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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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인생을 살다 보면 재수가 좋다는 말은 항상 입에 붙이고 살기 마련이다. 도로 위에 놓인 개똥을 안 밟았다던가, 아니면 너구리 라면에 다시마가 2장 붙어 나온다던가. 일상생활에서도 흔히들 쓰이는 이 말은 군대에 들어서기 전의 나에게는 너무나도 절실했던 문구였다.

 

“저기 그래서 제가 뒷모습을 쭉-바라보았는데 두 분 모두 저희 취향이셔서..”

 

“하..하하. 그..그러셨나요?”

 

“네! 뒷모습만 봤는데도 확! 하고 삘이 꽃혔던게..”

 

“아하하...”

 

“...”

 

 제발 이상한 부대에 배치되지만 말아다오. 제발 이상한 오지에 틀어박히지만 말아다오. 훈련소에서 없던 신앙심까지 불태워가며 기도를 드린 덕분일까. 나는 그나마 이상한 부대도, 이상한 보직도 배정받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재수 좋았다고 말하기에는..충분하지. 암.

 하지만 내게 있어 가장 재수가 좋았던 부분은 다름 아닌 선임이 나사 빠진 양반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딱히 내게 해코지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사고를 치면 대신 나서서 수습도 해줬다. 덕분에 이 양반이 징계받을 만한 사건 사고를 치면 나도 수습하느라 고생했지만.

 

“저기..혹시 평소에 인상이 좋으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신 적 없으신가요?”

 

“아..예. 없는데요.”

 

“어머. 그럴 수가. 이렇게나 선한 얼굴이신데 주변에서 한 번도 언급하신 적 없었나요?”

 

“...예.”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장신의 여성, 한눈에 봐도 늘씬한 몸매에 젊어 보이나 나는 그 여성에게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시선만큼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선임의 등을 향해 고정했다.

 

‘..이 양반. 왜 이렇게 헤벌쭉해?’

 

 콜 택시를 불러 부대 근처에 있는 번화가로 나온 지가 겨우 30분, 우리는 어느 한적한 대로변에서 두 여성에게 붙들린 채 그녀들의 헌팅 아닌 헌팅을 받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한 귀로 들어보아도 어색하고 어딘가 책으로 배웠다는 느낌이 확연히 드는 대사에 나는 눈살을 한껏 찌푸렸으나 내 곁을 따라 걷던 이 멍청한 양반은 입에 문 담배를 축 늘어뜨린 채 스포츠 컷을 한 제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혹시 휴가..나오신 건가요?”

 

“예? 아하하. 그..그게..”

 

“저기, 죄송하지만 여기까지만 듣도록 하겠습니다.”

 

“응? 야. 너 갑자기 왜..”

 

 갑자기는 무슨 갑자기야. 이 양반아.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샌님을 무시한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여성들을 향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저희는 휴가가 아니라 외박입니다. 그리고 현재 숙소로 이동해 당직사관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으니 이만 자리를 뜨겠습니다.”

 

“어..그..그러시면 저희 연락처라도..”

 

“죄송하지만 제 곁에 있는 선임도, 저도 이미 임자 있는 몸입니다. 그러니 연락처 교환은 삼가도록 하겠습니다.”

 

“어? 너 지금 뭔..”

 

“병장님. 그만 이동하시죠.”

 

“어?! 야! 얌마!”

 

 평소에도 얼빠진 행동을 종종하기는 하나 나사 풀린 모습은 일절 안 보여주던 양반이, 오늘따라 유독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앉아 있다. 나는 반항하는 꼴초뱀의 등 옷자락을 쥐어 잡고선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두 여성을 무시한 채 멈추었던 걸음을 재촉했다.

 발버둥은 그만 쳐. 이 양반아.

 

“꼴초뱀. 뭐가 그렇게 좋다고 헤실헤실, 짱구처럼 굴고 있습니까?”

 

“얌마! 나 연애 못 해 본지가!”

 

“예예. 나이대로 겠죠. 압니다. 알아요.”

 

“어?! 야 이..! 너가 어떻게 알아!?”

