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스틸라인 야간잡담 1편 : https://arca.live/b/lastorigin/31212289 

[단편]스틸라인 야간잡담 2편 : https://arca.live/b/lastorigin/31671739


스틸라인 5번 탄약고 초소 근무중이 이프리트와 레프리콘.

원래 분대장인 이프리트와 부분대장인 레프리콘이 함께 근무에 들어 갈 일은 없다.

하지만 하사(진) 이프리트는 행정계원들을 구워버릴 권위가 있었고

분대장 임무 인수인계라는 핑계는 그 임펫 원사도 적당한 행정적 착오를 눈감게 만들어주었다.

오르카호 분대장 임무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보통은 그렇지 않다.

단지 그 병장잡는 임펫 원사도 고개를 젓는 희대의 사고뭉치 브라우니2593번이 있는 분대였기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

어찌되었건 이프리트는 레프리콘에게 분대장직을 넘겨야 하는 말도 안되는(그래. 임관이라니 말도 안되지.)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레후야 어차피 너랑 나랑 하루이틀 같이 산 것도 아니고 분대장 대리 임무도 많이 해봤으니 어려운 건 없을꺼야."

"근데 이뱀. 아무리 제가 부분대장이여도 노움 병장 계시는데 분대장은 노움 병장이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네가 해야 돼. 꼭!"


하사(진) 이프리트는 이프리트의 임관이 곧 자신이 분대 최고참이 된다는 뜻임을 깨달은 노움의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저 분대장에 꽃는 순간 이뱀 머리부터 땅에 꽃히시는겁니다?'


마이티R과 언니동생하는 헬창인 자신의 분대원 노움이 밤 늦게 속삭이는 소리였다.

수십년을 함께 해온 이 두 바이오로이드는 서로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고

이프리트는 노움이 정말 분대장 달기 싫어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친분이고 짬밥이고 그 땐 정말 이뱀 죽고 저도 뒤지는 겁니다.' 정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노움은 정말 그것을 실현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이프리트는 그 심정이 이해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집요한 임펫 원사의 임관 권유에도 흔들리지도 않던 그녀의 전역에 대한 꿈을 단 1000일만에 접게 만든건 다름 아닌 그녀의 분대원 브라우니2593번이였기 때문이다.

이프리트의 후임 분대장이 된다는 것은 곧 브라우니2593번의 분대장이 된다는 뜻이였고, 본인이 아는 한 스틸라인의 모든 분대를 통틀어 가장 힘든 분대장이 된다는 뜻이였다.


결국 이 폭탄은 돌고 돌 필요도 없이 노움의 맞후임이자 현 부분대장인 레프리콘에게 갔다.

그리고 이프리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폭탄을 레프리콘 품에서 터트릴 생각이였다.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아직 세상의 때가 덜 탄 순진한 레프리콘은 이프리트의 그리고 노움의 속마음도 모른 체 물었고


"노움 걔 요즘 자기 개발에 빠져있어서 좀 보장해주고 싶어서 그래.

 너도 알다시피 걔가 나랑 같이 몇 십년을 저항군에서 굴렀는데 좀 챙겨줘야지.

 아무래도 분대장 달면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잖아?

 선임 좋다는게 뭐냐, 떠나기 전에 이런거라도 챙겨줘야지..."


이프리트는 솔직하게 '노움 시키면 걔가 빡돌아서 날 죽일 수도 있어.'라고 말하지 않을 정도로 타락했다.


하지만 착하디 착한 레프리콘은 그 정도 설명에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어흠... 어찌되었건 우리 분대 차기 분대장이 너인건 행보관(임펫 원사)도 알고 계시니 그쯤하자.

 어제 준 분대장 임무수행철은 가지고 왔냐?"

"네 여기 있습니다."

"그거 별로 쓸 일 없을꺼야. 그래도 검열이나 점검나오면 그거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니 잘 챙겨둬."

"아..."


한참을 잡다한 인수인계, 말이 인수인계지 그동안 이프리트가 구르면서 알게 된 노하우와 꼼수를 알려주고 있었다.

의무실 이용할 때 다프네는 친절한 거랑 별개로 일을 꼼꼼히 처리하는 타입이라 진료 내용이 바로바로 중대로 간다.

적당히 아픈 척 하고 쉬고 싶을 땐 리제한테 가는게 더 좋다. 불친절해도 침대에 누워서 자는 거는 그냥 넘어가 주더라.

요즘 임펫 원사 기동 장비 무음으로 개조해서 순찰 할 때마다 타고 다니더라. 초소 근무 때 공중감시 하는게 안전하다.

등등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주고 나서 마지막으로 이프리트는 가장 중요한 것을 넘기기로 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 2가지를 넘겨 줄께. 이건 꼭 잘 간직해라."

"뭡니까?"

"일단 이거, USB."

"... 이뱀?"

"각종 진술서 양식이야."

"???"

"분대장이 되면 분대원이 사고쳤을 때 자주 불려가서 쓰는게 있거든.

 그 안에 어지간한 양식 다 있어. 적당히 날짜랑 시간, 이름만 바꿔서 돌려 써."

"...그게 양식까지 따로 있을 정도로 많습니까?"

"브라우니2593번있지? 그 이후로 좀 많이 늘었어..."


