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으으…"


정신이 채 전부 들기도 전에 살짝 움직인 발가락 마디가 시큰거렸다. 뇌가 서서히 제 기능을 찾아감에 따라 서늘한 습기가 피부에 진득히 달라붙어 있는게 느껴졌다. 얼마가지않아 촉각이 완전히 돌아오고, 후각도 미각도 돌아왔다. 헐떡이는 숨에 맞춰 혀가 휘청이듯 돌아가자 잇몸 안쪽을 일제히 훑었다. 텁텁한 구강에 옅은 금속 맛이 나는 씁쓸함이 퍼져나갔다.


주위를 본다. 새까만 어둠 뿐이다. 눈꺼풀이 움직이는 걸로 보아 오감은 전부 돌아왔을 터인데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다. 눈은 뜨고 있어도 어둠뿐이라는 기묘함이 두통을 선사한 사이, 조금 거친 바람이 불어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바람에 몸을 맡긴 듯한, 싸아아- 하는 소리가 선명했다.


몸을 일으키려고 다리에 힘을 주자 전류가 흐른 듯 두 다리가 한 번 움찔 경련했다. 그 경련에 모든 힘을 빼앗긴 두 다리는 일제히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아니, 사실 일어난 적도 없었다. 두 다리는 무릎을 꿇고 있고, 허벅지와 종아리 쪽이 강하게 압박되어 있었으니까. 밭줄 같은 것에 결박되어 있는 것이리라. 몸이 기울어 옆으로 쓰러진 자는 그렇게 판단했다.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소리와 볼에 느껴지는 까슬한 감각으로 미루어보아 이 곳은 들판, 초원, 혹은 숲일까. 코에 닿은 것이 내뿜는 냄새로 판단하건대 세 가지 중 하나다. 잡초나 잔디… 뭐 그런거겠지. 그건 그렇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걸까. 그전에, 나는 누구지? 아, 맞다. 나는 드라코. 분명 나는 오르카호에서 작전명령을 하달받고 그 다음엔…


그 다음엔. 이라고 소리내어 말한 드라코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거나 얼굴을 바닥에 쓸어버리듯 비볐다. 다리에 얽힌 압박감은 벗어던질 수 없어도 눈가의 압박감은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분 정도 반복하여 머리칼이고 안면이고 풀색으로 범벅이 되어서야 드라코의 눈은 주위 풍경의 상을 맺을 수 있었다.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역시 예상한대로 눈은 가려져 있던 것이다. 마지막 기억을 더듬다 말고 하찮은 성취감을 잠깐 맛본 드라코는 옆으로 쓰러진 채 주위 풍경을 눈에 담으며 사고를 재개했다.


눈 앞은 잔디, 그 너머도 잔디, 좀 더 너머는 이슬비같은 안개, 그 주위도 온통 안개, 그 안개 너머에는 구릉같은 희뿌연 실루엣.


이상했다. 드라코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오르카호에서 무장을 챙기고 여느 때처럼 엄마와 초코 폭스, 히어로, 도넛과 작전 지역으로 향하던 중이었을 것이다. 작전 지역… 작전 지역… 드라코가 혼이 빠진듯 중얼거렸다. 기억이 거기까지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그 작전 지역이 이런, 안개만 없다면 꽤나 푹신한 기분이 들 것 같은 동산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드라코는 머리를 바닥에 몇 번 찧어 뇌를 맑게 했다. 단순하고, 종종 본인은 알게모르게 멍청이 취급받지만 용감한 드라코에게 어울리는 터프한 방식이었다. 단숨에 머리가 맑아진 드라코는 깊이 심호흡하고 머릿 속에 펜을 꺼내들어 점을 찍고 선을 이어갔다.


엄마가 말했다. 뭔가를 잃어버렸다면, 그 사실 깨달은 장소에서 헤매지 말고 완전히 처음부터 생각하라고. 예를 들면 하루 동안의 행선지 중 최초의 시작지점이라던가. 그 조언으로 드라코는 자신이 아끼던 책인 방법서설을 어이없게도 생활관에서 찾았더랬다. 영영 못찾으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하던 드라코는 제대로 적중한 조언에 감격하여 그 날, 하루 종일 엄마 주위를 돌며 연신 감사해했다. 그 성격 좋은 엄마가 귀찮아 했던 건 알지 못했다.


어쨌든, 점과 점 사이에 선이 한 줄 이어졌다. 가장 먼저 새롭게 기억난 것은 좀처럼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사령관이었다. 입은 일자로 굳어있었고 늘 맑은 빛을 내던 두 눈은 끝도 없이 깊어 주위의 모두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시선을 사령관에게 보내다가, 사령관과 눈이 맞으면 곧바로 피했었다. 드라코 자신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없었으나,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작전은 엄마가 아니라 사령관의 직속명령으로 실행하게 되었다. 작전안을 검토할 새도 없게 만드는 굉장히 감정적인 명령이었기에 몽구스들은 오르카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작전을 수행하러 떠났다. '찾아.' '관련 된 건 모조리 조사 해.' '만약 조우한다면, 가능하다면 죽여버려.' 등등… 평소의 사령관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험악한 단어들과 위협적인 말투가 얼마나 꺼름칙했는지 모른다.


점과 점 사이를 내달리던 선이 잠시 끊겼다. 사령관이 감정을 실어 신신당부한 건 알겠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도대체 무얼 찾고 무얼 죽여야 했던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철충이라면 사령관이 그렇게까지 감정적이게 되지 않는다. 적대세력인 아메리카의 펙스들에게선 특별한 동향이 감지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연결체? 설마. 연결체도 이제는 제원이나 특성 등이 대부분 파악이 완료되어 어지간히 수가 많지 않으면 이전처럼 특별히 위험하지가 않았다.


그 때였다. 종아리와 허벅지가 맞물린 다리가 반응했다. 미끌미끌하면서도 살짝 차가운, 이 안개로 희뿌연 동산을 촉각으로 치환한 듯한 소름끼치는 감각이었다. 이 감각에 드라코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뱀이었다. 은회색으로 빛나 보는 것만으로도 서늘해질 것만 같은 위협적인 뱀. 그 뱀이 다리를 휘감고 지나간 것 같다는 착각이 드라코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다리에 새겨진 그 감각을 지우고자 드라코는 한동안 이리저리 구르며 온몸을 비틀었다. 머리를 찧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몸부림이 잔디와 흙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잡초와 잔디가 흘린 피로 옷이 엉망이 되고나서야 드라코는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뱀을 만져본 적이 없다고.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치는 뱀의 밑바닥이 어떤 촉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왜 뱀을 연상한 걸까. 애초에 뱀 같이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녀석이 주위에 있었다면 머리가 둔한 만큼 육체능력이 뛰어난 드라코가 모를 리 없었다.


뱀을 사냥해야 할 몽구스가 뱀에게 겁먹었다. 그것도 존재하지도 않는 뱀에게. 자신이 한심해진 드라코는 기운 빠진 한숨을 푹 쉬고 엉금엉금 몸을 일으켜 시야각을 바로 잡았다.


"어딨니…"


"응…?"


"어딨니… 어딨니…"


느닷없이 들려온 속삭임은 결코 잘못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속삭임의 진원지를 찾아 드라코의 고개가 바쁘게 움직였다. "어딨니… 어디에 있어…?" 속삭임은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떠다니고 있어 정확히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래도 드라코는 고개와 두 눈을 쉬지 않는다. 귀를 간질거리는 이 속삭임은 환청이 아니다. 분명히 들린다. 게다가… 내가 잘 아는 목소리인 것 같다. 아주 많이, 이제는 질리게도 들은 목소리. 

그런 목소리의 주인을 거의 다 떠올렸을 무렵, 드라코의 정면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코는 그것이, 꼭 모습을 드러냈다기 보다는 안개가 지금 막 창조하여 내보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초, 초코 폭스!"


일단 마지막 기억 속의 자신은 작전 중이었으므로 호출명 겸 코드명을 입에 담는다.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미호다.


"여기야! 초코 폭스! 나 좀 도와 줘! 묶여있어서 꼼짝을 못하겠어!"


드라코가 다급히 외치든 말든 미호는 일정한 걸음속도를 유지하고 드라코에게 다가갔다. 전혀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닌데 태연해보이는 미호에게 드라코는 애가 탔다. 한 번 더 초코 폭스라 외치고 또 한 번 외쳤다. 네번 째 외쳐서야 조금 속도를 올린 미호는 그 걸음걸이와 어울리는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드라코를 결박에서 자유롭게 했다.


"괜찮니?"


"휴… 살았어."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다리가 저릿했기에 드라코는 잔디 위에 다리를 쭉 뻗은 채로 잠시 기다렸다가, 미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여긴 어디야? 아니아니, 우리… 방금까지 뭐하고 있었어?"


굳이 말로하지 않아도 의문스러운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라는 것이 드라코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미호는 그런 드라코에게 옅게 미소짓고 검지를 입 앞에 세워 대답을 보류한 채 안개 속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방금 걸어올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어쩐지 미호가 자신을 일부러 애태우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그 전에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던 드라코는 일단 그런 생각은 뒤로 하고 미호를 쫓았다.


달리기에는 아직 다리에 저릿함이 남아있었다. 가능한 빠르게 걸어 미호를 따라잡고서 드라코가 물었다.