 

“꼴초뱀의 반응 보면 대충 견적 나옵니다. 따라 걸으십쇼. 귀찮게 끌기도 싫으니까.”

 

 이제는 옷자락을 쥐지 않아도 내 걸음을 맞춰 걷기 시작하는 선임은 투덜투덜 중얼대면서도 구겨진 옷깃을 펼칠 뿐, 내게 한 마디의 불평불만이나 욕설도 날리지 않았다. 정말 선임 재수는 타고 났다고 생각할 즈음, 나는 그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위에서 내려온 공문 못 봤습니까?”

 

“그걸 왜 읽냐? 뭐라 적혀 있었는데?”

 

“근래 들어 사병들을 노리고 접근해오는 사이비 전도가 횡횡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이야기 있었잖습니까.”

 

“..응? 그런 공문이 있었어?”

 

“...좀 읽으십시오.”

 

 옛날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선임의 반응에 나는 이마를 턱 짚고야 말았다. 대충 견적 잡히잖냐.

 

“..꼴초뱀이 여성이라면 한적한 대로변에서 사람 없다고 실실 웃으며 입에 담배를 문 군인한테 대쉬하겠습니까?”

 

“...”

 

“머리도 까까머리. 인상이 좋다고요? 제가 살면서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제 인상, 꼴초뱀은 어떤 것 같습니까?”

 

“..존나 험악해.”

 

“그쵸? 가뜩이나 머리 기르고, 옷을 잘 빼입어도 모자랄 판에 디지털 군복 입고 머리도 까까머리라 이마까지 훤히 인상이 드러난 군인한테 왜 옵니까? 조금만 걸어가도 모델할 법한 놈들이 지천인데.”

 

“..씨발. 그러면 나 낚일 뻔한 거니?”

 

“모르고 있었다는 게 더 용합니다. 아주 그냥.”

 

터벅-터벅!

 

 한적한 대로변을 지나 행여 뒤따라 오지 않을지를 의심하며 나는 사람이 북적대는 상가 쪽으로 들어섰다. 대충 이 정도 인파라면 우리를 구분하기는 어려울 터, 나는 입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씹고 있는 선임의 불만 어린 얼굴에 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뭡니까. 그 얼굴. 여자한테 차인 남자보다 더 꼴사납습니다.”

 

“...넌 언제부터 눈치챘냐?”

 

“? 뭘 말입니까?”

 

“..저 아가씨들이 우리를 호구로 보고 왔다는 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 전도사라고? 상상도 안 가는데.”

 

“...”

 

 하긴.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정말 멀쩡하게 아름다운 아가씨들이다. 애당초 그런 아가씨들이 아무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온다면 이 샌님처럼 구는 게 당연한 일일까. 남자라면 한 번쯤 꿈꿔볼 만한 판타지긴 한다만.

 

“..처음부터 안 믿었습니다. 말했잖습니까. 우리 꼬라지를 보라고요.”

 

“..허이쿠. 너 그렇게 의심 많은 놈이었냐?”

 

“의심은 꼴초뱀도 의심하고 살았죠. 뭘.”

 

 무심결에 내던진 과거사에 선임은 반쯤 가라앉히던 눈썹을 다시 치켜 올리며 내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어? 그건 금시초문인데? 야! 나처럼 잘 해주는 선임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러니까 의심하죠. 무슨 선임이 후임 따라다니면서 양말 빨고 너는 것까지 일일이 챙겨준답니까? 크크.”

 

 어머니도 이 정도로 안 가르쳐주겠다. 나는 실망했다는 눈빛으로 날 쏘아보는 선임에게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상가 골목의 으슥한 곳으로 그를 인도했다. 이 양반은 하루 담배 한 갑을 안 피면 죽는 양반이니 이 정도 배려는 해 줄 수 있다.

 

칙-!

 

“-후우. 너 사람을 어! 그렇게 막 의심하고 보면 안 돼.”

 

“사람만큼 못 믿을 생물 없습니다. 꼴초뱀.”

