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헬리 문학 모음집 


철그럭


다시 자신의 일부가 된 강철의 날개를 보며 시그룬이 뿌듯한 듯 미소를 지었다. 수리를 위해 장착하지 않았던 것이었지만 한평생 달고 다녔던 날개가 사라졌을 때는 참 막막한 심정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돌아오니 기분이 새로웠다. 


-날개가 돌아와서 기쁜 건 알겠지만, 당분간 훈련에 날개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시그룬의 마음을 드라우그가 깨트렸다.


"어..어째서입니까?"


-네 날개 또한 너의 장비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훈련은 밑바닥에서 시작해야 하는 법. 말해봐라, 시그룬. 너는 너의 검과 방패를 완벽하게 다룰 수 있나?


드라우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시그룬은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지난 삶 동안 한번도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전투용답게 전투모듈을 달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 뿐, 시그룬 본인의 실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보이는 적을 향해 미련하게 돌진해서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를 뿐. 그래서 지난 번 드라우그가 대립했을 때처럼 숙달된 자에게 단번에 제압될 것이 뻔했다. 


"아뇨. 그야말로 문외한입니다."


 -잘 아는군. 그렇다면 내가 왜 이런 지시를 내렸는지도 알겠나?


"네, 잘 알겠습니다."


드라우그의 말대로였다. 날개는 자신이 공중에서 전투를 치루게 해줄 수 있는 강력한 요소이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이 햇병아리에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날 수 있다는 것은 절대 이점이 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시그룬이 그 장점을 제대로 써먹을 수 없을 것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그룬은 그렇게 다짐하며 자신의 날개를 해체했다.


쿠웅


인공척수에 연결된 날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저 기능정지만 시켜놓아도 문제 없지만, 시그룬은 단호히 다짐했다. 드라우그와 단련하다 아차하면 자신도 모르게 날개를 쓸지도 모른다. 전투에서는 최선보다 최악의 상황을 염두해야만 했다. 그렇게 되뇌이며 시그룬이 검과 방패를 전개해 자세를 잡았다.


에너지가 흐르는 검이 황금빛 열선을 빛내고, 방패에 북구의 룬 문양이 떠올랐다.


"준비됐습니다, 교관님."


드라우그도 대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취했다. 


-우선은 너의 검술 실력 향상부터 간다. 날개를 활용한 공중전은 그 다음이다. 자, 선공은 양보하마.


"갑니다!!"


시그룬이 땅을 박차고 드라우그에게 질주하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쉬익! 캉!


드라우그의 대검이 시그룬의 검을 막고 여유롭게 맞받아쳤다.


"큭.."


-휘두르는 동작이 너무 크다. 적을 일격에 죽이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힘이 들어갈 수록 속도가 더뎌진다.


쉬식 슈슉 슈왁!


드라우그의 나이프 파이팅 기술이 시그룬을 향해 쇄도했다. 시그룬이 방패와 검을 사용해 드라우그의 검격을 막아내는데 급급했다. 그마저도 완벽히 다 막지 못하고 조금씩 공격을 허용해갔다.


-검이라는 무기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송곳니이자 발톱이다. 일격에 죽이기보다 상대를 몰아세우고 고립시키는데 적합하지. 위력보다 속도에 더 중점을 두도록 해라.


"아.알겠습니다!!"


반격의 엄두도 못내는 시그룬과 달리 드라우그는 공격을 하는 와중에도 가르침을 줄 정도로 여유로웠다. 시그룬도 애써 틈이 나는대로 검을 휘둘렀지만, 드라우그는 검으로 받아치긴 커녕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시그룬의 일격을 피해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움직임은 너무 간격이 넓었다. 그렇다면 전법을 바꾼다.


슉! 카잉!!


-호오 습득이 빠르군.


불시에 날아온 찌르기에 드라우그가 막아서며 감탄했다.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휘두르는 것보다 찌르는 것이 속도에서 더 빠르지. 또한 베는 것보다 찌르는 공격이 힘이 덜 들어간다. 


"그러면 한번 쯤 당해주시지 그러신가요?!"


시그룬이 이번에는 연속 찌르기에 들어갔다. 그에 맞서 드라우그도 대검술로 맞받아쳤다. 그때 시그룬의 공격을 막던 드라우그가 몸을 크게 휘청였다. 기회다!! 시그룬이 재빨리 드라우그의 품으로 파고 들며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휙!


"어?"


퍽!


"으악!!"


품으로 파고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드라우그는 순식간에 몸을 돌리더니 팔꿈치로 시그룬의 등을 가격했다. 시그룬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두번째, 공격이 너무 정직하다. 명심해라, 적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는 열쇠는 언제나 속임수다. 적에게 빈틈을 보였다고 속이고 역으로 적의 빈틈을 만드는 것. 