"초코 폭스. 잠깐만. 여기가 어딘지 좀 말해 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넌 어쩐지 여기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라는 의미. 그 의미에 담긴 위화감을 아직도 알아채지 못한게 미호는 우스웠다. 그 뿐인가. 위화감을 느낄만한 요소는 지금만이 아니라 미호가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이미 한가득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말해 줄 수 없고… 음… 그러니까…"


"말해 줄 수 없다니!? 무슨 소리야!?"


없는 수염을 뽑는 시늉 중인 미호에게 드라코가 성큼, 한 발 다가갔다.


드라코가 뭐라 외치기도 전에 미호가 먼저 빙그레 웃고 입을 열었다.


"보물 찾기 중이었어."


두서없는 그 말에 드라코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뭐? 보물찾기? 이런 안개 속에서? 지금이 농담할 때인가. 아무리 머리 나쁘다고 자주 놀림받는 나라도 작전 때는 한없이 진지해지고 임무와 관련 된 지식만큼은 풍부하여 지금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다. 이런 식의 놀리는 듯한 말투로 작전과 한참 동떨어져있는 말을 꺼내는 것은 옳지 못하고 무엇보다 미호답지 않다. 미호가 누구인가. 평소에는 짓궂어도 작전만 되면 엄마 다음으로 진지해지는 동료이자, 가족이다. 그런 녀석이 보물찾기? 작전 중에? 


"나 불러 봐."


드라코의 뺨이 굳고 눈이 가늘어졌다.


"부르다니?"


"내 호출명 불러보라고. 우리 작전 중이잖아."


"호출명? 넌 드라코잖니."


이 대답으로 드라코는 알아챘다. 드라코 본인은 상당히 빨리 알아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미호가 짓기 시작한 불길한 미소에는 '이제야 알아챘냐.'는 의미가 담긴 듯 했다. 호출명이 뭐 대단한 거냐는 식의 대답도 대신하는 것 같다.

미호에게서 한 발 물러난 드라코가 다시 말했다.


"작전 중에 개체명은 부르지 않아. 그게 '우리' 방식이야. 몽구스의 교범에도 적혀있어. ……너, 누구야?"


"…아. 그런거였구나."


라고, 몰랐다는 듯이 반응한 미호이지만 불길한 미소는 유지하고 있다. 눈 앞에 있는 드라코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웃겨 죽겠는지, 소리 죽여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양손으로 억누른다.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 자세를 고친 미호가 검지로 드라코를 가리켰다.


"내 보물은 너야."


"나…?"


"응. 그리고, 내 호출명은 초코 폭스가 아니라 묘호(妙狐)야. 아, 아니지 아니지. 묘호였어. 한 때는 그랬어."


발음하기 어렵지? 라고 덧붙인 미호가 누구인지는 더 파악할 것도 없었다. 이 녀석은 내가 아는 미호가 아니다. 드라코는 곧바로 맨손전투에 대비한 자세를 취하고 가능하다면 이탈 할 수 있도록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여기서 이 정체모를 미호와 대치하거나 전투를 벌이는 건 옮지 못하다. 최우선적으로는 팀에 재합류하고, 그게 안된다면 오르카와 교신해야 한다. 퍼뜩 정신이 든 드라코는 자신의 귓가를 살폈다. 통신기가 없다. 생각해보니 그 뿐만이 아니라 무장도 없었다. 아무리 경황이 없었다고 한들,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살펴야 했던 건 자신의 무장이었는데 말이다.


"저 언덕 하나만 지나면…" 미호가 반 쯤 뒤돌아 안개 너머를 가리켰다. "네 엄마가 있어. 도넛도, 히어로도, 그리고… 초코 폭스도 있지."


"시끄러워. 뒤로 물러나. 안그러면 제압할 거야."


"어머? 그래?" 하고 쿡쿡웃은 미호는 "무섭네." 라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고 뒤돌아 언덕으로 향했다. 이런 상황에서 뒤를 보여? 내가 모르는 미호더라도 몽구스로 태어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아주 기초적인 교리도 모르는 것 같은 이 미호는 이상한 걸 넘어서 기분 나쁘기까지 하다. 무시당한 느낌인 것이다. 이탈하자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제압하자고 마음 먹은 드라코는 훈련 때 지독하게 반복했던 동작들을 머릿 속에서 한 번 그리고 미호의 등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잔디 위에 살포시 눕게 됐다.


태클이 완벽하게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등에 말이다. 뒤를 돌아있던 미호에게 반격의 여지는 누가봐도 없었다.


"당돌한 짓을 하는구나. 그냥 잠자코 따라오면 될 것을. 역시 옛날이든 지금이든 드라코는 드라코인가 봐."


드라코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자신의 복부에 올라타 있는 미호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몸 어디에도 미호의 손은 닿지 않았는데 공중을 한 바퀴 돌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쳐졌다. 이상한 것은 그랬음에도 고통이 없었다. 바닥이 잔디라 한들 등에 가벼운 충격정도는 있었어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하고 방금 전 상황을 그려볼 생각은 나지 않았다. 생각해봐도 모를 것이기도 했지만, '이 미호는 내가 이길 수 없다.' 라는 직감이 드라코의 전신을 경직시킨 탓이다.


바닥에 깔린 드라코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미호는 방금까지 향하던 언덕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 오셨다. 여기에요~"


자신이 아는 미호의 목소리톤과 비슷한 톤으로 외친 묘호를 따라 드라코가 고개를 위로 꺾었다.

반대로 된 동산의 언덕 중앙에서 안개로도 차마 가려지지 않는 존재감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존재를 인식한 순간 드라코의 모든 기억이 되돌아왔다.


그래. 뱀이다. 뱀이었다. 우리는 팀명에 걸맞게 뱀 사냥에 나섰었다. 작전명도 뱀 사냥이었고 타겟으로 삼은 것도 '블랙 맘바'라는 코드명이 붙여진, 미지의 철충 개체였다. 드라코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각에 휩싸였다. 방금 전 뱀이 다리를 훑고 지나간 것 같다는 착각이 힌트였다. 거기서 이미 알아챘어야 했다. 나같은 바보가 아니라 다른 동료들이었다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왜 나였는가. 왜 하필 그런 힌트를 받은게 나였냐는 말이다. 


바라지도 않았거늘 뇌가 멋대로 마지막 기억의 마지막 순간을 재생한다. 작전 지역은 이런 푹신한 동산이 아니었다. 완전히 파괴되고 어둠으로 물든 도시였고, 어둠 속에서 시야를 확보 할 만한 수단은 곳곳에 일어난 폭발로 발생한 불길이었다.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기도비닉을 철저히 유지하고 도시를 나아갔음에도 다 알고있다는 듯이 뱀이 습격해왔다. 최초의 전사자는 몽구스와 함께 투입 된 스트라이커즈의 미나였다. 그리고… 그리고…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양상의 시가전에서 마지막까지 서있던 건 드라코 자신이었고, 방패를 뺏긴 뒤에 그 방패에 맞아 기절했다. 그래. 그랬을 것이다.


기억의 재생이 끝났을 때엔 예의 그 뱀이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아, 왜 블랙 맘바인지 알겠다. 완전히 새카맣다. 이곳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 최초로 시야가 담았던 그 어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말 말그대로 새카맣다.


어느새 드라코의 전신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아하하. 얘 좀 봐요. 겁먹었나 봐."


"……"


어디를 보고 있는건지 모르는 눈을 한 드라코를 무시하고 뱀과 미호가 대화를 이어갔다. 철충이 어째서 바이오로이드와 대화를 할 수 있는가, 왜 바이오로이드가 철충에게 친근하게 구는가, 뱀이라면서 왜이렇게 인간과 무서울 정도로 흡사한 외형을 가진 것인가, 같은 의문다운 의문은 뇌가 굳어버린 지금의 드라코에게 어떠한 반응도 일으키지 못했다. 오직 마지막 기억의 마지막 순간, 그 순간의 직전만이 마음에 걸렸다. 


마지막까지 서있던게 자신이라면 내 가족들은 어떻게 됐을까. 죽었을까? 눈 앞의 미호가 말한대로라면 죽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뱀이 가족이 있다는 방향에서 나타난 걸로 보아 성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드라코의 뺨이 욱신거리고 눈물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드라코의 모든 감각이 '가족은 죽었다'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하나 묻지."


미호에게 무언가를 건넨 뱀이 드라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라벤더, 어디에 있어."


라벤더?


꽃을 말하는건가? 


무얼 지칭하는건지 모르겠다는 걸 알아챈건지, 뱀이 다시 물었다.


"너희 동료, 라벤더. 어디에 있냐고."     

   

라벤더?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런 개체명을 가진 바이오로이드는 오르카에 없다. 오르카에는 없으나 어딘가에 확실히 존재하는 개체라 하더라도 드라코에게는 처음듣는 개체명이었다. 모르니까 대답하지 못한다. 만약 알았더라도 거의 졸도하기 일보직전인 상태가 된 드라코는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애초에 드라코에게 큰 기대나 흥미는 갖지 않았던건지, 뱀은 한심하다는 코웃음을 치고 미호에게 무어라 몇 마디 한 뒤에 나타났었던 언덕으로 향했다. 


"보물찾기를 해봤으면 알고 있겠지? 널 찾은 순간부터 넌 내 것이 된 거야."