 

 하수구 냄새가 풀풀 풍기는 으슥한 골목이기는 하나, 이미 내 코앞에서 담배에 불을 붙인 이 군인의 탓에 하수구의 냄새가 담배 냄새에 묻혀버리기 시작했다. 나는 등을 벽에 기댄 채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그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못 믿긴 개뿔. 세상천지에 널린 게 인간인데 그렇게 일일이 의심하면 어떻게 사냐?”

 

“세상천지에 널린 게 인간이라서 의심하고 봐야죠. 꼴초뱀처럼 사람 좋은 인간, 이 세상에 몇 없습니다.”

 

“...칭찬은 감사히 받도록 하지. 음.”

 

“그리고 그 아가씨들, 허리춤에 백 하나 차고 있지 않았습니까.”

 

“? 어어.”

 

“제가 봤을 땐 거기에 그 아가씨들 교단의 교전이 있다고 봅니다. 백이 화장품 백이라기에는 조금 큰 사이즈였거든요. 코디에도 안 어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타일을 살린 아가씨들이 백을 그런 걸 쓴다? 의심부터 하고 봐야죠.”

 

“..추측인지. 아니면 추리인지. 얼씨구. 너 탐정 수사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

 

“뭐. 코난이라도 할까요? 아, 전 김전일팝니다.”

 

“...”

 

 뭐. 그렇게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면 어쩔 건데. 나는 내가 생각해도 음침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어갔다.

 

“열 길 물길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는 말. 괜히 있는 게 아니죠.”

 

“야이씨...너 그렇게 살면 힘들어. 쨔사.”

 

“꼴초뱀처럼 넙죽 낚싯바늘에 낚일 바에야 낚싯바늘 끝에 달린 미끼를 아예 쳐다도 안 보는 게 정답이 아닙니까?”

 

“...말 한마디를 안 지네. 너 그러면 너희 생활관 애들은? 걔들도 안 믿냐? 맨날 살뜰히 챙기더니만.”

 

“...”

 

 이렇게 나오시겠다. 나는 어딘가 사람을 채문하듯 물어오는 선임의 언동에 고개를 까닥였다. 이걸 어떻게 설명한다라..

 

“..예를 들어 제가 그 녀석들을 막 굴린다고 해봅시다.”

 

“후우-어.”

 

“그러면 걔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무슨 쌍팔년도 군대도 아니고. 곧장 절 소대장님이나 중대장님한테 찌르겠죠?”

 

“...음.”

 

“그러면 저는 징계 받겠죠? 그건 싫습니다. 그러니 그 녀석들을 잘 챙깁니다. 하지만 잘해주기만 하면 절 호구로 보겠죠.”

 

“...”

 

“호구가 돼서 전역 전까지 굴러지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욕하면서 챙기는 겁니다. 같이 한솥밥 먹고 같이 잠도 자는데. 서열 정리는 계급장으로 떼고, 대충 같이 작업하고, 가끔 삥땅도 쳐 주고 하면 걔들도 제가 편하니 어디 가서 제 욕은 안 할 테고. 저도 어디 가서 뒤에 칼빵 맞을 일 없으니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야. 거기까지 생각하고 살았냐?”

 

“군대 와서 배우는 게 사회생활 아닙니까.”

 

 군대는 폐쇄된 공간이다. 내가 나가고 싶다고 왱왱거려도 절대 군부대 밖을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다. 그리고 나는 말단 병사에 불과하다. 위에는 소대장, 중대장 할 것 없이 상관들이 득실거린다. 아래로는 나보다 한참 기수가 떨어진 놈들뿐.

 

“분대원 하나랑 다투기라도 하는 날에는 성질머리 더러운 놈들처럼 평생 뒤에서 호박씨 까이고 살아야 합니다. 거기다 어디 밖으로 못 나가니 그 녀석이랑은 샤워실에서도 보고, 밥 먹을 때도 보고. 심지어 잘 때도 보겠죠.”

 

 그럴 바에야 대충 위계질서만 잡고 풀어주는 게 낫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줄 바에야. 어지간한 일로 서로 얼굴 붉히지만 않으면 그만. 나는 속으로 내 주관의 당위성을 맞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인생관이다.

 

“...그래. 어. 음...그래. 흐음..”

 

“? 왜 담배 태우다 마십니까? 마저 피고 갑시다. 꼴초뱀.”