좀 많이 늘진 않았다.

진술서 파일에 사진이 들어가다 보니 용량이 늘었지만 그깟 진술서 양식 모음집이 USB에 들어갈 만큼 많을리 없다.

평범한 부대라면 말이다.

아무리 순수한 레프리콘이라도 이쯤되면 브라우니2593번의 분대장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슬슬 깨닫기 시작했다.


"저 이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건데 브라우니2593번 전입 온 이후 많이 불려가셨습니까?"

"...아니."

"이뱀? 눈 돌리시지 마십쇼."

"...별로 안 불려갔어."

"정말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건데 노움 병장이 분대장 안 다시는 이유가 혹시?"

"아니야. 원래 분대장 전역하거나 전출가면 부분대장이 분대장 다는거라 그래.

 ...그 임관해도 어차피 같은 중대에 있을건데 내가 뭘 더 속이겠냐."


수상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레프리콘은 그만두기로 했다.

더 따져봤자 본인이 생각한 답은 나올 것 같지 않았고, 더 따져봤자 하사 이프리트와의 관계만 꼬일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레프리콘이 물었다.


"...나머진 뭡니까?"

"자 이건 오르카호 자원 생산 지원실 옆문 열쇠."

"거기에 옆문이 있습니까?"

"사령관님 오시고 나서 한참 있다가 자원 생산 지원실 만든 것 기억나지?

 원래 거기에 바이오로이드 제작실 만들었다가 다시 허물고 지원실 2번인가 지었어.

 근데 생산공장이 3칸 짜리인데 생산실은 1개만 만들고 남은 곳 대충 창고로 쓰더라.

 거기 옆문 있는데 평소에는 캐비넷에 가려져있어서 몰라."

"... 이뱀은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거 만들 때 끌려갔거든."

"근데 그걸 왜?"

"날 끌고 간게 임펫 원사야.

 가끔 중대에 물자빌때 몰래 가져오는게 거기야."


레프리콘은 어이가 없었다.

어째 이 양반 검열 때만 되면 없는 물자나 장비 슬금슬금 채워두길래 어디선가 가져온다고 생각은 했지만

임펫 원사까지 그 판에 들어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거 안 걸립니까?"

"임펫 원사가 보낼 때는 확실히 안 걸릴 때만 보내닌까 걱정하지마.

 어차피 거기 폐품 위주로 모아둔 곳이라 수량 조사도 안 해.

"그... 검열 때 거기 물건 주워오신거 아닙니까?"

"검열 나오는 사람들이야 숫자만 맞으면 크게 뭐라고 안 하잖아."


겉모습만 그럴듯한 폐품으로 검열을 넘기다니 아, 오르카의 미래는 어둡다...


"아 그러고 보니 이뱀 임관하시면 직책 뭐하십니까?"

"나? 화기소대 부소대장."

"아... 아쉽습니다. 그냥 계속 분대장 하시면 안됩니까?"

"하하하.. 마음만 받을께.

차마 브라우니2593번네 분대장 못해 먹어서 임관으로 도망간다는 말은 못하는 이프리트였다.


"어차피 화기소대라고 해도 같은 층이잖아. 오며가며 자주 볼꺼야.

 나 임관해도 모르는 것 있음 자연스럽게 물어보고."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일단 임관 축하드립니다, 이뱀. 고생하셨습니다."

초소 안에서는 전임자와 후임자 간의 덕담과 축하가 이어지고 있었다.


한편 병력결산 중인 대대장실에서는...

"아, 임펫 원사. 이번 달에 임관하는 이프리트가 브라우니2593번 분대장이라면서요?"

"네 그렇습니다."

"잘 됬네. 계속 분대장 시키죠."

"...네?"


임펫 원사는 정말 오랜만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브라우니2593번 피하려고 임관까지 한 이프리트였다.

근데 계속 분대장을 시킨다고? 대대장님?


"그 브라우니 사단에서도 유명한 브라우니 아닙니까.

 이번 기회에 간부가 직접 관리하는 것으로 하죠.

 마침 오랫동안 돌봐온 이프리트가 간부가 된 후에도 계속 돌봐준다. 딱 좋네요."


식은땀이 흐르다 못해 울고 싶은 임펫 원사의 속도 모르고 대대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지난번 사건 때문에 연대장님께서도 당부했던 아이입니다.

 관찰의 지속성도 있고, 이프리트도 간부가 되면 책임감도 늘겠죠."

"그... 이프리트는 임관하고 화기소대 부소대장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어떻게든 이프리트의 폭주를 막고 싶은 임펫 원사는 화기소대장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막아! 어서! 제발!'


"아유 언니 저흰 괜찮습니다. 대대장님 말씀대로 하시죠."


하지만 눈치 없는 저 화기소대장은 임펫 원사의 눈치를 본 건지 만 건지 대대장의 의견에 찬성했다.


"고맙습니다, 소대장.

 하하 덕분에 한시름 놨네요.

 이제 슬슬 식사하러 가시죠."


웃음을 지으며 앞장서는 대대장과는 다르게

죽을 상을 한 임펫 원사는 이프리트 임관식 전 그녀의 폭주를 막을 방법을 생각하며 다짐했다.

오늘 반드시 저 눈치없는 화기소대장을 담그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