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퀵핸드가 합류한지 3주가 지났다.

 

고풍스러운 복장으로 사령관을 향해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를 하던 그녀였으나, 알비스와 LRL이 내민 손을 잡은 이후론 영락없는 아이였다. 가끔은 꼬맹이들 앞에서 언니 행세를 하려는 모습도 있었지만 사령관 앞에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베시시 웃는 표정은 마치 사령관에게 딸이 하나 더 생긴 기분이 들기에 충분했다.

 

“정말이지 영락없는 꼬맹이들이라니까”

닥터는 사령관의 표정을 읽은 듯 말했다.

 

“닥터!? 내가 아이들 생각하는건 어떻게 알아낸거야?!”

 

“그렇게 아빠 미소로 헤벌레하고 있으면 카엔언니라도 알아낼거야”

닥터는 음흉한 표정으로 잘난 듯 대답했다.

 

“으으.. 그래서 부른 이유는 뭐야?”

 

구겨진 종이뭉치들이 산재해 있는 살풍경의 방. 침대와 탁자, 조그만 옷장을 제외하면 흔한 꼬마화분 하나조차 없다. 차라리 아자즈처럼 장난감 조립에라도 흥미를 가졌으면 좋겠건만.

 

“또 또. 이번엔 아빠 얼굴로 걱정했어”

“아.. 미안..”

 

“신경쓸거 없어. 다른게 아니라 엘리 때문이야. 아까 LRL이랑 친하게 지낸다고 이야기했잖아?”

 

“그러고보니 거기서 시작됐구나”

“정확히는 오빠의 딸바보 표정이 거기서부터 시작된거지”

“내가 오늘 뭐 잘못한거 있니?”

 

“성격상 본론만 이야기할게. 그래서 엘리를 계속 오르카에 냅둘거야?”

“뭐?”

“내가 줬던 분석 데이터는 확인했을거 아냐?”

닥터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앳된 나이에 걸맞지 않는 표정엔 성인들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차가운 표정이 담겨있었다.

 

“봐, 봤어. ‘오르카 저항군에서 활용하기엔 엘리 퀵핸드의 능력은 부족하다’라고”

 

“...맞아. 당시엔 대 테러용 바이오로이드로 제작되었지만 지금은 시대가 너무 변했어”

차가운 표정으로 닥터는 말을 이어갔다. 닥터의 표정만큼이나 그녀의 방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분명 티타니아는 일을 나갔을 텐데도.

 

“장화의 습격 이후 몽구스 팀은 어떻게 하고 있지?”

“바이오로이드용 대 테러 훈련을...”

“이그젝틀리. 우리의 적은 ‘인간’이 아니야. 철충과 별의 아이, 그리고 미국을 점령 중인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잔당이야”

 

“알고있어”

“사령관인 오빠가 모를 리가 없겠지. 지금의 엘리론 하이에나 언니가 만든 사제폭탄을 해체하기도 힘들거야”

 

“그렇겠지..”

확실히 엘리는 과거의 폭발물 처리용 바이오로이드. 어림잡아도 백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현재의 폭발물을 처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엘리의 특성상 자신의 능력으로 해체 불가능한 폭발물이라면 그녀는 분명..

 

“미안하지만 쓸모없는 친구야”

“닥터..”

“같은 080기관의 요원으로서 내리는 판단이야. 알비스는 방어력이 뛰어나고, LRL은 순간적으로 상대를 봉쇄할 수라도 있어. 하지만 엘리는.. 엘리가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만든 부비트랩을 해체할 수 있을거라 생각해?”

 

사령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보내자. 요안나 섬”

 

속칭 요안나 아일랜드. 전투에 지치고 지친 바이오로이드들이 택하는 곳. 전투따윈 없는 곳에서 평화롭게 섬을 가꾸며 언젠가 돌아올 평화의 날을 위한 터전을 만드는 곳이다. 전투 모듈을 제거한 바이오로이드는 요안나의 통솔아래 정기적으로 섬으로 떠난다.