 

“...아니. 너 혹시 말이다. 분대장 할..생각 없냐?”

 

“...미친 소리 하지 마십시오. 제 인생관은 길고 얇게 가는 겁니다. 예?”

 

“...그래? 어. 우선 뭐, 알겠다.”

 

찌-직! 찍!

 

 갑자기 이 양반이 뭔 이야기를 하는 건지.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군홧발로 담배꽁초를 비비는 선임의 정수리를 빤히 노려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양반이 분대장 딱지를 뗄 날도 머지않았다. 나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눈치채곤 계속해서 내 눈길을 피하는 선임의 고개를 따라 몸을 웅크렸다.

 

“꼴초뱀. 행여 말하는 건데, 저 분대장 같은 거 죽어도 하기 싫습니다.”

 

“아, 알아. 야. 뭘 그렇게 정색하냐?”

 

“그런 책임만 있고 보상도 없는 일에 죽어도 관심 없습니다?”

 

“알고 있어. 너랑 나랑 보고 산 지도 어언 1년이다. 야.”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어. 어차피 내 추천으로 될 일도..음. 아니고. 생활관에 다른 동기도 있으니까. 뭐, 너무 걱정하지 마라.”

 

“...”

 

 쎄하긴 하지만 이 양반이 뭐 언제 내게 피해갈 만한 일을 벌인 적이 있나. 내가 싫다는 건 대부분 들어줬으니, 이 이상의 의심은 할 필요도 없겠지. 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라앉힌 채 골목을 빠져나가는 선임의 뒤를 따라 걸었다.

 

뚜벅-뚜벅

 

“이제 꼴초뱀이 전역할 날도 며칠 안 남았네요.”

 

“뭐. 그렇네. 이야. 군입대할 때만 해도 언제 전역하냐고 날짜 세기 바빴는데.”

 

“시간은 정말 멈출 줄을 모르고 흘러가네요.”

 

“크크. 무슨 영감쟁이처럼 말하냐? 어서 가자. 그놈의 시간 때문에 우리 외박도 빨리 간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능글맞게 구는 선임의 언동에 나는 피식 코웃음을 치며 상가의 북적이는 거리를 걸어나갔다. 생각해보니 아까의 그 질문 탓에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나 역시 그 질문을 내던진 주범에게 내심 쓸데없는 말을 한마디 내던지려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꼴초뱀. 제 인생 조언 하나 들어보겠습니까?”

 

“? 뭔 인생 조언?”

 

“제가 의심도 많고, 눈치도 많이 보는 성격이라 눈치챈 거지만 말입니다. 꼴초뱀의 앞날을 대-충 읽어보니..”

 

“...뭔 개소리를..”

 

“..꼴초뱀은 공처가가 될 신셉니다. 행여 기 쎈 아가씨랑 살림 꾸리거든. 꽉 잡혀 사실 각오는 하십시오.”

 

“...이 색히가!”

 

 그러게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그러십니까. 나는 얼굴을 화끈 붉히는 선임의 주먹질을 어깨로 받아내며 껄껄 웃어대었다. 정말이지. 놀리는 맛이 넘치는 양반이다. 이 양반 전역하면 난 무슨 낙으로 사나. 그렇게 나와 선임 양반은 시끌벅적한 도로변의 한가운데서 소음의 단계를 한층 끌어 올린 채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아갔다.


116)

 

 무더운 여름날의 연속, 특히나 근래 들어 유독 더워진 요안나 아일랜드의 기후는 이 땅의 물자를 총괄하는 똑 부러진 소녀, 안드바리마저 소매를 걷도록 만들었다. 그렇다. 너무나 더운 날씨였다.

 

“자. 알비스. 지금부터 네가 하는 말 한마디에 앞으로의 네 처우가 결정될 거란다?”

 

“우리가 잘-못 했어요! 안드바리!”

 

철-푸덕!

 

“후에에엥! 우리가 나빴어! 미안해!”

 

철-퍽!

 

“...예?”

