 구분 없이 통과할 수 있다. 게이트를 멋대로 열었다가 게이트를 타고 넘어온 상대의 마법에 맞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번째. 게이트의 사정거리는 스킬 레벨이 가장 높을 때를 기준으로 1km. 허나 시야에 없는 곳이라면 반드시 가봤던 곳에만 다시 열 수 있다. 단, 한번 설치해둔 것은 마법을 끊지 않는 한 범위 밖이라도 사라지지 않고 유지된다.


  정보가 많은 것은 감사하다. 게다가 주력으로 삼고 있는 워프와 게이트에 대한 것이라 더더욱. 지금까지는 구별 없이 써왔는데 이런 특징이 있었단 말이지. 작전의 폭이 더 넓어질 것 같다.


  "저기, 사령관?"


  곰곰이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는 도중에 팬텀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뒤돌아 팬텀을 바라보자 팬텀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같은 장소를 계속 돌고 있는 듯합니다만..."


  "엉?"


  그러고 보니 주위를 둘러보자 익숙한 숲의 모습이... 보일 리가 없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죄다 똑같은 숲이다.


  "그런 걸 알 수 있나?"


  "한 번이면 모르겠는데 저희 여기를 세 번째 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확실하겠지. 조금 더 일찍 알려주지 그랬어?"


  "저기... 몇 번이나 불렀습니다만 사령관께서 대답이 없으셔서..."


  "...미안."


  지도상으로는 곧 엘프의 나라다. 엘프의 나라 근처 숲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것은 아마 엘프의 마법이겠지. 자, 그렇다면 엘프의 나라는 어떻게 들어가야 할 것인가.


  "티에치엔."


  "왜?"


  "진각."


  "진각? 왜?"


  "묻지 말고 진각."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티에치엔이 다리를 들어 땅을 강하게 짓밟았다. 작은 체구에서 터져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충격과 함께 땅이 울렁거렸다. 작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했다.


  "꺄악!"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저 멀리 나무에서 누군가가 떨어졌다. 재빨리 숲을 달려 나가 떨어진 누군가를 덮쳤다. 무언가 굴곡이 많은 몸매를 붙잡자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잠깐, 사령관님! 어딜 잡는 거예요?!"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그녀를 놓지 않고 파티원들에게 데려갔다.


  "좋아, 엘프 확보다."


  내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사람은 뾰족한 귀와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를 가진 스트라토 엔젤이었다.



  *

  그나저나 스트라토 엔젤이 엘프인 것은 의외다. 아니, 오르카 호에 있는 엘프의 몸매를 생각해 본다면 그녀가 엘프가 아닌 것이 이상한 건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눈물 맺힌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스트라토 엔젤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도대체 어딜 만지시는 거예요!"


  "어딜 만지냐니. 포박하느라 배랑 허리 쪽만 닿았잖아. 가슴은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고."


  "차라리 가슴을 만져주시길 원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 말은 조금 아닌 것 같은데.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난 스트라토 엔젤이 헛기침을 하며 내게 말했다.


  "흠흠.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용사님. 용사님을 엘프의 마을까지 모시기 위해 마중 나온 스트라토 엔젤이라고 합니다. 엘프의 마을은 외부인을 막는 결계가 처져 있어서 엘프의 안내가 없다면 이그드라실로 들어갈 수 없답니다. 자, 가실까요?"


  앞장서서 나아가는 스트라토 엔젤을 보며 티에치엔이 내게 속삭였다.


  "저기, 주인. 마중 나온 엘프라고 했는데 스트라토 엔젤은 숨어있었잖아? 왜 숨어있었던 거야?"


  "글쎄. 멋있게 등장하려고 숨어있었는데 우리한테 걸린 거 아닐까?"


  "거기! 조용히 하세요!"



  *

  엘프가 있어야만 지나갈 수 있다는 스트라토 엔젤의 말이 사실인지 우리는 스트라토 엔젤을 따라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그드라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짧은 길을 걷는 동안 스트라토 엔젤은 나무뿌리에 걸려 수없이 넘어졌지만.


  비틀비틀 힘겹게 걷는 그녀를 보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아갔고, 아니나 다를까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다.


  한두 번이면 모를까 수십 번을 넘어지는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는 복원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기동형 바이오로이드라 산길을 걷는 것은 조금..."


