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석 부른다. 영희."


"넹."


"훈이."


"네."


"테티스."


"네에~"


"LRL."


"네."


"코코."


"네."


"알비스."


"네! 선생님! 나 배고파!"


"……네 명이나 월반하니까 교실이 휑하네. 너희도 하루 빨리 월반해서 나 좀 편하게 해 줘."


"배고프다고!"


"오늘 약속한대로 영화감상을 할 거야. 말해두겠는데 노는거라고 착각하지 말도록. 엄연히 수업인 이상 감상문 써오게 시킬거야."


"선생님. 나 배고픈데."


"제목은… '인생은 아름다워'다. 가히 20세기 최고명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너희 중에 눈물 빼지 않을 녀석은 없을거라고 내가 감히 장담할게."


"배! 고! 파!"


"야이 기지배야! 그럼 지금 당장 나가서 먹고 와! 결석 처리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보나마나 또 반찬이 마음에 안든다고 거르고 나왔겠지. 부모님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논에서 탈곡기 달고 고생 중인 하베스터 아저씨들한테는 안미안해!? 안되겠어. 넌 내일 촌장 님한테 데려갈 줄 알아."


"우에에엥!"


"또 우는 척이야? 안속아 이 녀석아. 지금 당장 뚝 그칠래? 아니면 조용히 영화 볼래? 네가 골라."


"선생님 미워!"






* * *






"총각! 오늘도 고생했시야~"


"고생은요. 조금 거드는 걸로 어르신들 동체 우그러지는 꼴 안 볼 수 있으면 그걸로 됐어요."


"그래도 매일같이 쌀포대 나르는게 만만한 일이 아닐텐디,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닌감?"


"그렇게 고생시키는 것 같거든 내일 새참은 다른 걸로 내주세요. 장화도 좀 바꿔주고. 논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찝찝해요."


"아이고, 장화에 빵꾸가 났는감? 그건 알겠고, 내일은 돌쇠 녀석한테 소 하나 잡자고 해야겠구만."


"아니… 밭일하는데 소 잡을 것까진… 그냥 평소랑 다른 반찬이면 돼요. 매일 야채쌈밥만 먹으니까 물려서…"


"그러니까 괴기 먹이겠다는 거 아닌감. 겸사겸사 기름 뽑아서 우리도 목욕 좀 하고."


"정말 됐어요. 돌쇠한테 미안하잖아요."


"그랴? 요새 소가 많이 늘어나서 슬슬 잡아야겠다고 하던디?"


"……그런거면…"


"잉?"


"…다 같이 먹게 한 마리만… 어떻게 좀…"


"고럼고럼. 괴기가 안뗑길 리가 없지. 내일은 아침 먹지 말고, 아덜 수업 끝나면 바로 와!"


"고맙습니다."


"…크흠. 고건 고렇고, 요새 촌장이랑은 잘 되어가는감?"


"예?"


"에헤이, 총각. 뭘 모른다는 듯이 굴어~ 거 촌장 아가씨가 그래 웃음이 많은 아가씨가 아니었는데 총각하고만 다니면 웃음을 멈출 줄 모르잖아. 총각도 그래. 웃음이 많아졌어."


"많이 웃게 된 거랑 레아랑 무슨 상관이죠?"


"거 참. 여그까지 와서 빼는감? 그렇고 그런게 아니고서야 그럴 수가 있느냐는 얘기지."


"그런 거 아니에요."


"흔하지 않은 아가씨야. 우리 촌장 아가씨가 생긴 것도 참하지만 마음씨가 그렇게 고울 수 없어. 그런 아가씨가 혼기가 다 찬 것도 모자라서 철철 넘치는데 아직도 짝을 못 구하다니. 우리 노인네들끼리 얼마나 안쓰러워 했는지 알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라니 잘해 봐. 마음이 잘 안맞는 구석이 있더라도 총각이 너르게 받아주고. 뭐, 다른 구석이 잘맞는다면 고거야 별 일도 아니겠지만."


"……듣고 계세요?"


"거 왜, 히히히. 고런 것들 중엔 떡정이 제일 무섭다는 말도 있지 않은감. 암. 고거만 잘 맞으면 다른 건 문제가 아니지."


"……아. 예."


"그라믄 내일 보자고!"


"살펴 가세요."


   




* * *






귀가경로에 놓인 나무다리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스멀스멀 산 너머로 기어들어가는 중이었다.  


"어머, 오빠. 어서 와. 오늘은 빨리 왔네."