 

 너무나 더웠던 날씨가 문제였을까, 안드바리는 지금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두가 내일을 위해 잠들었어야 할 심야의 시간대, 그 시간대에 라붕이 작전관은 운디네를 통해 지하 벙커 시설의 물자를 풀라고 했다. 그 의미를 알아챈 안드바리는 단숨에 벙커 비축 창고를 오픈, 그곳에서 여러 비축 물자를 들고 건물의 대형 로비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수송부대 사람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은다고 했으니까, 안드바리는 그런 생각만을 한 채로 양팔 한가득 주류와 식자재가 담긴 박스를 들고 옮기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이들이 있었으니.

 

“정말 할 말이 그것뿐이니? 알비스?”

 

“엣? 에...그..그러니까..”

 

“알비스! 좀 더 진지하게 사과 못 해요?!”

 

“히-잉! 하..하지만 여기서 더 뭘..”

 

“..보아하니 내일 우리에게 바캉스 계획은 없던 것으로 해야겠네. 베라, 오늘 밤 안으로 군장 점검을 끝마쳐 둬.”

 

“히-에에엑!”

 

 평생 마주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최고급 개체 철혈의 레오나가 자신의 앞에서 평상복을 입은 채 날카로운 턱 끝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일전에 만났던 알비스들을 쭉 나열해놓고 있는 광경에 안드바리는 멍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어..”

 

 도게자를 한 채 고개만 빼꼼 내밀곤 울상을 짓는 알비스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머리에 꿀밤을 놓는 베라들. 거기에 뒤편에서 한숨을 푸푸-내쉬는 님프와 샌드걸들. 

 

“...어...저기.”

 

톡-톡

 

갑작스러운 그녀들의 등장에 그녀가 미처 손에서 박스를 내려놓고 있지도 못하는 사이, 누군가가 가녀린 소녀의 어깨를 뒤에서 톡톡 두들겼다.

 

“어?”

 

“안드바리양.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예? 예?”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릴 필요 없습니다. 후훗. 일찍이 그녀들이 사과해야 했을 문제를 뒤늦게 받는 것뿐이니.”

 

 어깨에 올려진 가느다란 손바닥의 주인공, 발키리라 불리는 저격수의 뜻 모를 따뜻한 위로에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던 안드바리의 정신이 그제야 퍼뜩 제자리로 돌아섰다. 이제야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알비스들이 누구인지 인식한 것이다.

 

“...정말이지. 우리 부대에서 이런 일이 생겼을 줄은 몰랐어. 정말 미안해.”

 

 철혈의 레오나의 짤막한 확인사살로 안드바리는 확신했다. 지금 울상을 지은 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알비스들은 일찍이 자신에게서 초코바를 받아간 후방 보급부대 탈취 사건의 원흉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안드바리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지금 그녀들이 이렇게 도게자를 하는 이유와 제조 당시부터 존경해온 본대 소속의 철혈의 레오나가 이마를 짚고 있는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아니에요! 레오나 소장님! 제..제가 똑바르지 못해서 생긴 일이었는데요!”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 애들을 더욱더 용서하기 힘드네. 후우..”

 

“저희 대장님도 사건의 전말을 듣고선 매우 고심했습니다. 그러니 너무 그렇게 자기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

 

“아..아으..”

 

 사진으로만 영상으로만 보아왔던 철혈의 레오나와 발키리의 위로에 안드바리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박스 아래로 쑥 내렸다. 이곳에도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소속의 대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녀들과 같은 고급 개체는 없었기에 또 이런 상황 자체가 소녀에게는 익숙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알아챈 것인지, 발키리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그녀의 양팔에 한아름 담긴 박스들을 톡톡 두들기며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 들었다.

 

“그 물자는 로비로 옮기는 물자입니까?”

 

“예?..예. 대장님이 연회를 하라고 하셔서..”

 

“어머. 그 남자가? 생각보다 운치를 아는 남자네. 그렇네. 우리도 나름 여름 휴가의 첫날 밤인데, 남정네 둘만 즐기면 섭섭하지.”

 

“에..헤헤.”

 

 철혈의 레오나의 안색이 확연히 밝아지자 그제야 복도를 감싸던 한기의 무게가 조금 옅어졌다. 역시나 이름 그대로 철혈, 안드바리가 그런 감상평을 내리고 있자니 그녀 곁에 서 있던 장신의 여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대장님. 제가 안드바리양을 돕고 오겠습니다.”

