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도, 미완) LRL관련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소녀는 여운을 눈치 채지 못하고 문지르는 행위를 계속했다. 새로운 자극은 약간이나마 황홀감을 느끼게 했다. 자극을 받을 일이라고는 달에 한 번 그나마 비싼 통조림을 통한 행복이나 책속의 새로운 세상을 느끼는 것 밖에 없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버텨야 할 일수가 길어짐에 따라 비싼 통조림은커녕 일반적인 통조림도 일주일에 야금야금 나눠먹어야 할 상황이고, 다른 책은 이미 페이지가 헤어질 정도로 읽었기에 새로운 세상 또한 펼쳐지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약간이나마 좋은 감각을 느끼게 할 새로운 자극은 궂은 하늘에 비추는 한 줄기 빛이요, 꿈에서나 그리던 자신을 만나러올 새로운 인간님과도 비슷할 정도의 위치였다. 그렇기에 무의식적인 손가락의 움직임은 이어졌고, 다시금 자극을 느끼게 되었지만, 이번 자극은 몇 분전의 황홀감을 느끼게 하던 자극과는 다른 자극이었다.


 새장 속의 작은 소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밖의 자극을 느꼈다. 책 속의 문장은 누군가의 이상한 취향을 만족시키려는 듯이 사진이라도 찍은 마냥 섬세한 묘사를 품고 있었으나 성인 남성은커녕 인간이라는 부류도 몇 번 보지도 못한 LRL로서는 풀어볼 엄두도 안 나게 복잡이 꼬여버린 글의 실타래 이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고혹적인 에로스가 담긴 글이 풍기는 분위기는 그러한 지식이 아주 없는 아이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자극을 찾게 하는 요소였다. 그러한 분위기가 이끈 곳은 쾌락이라고는 부를 수가 없는 자극의 너머였고, 이는 누군가가 언젠가 즐기기 위해 정교히 짜 넣은 일종의 ‘테마’였으리라.


 쾌락 또한 자극이기에 일정 선을 넘어가면 고통으로 변모하기 마련이었고, 좁은 방의 소녀가 스스로 도달한 미숙함은 입김이 불어넣어진 풍선마냥 흉측이 부풀어 올라 터져버렸다. 그렇기에 쾌락은 고통이 되어 작은 소녀의 마음을 서서히 도려냈다.

 이는 작은 소녀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얼룩을 남겼다. 새로운 자극을 찾은 지 수 분이 채 안되어서 그것을 잃은 그 상실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으리라. 어린 마음의 바이오로이드가 겪어서는 안 될 부류의 상실감은 더 큰 파도가 되어 LRL을 덮쳤다. 그녀는 서둘러 바닥을 닦고, 나눠놓은 통조림의 일부를 먹고 잠에 들기로 했다. 잠은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도피처이자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꿈으로의 입구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인간이 자신을 만나러 오는 꿈을 꿨다. 환상적인 꿈이었다. 얼굴 위로는 검어서 안보이지만, 그는 그녀에게 새로운 옷과, 몇 번 밖에 못 먹어본 달콤한 것들을 산더미만큼 가져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따라 나오라 했고, LRL은 부푼 기대감을 안고 그를 따라 등대를 나섰다.


 등대 밖의 세상은 모르기에, LRL의 꿈은 등대를 나서면 깨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번 꿈은 여느 꿈과는 달랐다. 문을 나서자 약간 어둑한 방이 나왔고, 그 방 중간에는 큰 침대가 있었다. LRL은 푹신해 보이는 침대로 뛰어들었다. 구름에 뒤덮이는 듯한 보드라운 감촉이 그 작은 몸에 전해졌다. 이제부터 이런 곳에서 잘 수 있겠다는 상상은 기대감은 한 층 더 부풀렸다.

 그러나 기대감은 곧 큰 배신감과 절망이 되어 LRL을 덮치려 했다. 인간은 말끔히 차려입은 옷을 흥분을 주체할 수 없다는 것 마냥 거칠게 풀어헤치며 누워있던 LRL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두려움과 그에 따라 경직되어가는 원망스러운 작은 몸을 느끼며 점점 검은 색으로 뒤덮여가는 남자에게 물었다.


 “왜 옷을 벗으면서 다가오는 건가요?”

 그녀는 그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여러 명이 뒤섞인 듯한 알 수 없는 불협화음 같은 목소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가올수록 목소리는 끔찍하고 낮게, 누가 들어도 확실하게 선명해져갔다. 

 마침내 완전히 검은 색으로 뒤덮인 남자는 그녀가 누워있던 침대 앞에 섰다. LRL은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물러서고 싶었으나 몸은 어딘가에 묶인 것 마냥 움직여주지 않았다. 남자는 침대로 올라왔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침대는 넘실넘실 파도치듯 움직였다. 그가 코앞까지 다가와서 그녀의 가는 손목을 잡고 넘어뜨릴 때쯤이 되어서야 LRL은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끔찍한 목소리가 속삭이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LRL, □만의 아름다운 님펫, 내 몸의 □을 □□시켜 주오.”

 LRL은 서늘함이 등골을 스치고, 식은땀이 온몸을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있는 한 저항하려 하였다. 발로 차보려 하였으나 작은 발은 맥없이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렇게 의미 없는 저항에 지쳤을 때쯤에 그녀를 감싸고 있던 낡고 헤진 옷은 더 이상 그녀를 감싸주지 못했다. 그렇게 그의 검은 그림자가 LRL의 하복부로 다가갈 때쯤에 그녀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기나긴 꿈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의 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은 그녀가 이 생활에서 가장 좋아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소소한 요소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악몽은 너무나도 세세했기에 현실과도 혼동될 정도였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자신이 잡혀있는 광경이 펼쳐질 정도였다.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그녀는 다시금 눈을 떴고, 그녀의 눈앞에는 문제의 책이 있었다.