그리고 오늘도, 나무다리 중앙의 난간에 두 다리를 내밀고 앉아있는 메리와 마주쳤다.


"일이 적었어서. 너도 변함없이 여기있네."


"내 아지트니까."


메리는 슬쩍 내 쪽을 확인하고 품에 들린 캔버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메리에게 다가갔다.


"어디 봐. 다 완성했어?"


"응. 그런대로. 봐. 어때?"


캔버스 위로 카키와 라일락이 어지럽게 회오리치는 듯한 회화에서 꽃의 윤곽을 발견하고 메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메리의 옆얼굴은 만족스러운 건지 불만족스러운 건지, 자신의 작품을 애매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네의 수련이네."


"맞아. 정확히는… 그렇게 보일 뿐인 그림."


여느 때 처럼 '그렇게 보일 뿐인' 이라 정정한 메리가 흰 원피스를 툭툭 털고 일어나 네온그린 색 가디건을 고쳐 입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보일 뿐인 이번 그림은 원본과 얼마나 일치하나요?"


미술 박물관에 방문한 학생같은 말투로 나는 물었다.


"99.8 퍼센트. 물감이 구린 걸 감안하면 98퍼센트까지 떨어질 거야."


"뭐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잖아. 그런데 왜 불만이야?"


"왜냐니. 몇 번을 말 해. 난 '이런' 그림 밖에 못 그려. 바이오로이드니까."


"이런 그림이라고 말하기엔 전부 명화들이 아닌가 싶은데…"


메리의 '이런' 그림이란, 모사를 말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다 빈치의 암굴의 성모, 오늘 그린 모네의 수련 등등… 거장들의 명화들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모사하지만, 결코 자신만의 오리지널을 창작해낼 수 없다. 명화들의 원본을 사기엔 경제력이 부족한 인간에게 그럴 수 밖에 없도록 남몰래 주문제작 되었다나. 멸망 전부터 오직 모사만 해왔다는 모양이다. 


"명화든 거장이든, 지금 다 무슨 소용이야. 원본 대다수가 소실되었을텐데."


몸을 휘릭 돌리고 앞서 걷던 메리가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곁눈질했다.


"집에 가자, 오빠."


걸음을 옮겨 메리 옆에 나란히 선다. 팔을 굽히면 메리가 팔짱을 껴온다. 레아보다는 여러 면에서 연령이 어려서인지 거부감은 들지 않는다. 애초에 팔짱을 껴주지 않으면 메리는 출발하지 않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앞으로 집까지 5분도 되지않는 거리를 그런 상태로 걷는다.


"그러고 보니 오빠. 다음 주면 오빠가 여기 온지도 두 달이야."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메리의 발걸음 템포에 맞춰 걸었다.


두 달이라. 벌써 그렇게나 흘렀나. 인공적인 조명이라곤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숲길을 걸으며 되돌아본다. 그 날, 무언으로 이곳에 남겠다는 뜻을 내비친 날 이후로 두 달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다. 굳이 정확하게 나눠보자면 정신적인 면에서 짧았고 육체적인 면에서 길었다. 


이곳에 남는다는 결정이 뭔가 대단한 선택을 한 것처럼도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확성기 녀석부터가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고 했을 뿐더러, 나 자신도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해보자고 생각한 적은 이 두 달간 단 한 번도 없었다. 남겠다고 한 것도 실은 대단한 이유가 아니다. 확성기 녀석과 레아에게 감응하여 동정이라도 느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이 곳의 환경이 마음에 든다. 그래서인지 덧없는 상념에 잠기는 시간이 줄었고 악몽을 꾸지도 않는다. 그 정도의 이유였을 뿐이다. 게다가 정신을 한 켠부터 좀먹어가던 고질적인 우울증을 치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울증과 완전히 결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찾는 것도, 부르짖는 것도 의미없는 첫사랑의 망령과 함께.


그럴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한 나는 축제가 모두 끝난 그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 이전의 보름 동안 해왔던 생활 패턴에 집중하여 그대로 유지했다. 동네 주민들과 조금 친해지고, 이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하는 여러 일들을 돕거나, 좀 더 번듯하게 선생 노릇을 하는 등. 몇 가지를 더 첨가해서.


"오빠 눈이 흐리멍텅해진걸 보니 또 이것저것 생각하나보네. 분명 솔직하지 못하게 자기변명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이 메리가 태평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는 팔짱에 힘을 주었다.


메리 말대로일지도 모른다.


아니, 인정하자.


다른 이유 없이 순수하게 이 곳이 좋다.