 

“그러렴. 어차피 우리 애들은 오늘 연회에 미참이니까.”

 

“엣?! 그..그건.”

 

“알비스! 아직 진심으로 반성하지 못한 눈치네!”

 

“아..아니야. 베라 언니. 히잉.”

 

“연대책임으로 저나 님프 역시 불참입니다. 아쉽게 되었군요.”

 

“그..그런 거야? 샌드걸?”

 

“뭘 되묻고 그러십니까. 설마 저 아이 손에 들린 물자를 탐내고 있는 겁니까?”

 

“아..아니야. 그..그럴 리가.”

 

“당장 어제만 해도 체중이 늘었다고..”

 

“쉿-! 쉿!”

 

 샌드걸의 폭로 아닌 폭로에 님프의 얼굴이 붉게 물들자 기다란 복도 위가 저마다의 하하호호하는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이것이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같은 부대의 자매애라는 것일까. 안드바리는 평소 느껴보지 못한 안도감에 사로잡혀 헤실헤실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본 철혈의 레오나의 얼굴에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가는 길에 붙잡아서 미안해. 자, 이제 네 임무를 완수하러 가보렴.”

 

“네..넷! 알겠습니다!”

 

“그렇게 뻣뻣하게 굴 필요 없어. 심심하면 우리 부대 생활관으로 찾아오고. 할 이야기는 많으니까.”

 

“헤헤. 네. 소장님.”

 

“짐을 덜어드리겠습니다.”

 

덜-커덕!

 

“헤헤. 감사합니다.”

 

“..이 정도는 당연한 겁니다. 후훗.”

 

 어느새 자기 앞을 가로막고 앉아있던 무리가 길을 터주자 안드바리는 평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들 사이를 지나쳐 갔다. 본대 사람들은 매일 전투를 하는 사람들이니까, 무서운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상은 친언니와 같은 사근사근하고 따듯한 이들이었다.

 

‘헤헤. 모두 리리스 언니처럼 착한 언니들이네요.’

 

 문득 머릿속을 팍-하고 스쳐 지나가는 한 인물을 떠올린 이 땅의 안드바리는 조금 조급해진 발걸음으로 복도 위를 걸어갔다. 지나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사람들도 좋은 사람들이지만, 소녀에게 있어 이미 언니라고 부를 만한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다.

 

또박-또박!

 

“발걸음이 제법 빠르군요. 안드바리양.”

 

“헤헤. 모두가 저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 말이 맞습니다. 저도 걸음을 좀 재촉해 볼까요.”

 

“네!”

 

‘얼른 리리스 언니랑 놀고 싶네요.’

 

 작년과 같이 그저 무더운 여름날만 견뎌야 할 줄 알았던 안드바리의 머릿속은 온통 내일을 향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분명 작년만 해도 전방 대원들에게서 음료수를 어떻게 지켜낼지만 고민했던 것 같은데, 올해만큼은 확연히 달랐다.

 

‘전부 대장님 덕분이네요. 헤헤. 내일 대장님도 나오시겠죠?’

 

“헤헤..”

 

또박-! 또박!

 

“..후훗.”

 

 만면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남색 머릿결 소녀의 얼굴에 설원의 저격수 역시 입꼬리를 뺨 위로 끌어올렸다. 지금의 그녀는 마치 양팔에 들린 박스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기에.

 

117)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느 한적한 여름날 밤, 섬에 드리운 어두운 장막 사이로 환한 햇빛과도 같은 전등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건물은 유달리 시끌벅적한 여름밤을 만끽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모두가 잠을 청했을 시간이었으나, 오늘만큼은 그 누가 무어라 할 것도 없이 저마다 건물의 지하창고에 비축되어 있던 식자재들을 들고나와 건물의 대형 로비에서 떠들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유달리 많은 사람이 모인 어느 구석, 그곳에는 오랜 시간 서로 얼굴도 못 보던 이들이 저마다의 술잔을 쥔 채 기나긴 해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야야. 이프리트.”

