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헬리 문학 모음집


수복실에 들어온 소녀 장화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령관은 식사를 건네 받고 다시 레오나에게 넘겼다.


"레오나, 시그룬 밥 좀 먹여 줘. 난 장화하고 얘기 좀 하고 올게."


"알았어, 달링."


사령관은 장화를 이끌고 수복실 문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은 후 장화가 사령관에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내가 필요하다고 했지? 무슨 일이야?"


"음 아마 장화만 할 수 있는 일일거야."


사령관이 수복실 문틈 사이로 처음 보는 음식에 우물쭈물하다 레오나가 건네주는 숟가락을 무는 시그룬이 보였다. 사령관이 식사에 정신없는 시그룬을 가리키며 조심히 건넸다.


"장화가 시그룬을 도와줬으면 해."


"도와달라면 어떤 식으로?"


"오르카호를 안내해준다던지, 밥 먹을 사람이 없을 때는 같이 먹어준다던지, 심심해보이면 함께 놀아준다던지."


"뭐야, 왜 그런걸 나한테 시키는거야? 나 말고 더 적합한 사람들 많잖아?"


장화의 말대로 시그룬을 보살펴주고 돌봐줄 사람은 많았다. 태생적으로 보모 역할로 제작된 마리아나 아이들을 잘 다루는 샬럿, 다정하고 배려심 많은 뽀끄루 등. 장화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자신은 절대 누군가를 돌봐주는 재능이 없었다. 최근에야 사령관과 홍련, 몽구스팀 덕에 활발해졌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 


사령관도 장화의 말에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장화야말로 시그룬을 보살펴줄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혼자였대."


"응?"


사령관이 혹시 시그룬에게 들리기라도 할까 장화의 귀에 가까이 조심히 속삭였다.


"시그룬 말이야...여지껏 계속 홀로 지냈대...아는 사람도 없고....만나 본 적도 없고....지금까지 계속."


사령관의 말에 장화의 얼굴이 굳어갔다. 혼자. 그 고독. 그 고통. 장화가 너무나 잘 아는 것들이었다. 교류하고 감정을 나누고 소통할 존재가 없이 홀로 모든 것을 감내해야만 했던 지난 삶. 장화가 그나마 타인과 교류할 때라고는 마리아 리오보로스의 명령으로 테러를 할 때와, 복귀 후 그녀에게 학대 받을 때 뿐이었다.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는 것이 유일한 교류였기에 자연스레 장화의 삶은 피학적이고 가학적인 것 뿐이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 둘다 병들어가고, 올바른 교류를 하지 못한 채 속에서 고독으로 썩어들어가는 고통. 


장화가 문틈으로 보이는 시그룬을 응시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장화는 비록 비정상적이긴 했지만 적어도 타인과 소통을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시그룬은 그마저도 기회가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인간들이 멸망하고, 지금까지 목적도 의미도 없이 생존에만 급급한 너무나 순수한 영혼이었다. 그런 순수한 영혼이 오늘에서야 고독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다른 이들과의 교류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제야 장화는 사령관이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긴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야말로 시그룬의 고독에 공감할 수 있으니까. 그랬기에 시그룬이 자신처럼 비뚤어진 애정과 집착이 아닌 애정과 배려를 통한 교류로 이끌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사령관의 진위였다. 이윽고 장화가 결심이 선 표정으로 사령관을 바라봤다.


"알았어, 사령관. 서툴겠지만 최선을 다할게."


"고마워, 장화야."


사령관이 장화의 볼에 입을 맞췄다. 장화의 볼이 빨개지면서 베시시 미소를 지었다. 둘은 잠시 서로를 보며 웃음을 짓고 다시 수복실로 들어갔다. 어느새 시그문은 식사를 막 끝마쳤다. 식기 쓰는 법이 숙련되지 않아서인지 얼굴에 소스가 지저분하게 묻은 것을 레오나가 닦아주고 있었다.