  기동형 바이오로이드라기 보다는 가슴이 커서 바닥이 잘 안 보여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 생겼지만, 말없이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의외로 엘프의 마을은 거대한 나무에서 꽤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게다가 별로 위태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스트라토 엔젤은 우리를 데리고 엘프의 여왕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혹시나 예상외의 누군가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별 반전 없이 여왕의 자리에 앉아있는 세레스티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레스티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어서오세요,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님. 당신이 이곳에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오. 역시 전직 기업 홍보용 바이오로이드. 별로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역할에 충실하다.


  "저희 엘프는 본디 신목을 수호하는 일족. 허나 어느 날 나타난 압도적인 어둠에 신목을 빼앗기고 이곳에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부디 어둠을 물리치고 신목을 되찾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가련한 표정으로 용사를 향해 기도하듯 말한 세레스티아가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대사가 끝났어요."


  "이봐."


  사람 몰입을 깨지 마라.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센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센과 여기는 정 반대 방향이라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거든요."


  "쾌속의 진격으로 여기까지 달려왔지. 한시라도 빨리 닥터의 엉덩이를 두들겨주러 가야 하니까."


  "이럴 때는 한시라도 빨리 저를 만나러 와주셨다고 해주시길 바랐어요."


  아쉽게도 만나야 할 것은 세레스티아가 아니라 이곳의 보스다.


  "그래서, 엘프의 나라는 다른 곳과 다르게 마왕의 부하가 마을을 직접 습격하지 않았고, 저 큼지막한 나무에 폐인 마냥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는다고?"


  "정확해요. 표현이 조금 그렇지만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뒤덮을 듯이 높게 솟아오른 나무를 바라보았다. 저기까지 가는 게 문제로군.


  "보스에 대해서 아는 건 있나?"


  내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세레스티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낙뢰를 조심하세요?"



  *

  여태까지 얻었던 스킬 포인트로 스킬을 찍으며 산길을 걸어 나갔다. 앞을 똑바로 보며 걸으라고 잔소리하던 홍련도 포기했는지 한숨만 내쉬며 묵묵히 내 옆을 걸어 나갔다.


  "번개를 조심하라고 했지. 보스는 누구일 것 같아?"


  "번개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알렉산드라 씨와 오베로니아 양이겠네요. 하지만 보스는 AGS일테고…. 생각나는 건 로크 정도일까요."


  스킬도 찍었다. 남은 것은 세계수까지 걷는 것뿐. 할 것도 없으니 보스의 정체에 대해 고민해보자.


  거대한 세계수 이그드라실.


  리앤이 말한 지키는 자.


  세레스티아가 경고한 번개.


  정확히는 위그드라실이지만, 이그드라실은 다른 국가에 비해 명확한 모티브가 있다.


  북유럽 신화의 물푸레나무, 세계수 위그드라실.


  북유럽 신화에서 엘프가 사는 동네는 알브헤임이고, 까놓고 말해 엘프랑 위그드라실은 큰 연관은 없지만 그냥 넘어가자.


  북유럽 신화에서 번개를 다루는 신은 토르. 하지만 보스가 AGS인 만큼 사람에서 모티브를 따오지는 않았을 것이니 패스.


  그렇다면 또 누가 있나? 아쉽게도 나는 북유럽 신화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이 게임의 설정을 짠 사람, 아르망도 북유럽 신화에 그렇게 잘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지키는 자라는 것을 생각해 볼까. 무엇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너무 많다. 세계수와 연관 지어서 생각해 볼까? 북유럽 신화에서 세계수와 연관을 가진 지키는 자라는 것은 누가 있을까.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미미르의 샘을 지키는 거인 미미르.


  세계수의 뿌리를 갉아 먹는 자, 니플헤임의 샘 흐베르겔미르에 살며 그 샘을 수호하는 마룡 니드호그.


  세계수의 가지 위에 살며 세계수의 뿌리를 갉아 먹는 니드호그와 싸우는 베드르폴니르와 이름 없는 수리.


  토르와 마찬가지로 인간형인 미미르를 제외한다면 남는 것은 니드호그와 이름 없는 수리.


  마룡 니드호그.


  오르카 호에서 마룡이라고 할 수 있는 AGS는 누가 있을까.


  타이런트와 글라시아스.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 타이런트 쪽이 맞겠지. 글라시아스는 마룡이라고 불릴 정도까지는 아니다.


  베르드폴니르와 이름 없는 수리.


  베르드폴니르와 이름 없는 수리가 따로 나올 수도, 아니면 하나로 묶어서 나올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로크인가.


  "주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 앞에서 튀어나올 보스가 누구인지 생각하고 있다."


  "그래? 그것보다 중요한 건 번개 대책 아니야? 세레스티아가 번개를 조심하라고 했잖아? 대책은 세웠어?"