 

“대위! 이! 프리! 트!”

 

“아하하하!”

 

“크크크! 중사한테 복명복창하는 대위가 여기 있네?”

 

“그렇게 말하는 중사님은 어째 여전히 중사 딱지를 못 떼고 계신답니까?”

 

“어쭈!”

 

“헤헷.”

 

 백발에 가까운 머릿결을 휘날리는 성인 여성의 꿀밤 시늉에 그녀의 곁에 앉아있던 분홍빛 머릿결의 소녀, 이프리트는 샐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오른 주먹을 피하는 시늉으로 맞받아쳤다. 그러자 그녀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다른 이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중사님도 여전하시네요.”

 

“그렇게 말하는 노움 너도 장교 딱지 달았다면서? 어째 재빨리 전역했다는 녀석들이 돌아올 땐 나보다 승진해서 돌아오냐?”

 

“헤헤..거의 반강제에 가까운 계급장이긴 하지만요.”

 

“맞아. 우리도 이렇게 재입대할 줄은 몰랐다고.”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예상외의 이야기가 두 조교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유리잔에 담긴 맥주를 목구멍에 넘기려던 임펫 중사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것은 그녀들 주변을 둘러싼 스틸라인 소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위님. 대위님. 그 이야기, 조금만 자세히 해보십셔.”

 

“브라우니! 윗분들 이야기에 함부로 끼어들지 마요!”

 

“아니. 이건 나도 궁금한데..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국방색 나시티를 입은 여성들이 저마다 눈을 반짝이며 목을 자신에게 쭉 내밀자 주목의 대상이 된 이프리트의 입술이 앞으로 삐죽이 튀어나왔다. 딱히 숨길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막 기분 나쁜 경험도 아니었으나 괜히 그녀들만의 기억을 떠벌리고 싶지는 않았던 탓이다.

 

“언니. 제가 말할까요?”

 

“..아냐. 뭐. 딱히 숨길 이야기도 아닌데.”

 

 이런 부탁에 약한 후임이 자신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 두리번거리자 이프리트는 짧은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자신의 과거사를 찬찬히 읊어 내렸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 대장..아니. 대장님이 부임하시고..”

 

“...”

 

“..처음에는 뭐 이런 띨빵한 인간이 다 있나 싶었거든? 그래서 대충 눈치만 보면서 일하려고 했는데..”

 

“...”

 

“어느 때는 삽 한 자루 들고 와서 우리보고 땅을 파자는 거야. 그때는 이 인간이 뭘 잘못 먹었나, 아니면 미친놈인가 싶었는데..”

 

“...”

 

“...왜 다들 그렇게 날 바라보는 거야? 이게 그렇게나 궁금할 일이야?”

 

 갑자기 침묵으로 돌아선 로비의 분위기에 이프리트는 읊으려던 이야기를 잠깐 멈추고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주변으로 저마다 떠들고 있던 로비의 인원들의 시선이 모조리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부담감에 이프리트의 눈썹이 찌푸려지다 못해 찡그리려 들자 곁에 있던 임펫 중사는 제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 뭐냐, 여기 대장님. 사실 우리한테는 미지의 인간님이니까. 관심이 동하는 건 어쩔 수 없지.”

 

“..우리 대장이 그렇게 희귀한 동물이야?”

 

“사실 라붕이 대장님이 여기 취임했을 때만 해도 우리는 전부 사령관님 몰래카메라인 줄 알고 식겁했다니까? 갑자기 두 번째 인간님이 등장했다고 하질 않나, 그 인간님이 최후방에서 지옥 훈련을 개시했다고 하지 않나.”

 

“-그 인간 찾은 건 나야! 나!”

 

“전대장! 시끄러워! 잘 안 들리잖아!”

 

“히잉..”

 

 저 멀리서 어느 발랄한 여성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이번에는 그곳으로 로비 인원들의 시선이 돌아섰다.

 

“슬레이프니르양! 그거 사실이에요?!”

 

“와아! 어디서 발견하신 거예요? 발견 당시에는 대장님이 어떠셨어요?!”

 

“이건 특종이에요! 왜 이런 걸 여태까지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그..그게..헤헤. 사령관이 일급 기밀이라고 해서..”