미호의 왼손에 작은 유리파편 같은 조악한 날붙이가 들려있다. 날붙이는 아주 천천히, 드라코의 떨리는 눈빛을 받아가며 서서히 내려가고 있다.


"가증스러운 것들."


날붙이가 드라코의 목에 닿고 파고들듯 말듯, 목덜미를 꾸욱 눌러 자국을 남기다 말고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수십 번 정도를 반복했을 것이다. 미호는 어떻게든 드라코에게서 유의미한 반응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드라코는 그 반복의 처음부터 끝까지 미호를 만족시킬만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드라코의 마지막의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 * *




 


"듣고 있냐? 야."


그런 말과 함께 뒤통수에 충격이 있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단박에 명료해지고 뒤통수에 일어난 고통에 손이 반응하여 뒤로 향하려는데, 그전에 옆구리에 예리한 아픔이 파고들었다.


"이 어린 놈의 새끼가 어디 어른이 얘기하는데 쳐 자빠져 졸고있어?"


"잠깐만요! 오드리 씨!"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힘겹게 방어하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오드리 씨의 졸고있었다는 말로 미루어 보아 방금까지 본 건 꿈이었던듯 하다. 아주 선명한 꿈…… 이런 상황이 이전에도 있었다. 언제였더라, 하고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 곳에 오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 교실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때도 지금과 동일하게 느닷없이 졸음이 쏟아지고 정말 이상한 꿈을 꾸었었다. 그리고,


"한 번만 더 쳐졸면 진짜 뒤진다 너."


오드리 씨에게 진심을 담아 끄덕이고 옆을 슬쩍 곁눈질 했다. 유아부 담당 선생인 미호가 '상어가족'으로 아이들을 인솔하며 지금 막 숲을 떠나려는 참이었다. 내 시선을 알아챈 것처럼 미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나는 미호와 시선을 맞대고 있었다. 결국엔 미호가 환한 미소로 선회했고, 그럼에도 나는 미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미호는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는 난감한 미소로 얼굴을 바꾸고 오드리 씨와 아이들을 번갈아봤다.


"미호는 왜 계속 꼬나보냐? 쟤 좋아해?"


주머니가 뒤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오드리 씨는 내 담배를 일방적으로 빌려 가려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한 갑에는 아침에 확인해보기로 다섯 개비 쯤 남아있었을 것이다. 오늘 내가 두 번 피웠고 이번에 오드리 씨가 한 개비 가져가면 남는 건 두 개비가 된다. 


열 개비가 넘게 남아있었을 때도 맹렬하게 거절했으나 결국 뺏겼다. 세 개비남은 지금은 더욱 거세게 저항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꿈 속의 미호와 눈 앞의 미호를 대조하느라 바빠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것 참 이상하다. 꿈의 마지막 쯤에 미호는, 드라코라는 녀석의 목을 잘 듣지도 않는 날붙이로 거의 절단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경동맥이 끊겨 절단면에서 새차게 뿜어져나오는 피를 맞아가며 아주 철저하고도 느긋하게 야금야금 살을 발라내듯 목을 절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인지 그 꿈 속의 미호와 "아빠 상어~" 라 노래하며 철충꼬맹이들의 추임새를 유도하는 중인 미호가 동일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호에게는 엄청난 실례겠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요소가 몇 가지 있었다. 일단 그 동산. 그 동산은 분명 양들과 소, 보더콜리들이 자리하고 있는 삼색동산이다. 온몸이 새카만 존재가 서있던 언덕도 그 삼색동산의 언덕이었다. 안개 속에서 양들은 풀을 뜯고 있었고 보더콜리들은 여느 때처럼 하라는 양몰이는 제대로 하지도 않고 안개 속에서 태평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안개 너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신경쓰이지도 않는다는듯이. …즉, 그 드라코가 참수 당하던 곳은 이 곳, 균열이었단게 된다.


그리고 그 존재가 입에 담은 '라벤더' 라는 단어. 이 라벤더는 이전에 교실에서 꾼 꿈 속에서도 등장했다. 그 꿈 속에서 나는 그 라벤더라는… 아마도 바이오로이드인 존재를 가혹하게 고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꿈의 그 검은 존재는 나라는게 되는건가. 드라코를 죽이라고 미호에게 날붙이를 건넨게 나라는 건가.


꿈 속의 미호와 눈 앞의 미호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는 오드리 씨가 직격해온 담배연기에 사라졌다.


"어쨌든, 말 안들으면 그냥 확 쥐어박아 버리라고. 알았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꿈 때문에 이전의 상황과 대화의 맥락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시선으로 오드리 씨에게 물었다.


"기억 안나냐?"


"네."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자 눈부신 미소를 지어보인 오드리 씨가 아주 훌륭한 폼으로 아주 훌륭한 바디블로를 날려왔다. 바디블로의 효과는 굉장했다. 꿈의 여파가 산산히 부서지고 잠깐 사라졌었던 오드리 씨와의 시간이 전부 기억났다. 


분명, 딸인 테티스가 옷 가게에서 옷 한 벌을 훔치고는 내게 찾아왔었다. 그 옷은 뭐라고 해야될까. 일본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운동복, 테티스가 말하기로는 부르마라는 옷이었던 것 같다. 그 옷을 차려입고 내 앞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교태를 부려댔던 걸 오드리 씨에게 알렸고, 곧장 찾아온 오드리 씨와 함께 테티스를 혼냈다. 그 다음 어째서인지 오드리 씨와 남서쪽 거리의 카페에 들러 이런저런 푸념을 듣고는 함께 오락실로 가서 있는대로 좀비를 쏴죽이고 (오락실에서 안 사실인데 오드리 씨가 그 슈팅게임의 랭킹 1위였다.) 내 오두막이 있는 숲까지 함께 오기에 이른다. 그리고 지금이다.


눈 앞의 유치부들은 오늘이 소풍 날이다. 소풍 장소는 내 오두막의 뒤편에 있는 개울이었는데, 요 며칠 간 내렸던 장대비에 물이 불어나 도무지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운동회도 취소됐다. 그래서 장소를 이 물먹은 숲으로 바꿨고 마침 돌아온 우리와 마주쳤다. 그래, 분명 이거다. 


정리를 마치자 머릿 속이 개운했다.


"그러니까, 말 안들으면 그냥 패버리라는 거죠?"


"그래." 라고 오드리 씨는 연기로 도넛을 두 개를 만들고 말을 이었다. "암만 내 딸이지만 지나칠 때가 있어. 그러다가 진짜 피본다고. 하지말아야 할 것과 해도 되는 건 확실하게 구별할 줄 알아야 해. 네가 그걸 가르쳐야 되고. 자격이야 어찌됐든 일단 네가 선생이잖아."


오드리 씨같은 터프한 여성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냥 패버리라는 건 너무 거친게 아닌가 싶었다.


이 오드리 씨는 이전의 여름 축제 전에 들렀던 옷 가게의 주인으로, 요 근래 남서쪽 거리에 갈 때 마다 항상 마주치고 있다. 처음 옷을 내던지듯 건넬 때도 그랬지만 마주칠 때마다 아주 못마땅하단 듯이 쳐다보는 탓에 내쪽에서 뭔가 이 사람에게 잘못한 게 있었던가, 착각하는 것을 계기로 말을 트게 됐다. 알고보니 내가 못마땅한 게 맞았고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는 것 같다. 지금도 그렇다. 이유는 딱히 없단다. 그냥 인간이 싫다고. 그래도 처음보다는 다소 괜찮아져서 지금은 카페에 같이 갈 정도는 되었다. 같이 간다기 보다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는 거지만.


오드리 씨와 비슷한 경우는 이외에도 있었다. 철충들은 그들의 입장 상 해당되지 않지만, 내가 이곳에 남기로 결정된 그 순간부터 바이오로이드의 절반은 나를 반겼고 나머지 절반은 나를 경계하거나 까닭없는 경계심과 노골적인 혐오를 가감없이 드러내보였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쪽 세계가 멸망하기 전부터 살아온 균열의 주민들이 겪은 온갖 풍파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그 경계심과 혐오에 일어난 화도 수그러지고 절로 숙연하게 되버렸으니까. 이쪽 태생이 아닌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의…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그 경험담들은 결코 인간의 몸과 정신으로 견뎌낼 수 없는 것이었다. 같은 인간이 인간에게 혐오가 생길 지경이었다.       


오드리 씨가 뿜어내는 연기를 시선으로 쫓으며 말했다.

 

"피를 볼 것까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냥 개구쟁이잖아요."


"아니. 보게 돼 있어. 돼먹지 못한 세상이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경우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어."


오드리 씨의 말에는 묘하게 확신이 있었다. 경험에 의거한 발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아끼기로 했다.


"뭐 됐고, 너, 좀 어때. 이젠 살고싶은 욕구가 뿜뿜하냐?"


"……예?"


"자살 안할거냐고."


혹시 레아에게 들은거냐는 되물음이 목구멍까지 막 차올랐을 때 오드리 씨가 말을 이었다.


"너같은 놈들은 멸망 전에 넘쳤거든. 낯빛이 유리같으면서 하나같이 흐리멍덩한 눈깔을 해서는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는 얼굴. 길가에 나다니는 인간들의 절반이 그런 얼굴이었어.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라고 쓰여있는 것 같아서 짜증났다고. 하필이면 그 길가 쪽에 내가 운영하던 가게가 있었으니까. 