  "글쎄다. 번개가 누구한테 어떻게 떨어지는 건지, 애초에 번개를 떨어뜨리는 스킬인지도 불확실한데. 낙뢰라고 했으니까 번개가 떨어지는건 맞겠다만."


  "헤엑. 우리 전멸하는 거 아니야?!"


  "원래 RPG라는건 끊임없이 도전하고 방법을 알아나가면서 깨는 거지. 여태까지 운이 너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내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티에치엔이 비명을 내질렀다.


  "시잃어어~~!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절망한 듯 바닥에 쓰러져 머리를 싸맨 티에치엔에게 포티아가 다가갔다.


  "열심히 하면 죽지 않을 수 있을거에요오..."


  "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최다 사망자!"


  티에치엔의 울분 섞인 외침에 포티아가 충격받은 얼굴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으에에에엥... 주인니임...!"


  "애는 또 왜 울리냐."


  "그치만! 나는 죽고 싶지 않다고! 나랑 아탈란테가 가장 앞에서 싸울 건데 우리가 가장 먼저 번개에 맞을 거 아니야! 싫어어어어~!"


  그렇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숲을 방방 뛰어다니는 티에치엔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문득 세레스티아의 말을 떠올렸다.


  흐음. 번개 대책이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실 하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거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실례일 정도로 드높게 솟아오른 세계수는 탐욕스레 가지를 뻗어 하늘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하늘을 어찌나 빽빽이 뒤덮었는지 가지 아래가 밤이 찾아온 것 마냥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 어둠 속을 그나마 밝히고 있는 것이 나뭇가지 사이로 간신히 새어 들어온 미약한 빛줄기와 하늘을 떠다니는 정체불명의 빛무리였다.


  저 멀리 짙은 어둠 속을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탈란테를 볼 수 있는 것은 이 미약한 빛 덕분이다.


  번개 대책. 번개 대책.


  어둠 속에 숨어 조심스레 아탈란테의 등 뒤로 다가가 아탈란테의 모자를 벗기고 귀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푹 파묻힐 정도로 부드러운 귀였다. 오. 컴패니언 애들이나 히루메에게 뒤지지 않는 푹신푹신한 귀다.


  "히이익!"


  아탈란테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비명을 내지르며 나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설마 귀를 만진 정도로 창을 휘두르다니, 가차없다. 내 옷에 얼굴을 파묻고 냄새를 맡다가 들킨 메이만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아탈란테가 내게 창을 겨누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전사를 욕보인 데에 정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 사령관."


  "아니아니, 낙뢰를 조심하랬잖아? 낙뢰 대책이야, 낙뢰 대책."


  아탈란테의 눈과 나를 향해 겨눠진 창끝이 싸늘하게 빛났다. 창은 한 치의 오차 없이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 거짓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적어도 제가 납득하는 시늉이라도 할 만큼 설득력 있는 거짓말을 준비할 수는 없었나요? 설마 그 정도 준비도 없이 처녀의 귀를 함부로 만지신 건 아니겠죠?"


  "전사인지 처녀인지 둘 중 하나만 하라고. 진짜로 낙뢰 대책이라니까. 거짓말도 변명도 아니라니까."


  순간 나무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불쾌한 기운이 사정없이 우리를 뒤흔들었다. 죽음이 끈적한 손길로 내 등줄기를 훑은 듯했다. 머리가 마구 흔들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래도 직접 납셨나 본데."


  자조하듯 말을 씹어뱉으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없다.


  방금까지 자신에게 창을 겨누고 있었을 아탈란테도.


  번개를 걱정하며 날뛰던 티에치엔도


  티에치엔에게 한 소리 듣고 울먹이며 내게 매달리던 포티아도.


  마리아, 팬텀, 홍련.


  함께 해왔던 누구도 내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방금 그것이 공격이었다면, 내가 살아있는 것이 이상하다.


  파티원 중 나보다 HP가 높은 아탈란테와 티에치엔이 죽었는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


  나를 제외한 파티원이 어딘가로 날려져 버렸거나.


  내가 파티원들과 다른 곳으로 날아와 버렸거나.


  최악의 경우는, 파티원이 각각 따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홍련과 마리아는 특히 위험하다. 몬스터가 나온다면 후위인 그 둘은 버틸 수가 없다.


  "푸하! 사령관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내 옷들을 파헤치고 밖으로 튀어나온 지니야가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입에 침 자국이 있는 것을 보니 조금 전까지 자고 있었던 듯했다. 내 옷에서 침을 흘리면서 잤다 이거지.


  "너랑 나 말고는 다 없어졌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어."