"시그룬,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어."


"나.나한테..?"


사령관의 소개와 함께 장화가 시그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난 장화라고 해. 엠프리스 하운드 팀이었다가 지금은 몽구스 팀에 배속됐어."


시그룬은 장화와 장화가 내민 손을 번갈아 쳐다봤다. 장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장화가 손을 내민 이유 자체를 모르는 듯 했다. 정말 사회적인 지식이 완전히 전무했다. 레오나가 시그룬의 손을 맞잡고 장화의 손을 붙잡게 했다.


"자, 이건 악수라고 해. 처음 만난 사람끼리는 이렇게 인사하는거야. 손을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어봐."


레오나의 지시에 시그룬이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아...안녕...."


"오늘부터 네가 오르카호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내가 도와주기로 했어. 괜찮지?"


"도..도와줘...? 그...그러면...."


시그룬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괜찮아, 말해봐."


"그....네....네가......내....친구가 돼주는 거야..?"


시그룬의 너무나 순수한 질문에 장화가 도리어 놀라고 말았다. 장화 본인에게도 이렇게 스스럼 없이 친구라는 말을 건넨 이는 시그룬이 처음이었다. 홍련이나 몽구스 팀은 친구라기보다는 가족이었다. 언니인 홍련과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몽구스 팀은 너무 자연스럽게 장화의 가족이 되어줬다. 하지만 친구라. 물론 이제 오르카호에 그녀의 친구는 많았다. 하지만 시그룬은 그런 류의 친구가 아니었다. 서로 같은 고통을 겪은 동병상련의 처지. 어쩌면 이 세상에 둘 밖에 없는 사이일 것이다. 장화는 시그룬의 손을 두손을 붙잡았다. 느닷없는 온기와 손길에 시그룬이 흠칫 떨었다.


"그래...내가...네 친구가 되어줄게."


"저..정말?"


장화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그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앞으로 내가 매일 병문안 올게. 나 말고 너하고 친구해 줄 사람도 데려오고, 심심하지 않게 같이 놀자."


"저..정말로? 정말 그래줄거야?"


"그럼. 이제부터 우린 친구야."


시그룬의 입이 기쁨에 벌어졌다. 다정한 둘의 모습을 보며 사령관과 레오나, 드라우그가 조심히 뒤로 물러섰다. 레오나가 사령관의 손을 맞잡고 그녀의 뺨에 사령관의 손을 가져갔다.


"고마워, 달링. 시그룬을 저렇게 챙겨줘서."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하는건 역시 같은 상처를 아는 사람의 손길이지. 이 기회에 장화도 좀 더 성숙해질 수 있을거야."


-참 배려심이 깊군, 사령관. 그대같은 사람이 내 시대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드라우그가 얼굴에 쓴 웃음이 배어 나왔다. 인간도 바이오로이드도 아닌 초인병사로서 노예도 아닌 부품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과거에 만약 사령관 처럼 자신들을 위해 힘 써 줄 사람이 있었더라면. 사령관은 드라우그의 어깨를 툭 쳤다.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대신 이제 우리가 있잖아요. 기운 내세요, 영감님."


-허, 이제 벌써 그렇게 부르시겠다?


짖궂은 장난을 치며 셋은 장화와 시그룬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에 집중할 수 있게 조용히 수복실을 빠져나왔다. 장화와 시그룬은 그렇게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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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숨가쁘게 흘러갔다. 연구소에서 가져온 메인프레임 분석도 슬슬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안타깝게도 에인헤랴르 프로젝트에 관한 정보는 담겨 있지 않았다. 역시 오미크론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이었다. 하지만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알파가 케스토스 히마스를 직접 메인프레임에 연결하며서 그녀의 슈퍼컴퓨터가 한층 업그레이드되었고, 이를 통해 메인프레임간의 주파수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드라우그님이 말씀하신대로 메인프레임간의 주파수를 눈치챈 오미크론이 저희 쪽에 통신 간섭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제때 발견해서 방화벽을 강화시켜서 차단을 막았죠."