메리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 것도 한 두번이 아니다. 따라서 한 번 정도는 솔직하게 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면 더 이상 이런 식의 자기변명은 좋지 않다. 애초에 남겠다고 한 시점에서 변명할 거리도 없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나 자신을 비웃지 않을 수가 없다. 목숨을 한 번 허공에 내던지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다니. 그렇게 맺은 관계의 대상이 실은 인간도 뭣도 아니라니. 그러나 그들이 내겐 인간과 다를 바 없으므로, 어떤 면에선 더 인간답게 느껴지므로 '인간관계'라는 표현은 정정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엉망인 인간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본래 살던 세계도 아니고, 인간이라곤 단 둘 뿐인 별세계에 와서야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마나 망가진 인간이냔 말이다. 죽으려고 했기 때문에 다시 살게 됐다? 죽으려고 했기 때문에 이전에 없던 관계의 구축을 경험할 수 있게 됐다? 아이러니도 뭣도 아니다. 도리어 아이러니란 단어에게 미안하다.


"다 왔다. 오빠. 정신차려. 또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메리가 검지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최근들어 이런 불쾌한 상념은 찾아오지 않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또 머리까지 푹 잠겨있었다.


서둘러 고개를 젓고 메리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잘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별 반응이 없는걸로 보아 미소가 영 어색했던 듯 했다.


"우와. 리모델링 끝냈다더니 진짜네?"


눈 앞에 펼쳐진 내 오두막은 이 두 달간 상당히 변했다. 주변에는 둥글게 나무 울타리가 새워지고, 오두막의 왼편에는 작은 정원, 오른편에는 야외 목욕탕이 생겼다. 바위로 이루어져 뜨거운 물을 채우면 온천탕이 되고 찬 물을 채우면 수영장이 된다. 물의 온도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예상할 수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연탕이 아니다. 인공적으로 정제된 물이며, 어느 수도꼭지를 개방하느냐에 따라 온도가 변한다.


이 숲 한가운데에 어떻게 수도를 설치할 수 있었는가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다. 이걸 궁금해 하면 나무 오두막 안에 자리 잡게 된 화장실과 냉장고, 싱크대도 자신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주장 할 것이기에, 그냥 쇠돌이의 기술이 상당하구나. 라고 여기기로 했다.


"내가 살 땐 이런 건 하나도 안해줬는데. 불공평하네. 우리 촌장 언니."


말이 나온김에, 무표정으로 볼을 부풀리고 있는 이 소녀에 대해 첨언하자면 본래 이 오두막의 주인은 메리였다. 더해서 이 숲까지. 아무래도 이 숲은 귀신이 나타난다는 심령스팟이었던 모양이라 메리 이외에는 그 누구도 살려고 하지 않았다는 듯 하다.


축제가 끝난 후,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본의 아니게 메리의 집을 뺏어버렸다는 것은 뒤로 한 채 당장 확성기를 찾아가 흠씬 두들겨 패버렸다. 확성기는 이전처럼 고통스러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때려달라는 듯이 낄낄거렸다. 

보아하니, 뇌 구실을 하는 내부기관 어딘가가 완전히 맛이 가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그 낄낄거림에 부응하여 이대로 새로운 취향에 눈뜨게 해주겠다는 기세로 무자비하게 후드려 팼다.

이후, 평소에 쌓인게 있었는지 나를 말리긴 커녕 속이 시원해 하는 레아를 통해 메리를 소개받는다. 이 때가 축제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이다.


그 날부터 메리는 본래 이 곳의 주인이었던 만큼 숲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됐다. 숙식은 레아의 집에서 해결하고 가끔은 내 오두막에서도 몇 일 지내다 간다. 미안한 마음에 내가 나가서 살테니 다시 들어오라고 권해봤지만, 레아와 나 사이를 오가는 지금이 더 좋다고 했다.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는 말을 제 입으로 잘도 말한다고 생각했다. 어려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메리는 상당히 4차원적인 면이 있는 소녀로, 마이페이스적인 기질도 다분하다. 성정은 착하기 그지없지만, 가끔가다 이상한 타이밍에 생각도 못한 질문들을 던져대고는 한다.


"오빠에게 촌장 언니란?"


"음… 허당끼가 있고 가끔은 엉뚱한 녀석."


"맞아. 맞긴한데, 오빠가 할 말은 아니네."


"응?"


"오빠는 엉뚱한 걸 넘어서 서투르니까."


"서툴러? 내가?"