  "네에?! 그러면 저희는 어떡해요! 빨리 도망가야죠!"


  "아쉽게도 그것도 안 될 것 같다."


  어둠 속에서 달려온 거대한 무언가가 나를 향해 무언가를 휘둘렀다. 검을 뽑아 급하게 막아냈지만 무지막지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하늘과 땅이 순식간에 뒤바뀌며 눈앞을 어지럽혔다.


  "으아아아!"


  품 안에서 지니야가 비명을 질렀다. 하늘로 높게 떠올라 웬만한 고층 건물을 뺨칠 높이의 나무뿌리에 칼을 박아넣어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어둑한 빛 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적의 정체는 나의 예상을 뛰어넘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AGS였다.


  [나의 이름은 골타리온 XIII세! 뽀끄루 대마왕님의 명을 받아 그대를 처단하겠노라!!]


  나와 지니야의 앞에 나타난 것은 타이런트도, 로크도 아닌 뽀끄루 대마왕의 충직한 심복, 골타리온이었다.



  *

  거대한 대검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무시무시한 파공음에 솜털까지 곤두서는 듯했다.


  "헤에엑! 사령관님! 눈앞이 뱅글뱅글 돌아요오~!"


  "나는 진짜로 돌아버리겠거든!"


  하늘로 몸을 던져 몸을 위아래로 쪼개버릴 듯 날아오는 검을 피하며 골타리온을 향해 수리검을 던졌다. 골타리온의 장갑 사이로 박힌 수리검이 파랗게 점멸하더니 강렬한 전격을 뿜어냈다. 푸른 번개가 똬리를 트는 뱀처럼 골타리온을 휘감았다.


  [우오오오오오!!!!]


  땅에 내려앉자마자 번개에 휘감긴 채로 대검을 높이 치켜드는 골타리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검이 대지를 양단할 듯 매섭게 휘둘러졌다. 번개를 휘감은 검의 폭풍이 매서운 기세로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간신히 매달려 있는 지니야를 품에 욱여넣고 땅을 굴러 검의 폭풍을 피하고 골타리온을 향해 달려 나갔다. 골타리온의 대검과 쌍검이 충돌했다. 맞닿은 검 너머로 골타리온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보였다.


  "내가 궁금한 게 참 많은데! 일단 다른 애들이 어디로 갔는지부터 물어봐도 될까?!"


  [결투는 신성한 것! 다른 이들이 우리의 결투를 방해하지 않도록 멀리 내쫓아 버렸다! 걱정하지 마라! 그들에게 걸맞은 상대가 그들을 반겨주고 있을 테니!]


  "그것 참 안심이구만!"


  몸을 비틀어 대검을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빗겨냈다. 골타리온의 대검이 대지를 후려갈기고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흙먼지 사이에 섞여 뛰어올라 골타리온의 머리를 검으로 후려갈겼다.


  쩌엉!


  골타리온의 투구에 커다랗게 금이 갔다. 순간, 섬찟한 감각이 허리를 꿰뚫었다. 그보다 반 박자 느리게, 거대한 대검이 허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거슬리는군. 그 공간이동의 비술.]


  "서로서로 귀찮지 않게 곱게 헤어지는 방법도 있는데 어때?"


  히죽 웃으면서도 굳어버린 얼굴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당황하는 중이었다.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골타리온의 검을 순간이동으로 간신히 피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거대한 대검을 땅에 꽂아 넣고 나를 노려보는 골타리온을 보며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북유럽 신화와 전혀 관계없는, 여태까지의 추측이 모두 무색해진 정체를 향해 소리치고 싶다는 심정.


  어째서 골타리온은 지금까지 만났던 AGS와 달리 말을 할 수 있는지.


  어째서 닥터가 아닌 뽀끄루의 명령을 듣는 것인지.


  어째서 골타리온이 지키는 자인지.


  그 모든 것을 날려버린 단순하고도 강렬한 충격.


  검술을 쓴다.


  골타리온은 원래 검술을 쓰는 AGS는 아니다. 애초에 그의 검만 보더라도 검술에 적합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 단번에 눈에 들어온다. 베는 것이 아니라 휘둘러 박살 내는 것이 목표라고 소리치는 것 같은 느낌의 검이니까.


  그런데 방금 허리를 향해 휘두른 검을 보고 느꼈다.


  검술, 그것도 상당한 실력의 검술이다.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신체 출력을 생각하면, 금란과 무적의 용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위협.


  검술을 쓴다. 그것 하나만으로 골타리온은 지금까지 만났던 보스 중 가장 강력한 보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