나머지 절반은 들어서 존나게 박고싶다느니 개처럼 따먹고 싶다느니 같은 말을 누가 듣든말든 떠들어대던 병신새끼들이었고.

테티스같은 애들도 다 듣고있는데 병신들이 어지간히 지껄여야지. 진짜 싸그리 잘 뒈졌어."


다 피운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 오드리 씨는 묻지도 않은 본인의 이야기들을 꺼냈다.


돌아버린 세상에서 드물게 돌지 않은 인간이었던 자신의 주인, 그 주인이 입양하여 자신의 딸로 삼게 했던 테티스, 군인으로 태어났으나 총기는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하고 인간들의 좆이나 잡았다던 테티스, 그래서 상처투성이었다는 테티스, 그 상처를 치료해준 것이 이 곳의 철충들. 지금 운영 중인 가게는 멸망 전의 가게와 동일한 인테리어이고, 그 가게를 지어준 것도 철충들.


중간부터는 오드리 씨의 이야기가 아니라 거의 테티스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내가 진짜 마음에 안드는게 뭔 줄 알아? 우리는 자살도 못하는 몸인데, 인간들은 앞 뒤 안가리고 여기저기서 자살했다는 거야. 씨발새끼들이 감히 내 딸한테 끝도없이 그런 짓을 해놓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는 즉각 고개를 저었다.


"레아만 아니었으면 넌 내 손에 쫓겨났을 거란 소리야. 그러니까 레아한테 잘 해. 혹시라도 레아 울렸다간 넌 나한테 뒤져. 알았어?" 


"그… 죄송하지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게 있어요. 아까 자살도 못하는 몸이라고 하셨는데 바이오로이드는 자살을 못하나요?"


뒤통수가 얼얼했다. 느닷없었다는 건 알았지만 죄송하지만을 붙여도 여쭤선 안 될 사항이었던 것 같다.


"야. 우린 상품으로 태어났어. 생각해 봐. 제 손으로 제 가치를 해치는 상품이라니, 상상이 되냐? 인간들이 그렇게 뒀을 것 같아?"


정말 알기 쉬운 설명이었다. 그렇겠지. 당시에는 한 대당… 아니, 한 명당 수천수억을 호가하던 상품이었다고 하니 아주 철저했겠지.


나는 이쪽 세계 태생이 아니라서 몰랐다, 라는 변명 거리는 있었어도 말을 아끼기로 했다. 딱 봐도 인간을 무섭도록 증오하는 오드리 씨가 그 증오의 대상 중 하나인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거다. 변명같은 건 악효과만 낳을 것이다.


오늘은 확성기 녀석과의 약속도 있고해서 먼저 일어났다. 오드리 씨는 갈 생각이 없는지 숲 한 켠에 놓인 바위에 여전히 앉은 채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남은 담배를 확인하고, 담뱃갑 째로 오드리 씨에게 넘겨주고 숲을 나섰다.


숲을 나서고 시장을 지나 남쪽의 삼색동산에 거의 다다랐을 때, 느닷없이 자각이 들었다. 이 한 달 간 들어온 여기의 바이오로이드들이나 철충들의 이런저런 사정, 거의 대부분 씁쓸함에 치우쳐있는 그 경험들에 어째서 동정심을 품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어졌다.


한 가지 확실히 하도록 하자. 이곳에 남은 이유는 주민들이 마음에 들어서인가, 아니면 이 장소가 마음에 들어서인가.


두 말할 것도 없지. 이 장소가 마음에 들어서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사정이나 경험이 없는 이들은 없고 그 대부분이 행복보다는 쓰고 축축한 것에 치우쳐있음을 나는 안다. 동정 할 필요가 없다. 동정하면 오히려 분노만 살지도 모른다. 애초에 내가 먼저 물어서 듣게 된 이야기들이 아니다. 


그래. 주민들에 대해선 이렇다 치자.


그럼 왜 이 장소가 마음에 든건데? 진짜로 그냥 순수하게 좋다고? 그럴 리가 없다. 이 균열이라는 장소가 뿜어내는 파장이 내가 가진 파장과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파장의 근원은 이 곳의 주민들이다……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사고가 꼬여버렸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머릿 속의 목소리가 묻는다. 이 균열이란 곳이 내뿜는 파장이 어떤 성질을 가졌길래 그렇게 마음에 드는거냐. 행복? 아니, 아니지. 넌 무엇보다도 행복을 혐오하는 놈이야. 이상적인 행복을 바라다가 놓쳐버리고, 끝내는 거머쥘 수 있는 행복마저 모조리 내쳐버리는 꼴이 됐지 않나. 그래서 그 오르카를 떠나왔지 않았나. 그러면 슬픔? 그럴까? 네 눈엔 여기 녀석들이 슬퍼보이냐? 아이들은 자유롭게 뛰놀고 시장은 웃음소리로 가득한데.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


소거 끝에 이 장소가 내뿜는 파장의 성질을 파악했다.

여기 녀석들은 행복한게 아니다. 어떻게든 행복해 보이려고, 행복하다고 자기암시를 걸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머릿 속의 목소리가 다시 지껄인다. 

이제야 깨달았냐? 너같은 새끼가 마음에 들어할만한 장소가 과연 정상적일거라 생각했냐?   


네 말이 맞다고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다. 여기는 정상이 아니다.


비과학적인 곳이 실재한다는 의미에서 말하는게 아니다.


가만히 보면 이 곳은 오르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여러 군상들이 웃고 떠들고 사랑한다. 서로 적대하던 때와 어느 한 쪽이 완전히 박살났던 적이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오르카보다도 더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지. 거기에서 차이가 있다.

상실.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그것에서 오르카의 녀석들은 회복 할 수 있다면 여기 주민들은 그럴 수 없다. 기둥이 없으니까. 오르카의 사령관 같은 의지할만한 존재가 없으니까. 오드리 씨는 테티스가 치료됐다고 했지. 과연 그럴까. 철충 녀석들의 입장상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했을까.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에게 죄의식을 가진 이곳의 녀석들이 과연 제대로 된 치료는 커녕 위로나 할 수 있었을까. 철충 녀석들과는 상관없는 종류의 상처들을 제대로 보듬어줄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인간이 멸종된 걸로 치유된 녀석들도 있겠지.

하지만 그랬다면 내 귀에 이 한 달 간 그러한 경험담들이 들어올 일도 없었다. 게다가 바이오로이드만이 그런게 아니다. 상실의 빛은 철충 녀석들에게서도 뜨문뜨문 보인다.


행복과 평온 따위가 아니었다. 

이 곳이 내뿜는 파장은 상실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행복과 평온이라고 나는 멋대로 착각했다.

나는 상실에 기대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악감이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행복은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곳은 상실과 죄의식으로 점철된 곳이었다.


     



* * *





"뭐야, 인간. 늦었잖아. 점심먹고 바로 오라니까 왜 이제 와."


삼색동산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엘리베이터에 도착하자 확성기가 맞이했다. 확성기 말고도 레아, 돌쇠 아저씨, 다프네도 보인다.


오늘은 균열 바깥으로 나가는 날로, 탐색, 즉, 외출 목적은 때마다 다르다. 처음 나갔을 때는 '통발'(레아는 구조라고 표현하라며 확성기에게 성을 냈다.) 두번 째 외출은 자원수집이었다. 통발을 돌리던 날은 내게있어 첫 외출이었으므로 위험하다는 확성기의 만류 덕에 동행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근처의 숲에서 시간을 죽였다.


해가 질 때가 되어서야 돌아온 레아와 확성기, 돌쇠 아저씨의 뒤에는 네다섯명의 바이오로이드와 세 대의 AGS가 뒤따르고 있었다. 레아야 그렇다치고 잘도 철충을 뒤따라 왔던 것이다. 이전에 들었던 레아의 말에 따르면 그 날 합류한 녀석들은 전투와 멸망한 세계의 환경에 지친 녀석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저항감이 없는게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나는 두번 째 외출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첫번 째 외출 때도 그랬지만 확성기 녀석이 길길이 날뛰면서 나는 절대 나가선 안된다고 성을 낸 탓이다. 집에만 갇혀 살아야하는 강아지 취급을 받은 기분이었어서 평소처럼 확성기를 두들겨패는 것으로 허락을 받아냈다. 아무리 균열의 바깥이 멸망한 세계라지만 언제까지고 같은 풍경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원수집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 자원이란 건 별로 대단한게 아니었다. 예를 들면 담배라거나, 담배라거나… 다시 생각해보니 중요하긴하다. 

주택가에서 화원을 운영하는 다프네는 균열 내에선 자라지 않는 야생화를 채집하고, 돌쇠 아저씨는 다양한 용도로 쓰일 나무를 베어오거나 균열 내에 서식하지 않는 대형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등, 주로 균열 내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찾는다.


이 외출 중에는 세 가지 규칙이 있다. 첫 외출 당시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확성기가 정말 진지한 태도로 설명했기에 그때만큼은 확성기를 패지 않았다.


1. 외출 전에는 반드시 무장할 것.


2. 외출 중에는 둘 이상 동행할 것.


3. 인류저항군과는 절대로 접촉하지 말 것.