 그녀는 책을 집어다 어딘가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이제 그 끔찍한 죄악이 담긴 책은 다시는 펼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그녀의 머릿속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녀가 잊으려 할 때마다 다시금 떠오를 것이다.


 그 끔찍한 악몽 이후로 그녀의 잠은 의미가 달라졌다. 이제 그녀는 잠을 잘 때마다 똑같은 악몽을 꿨다. 잠은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도피처이자 꿈으로의 입구였거늘, 이제 와서는 끔찍한 것을 상기시키는 행동이자 악몽으로의 입구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자고 싶지 않게 되었다. 잠을 피해 도망치는 그녀의 몰골은 피폐해졌다.


 그렇게 잠을 피해 다니는 생활을 하다가 깜빡 졸았을 때, LRL은 뭔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과 같은 바이오로이드일 수도 있었지만, 인간일 수도 있었다. 이 등대에 인간이 온다는 점은 LRL에게는 더 이상 희망찬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먼지가 쌓인 도끼를 들어올렸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 한 것이었다. 소리가 커질수록 도끼를 잡는 힘은 강해졌고, 성인 남성에 맞춰진 자루는 작은 손으로 잡기에는 손가락이 아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려오는 것을 못 느낄 정도로 두려움은 컸고, 마침내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멸망 후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녹슨 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움직였고, 완전히 열리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문 밖에는 기동형 장치를 단 금발의 바이오로이드가 서있었다.


 “뭐야, 꼬맹이 한 명 뿐이야?”

 그 이후로 금발의 바이오로이드는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작은 통신기로 누군가에게 통신을 한 후에 LRL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누군가를 불러왔다. 계단 아래서부터 뇌파가 느껴졌다. 인간이었다. LRL은 좁은 방의 구석으로 향해서 머리를 손으로 가리며 웅크렸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한 행동 중에서는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마침내 인간이 등대지기의 방에 도착했을 때에는 LRL은 구석에 웅크려 떨고 있었다. 그리폰은 저게 뭐하는 짓인가 하며 LRL을 세우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인간은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녀가 떠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작은 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모습은 안쓰러운 감정만을 느끼게 했고, 그 작은 아이에게 필시 안 좋은 기억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자신이 다가가보기로 했다. 그리폰은 맘대로 하라며 등대 밖의 하늘을 경계하기로 했다.


 “저기, 괜찮니?”

 인간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인상을 찌푸리는 것보다는 좋은 첫 인상을 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지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떠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인간을 바라보았다. 검은 그림자에 감싸여 있지는 않았지만 남자였다. 그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고, 언제라도 잡으라는 듯이 손을 내밀고 있었으며, 무릎을 꿇어 자신과 시선을 맞추려하고 있었다.


 LRL은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열리지 않던 문을 열어준 인간을 믿어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에게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꿈에서는 느낄 수 없던,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손이었다.

 LRL은 좁은 등대에서 벗어나 넓은 오르카호로 오게 되었고, 처음 보는 것투성이에 오랜만에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밤이 되고, 모두가 잠들 시간에 LRL은 그러지 못했다. 또 악몽을 꿀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LRL을 재우고 사령관실로 향하려던 인간은 소녀의 방에서 발이 묶였다.


 그는 따듯한 우유를 가져와서, 함께 마시면서 혹시 불편한 것이 있는지 물어봤다. LRL은 모든 게 좋지만, 악몽을 꿀까 두려워서 잠잘 수 없다고 얘기했다. 인간은 잠시 고민하더니 어디선가 낡은 동화책을 갖고 와서 얘기했다.


 “네가 악몽을 꾸면, 내가 꿈속에서 지켜줄게.”

 그 이후 인간은 자신이 진짜로 꿈속에 들어가 지켜줄 수 있다고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얘기했다. 물론 거짓말이겠지만, 어린 아이에게 당당한 거짓말은 진실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말로 지켜줄 거예요?”

 LRL은 혹시나 하는 한 줌의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봤다. 인간은 새끼손가락만을 펴서 내밀며 얘기했다.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 그러면 더 이상 무섭지 않지?”

 LRL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새끼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거의 말뿐인 약속임에도 어딘가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은 LRL도 잘 보이게 동화책을 펼쳐 보이며 얘기했다.


 “잠들기 전까지 동화책을 읽어줄게. 옛날 옛적에...”

 따듯한 우유와 침대, 포근한 이불과 안심이 되는 약속은 잠들지 못하던 작은 소녀를 동화책의 한 페이지가 채 끝나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져들게 했다. LRL은 또다시 꿈을 꿨다. 그러나 이번에는 문을 나서자 드넓은 하늘과 따스한 햇살만이 느껴졌다. 소녀는 간만에 마음속 깊이부터 편안함을 느끼며 그 꿈을 즐길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의 숙면이었다. 그녀는 눈을 뜨자 등대와는 다르게 어딘가 깔끔한 천장을 보았고, 기분은 하늘을 날아갈 듯이 좋고, 상쾌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손이 잡힌 것을 눈치 채고 그쪽을 바라봤다. 인간이 자신의 손을 꼭 잡아주고 있었다. 소녀가 언제 일어나도 괜찮게 옆을 지켜줬던 모양이다. 그녀는 이제 배시시 웃으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자 한다. 더 이상 어떤 그림자도 소녀를 괴롭히지는 못할 것이다. 따듯한 약속이 그녀를 지켜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