"응응. 오빠 몰래 그 보름 동안 오빠를 관찰한 결과,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오빠, 꼭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같구나. 라고요."


"어째서?"


"아. 정확히는, 외계가 두려워 방에 쳐박히는 그런 인상의 고슴도치가 아니야.

오빠는 품에 안고 있는게 없어질까 두려워하는 고슴도치야. 단순히 겁많은 고슴도치는 외계와 최소한의 교류라도 하거든? 근데 오빠는 버젓히 외계에 서있으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은 타입이야. 어떤 면에선 오히려 외계에 고압적이기까지 해. 업신여기기도 하겠지. 필요없는 아는 척도 자주 할거야. 사실은 본인도 제대로 아는 건 요만큼도 없는데.

그런게 다 드러나. 있잖아 오빠. 그럴려면 최소한,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해 드러내지 않는 철저함이 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고 메리는 생각 해."


"다 좋은데 자기자신을 3인칭으로 칭하지 마."


이런 느낌의 4차원이다. 가차없는 말을 태평해 보이기까지 하는 무표정으로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 * *






"으음"


식사를 마치고 최근 들여온 오디오에 아무cd나 삽입한 다음, 침대에 앉았다. 이 침대도 최근 바꾼 제대로 된 매트가 설치된 녀석으로, 이전의 나무침대를 더 사용했다간 허리가 나갈 것 같아 레아에게 강하게 요청해 바로 바꾼 것이다.


손으로 만든 카메라에 나를 담고 가만히 보던 메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오른쪽을 가리켰다.

오른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자 "왼쪽이야." 라고 차갑게 말했다. 이 녀석, 그림에 한해서는 굉장히 예민해진다.


"어때? 오늘은 그려낼 수 있겠어?" 라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며 내가 말했다. "이대로 있으면 돼?"


"조용히 해."


"응"


"대답도 하지 마."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고정했다. 오늘은 어떨까. 전에는 가만히 앉은 자세로 살짝 위를 본 채 2시간이나 움직일 수 없었다. 전전에는 요염하게 누운 자세로 3시간이었다. 상당한 고역이다. 뭐 그래도, 집을 빼앗은 대가를 피사체가 되어주는 것으로 지불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래줄 수 있다. 게다가 오늘은 운이 좋게도 편한 자세다. 가만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거라면 반나절이라도 가능하다.


반나절이라도 가능했는데, 메리는 한시간도 되지않아 한숨과 함께 캔버스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오늘도 안 돼?"


"응. 아, 힘들다. 오빠. 나, 머리를 썼더니 배고파졌어."


그렇다면 허기를 달래줘야 마땅하다. 냉장고를 확인해본다. 엊그제 시장에서 산 닭가슴살과 녹색채소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외엔 하나같이 메리가 질색할 것들 뿐이다. 밤도 슬슬 깊어가고, 저녁도 이미 먹었으니 샐러드가 적당하겠다.


"오빠 말이야. 촌장 언니보다 요리 잘하는 것 같아."


"레아한텐 비밀로 해."


"뭐야? 이럴 땐 오빠가 부정해야지."


"아니 내가 봐도 레아의 요리실력은 영 아니니까."


메리가 샐러드에 포크를 가져가다 말고 키득거렸다.


"벌써 한 달인데 언제 쯤 그려낼 수 있을까?"


드레싱 소스가 덜뭍은 녹색을 목구멍으로 넘긴 다음 말했다.


"이번에도 머리가 아팠어?"


"응. 엄청."


메리의 포크가 머리에 겨눠지고 빙글빙글 돌더니 닭가슴살 조각에 푹 꽂혔다.


"역시 포기할까봐."


내가 하고있는 피사체 노릇은 메리의 '집을 빼앗은 대가를 치루라' 라는 장난기 다분한 구실 아래 시작됐다.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며 도전을 하고 싶다고 밝힌 메리는 반드시 자신만의 오리지널 작품을 그려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려고 하면 붓이나 펜을 한 번이라도 휘두르기는 고사하고 두통 때문에 제대로 집중도 하지 못하게 되는지라, 이제껏 단 한 번도 내 얼굴은 커녕 윤곽조차 그려낼 수 없었다. 


메리는 이에 대해 저항하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은 오로지 모사만이 가능하도록 주문제작 되었기에 오리지널을 그려내는 것은 설계의도에 반한다. 그 부작용으로 강한 두통이 일어난다. 어찌나 아픈지 당장 머리통을 열어젖혀서 모듈을 빼내고 싶을 정도다


내 눈에는 그 정도로 아파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나 어떻게든 선이라도 한 줄 그려보고자 고통도 감내하고 집중하던걸까. 나를 피사체로 삼기만 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다음부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샐러드를 금새 먹어치운 메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과장된 몸짓을 취하고 입을 열었다.