1번과 2번은 바로 납득할 수 있었지만 3번의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인류저항군이 나쁜 녀석들도 아니고, 설령 조우했다 해도 도망친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그런 내 물음에 대한 확성기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잘 들어. 녀석들한테 있어서 엘리베이터 근처의 숲 전체와 근방의 도시는 안전지대야. 그 도시의 모든 철충은 오래 전에 사멸했고 바이오로이드들은 구조 됐어. 인류저항군 소속 바이오로이드와 야생동물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어야 할 지역인거라고. 그런 곳에서 함부로 돌아다니다가 발각되기라도 해봐. 녀석들이 그냥 추격해오는 걸로 끝날 것 같아?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할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정보력 작살나는 놈들이 '안전지대에 기웃거리는 철충과 바이오로이드가 있다.' 라는 걸 놓칠 것 같아? 나아가서는 철충과 모종의 관계를 맺은 바이오로이드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내겠지. 그 검은 아자젤을 생각하면 바이오로이드에게 참작의 여지를 줄지도 모르지만, 철충에 관해서는 그런 것도 없어. 우리는 물론이고 레아를 포함한 여기 바이오로이드들은 다 죽어. 분명해. 그렇다고 해도 만약 그 때가 되면 여기는 안전하니 틀어박히면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완전히 고립되어 버리는 거라고. 끝장나는거야."


그래서 처음에 나를 간호했던게 위험한 일이었다고 한 거로군. 


"왜 여기는 안전한데?"


"왜 그쪽이 궁금한거냐…… 왜 안전하냐면… 음… 인간. 너 해리포터 봤지?"


갑자기 마법사가 튀어나온 것이 놀랍지는 않았다. 이 녀석들이 20년간 내 옆에 붙어있던 유령이었다는 건 이제 받아들였으니까.


"지금은 출입구가 이 엘리베이터 뿐이지만… 균열과 바깥 세계를 잇는 모든 출입구는 9와 4분의 3승강장 같은거거든."


"특정한 존재들만 오고갈 수 있다?"


"그렇지. 정확히는, 균열을 인식해야만 들어올 수 있어. 혹은 인식한 존재가 알려주거나 동행해야 출입구를 찾을 수 있고."


"또 어렵게 설명하신다. 인간 님. 그러니까요. 그냥 회원제와 추천제로 운영되는 클럽하우스의 입구같은거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네 설명도 거기서 거기같은데……"


이런 진지하지만 요령없는 대답과 설명들을 귀담은 것이 무색하게도, 숲에서만 시간을 보내게 됐던 것이다.


그렇게 세번 째 외출 날인 오늘이다만, 확성기의 모습이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동체 곳곳에 크고작은 보따리들을 달아놨다.


"뭐야. 물건팔러가냐?" 라고 내가 빈정댔다. "뭐 보따리상이라도 돼?"


그 빈정거림에 확성기는 아주 시크하게 대답했다.


"맞아. 보따리 팔러 간다."


"뭐?"


"보따리 팔러간다고. 아니지. 파는게 아니지. 교환하러간다."


"교환? 물물거래?"


"그래. 그거 외에 뭐가 있어. 주기적으로 거래하는 녀석들이 있거든. 오늘은 그 녀석들을 만나러 갈거야."


"……누군데?"


"가보면 알아. 뭐, 그전에… 인간 너는 다른 곳에 갈거지만."


거기까지만 말하고 확성기는 눈 앞의 엘리베이터까지 다가가서 멈추…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어디 가! 엘리베이터 여깄잖아! 그리고 뭐 나는 어딜 가는데!?"


크게 외쳐 불러봐도 확성기 녀석은 무시한 채 계속 걸어가고 있다. 요새 안패서 그런가, 슬슬 매타작을 벌일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레아가 다가왔다.


"중요한 거니까 말을 아끼는거에요. 일단 따라가요."


"뭐 얼마나 중요하길래 그래?"


"…음, 글쎄요? 인간 님 받아들이기 나름이네요.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뭐야… 무섭게."


내 중얼거림이 들리지 않았는지 레아도 앞서서 걸어갔다. 두 녀석이 저런 반응이면 뭔가 확실히 중요한거긴 한 것 같다.


확성기 녀석이 어찌나 빨리 걸었으면 걷는 걸로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살짝 속도를 올려 달려야 겨우 녀석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무릎을 짚고 잠깐 숨을 고르는 사이, 녀석은 또 거리를 벌렸다. 그건 그렇고, 엘리베이터의 뒤편은 와본 적이 없었다. 수십 분은 걸은 것 같은데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걸까.


"어, 인간. 거기 멈춰."


5분 정도 더 걷고 뛰어서야 확성기가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말했다.


"그래. 거기. 거기 그대로 서있어."


이 녀석 말에 고분고분 따라 서있는게 아니다. 숨을 고르고 있는거다. 기계라 좋겠어. 숨 찰 일도 없고.


"그대로 움직이지 마."


또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물었다.


물으려고 했다.


구르르릉, 하고 바닥이 울린다. 지진인가. 균열에선 지진도 일어난다면 나는거겠지만 이 삼색동산은 균열의 장소 중에서 지진과 가장 관계없을 것 같은 곳이다. 지진과 어울리는 곳은 다른 곳에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지진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임팩트라고 해야하나. 그런 것이 살짝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다.


"오. 내려간다."


확성기 녀석의 말대로였다. 땅이 내려간다. 그리고 이… 지진소리가 출입구로 사용되는 엘리베이터 소리의 거대한 버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뭐냐…?" 나는 확인차 물었다. "설마 내가 서있는 여기 이 땅이 엘리베이터야?"


내 물음에 확성기는 신난듯 구구절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럼 엘리베이터가 아니면 뭐냐? 우리가 전에 말했지. 엘리베이터는 한 개가 아니었다고. 거기에 균열도 좁아지고 있었다고.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네가 오면서부터 균열은 더 좁아지지 않고 있었는데, 이젠 슬슬 원래 크기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 같아. 그래서 원래 있었던 이 엘리베이터도 다시 돌아온거지. 이야. 이건 상상도 못했어. 대단 해. 저 작은 엘리베이터로 몇 번이나 왕복할 것 없이, 이젠 한 번에 다같이 올라갈 수 있는거야."


나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뛰어서 지쳤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뭐든 이해하려 드는게 아무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이젠 알고 있었다. 솔직히 모양새로 보면 그 작은 엘리베이터 보다는 그래도 그럴 듯 했다. 엘리베이터 바닥이 잔디라는 것과 거의 농구경기장만한 크기라는 걸 제외한다면 말이다. 거기에 오고 내려가면서 흙먼지를 뒤집어쓰지 않아도 되겠다는 점이 반가웠다.


기운이 빠져 거의 주저앉다시피 바닥에 앉고 확성기에게 물었다.


"야. 진짜 나 때문에 이 엘리베이터가 생긴거야?"


"그렇다니까. 없어지거나 좁아지면 좁아졌지, 이런 변화는 네가 오기전까진 없었어. 이건 말이야. 네 능력이야 능력."


"능력?"


"인간. 혹시 이세계물이라고 알아?"


"뭐?"


옆에서 레아의 한숨소리가 들린 듯 했다.


"이.세.계.물. 알아몰라?"


"몰라."


"원래 살던 세계에서 문화활동이란 걸 전혀 하지 않았던 거냐? 네가 이곳에 오기 삼사년 전에는 대유행이었잖아. 네 세계의 일본에선 아직도 유행 중일거야. 그 이세계물이란 장르는 말이야. 너처럼 자살하거나, 아니면 사고를 당하거나, 모니터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거나 하는 다양한 이유로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날아가버리면서 이야기가 시작 돼. 보통 그런 과정에서 주인공은 이능력이란 걸 얻거든? 마법을 쓸 수 있게 되기도 하고 온갖 무기를 다룰 수 있게 되기도 하고 그냥 육체자체가 엄청나게 강해지기도 하지. 거기에 엘프나 수인, 용족 등등, 다양한 종족의 조력자들이 함께 해. 그래그래, 그렇지. 여기 레아가 적당하네. 레아를 이세계물의 엘프에 빗대면 딱 들어맞아. 너한텐 여기가 이세계와 다를게 없으니까. 그렇지?" 


"추기경 님!"


"어쨌든, 너한테도 그런 이능력이 있다는 거야. 이능력이라고 하기엔 살짝 아쉽긴 하지만, 뭐 우리에겐 구원과도 같으니 아무래도 좋을 얘기지."


나는 얼굴이 시뻘개진 레아와 여러 개의 눈을 불규칙적으로 꿈뻑이는 돌쇠 아저씨, 확성기가 뭐라고 나불대든 꽃을 담을 바구니를 살펴보는 중인 다프네를 차례로 살펴보고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 이능력은, 여기를 유지하는거다?"


"그래그래! 이제 좀 이해를 하나보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네 존재자체가 이능력인거야. 너와 이능력이 따로 존재하는게 아니라고."


이능력이고 나발이고 씨발이고간에 한 가지는 알겠다. 이 확성기 새끼. 내가 이제껏 봐온 모습 중에서 오늘이 가장 신나보인다.


"야, 확성기. 들어보니까 그건 오타쿠계열 장르 같은데, 맞아?"


