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설정과 다를 수 있음

*좀 매운맛, 새드 엔딩

*이전 글 마음속에 늘 함께하는 그대를 그리우며 아스널

*그 외 그동안 쓴 문학 총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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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이곳은 언제 와도 늘 그리운 장소네요..."


한적한 숲 속, 조용히 마련된 소박한 묘지. 사랑하는 이를 묻은 곳으로 삼기에

조금은 부족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키르케는 사령관의 뜻을 존중하여 이 곳에 그를 묻었다.


"후우~ 걱정 마세요... 사령관 님... 오늘은 음주 운전은 안 했으니까."


키르케는 묘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늘 애용하던 마녀 컨셉을 지키기 위한

빗자루도 타지 않은 채, 그녀는 먼 거리를 홀로 걸어왔다. 그와 함께 나눌 와인 한 병을 든 채

유유자적 걷는 것도 좋은 기분 전환이 되었다.


"사령관 님... 벌써 세상이 많이 복구 되고 있어요. 이게 다 사령관 님 덕분이겠죠."


다시 옛날 번영했던 그 모습을 찾아가는 세상을 떠돌며, 그녀는 많은 것들을 보았다.

지난 전쟁에서 파괴되었던 주택가는 화목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고 다 타버렸던 숲은 

아름다운 공원이 되어 산책하는 사람들이 늘 보이는 곳으로 바뀌었다.


"오늘은 테마 파크를 지나쳐 왔어요."


지난 날 멸망 전 있었던 세상에서 보았던 테마 파크, 그 지옥과 같았던 혐오스러운 그 곳은

아이들의 미소가 끝없이 들려오는 환상적인 곳으로 변해 있었다.


"사령관 님이 저에게 약속 하셨죠."


다시는 그런 지옥과 같은 곳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의 약속. 키르케는 그 약속에

이끌려 사령관을 따라가 그의 곁에서 함께 싸웠다.


"정말... 정말로... 그 각오를 지키셨어요. 사령관 님은 정말로 그 약속을 지켜냈어요..."


C구역과 같은 곳들은 자신이 모두 끌어안아 심연 깊은 곳으로 묻어 버리리라 각오했던

그의 모습, 그리고 다시는 이런 장소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의 약속.


그 각오와 약속은 정말로 실현되었다. 비록 그는 죽고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는 수명이 다 해 키르케의 곁을 떠나기 전 까지 그녀의 곁에서 그것들을 지켜냈다.


"후훗, 너무 어두운 이야기만 했나? 그럼 모처럼 왔으니까 제 술 상대라도 해 주세요."


키르케가 들고온 와인을 열고 그의 묘지에 조금 부어주었다. 조르륵 소리를 내며 살포시

와인이 묘지에 흡수되고, 키르케는 자신의 입에 와인을 조금 털어 넣었다.


"하아~ 역시 혼자 마시는 것 보다... 사령관 님과 함께 마시는 것이 더 맛 있네요."


술 친구는 유미와 그렘린, 그리고 베로니카도 있었지만 역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술 상대는

사령관 이었다. 가장 긴 시간을 곁에서 모신 인간 님. 그리고 가장 사랑했던 남자.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키르케는 사령관이 먼저 떠나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 자신은 바이오로이드.

제 아무리 오리진더스트로 강화된 몸을 지닌 사령관 이지만 흘러가는 세월은 이기지 못했다.


"하긴... 나도 이제 슬슬 육체가 무너져 내릴 정도로 시간이 지났으니..."


멸망 전에 탄생한 키르케의 몸도 이제는 세월의 흔적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였을 거리도 이제는 힘에 부쳐 고되게 느껴졌다.


"그거 알아요? 저희 바이오로이드는... 조금만 개량하고, 수복 하면.. 더 오래 살아갈 수 있어요."


키르케가 와인을 조금 더 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가 떠나가고 벌써 100년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사령관이 먼저 떠나가고 그녀는 여행을 다녔다. 그저 목적 없이 떠도는 여행...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닥터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닥터는 그녀의 몸을 정밀 진단하고 그렇게 결론 내렸다.


'키르케 언니! 당장 수복 하자! 그렇지 않으면 언니는...! 언니의 몸이 오래 못 버틸 거야...!'


하지만 키르케는 닥터의 필사적인 권유를 거절했다. 사령관이 떠나고 마지못해 사는 목숨.

세상은 평화를 되찾고 번영하고 있으며 자신은 그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런데 전 수복을 거절했어요. 후후훗.. 사령관 님이 살아 계시다면... 분명 크게 화내셨을 건데..."


키르케가 사령관의 무덤에 등을 기대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청명하고 푸른 하늘, 그 하늘로 수많은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저 새들처럼... 자유롭게 날아도 봤고..."


고개를 살짝 돌리자 저 멀리 숲 속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사슴이 보였다.


"저 사슴처럼... 한가로이 숲 속을 거닐어도 보았고..."


이제 미련은 없다. 무너져 가는 이 신체는 그녀에게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탄생, 오래되어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많은 꿈을 부풀고 첫 발령지인 테마 파크로 향했다.


그 후의 삶, 테마 파크에서 C구역을 맡아 지옥도를 눈 앞에서 목도했다.

수많은 꿈을 갖고 찾아온 아이들이 그저 장난감으로 학살 되는 지옥과 같았던 풍경.

그 풍경들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사령관과 만나고 지금까지의 삶, 한창 전쟁이 격화된 와중에 만난 마지막 인간 님.

그녀는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그를 테마 파크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녀의 도박은 멋지게 성공하였다.


"이제... 시간의 순리에 따라서... 저도 드디어 사령관 님의 곁으로 갈 시간이 온 것 같아요..."


사령관이 남긴 그의 마지막 유언이 생각났다.


"저에게 그러셨죠? 충분히 살아 달라고... 평화를 누리고, 고통스러운 과거는 잊고...

그저 번영할 세상을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내게 누려보라고..."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 스스로 보다는 키르케를 더 걱정하고, 언제나 좋은 것들은

키르케에게 나누어 주던 따뜻한 사람. 그런 남자의 사랑을 받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행복했던 시간들을 누려보는 호사를 누렸다.


"후후훗... 세상에 어떤 키르케가 저만큼 행복한 생활을 해 봤을까요? 하아....

저는 만족해요... 이제... 당신의 곁으로... 드디어... 그립고, 또 그리웠던..."


키르케의 시야가 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한계치에 도달했던 그녀의 육체는 서서히 그 기능이

꺼지고 있었다. 


"아... 사령관 님..."


그녀의 뿌옇게 변하는 시야에 사령관이 나타났다. 가장 사랑했던 남자.

그녀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준 남자. 마지막까지 함께 있고 싶었던 그리운 사람.


"드디어... 당신의 곁에... 갈 수 있어요...."


그 말을 끝으로 키르케의 손에서 빈 와인 병이 스르륵 굴러 떨어졌다.

마치 평온하게 잠에 빠지듯, 키르케는 사랑하는 남자의 품 속에 안겨 들듯이

길었던 삶을 내려놓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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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잔에 그리움을 담아, 당신을 그리우며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