"아아~ 오빠. 어떡하죠? 메리는 '메리'라는 세상에 갇혀버리고 말았어요. 이렇게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피사체가 있는데, 피사체에게 실례네요."


"새처럼 부수고 나오세요."


"에이 참. 오빠. 지금은 '사랑스럽다.' 라고 표현한 부분에 반응해줘야지."


눈치가 없는 오빠네. 라고 중얼거리고는 양 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최대한 부담스럽지 않은 척 샐러드에 신경을 집중했다.


"오빠에게 사랑이란?"


이젠 익숙해져서일까. 그래. 느닷없는 질문이 날아온다면 이 타이밍일 거라고 예상은 했다. 질문의 내용도 대화의 맥락을 통해 어느정도 예상했다.


포크질에 뭉개진 샐러드를 바라보다가, 메리에게 고개를 들었다.


"저주."


말해놓고나서 놀랐다. 내가 생각해도 저항감이 너무 없었다.


"흐응... 그래?"


가늘어진 눈꺼풀 사이로 한 쌍의 둥근 오레올린이 어둡게 빛났다. 


"다 먹었어? 그릇 치운다?"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고서 없었던 이야기로 해달라는 시선을 보낸 뒤, 싱크대로 향했다.


"상처가 많은 고슴도치네. 너무 재미없어서 메리는 따분해졌어요."


"아니. 그러니까 3인칭은 하지 말라고."


"아, 정말. 또 번짓수를 잘못 잡았어. 지금은 고슴도치 취급받은 부분을 걸고 넘어지면서 화를 내야지.

뭐, 이건 그렇다치고. 오빠. 3인칭이 싫어? 이러는 메리는 귀엽지 않아?"


손으로 만든 꽃에 턱을 올리고 메리가 물었다.


"당연하지. 귀여움을 의도한 시점에서 귀여움이 상실 됐으니까."


"귀여움이란, 의도해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인가요? 우리 사랑스러운 고슴도치는 그걸 구별 할 수 있어요?"


"구별할 수 있지. 예를 들면 그래. 허당끼가 있는 레아나"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제발, 메리가 듣지 못했기를 간절히 빌었다.


"응? 레아?"


"뭐?"


모른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그렇게 의도했어서일까. 내가 시치미를 떼고 있다는 것을 메리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촌장 언니가 귀여워?"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아냐아냐. 방금 레아. 레아라고 했어. 분명히 들었어."


"오늘은 유독 두통이 심했나 보네. 환청까지 들을 정도면 말이야."


"아하. 오빠. 촌장 언니가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야."


"촌장 언니한테 다 말해야지. 언니 엄청 좋아하겠다~"


"하지 마!"


"뭐어야~ 그렇게 튕기더니 결국은 좋아하는게 맞았잖아. 동네 어르신들 아주 신나하시겠네~"


얼마나 확대해서 해석해야 그런 결론으로 도달하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귀엽다고 느끼는거랑 그런 식으로 좋아하는 건 조금도 관계가 없다. 계기가 될 순 있겠지. 하지만 나는 결코 레아에게 마음이 동한 적이 없었으므로 내게는 그것이 계기가 될 가능성도 없다.


그런 내 변명은 한 귀로 흘리고 메리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 꺄르륵대며 나뒹굴고 있다. 슬슬 주먹을 꺼내들어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머리에 혹을 하나 만들어주면 얌전해지는 녀석이 하나 있다. 내 학생인 테티스로, 가만히 살펴보면 메리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슷하기만 하지 테티스와 메리의 소악마력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테티스는 놀려대는 걸 좋아하지만 요령이 없고, 메리는 있다. 테티스는 능청스럽지 못하나 메리는 능청스럽다. 거기에 4차원적인 면까지 가미 되어있는데다가 자신의 정신연령과 신체연령을 무기로 삼을 줄도 아는, 아주 사악한 녀석인 것이다.


주먹을 내렸다. 이런 녀석에게 혹을 만들어봤자 역효과만 난다.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깔깔대는 소리를 가능한 차단해가며 반격에 사용할 수 있을만한 걸 찾았다.


새로 들인 책상 위에 레아가 줬던 설정집이 눈에 들어왔다.