"문화와 장르에 계열을 왜 따지냐. 이세계물이 오타쿠 소리를 들으면 고전명작 중에서도 오타쿠 소리 들을게 수두룩 해."


뭐지. 이 녀석, 목소리가 살짝 내리깔렸다. 기분이라도 나쁜건가. 특히나 오타쿠라는 단어에 강하게 반응한다.


"아니… 오타쿠건 뭐건 간에 그런 건 상관 안하는데 궁금한게 있어서. 너, 나 여기로 데려올 때 혹시 그런 걸 겹쳐보고 있었어?"


"…뭐라?"


"날 데려왔다는 건 내가 자살하는 순간을 보고 있었단 소리잖아. 그 순간이랑 네가 말하는 그 이세계물이랑 겹쳐보고 있었냐고."


"……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레아."


무어라 혼자 중얼거리고 있던 레아가 퍼뜩 몸을 튕겼다.


"네, 네!"


"그… 유령이었을 때, 너희가 마냥 내 옆에 붙어있진 않았을거 아니야? 내가 살던 세계의 건축양식이나 문화나 같은 걸 잘 알고 있으니 그럴거야. 내가 정말 혹시나해서 묻는데, 확성기는 뭐하고 다녔어?"


레아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내쉰 뒤에, 확성기를 곁눈질 했다.


레아의 눈길에 확성기의 동체가 살짝 움찔했다.


"저는… 인간 님의 세계를 공부해서 이쪽에 적용했…구요. 확성… 아니, 추기경 님은 여러 문화를 접하고 다니시곤 했어요. 추기경 님과 취향은 달랐지만 저도 간간히 접하긴 했어요…"


"확성기가 가장 좋아하던게 뭐야?"


"애니메이션… 영화… 만화책…"


"유령이었으면서 어떻게 그런 걸 찾아봤는데?"


"그… 인간 님한테서 엄청 멀어질 수는 없었어도, 조금 떨어지는 건 가능했거든요. 인간 님이 계신 건물에 영화관이 있다면 영화관에 들르거나, 인간 님이 사시던 오피스텔 이웃집에서 훔쳐보거나…그런 식으로…"


"알았어. 더 말 안해도 돼."


죄송해요… 라고 레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네가 죄송할 건 없다. 죄송할 만한 것도 아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 걸 좋아할 수도 있다. 성인이 되어서 일과 집 밖에 모르던 나도 영화 정도는 간간히 봐줬다.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다. 그런데도 왜인지 나조차 놀랄 정도의 분노가 서서히 밑바닥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용솟음치려 한다. 


내게 멤도는 기류를 알아챈 걸까. 아까부터 나를 빤히보던 돌쇠 아저씨의 거대한 동체가 다가왔다.


"인간 씨. 참아요."   


"참다뇨.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뭘 참으라는 건지는 말 안했는데…"


돌쇠 아저씨의 말대로 나는 고개 숙이고 침묵하기로 했다. 지금 확성기를 쳐다봤다간 나도 모르게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몸이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참는다. 참는다. "어머, 여기에 꽃이 있네." 라는 무신경한 말이 들림과 동시에 사방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땅 속을 내려가고 있으니 이상할 건 없다. 이상한 건 공중이 되어버린 이 엘리베이터만한 삼색동산의 구멍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좋지 않다. 나같은 인간은 어둠 속에서 마음의 평온을 찾을 줄 알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공격성만 증폭시킨다. 마음 속에 참을 인 석자를 아로새기고 눈을 감는다. 눈 감을 필요가 없는데도 감는다. 눈이 적응하면 어둠 속에서 그 좆같은 실루엣을 그려낼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 레아 언니. 여기 봐. 벽에도 꽃이 있어. 이런 곳에 어떻게 있는걸까?"


다프네의 고운 목소리가 지금의 내게는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거대한 엘리베이터의 거대한 구동음까지. 최악이다. 내 안의 폭력성이 끝도 모르고 전신에 촉수를 뻗어간다.


제발, 부탁이야 다프네. 닥쳐 줘.


"어머머머, 코스모스야. 아주 예쁜 연보라색이네. 우후후… 메리가 좋아하겠어."


그러니까 지금 어떻게 색을 알아보는 거냐고.


내 안의 어딘가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다.


내 안의 또다른 내가 구실을 찾는다. 최근들어 구실 없이 굴었다가는 레아가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으므로 아무거나 적당한 거라도 찾아야한다. 이세계가 어쩌고는 타이밍을 놓쳤으니 구실로 삼을 수 없다. 그렇다고 다프네를 이용하자니 그럴만큼 이성이 흔들린 것도 아니다. 뭐가 좋을까. 적당한게 생각이 안나 어둠 속에서 눈을 떴고, 돌쇠 아저씨가 보였다.


"저기, 돌쇠 아저씨. 전부터 궁금했던게 하나 있어요."


"뭡니까…?"                                    


돌쇠 아저씨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 확성기는 추기경인데, 왜 돌쇠 아저씨는 돌쇠 아저씨에요?"


뭔가 애같은 뉘앙스였다. 하지만 지금은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돌쇠 아저씨가 대답을 고민하고 있자 "아, 그거요." 라고 다프네가 끼어들었다. "그게 이름이니까요."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오고간 대화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알기 쉽게 말해 줘."


"돌쇠 아저씨의 이름은 돌쇠고, 추기경 님의 이름은 추기경이란 소리에요."


평소라면 한 번 이상 곱씹을 대답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거진 스무 번 이상 그 대답을 곱씹고서 다프네에게 확인했다.


"그러니까… 가톨릭의 그 추기경이 아니라 이름이란 소리지?"


"맞아요."


"성이 추고, 이름이 기경이야?"


"정확해요."


"정말로?"


"그렇다니까요."


이거다.


"레아, 왜 말 안해줬어?"


레아가 있을 어둠 속에선 아무 말도 없었다. 문제없다. 애초에 내가 물어본 적이 없었다.


"와… 이거 완전 쓰레기 새끼네." 확성기가 있을 방향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지만 그럴듯한 이름을 갖고, 나머지는 다 뭐, 돌쇠, 박씨, 쇠돌이, 이런 이름을 갖고있대? 숙자라는 이름은 너무 옛날식 아니냐? 말이 나와서 물어보는데 아줌마 아저씨들 이름은 누가 지었냐?"


"누가 지은게 아니라 저희가 각각 자칭한겁니다. 부르기 쉬, 쉬우니까요. 어어, 참아요, 인간 씨."


방금 들려온 돌쇠 아저씨의 말은 무시한다.


"너 돌쇠가 주로 누구한테 붙인 이름인 줄 아냐?"


확성기에게서 대답은 없다. 상관없다.


확성기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지면을 박차고 내달렸다.


"종놈한테 붙인 이름이야 이 개새끼야!"


      






* * *






"그럼, 추기경 님. 저희는 숲에서 일보고 오겠습니다."


"어. 고생 해. 우리 다프네 아가씨 잘 보호해주고."


"그러믄요. 걱정 마세요. 가자꾸나. 다프네."


"으음… 오늘은 사철란이 필요해요. ……어쩌면 방울꽃을 발견할지도… ……코스모스는 많이 딸거고…"      


앞은 제대로 보고 걷는건지 흐느적거리는 다프네가 신경쓰였다. 메리가 까다로운 4차원이라면 저 녀석은 전형적인 4차원이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마자 보인 것은 숲이었다. 그 작은 엘리베이터와 똑같다. 다만, 지점이 달랐다.


확성기 녀석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암벽의 반대편이었다. 


이어지는 확성기의 말에 따르면 이 암벽은 산의 줄기 중에 하나고, 타고온 거대한 엘리베이터가 향한 방향으로 쭉 가면 바다가 나온단다. 그 바다에서 거래가 이뤄진다는 모양이다. 


"어이, 기경 씨. 빨리 앞장 서. 짜증나니까."


"발로 차지 마! 보따리 또 떨어지잖아!"


투덜투덜 궁시렁대는 소리는 무시하고 레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볼 때 마다 적응이 안 돼."


"그렇죠? 원래는 이 메이드복이 본래 차림이었어요. 지금은 외출한정 차림이지만요."


레아는 주변을 빙빙 돌고있는 청색 드론을 살살 어르듯 쓰다듬고 있다. 설정집 속 레아의 드론은 흰색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아는 레아는 청색 드론을 사용하는 듯 했다. 아니면 따로 채색한거겠지. 그랬다면 아마 메리가 채색을 맡았을 것이다. 어쩌면 메리가 멋대로 색을 바꿔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매일 롱원피스에 가디건 차림이었으니까. 지금 차림을 보니까 그 조합이 되게 답답하게 느껴지네."


"그, 그런 말씀 마세요…"


사실이지 않냐고 더 놀릴까 하다가 말을 삼키고, 혼자 걸어가고 있던 확성기의 뒤를 따라 걸었다.


확성기의 말을 빌리자면 장대비가 쏟아졌던 이세계 속의 이세계인 균열과 같이 바깥 세계인 1255059에도 장대비가 내린 것 같았다. 점심 밥을 먹고 두 시간은 지난 시간임에도 숲 곳곳에 희뿌연 안개가 걸쳐져있다. 여기서 온도만 높이면 완전히 한증막 같은 풍경이었다. 비도 내렸고, 이미 10월로 접어든 터라 매미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균열에서는 장대비가 내리기 직전까지 매미가 생존해 있었는데 여긴 어땠을까. 이미 보름도 더 전에 가을에게 몰살 당했을지도 모른다.