"그..그건 너무 비겁하지 않나요?"


 -비겁이란 것은 결국 상대적이다. 전투에서는 오직 승자만이 모든 것을 결정지을 수 있다. 네가 아무리 정정당당해도 죽어서 패배핸다면 비겁한 것은 네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거라. 적에게 패배하면 단순히 우리의 목숨만 잃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소중한 이들도 우리의 패배를 통해 빈틈이 생길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적을 속이고, 얼마나 적의 속임수를 잘 간파해내느냐. 그리고 얼마나 적의 빈틈에 치명타를 꽂아넣느냐. 이것이 전투의 핵심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검을 짚으며 비틀대며 일어선 시그룬이 다시 드라우그에게 검을 겨눴다.


"다시 한 번 갑니다!!"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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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에고로 향하는 와중에도 시그룬과 드라우그의 훈련은 계속 됐다. 시그룬은 사막에서 갈증으로 죽어가던 이가 물을 들이키듯 무서운 속도로 실력을 흡수해 나갔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드라우그와 가장 자주 붙어있다보니 어느덧 그녀의 성향도 점차 드라우그에게 물들어가는 것 같았다. 


초기에 순수하고 소심했던 말투는 드라우그처럼 딱딱하고 정중해져갔다. 말투만이 아니라 행동거지도 절제되고 명예를 중시하는 전사로의 모습이 잡혀가고 있었다. 사령관은 그런 시그룬의 모습에서 초기에 만났던 아직 어색했던 레오나가 떠올랐다. 과연 같은 발할라 팁 답게 이런 쪽에서 닮아가는구나 싶었다. 정작 당사자인 레오나는 그런 시그룬의 변화를 썩 좋게 보지 못했다.


"어제는 시그룬하고 간만에 걸즈토크 좀 나눠보려고 했는데, 글쎄 얘가 뭐라고 대답한 줄 알아?"


-사양하겠습니다, 대장님. 아직 제게는 섣불리 꺼낼만한 사적인 주제가 없습니다. 다음에 참석하겠습니다.


"애가 어쩜 그렇게 목석이 되버렸는지. 가끔은 내가 시그룬하고 대화하는지 더 무뚝뚝한 발키리하고 얘기하는지 모르겠다니까.이래서 드라우그한테 맡기기 싫었던 거였는데..."


마치 너무 빨리 철들어버린 딸의 모습이 아쉽기라도 한 듯 투덜거리는 레오나의 모습에 사령관은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반면 그런 시그룬의 변화에도 장화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우정을 변치 않았다.


"뭐 갑자기 너무 예의 발라진 것 같긴 해. 그래도 우리하고 놀 때는 여전히 우리가 아는 시그룬이 맞아. 그게 중요한거 아니겠어?"


내면의 변화를 겪은 본인이었기에 장화는 시그룬의 변화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시그룬도 여전히 장화에게는 다정한 친구였고, 자신도 장화를 소중한 친구라고 여겼다. 사령관은 그런 둘의 모습에 대해 이런 점에서 닮았구나 싶었다. 장화는 지나친 학대와 애정결핍,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성격이 망가졌다 치유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반면 시그룬은 마치 자연 상태의 동물처럼 순수하고 백지 상태인 내면이 오르카호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자신만의 색으로 변한다고 생각했다. 어느쪽이든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흐르는 와중에도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오르카호는 샌디에고에 도달했다. 항만에 접근하기 전 사령관은 바로 정찰조를 꾸려서 인근 정찰을 명령했다. 이미 알래스카에 오미크론이 한발 먼저 다녀갔는데 샌디에고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거기다 이번 샌디에고는 펙스의 바로 앞마당인 미국이었다. 분명 사전에 준비를 다 해뒀을 것이다. 함정이든 매복이든.


"정찰조에서는 아직 응답이 없어?"


"네, 항만에 가까이 왔는데도 적으로 보이는 움직임은 감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라비아타의 보고를 들으면서도 사령관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교활한 레모네이드 시리즈였다. 절대로 이곳에 아무 조치도 취하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정찰조한테 아주 미세하고 수상한 낌새라도 절대 놓치지 말라고 전해 줘. 방심하는 순간 우린 끝이야."


"걱장마세요, 주인님."