"아, 맞아. 메리. 혹시 그거 알아?" 라고 운을 떼면서 화제를 돌렸다. "글쎄 있잖아. 오르카의 메리는 제 주인에게 오라버니라고 부른다는데?"


"으우욱."


거짓말 같이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그에 바톤터치하듯, 인공적인 토악질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대답이었고, 즉답이었다.


효과가 있다.


"음. 저기, 메리. 나는 네 주인도 아니라 이런 부탁은 좀 뭐한데, 나도 한 번 오라버니라고 불려보고 싶어."


"으에에엑."


오만상을 찌푸린다.


"빨리. 빨리 해 봐."


"싫어!"


그렇게 한동안 레아와 오라버니가 오두막에 메아리쳤다. 

슬슬 힘이 빠질 때가 되어서 이것도 지루해졌는지, 메리가 자연스럽게 다른 걸 요구해왔다.


"오빠. 월초에 요람 밖으로 탐사나갔다 왔지?"


요람이란 이 오두막을 품은 작은 세계를 가리키는 레아의 표현이다. 편의상 내 이해를 위해 레아도 균열이라 칭했었지만.


"그랬지."


"그 때가 몇 번째였지? 3번 째?"


"맞아."


엎드린 채 메리가 입을 삐죽 내밀고 올려다본다.


"그 때 나갔다왔던 얘기 안해줬잖아. 지금 얘기해주라."


"그럴까? 딱히 재밌는 일은 없었는데."


"빠알리."


"그래. 그럼 오늘은 자고가야겠네."


"그럴 줄 알고 미리 잠옷 가져다뒀지롱."


침대맡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보따리를 꺼낸다. 내가 외출해 있을 때 들렀던 걸까. 이 집은 메리의 집이기도하니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화장실가서 갈아입고 와."


그렇게 말하고 검지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훔쳐보면 안 돼?"


"볼게 어디있다고."


"오빠는 메리같은 어린 여자가 취향이잖아."


"아니야 임마!"


닫혀가는 화장실 문 사이로 사악하게 이죽거리는 얼굴이 보였다.

저 녀석을 완벽하게 이길 날이 올까. 생각해봐도 도무지 그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들른 겸 이것저것 볼 일을 보는 모양인지 메리는 당분간 화장실에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설거지를 마치고,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맡 협탁의 조명만 켜둔 채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조명의 주홍빛에도 삼켜지지 않은 반딧불이의 완만한 녹색명멸이 시선을 끌었다. 리모델링을 해서 이전의 오두막은 기억 속으로 사라졌는데, 그럼에도 밤의 손님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방문해주고 있다.


"짜자잔."


주목해달라는 몸짓으로 나타난 메리에게 지극히 의례적인 박수를 쳐주고, 옆자리를 두들겼다.


"진정성이 없어. 진정성이."


침대로 날아든 메리에게 옆구리를 꼬집힌 걸 시작으로 우리는 여느 때처럼 레슬링으로 승부를 벌였다. 오해는 없기를. 문자 그대로 초보적인 기술만이 오가는 아기자기한 레슬링이니까.


서로 충분히 힘을 빼고서 내가 말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되지."


"그냥 그 날 하루 전체 다 얘기해주면 되잖아."


"뭘 고민 해?" 라고 중얼거린 다음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내 팔을 잡아당긴다. 적당히 끌어안아 달라는 신호인 것이다.

이렇게 누워서 끌어안을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녀석. 서있을 때도 결코 덩치가 작은 편이 아닌데 아니 누워있으면 덩치가 더 커지는 것 같다. 인체 중에선 몸을 말면 평소보다 더 부풀어오르는 체질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감상을 그대로 전하면 몸 어딘가에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찍힐 것은 예상해 볼 것도 없으므로 말은 아끼기로 한다.


그건 그렇고, 세번 째 탐사를 나갔던 날의 이야기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느 부분을 시작점으로 찝을지 모르겠어서, 메리의 말대로 처음부터 전부 이야기 해주기로 했다.


침대 맞은 편의 벽시계를 바라본다. 12에 걸쳐진 시침을 반대방향으로 수 십 바퀴 돌린다.

시간은 10월의 첫째 주. 운동회가 끝나고 이틀 뒤로 거슬러 올라간다.

      


   




* * *



다음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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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늦었다... 기다린 친구들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왔음.


이번에는 최대한 한편에 담고 싶은 내용을 압축해봤는데 어째 잘 됐는지 모르겠다 


이전보다 읽기 편해졌다고 느낀 사람이 있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