걸을수록 바다냄새가 강해져갔다.


말이 없는 확성기와 벌레에게 사랑받아 팔뚝을 연신 긁어대는 레아 뒤에서 몇 분 정도 걸으니 정말로 바다가 나타났다.

연노랑빛 모래사장 너머의 바다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위치를 상하 반전해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다. 여름의 바다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 바다의 한 켠, 우리 정면에 누군가가 있었다.


"여기야~ 여기~"


외침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레아가 튀어나갔다. 등쪽의 장비에서는 엘프에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을 날개가 돋아 있었다.


"오랜만이네, 레아 언니."


"우리 트리아이나 잘 지냈니? 힘든 거 없었어?"


"나한텐 그 요람 속에 있는게 제일 힘든 일이야."


대화를 들어보니 눈 앞의 트리아이나도 균열의 주민인 듯 했다. 오랫만의 해후인지 내가 다가갈 때까지 하하호호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잠수복 차림의 여성은 멀리서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트리아이나. 심해 탐사를 목적으로 제작된 바이오로이드다.

설정집 속 트리아이나는 모험을 좋아하는 개체였는데 이 개체는 어떨까.


"데려가야 한다는게 이 인간?" 트리아이나가 나를 가리키며 레아에게 물었다. "그 언니 피할텐데?"


"오늘 아니면 또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될 수 있을 때 뵙게 해드려야지."


이 바다에서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냐고 물으려는 차에 확성기가 뒤에서 잡음을 흘렸다.


"인간. 이 녀석의 로봇에 타라." "오~ 기경 씨! 오랜만!"


"기경 씨라고 하지 마! 추기경 님이라고 불러라! 그리고 어딜 어른들 대화에 끼어들어!"


"응? 기경 씨 어른이었어?"


"내가 어른이 아니면 뭔데!"


"난 또 만화영화 좋아하는 고등학생인줄 알았지. 어쨌든, 이 인간 데리고 다녀오면 되는거지?"


확성기에게 일방적으로 데미지를 가한 트리아이나는 인사도 없이 내 팔목을 잡아 끌었다.

발걸음을 머뭇거리면서 내가 물었다.


"저기, 잠깐, 어딜 가는건데?"


"비밀이야 비밀."


"위험하지 않아요. 인간 님, 다녀오세요."


뭐야. 왜 갑자기 나한테 초점이 맞춰지는 거야. 이 녀석들. 대화할 거리가 더 있는게 아니었어?


일단 트리아이나를 떼어놓고 얘기하려는데, 이 트리아이나. 완력이 말도 안된다. 저항을 못하겠는게 아니라, 저항이 안된다. 그 정도로 힘 차이가 있었다. 질질 끌려가는 것도 아니고 거의 미끄러지듯, 딱봐도 잠수용도라는 걸 알 수 있는 로봇 쪽으로 딸려가고 있다. 


완력 차이에 당황하여 얼이 빠진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고보니 어느새 나는 트리아이나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1인승이라 좀 답답하지? 금방 내려갔다 올거니까 조금만 참아."


"아니, 야. 잠깐만. 어딜 내려가? 어딜 내려가냐고."


"어디긴 어디야. 심해지."








* * *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다. 심해에 대해 밝혀진 정보는 화성의 표면보다 적다고.

달에는 11명이 갔으나 심해에 간 것은 4명 뿐이라고. 

가장 깊은 곳을 위로 세우면 에베레스트보다도 높을거라고. 



어둠.

빛줄기 속 부유물.

어둠.

빛줄기 속 부유물.

어둠. 

빛줄기 속 부유물. 

 

잠수하고 5분이 지나자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 로봇이 쏘아내는 빛줄기 속 부유물 뿐이다. 아직은 윗부분이 감청색을 띠는 걸 보아 미약하게나마 빛이 닿는 구역인 듯 했지만, 그 미세한 빛이 오히려 공포를 가중해왔다. 해류 소리인지 미지의 생물이 내는 소리인지, 동굴 속에서 사이렌을 작게 틀어놓은 듯한 괴상한 소리가 울린다. 차라리 완벽한 어둠이었다면, 하고 나는 간절해졌다. 빛이 사라지면 이 괴상한 소리도 멎을지도 모른다.


"심해에 가본 적 있어?"


없어. 닥쳐. 말 걸지 마. 


"왜 대답이 없어?"


"…그냥 내버려 둬."


"무서워?"


"어. 무서워."


나는 거리낌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정말로 무섭다. 살아오면서 진심으로 무섭다고 느끼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허공에 몸을 날렸을 때도 이렇진 않았다. 모든 공포는 미지에서 온다는 말에 백퍼센트 동의한다. 허벅지 위에 있는 트리아이나의 둔부가 간헐적으로 고간에 닿는 것은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 주의를 줄 생각도 들지 않는다.


패널의 빛을 받아 푸르스름해진 내 얼굴이 전방의 창에 떠올랐다. 달걀 귀신에게 이목구비가 있다면 이런 이미지겠거니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창에 비친 내 얼굴 옆으로 난생처음보는 물고기 하나가 지나갔다. 트리아이나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데메니기스야." 라고 태연하게 설명했다. 데메니기스고 나발이고 대가리가 발광하는 물고기가 내 바로 옆에 있었다는 착란에 내 전신은 송연해져 있었다.   

   

정말 말그대로 혼이 빠져있었다. 시각만 살아서 무의식적으로 쏘우피시라는 로봇의 조종석을 훑어보고 있다. 패널이 나타내는 2500M라는 숫자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2500이란 숫자 하나 없어지더라도 세상엔 딱히 조금도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것보다 이 로봇, 이 정도 깊이의 수압을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크기가 아닌 것 같았는데 괜찮은건지 모르겠다.


조금 더 간절해져 버렸다.


완전히 어둠 뿐이라 시간감각마저 옅어졌을 무렵, 트리아이나가 말했다.


"거의 다 왔어. 준비 해."


뭘 준비하라는건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여기서 나갈 준비를 하라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거라면 이 자리에서 트리아이나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


라는 생각을 했을 때였다.


어둠이 보랏빛을 띠었다.


보랏빛?


"오오, 언니다. 언니 안녕!"


언니? 안녕? 그래. 틀림없다. 이 트리아이나는 태연해 보였어도 나처럼 심해에 오그라들어 기어이 미쳐버린 것이다. 내가 이겼다. 내가 좀 더 오래버틴 것이다. 가소로운 녀석. 무섭다면 무섭다고 나처럼 솔직하게 말하지 태연한 척은.


패널이 삑삑댄다. 레이더다. 잡히는 점의 갯수는 수심이 깊어질수록 적어졌으나 이전의 점과는 크기를 달리하는 점 하나가 정면 방향에 잡혀있다. 200M에 다다랐을 때 이 레이더는 주변 생물체를 감지한다는 트리아이나의 설명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이 미쳐버린 트리아이나가 언니라 부르는 보랏빛은 생물체라는건데, 온통 빛 뿐이다. 보랏빛으로 부옇게 뜬 부유물 뿐이란 말이다.


도대체 이만한 크기의 생물체가 어디에 있느냐, 라고 트리아이나에게 물으려 할 때 레이더에 잡힌 점과 로봇과의 거리가 200M 임을 나타내는 알림이 떴다. 


전방을 보았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저주를 다 퍼부어서 창조해낸 듯한 얼굴이었다.

미쳐버린 과학자가 악의만을 품고서 인공적으로 창조해낸 생물체가 가질 법한 얼굴이었다.

부모에게 학대받은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에 등장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태생부터가 완전히 잘못된, 존재해선 안될 존재처럼 보였다.


무어라 표현해도 모자르다.

그냥 지금 이 상황은 무언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거의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에 다다라서야 트리아이나에게 어서 올라가자고 말하려 했다.


"왜…?"


그런 소리, 돌고래 수천마리가 동시에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흘렀다. 머릿 속에. 뇌 속에.


"어떻게…"


"으아… 역시 슬퍼하네. 오빠, 인사 해. 이 동네 언니야."


뭐라는 거야 이건.


"어떻게 살아있어…?"


뭐라는 거야 저건.


"미안해…"


"인간. 언니가 미안하대."


"너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저게 어떻게 언니야."


입을 열자 생각보다 술술 말이 잘 나왔다. 비현실과 공포가 상한선을 돌파해버리면 아무래도 인간은 더없이 차분해지는 듯 하다.  


"미안 해…"  


"저거… 어디서 봤는데…"


"기경 씨는 별의 아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더라고."


"…아."


차분해졌지만 그 외마디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미안해…"


"미안하대. 뭐라고 대답이라도 해 줘."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아. 떠난다. 잘가, 언니."


200M나 되는 거리를 떨어져 있어도 창에 다 담아내지 못한 그 거대한 존재가 몸을 돌렸다.

어둠 속을 향한다.

얼핏 보면 어둠 속을 향하는게 아니라, 어둠에게 빨려들어가는 것처럼도 보였다.


나중에 정신이 온전해지고서야 깨달은거지만, 그 별의 아이는 이 1255059의 인류사에 마침표를 찍어버린 걸 사과했던 것이다.