 

요안나 섬으로 보내는 것은 사령관 역시 고려해봤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이 있었다.

 

“그녀가 직접 택해야 해..”

“뭐? 또??”

 

지금껏 바이오로이드의 요안나 섬 이주는 모두 그녀들의 선택으로 이뤄졌다. 사령관은 절대 이주를 중용하지 않는다. 이건 그가 절대 굽하지 않는 정책 중 하나였다. 아직 싸울 수 있다면, 자신의 곁에 함께 항해하는 것을 허락했다.

 

“캐럴라이나, 포티아 모두 나와 함께 있길 택했고 그녀들 나름대로 활약하고 있잖아”

“엘리가 불을 다루고, 음파 공격을 할줄 안다면 나도 남겨뒀을거야”

“....”

 

사령관은 망설였다.

 

“하지만, 안돼. 그녀의 의지가 아니면 보내지 않을거야”

사령관은 단언했다. 닥터는 작게 “하아.. 엘리도 제 발로 나가진 않을텐데..”라 중얼거리며 탁자에 있는 노트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오빠? 나말야... 더 이상 친구가 죽는건 싫어”

닥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친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다치고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않아”

“나도 그래”

 

“엘리 퀵핸드는 우리가 맞서는 전쟁에서 효용이 확실히 떨어지는 기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어. 그러니까 요안나 언니 따라 안전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물론 새로사귄 친구들이랑 떨어지는건 슬프겠지. 그래도 거기에서 새로운 친구를...”

 

“내가 완벽할게”

닥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내가.. 아무도 죽게하지 않을거야. 지금까지처럼. 아직 완벽히 이겨내겠다곤 말할 수 없지만, 일단 미국까지는 내가...”

 

“후훗, 말이 길어지네 오빠?”

닥터는 다시 몸을 사령관 쪽으로 돌렸다. 특유의 장난기 넘치지만 망설임없는 표정과 함께. 눈망울은 조금..

 

“감히 레이디의 속마음을 들춰보려는거야?”

닥터는 몸을 획돌리며 사령관을 쏘아댔다. 남자는 ‘하하’ 웃었다.

 

“닥터도 내겐 여동생이고 딸같은 존재야”

“아니야! 나도 어엿한 레이디야!”

일어선 닥터는 사령관을 향해 포옥 안기며 작은 가슴을 들이댔다.

 

“그래그래 우리 동생”

사령관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닥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닥터는 사령관의 품에 안긴 채 말했다.

 

“엘리 개체는 LRL, 알비스, 안드바리 같이 동년배 개체가 많아서 적응이 편할거야”

“그래. 히루메는 배틀 메이드에 적응하는게 꽤나 쉽지 않았더라고”

“오빠는 콘스탄챠 언니가 누구한테나 상냥할거 같지?”

“무슨 소리야”

“키히히. 글쎄”

 

“그러고보니, 닥터는 아이들이랑 안놀아?”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어찌 놀겠어?”

“하하”

 

“과자부터 콜라 마시는 것까지, 하나하나 타일러서 귀찮아 죽겠어”

“엘리는 귀족의 교육역할도 맡았다니까. 여기서도 어린이들의 예절교육을 하고 싶나봐”

“짜증나 죽겠어 진짜. 가서 회로를 확 뒤집어 엎어버릴까”

 

사령관은 닥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어쩌면 엘리는 오르카호에서의 자기 역할을 찾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그러니 엘리가 활약할 때까지 조금만 시간을 갖고 기다려줘”

 

“무슨 소리야 오빠. 바이오로이드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은 우리 연구팀의 일이야”

닥터는 사령관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을 이었다.

 

“사령관은 지휘만 하면 돼”

그러고는 문을 열더니 오르카호의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가?”

 

“까마귀들 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