그렇게 신신당부하고 정찰조도 만전에 기하며 철저한 수색을 진행했지만, 날이 저물도록 그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밤이 찾아오고 정찰조도 지쳤기에 사령관은 하는 수 없이 복귀를 명령했다. 돌아온 후에도 혹시 모를 위험을 위해 정찰조의 신체 수색은 빼놓지 않았다. 레모네이드 오미크론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찰조의 신체에 보이지 않는 전파나 나노봇, 하다못해 바이러스를 묻히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사령관의 예민하다 못해 신경질적인 반응에도 오르카호의 누구도 반론하지 못했다. 그의 모든 염려는 전부 자신들을 위한 것임을 알았기에.


그렇게 정찰조는 휴식을 취하게 한 후 사령관은 지휘관 개체들을 소집했다. 그곳에는 두번째 인간 드라우그와 오미크론과 접촉했던 시그룬도 특별 참석했다.


"다들 들었다시피 정찰조가 하루종일 수색을 했는데도 발견한 게 없었다고 해. 하지만 난 절대로 오미크론이 아무 조치도 해놓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현명한 판단입니다, 각하. 레모네이드라면 분명 무슨 속셈을 숨겨놨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았어. 더 정찰을 하고 싶지만 정찰만 하다 시간을 뺏길 수도 없는 노릇이야. 너희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 기탄 없이 말해줘."


마리는 단박에 볼 것도 없이 제시했다.


"정찰은 충분히 했습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오르카호에서 대기만 할 수도 없습니다. 내일이라도 상륙해서 본격적인 점령작전에 들어가야 합니다, 각하!"


"그렇게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마리 소장님. 오히려 레모네이드의 계략에 말려들 수도 있어요. 아직은 더 신중해야 합니다."


홍련이 마리의 말에 반박했다. 그를 계기로 지휘관 개체들도 두 의견으로 나뉘었다. 당장이라도 점령 작전에 들어가자는 쪽과 좀더 수색을 가하자는 쪽. 


"되려 이렇게 시간을 끌게 하는 것이 오미크론의 계략일 수도 있다. 이렇게 낭비되는 시간에 오미크론이 언제 에인헤랴르에 도달할 지도 모르지 않나?"


"그렇다고 해도 아직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대원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소관도 동의하오. 애초에 점령보다 연구소 발견과 수색을 위한 작전이지, 이곳의 점령은 2차 목적이었소."


"그건 알 수 없어. 우리가 늦은 사이에 이미 오미크론이 우리 모르게 병력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전면전은 피할 수 없게 돼. 그건 알고 있지, 달링?"


"그냥 도시 째로 폭격해서 날려버리면 안될까? 그러면 적들이 숨어있어도 상관 없잖아?"


"메이, 조금 전에 들었지 않나? 그렇게 폭격하다가 연구소도 같이 날아가버리면 의미가 없게 돼네."


지휘관들 간의 의견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하필이면 두 의견 모두 타당한데다 서로 감정적으로 번지지 않고 논리적으로 서로를 설득하려다 보니 시간이 더 지체되어만 갔다. 이러다가 밤새 회의하겠다 싶어 급히 중재를 한 사령관. 지휘관들도 사령관의 지시에 순순히 응하면서 잠시 정숙했다. 사령관은 잠시 눈을 감고 고민했다. 어느 의견이든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었기에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운 순간. 사령관은 뒤에서 대기하던 드라우그와 시그룬에게 물었다.


"둘에게 물어볼게요. 어떻게하면 좋다고 생각해요?"


질문의 화살이 자신들에게 날아오자 드라우그와 시그룬이 움찔했다. 물론 사령관도 무턱대고 선택권을 둘에게 떠넘긴 것이 아니었다. 


"우리 중에서 알파를 제외하면 오미크론과 만난 건 드라우그와 시그룬 뿐이에요. 그리고 이번 작전의 핵심과 원인도 두 사람이고. 이대로는 도저히 결론이 안 나니 두 사람의 판단에 따를게요."


-...잠시 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네.


사령관이 허락하자 드라우그와 시그룬은 회의실의 구석으로 가 둘이서 속삭였다. 지휘관들도 둘의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절대 끼어들지 말라는 사령관의 지시에 그저 대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논의를 마친 둘이 다시 돌아왔다.


"아직 정보가 충분치는 않지만, 계속 시간을 끄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박이 되든 쪽박이 되든 우선 부딪혀보세. 이 시간에도 오미크론이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을지 몰라.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야.


결론이 정해졌다. 둘의 결정에 동의하며 사령관도 지시를 내렸다.


"내일 바로 상륙해서 돌입 작전을 개시한다. 오르카호는 만이르 대비해 항만에서 좀 떨어진 위치에서 대기하고, 수색작전을 꾸릴 유격대를 구성해야 해. 각 부대에 전파해서 지원할 사람은 내일 내게 찾아오도록 해. 이만 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