사과할 대상이 잘못됐던 것도 모르고.

그리고, 그 확성기 녀석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먼 미래의 예정된 결과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녀석도 의지와는 상관없었던 모양이었다.

 


이 이후로 별의 아이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 * *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을 때는 취했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머리가 핑핑돌고 위가 아래인지, 아래가 위인지, 하늘 위의 저물어가는 태양은 진짜 태양인지, 태양이 쏘아내는 빛이 사실은 어둠인게 아닌지 온 감각이 완전히 뒤죽박죽이었다.


"인간 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보이냐…? 머리가 이상해… 좀 몽롱한데…"


"그럼 좋은거죠. 공짜로 취하셨잖아요."


"방금… 너…너한테, 처음으로 욕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음? 하셔도 되는데."


내가 심해에서 벌벌떠는 사이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건가. 레아의 텐션이 살짝 올라간 것 같이 보였다.


"네가 남기로 한 이상 필요없는거였지만…"


토할 것 같아서 몸을 수그리고 있는데, 확성기의 목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렸다.     


"반드시 증명하겠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어땠냐. 증명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냐?"


"……내가 봤던 그 별의아이도 너희랑 똑같은 거야?"


"…그래."


"별의아이 전부가 저래?"


"그건 몰라. 그건 모르지만, 확실한 건 먼 미래에 별의 아이도 모조리 죽어버린다는 거야. 악역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의지와는 상관없이 악역을 떠안았다는 이유로…… 우리와는 달리 악역이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로 말이야."


"…일단, 좀 쉬어야겠어. ……보따리 색깔이 바뀌었네? 거래는 끝났냐?"


"끝났다. 너 내려가있던 사이에. 이건 됐고, 아직은 갈 수 없어. 아직 증명 하나가 더 남았거든."


"또, 뭔데…"


"숲에 난 암벽을 따라 올라가면 해안 쪽으로 절벽이 하나 나 있어. 거기 경치가 좋으니까 들렀다 가자고."


오른쪽으로는 레아, 왼쪽으로는 트리아이나의 부축을 받으면서 길을 나섰다. 눈을 한 번 감고 뜨니까 숲이었고, 두 번 뜨고나니까 암벽 앞, 세 번 뜨고 나니까 확성기가 말한 절벽 위에 다다랐다. 이 혼이 빠진듯한 상태에서 회복하려면 하루로는 모자랄 듯 했다.


"오. 도착하자마자 시작했군." 확성기가 말했다. "인간, 위를 봐라. 메뚜기 떼다."


확성기의 말대로 위를 보자 하늘이 새카맸다. 지평선에는 다홍빛으로 노을이 지고 있는데 여기만 밤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차게 고개를 젓고 다시 확인해보니, 확성기가 말한 메뚜기는 내가 아는 메뚜기보다 훨씬 컸다.


메뚜기가 아니었다.


"저쪽 멀리 봐라. 함대가 하나 보일거야."


한 번 더 확성기의 말대로 전방을 향했다. 절벽 너머 펼쳐진 바다의 지평선 근처에는 꽤 많은 크고 작은 물체들이 반듯한 대열로 지평선을 따라 늘어져있었다.


함대다.


"용. 알지? 인류 저항군 녀석들의 대가리 중 하나. 그 녀석이 거느린 함대야."


면담 때 본 정갈한 여성 말인가. 상당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용을 떠올리자, 멀리 있어 개미만해 보여도 그 함대의 위압감이 수 배는 상승한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위압감이다. 감청을 검정으로 채색한 저 스카우트들과 스캐럽, 몇몇의 레이더들에겐 절대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전함 하나하나의 화력이 강하다고 해도 이 정도 숫자의 차이는 절대 뒤집을 수 없다. 전술전략 따위는 조금도 모르는 내가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그런 차이였다.


"인간, 오늘 하루 고생했다."


나직이 속삭이는 듯한 확성기의 말이 들리고, 해가 한 번 번쩍였다.


지평선을 따라 난 함대에서 일제히, 주홍이 점멸했다.


"무… 뭐야…"


그런 말이 내 목구멍에서 나온 것 같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왜 이 노을진 가을 밤이 일루미네이션 공연현장으로 변모했는지 알 수 없었다.


스카우트 하나하나가, 스캐럽 하나하나가, 그리고 커다란 레이더들이, 노을의 다홍에도 가려지지 않는 주홍빛으로 다시 태어나 하늘에 수놓여져간다.


최소 수천이다. 아니, 최소 수만이다. 그 정도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봐야 백 대도 채 안되는 전함들에 의해 모두 일루미네이션의 빛송이로 변하여 덧없이 반짝이고서 사라져간다.


"뭐, 오늘도 같군." 확성기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렇게 기회가 될 때 마다 말했는데, 여전하구만."


확성기가 말한 후로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하늘이 검보라빛을 띠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 일루미네이션은 막을 내렸다.


전함은 단 한 대도 파괴되거나 침몰하지 않았다.


"감상은?"


"……무슨 감상?"


"그냥. 감상."


꼭 단어를 외우는 듯한 말투다. 무슨 감상을 말하라는 건가. 아름다웠다? 죽음을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만큼 병신같은 것도 없다. 그러면 슬펐다? 확성기 녀석이 슬퍼하는 기색이 없는데 나라고 다를까. 그러면 안타깝다? 슬프지도 않은데 안타까울 리가 없다. 그러면…… 통쾌하고 시원하다? 아니, 빛송이들의 반짝임은 반딧불이의 완만한 명멸을 닮아 시원함과는 정반대였다. 불면증 환자가 쓸 법한 조명 같은 인상이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어."


"그러냐? 나도 그래."


"넌 왜? 네 동족 아니야?"


"동족? 동족이긴하지. 그래도 내가 챙길 녀석들은 아니야."


"…뭘 말하든 제발 알기 쉽게 말하라고 몇 번을 말 해."


"내가 신경쓰는 건 오직 균열이야. 균열 속의 바이오로이드, 균열 속의 철충. 내 품에 안은 녀석들 뿐이라고. 네가 살든 세계든 여기든 시대를 막론하고 내사람만 챙기기도 바쁜 건 너도 알잖아. 뭐, 이렇게 말하면 너무 차가운 놈으로 보일테니까 말해두는데, 노력은 했어. 인류 저항군 놈들은 죽이긴 커녕 이길 수 없으니 무의미한 짓 그만하라고. 근데 안듣더라고. 말이 제대로 통하는건지 조차 의문이었어. 처음엔 그 의문 속에서 녀석들이 죽는 걸 지켜봤고,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공장에서 재생산되어서 다시 돌격하는 걸 지켜봤지. 그러다보니까 말이야. 꽤 무덤덤해질 수 있더라고. 이야. 익숙함이란 무서운거야."


"저 철충들 덕에…" 뒤쪽에서 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가 안전 할 수 있는거에요. 시선과 주의를 모두 가져가 주니까요. 저희는 행복해져야 해요. 매일 기뻐야 해요. 하루하루 열심히…… 그럴 이유로는 충분하죠?"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아, 그리고, 돌아가기 전에 하나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


"뭔데?"


"라스트 오리진의 사령관은 유저 자신이란 설정을 얼마 전에 읽었어. 1255059는 내 계정의 uid고……"


"이쪽 세계의 사령관은 인간, 너 자신과 동일인물인게 아니냐는 소리냐?"


"동인인물인 것까지는 아니고… 관련이 있지 않겠냐고."


"없어."


"즉답이구만."


"당연하지. 간단하게 생각해 봐. 네가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났지, 만들어진 다음 하늘에서 떨어졌냐? 네가 그 라비아타한테 괴물 소리를 들었어? 아니잖아. 넌 사령관이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했어."


"알았어. 그러면 됐어."


"……연관이랄 건 아니지만, 생각해보니까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긴하네."


"…그 불쾌한 놈의 어디가?"


"지금의 너를 완전히 반전시켜버리면 딱 저런 인간일거야."


"지랄하지 마."


"아니, 맞아. 네가 제대로 된 성장배경만 가졌다면 넌 저런 인간이 됐을거야. 물론 조금은 모자라겠지만, 엇비슷할 것 같아."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라며 멋대로 대화를 끝마친 확성기가 옆을 지나쳐갔다.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어 뒤돌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함대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 * *








"……여기까지가 그 날 있었던 일이야. 어때? 재미없지?"


"재미없진 않은데, 좀 이상하네. 오빠 피곤했겠다."


"재미없지 않긴. 너 도중에 졸았잖아."


메리가 내 팔을 베게 삼고 이불을 끌어올렸다.


"나 잘래. 오빠, 조명 좀 꺼 줘."


"알았어. 벌써 3시네. 내일은 아침되면 바로 돌아가."


"아침으로 계란프라이랑 딸기 잼 넣은 토스트 만들어주면 그렇게 할 게."


"싫으면?"


"레아 언니한테 오빠가 그런 말 했다고 다 말할거야."


"이게."


우리는 또 잠에 들려다 말고 한동안 뒹굴거렸다. 


메리가 잠에 들고 눈을 침대바깥으로 돌렸다.


반딧불이는 사라져 있었다.








* * *


다음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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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고 준비했던게 다 날아가서 너무 텀이 길어졌다 분량도 많아지고 ㅜㅜ


자고나서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