"그 뿐만이 아니야, 왓슨. 오미크론의 시도를 역이용해서 그녀의 주파수를 역탐지할 수 있었어."


"잘 됐네. 그러면 오히려 그녀가 있는 위치를 알 수 있게 된 거지?"


"네, 하지만 계속 막기만 하면 되려 오미크론이 눈치챌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적당히 미끼를 던져줘야지.


드라우그의 제안대로 알파와 리앤은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슬금슬금 풀어서 오미크론이 계속해서 메인프레임의 해킹을 유도하도록 만들었다. 작전대로 오미크론이 틈만 나면 메인프레임을 해킹하려 들었고, 그때마다 알파가 발각되지 않게 그녀의 위치를 추적하면서 그녀의 다음 목적지를 분석할 수 있었다. 계산상 그녀의 다음 목적지는 샌디에고였다. 볼 것 없이 오르카호는 바로 샌디에고로 방향을 틀었다.


그 과정에서 희소식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레오나와 발할라팀의 환영, 그리고 장화의 보살핌 덕에 시그룬도 점차 오르카호에 적응하고 있었다. 특히 장화는 시그룬의 고독과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녀를 잘 배려해줬고, 새로운 경험을 늘 시도하게 해줬다. 덕분에 시그룬은 최근 엘라의 보드게임 동아리에 장화와 함께 들어가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 주사위 신님, 저를 도와주세요!!"


달그락


"치명타 판정이에요."


"좋았어!! 자, 가자 시그룬!! 피의 신께 피를!!!"


"해.해골 옥좌에...해골을...!"


어째 즐기는 게임이 영 건전하지 못한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샌디에고로 향하는 길이 순탄할 무렵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훈련실에서 개인용 무기를 들고 몸을 단련하는 드라우그. 아침마다 거친 움직임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자신을 더욱 몰아세우며 한계를 넘어서려 했다. 군인과 남자이전에 한 명의 전사로서 한 순간의 방심과 나태는 죽음으로 이어지기에 그는 늘 빼먹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쌓아갔다. 이른 아침이기에 훈련에 무아지경이 되어서 집중하고 있던 드라우그.


우웅 철컹


느닷없이 열리는 문 소리가 그의 사색을 방해했다. 이 시간에 누가 올리가 없는데? 드라우그가 의아해 하며 잠시 휴식을 취할 겸 무기를 내려놓고 땀을 닦으며 들어온 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는....


"아..안녕하세요, 드라우그님..."


공손히 인사를 하는 소녀는 시그룬이었다. 그동안 잘 먹고 잘 쉬면서 몸을 휴식한 덕에 그녀는 어느새 본래의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다. 발키리나 레오나보다는 작았지만 제법 탄탄한 기골이 돋보이는 몸이었다. 드라우그도 맞인사를 건넸다.


-오르카호에는 잘 적응하고 있나?


"네...덕분에."


-다행이군. 그런데 이른 아침에 무슨 일이지? 훈련을 하러 왔나?


"아...네 뭐....정확히는 드라우그님을 보러 왔습니다."


물을 들이키던 드라우그가 의아해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그, 사령관님과 레오나 대장님께 들었습니다. 드라우그님께선 에인헤랴르 셨다고..."


-그래.


"오랫동안 전투를 겪으신 백전노장이자 뛰어난 전사라고 들었습니다."


-지나치게 과장된 평가다. 나는 그저 본분에 충실한 군인일 뿐이다.


"하지만 제가 직접 겪은 드라우그님의 강함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확히 뭔가?


그때 시그룬이 예상치 못한 행동을 취했다. 드라우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냅다 절을 한 것이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드라우그도 흠칫 놀랐다.


-이봐, 지금 뭐하는...


"드라우그님!! 부디, 저를 제자로 받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