 

“그러면 입 열면 안 되던 거잖아! 이 멍청한 전대자앙!”

 

“...관심이 저쪽으로 돌아갔네. 후우.”

 

 로비에 모인 본대 인원들이든, 생산 인원들이든. 그 누가 무어라 할 것도 없이 몇몇 기동대원들이 자리 잡은 테이블로 모여들자 아까까지 관심의 중심에 머물러 있던 이프리트는 또 한 번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이제야 자신의 손에 들린 맥주캔을 입가로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그의 옛 상관이었던 임펫이 다시금 살짝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이프리트. 네가 보기엔 여기 대장님은 어떤 사람인 것 같아?”

 

“..질문의 뜻을 모르겠네. 중사님.”

 

“뭐, 나쁜 인간님이냐. 아니면 우리 사령관님처럼 좋은 인간님이냐. 단순한 질문이야.”

 

“...”

 

 과거, 사령관이 발견되기 전부터 여러 전장을 뒤엉켜 왔던 그녀들에게 있어 이 질문의 무게는 짧은 문구만큼 가볍지 않았다. 사령관이라는 인물은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증명했다.

 바이오로이드들을 차별하지 않고, 그리고 그녀들을 따듯하게 보듬어주는 그런 꿈에만 그리던 인간. 그렇다면 라붕이 작전관은 어떠한가. 그는 사령관처럼 착하기 그지없는 인간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오르카 저항군 전체의 사기에 영향을 끼칠 터였다. 임펫의 짤막한 질문 속에 담긴 의중을 알아챈 이프리트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대기 시작했다.

 

“..우리 대장이 어떤 인간이냐라..”

 

“안색이 별론데? 썩 그렇게 나쁜 인간님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으음. 나쁜 인간님은 아니야. 그것만은 확실해.”

 

후-룩!

 

 복잡 미묘한 얼굴로 천장에 달린 전등을 빤히 바라보던 이프리트는 손에 들린 음료수 캔의 끄트머리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시원한 음료의 맛이 그녀의 입안 전체를 맴돌자 그제야 그녀는 칼칼한 목구멍에 음료를 들이붓곤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대장은 좋은 인간이지. 응.”

 

“그럼 사령관님 같은 인간이라는 말이잖아?”

 

“..그건 또 다른 뜻인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대장이 사령관님처럼 한없이 좋은 인물은 아니라는 거야.”

 

“? 그게 무슨 소리야?”

 

“...약간의 거리감이랄까. 뭐. 나도 잘 모르겠네. 그건.”

 

 라붕이 작전관은 격이 없다. 병사들과 잘 어울리고, 또 병사들의 고충을 빠르게 이해한다. 이프리트가 보아온 그의 언동에는 분명 병사들에 대한 배려가 한가득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사령관과 같이 한없이 다정한 남자인가, 그 질문에는 이프리트는 당당하게 NO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대장은 가끔 보면 냉철하기 짝이 없으니까.’

 

 사령관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극기훈련 계획, 라붕이 작전관은 작전이 수립되자마자 결행해버렸다. 어딘가 음침한 구석, 그리고 사령관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거친 언사. 그것이 그와 사령관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이프리트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속으로만 생각했다.

 

“사람도 저마다 다르다는 거지. 뭐.”

 

“..사령관님이 합류했을 땐 인간이고 뭐고 전역하겠다던 놈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얌전하게 재입대를 했대?”

 

“그건 나도 나 나름 아니겠어? 같은 이프리트라고 해서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잖아.”

 

“..어쨌든 우리 저항군에게 있어서는 좋은 인물이라는 거지?”

 

“응. 후방 걱정은 이제 염려 마셔라. 우리 대장만큼 화딱지 나면 무서운 인간님도 없을걸. 킥킥.”

 

“헤헤. 덕분에 저희가 장교로 차출되었지만요.”

 

“흐흐. 전역하고 나서도 고생이네. 이래서 짬 높은 놈들은.”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임펫의 손길에 이프리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저마다 떠들고 있는 본대 인원들과 생산 인원들, 그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보급부대의 안드바리와 그녀를 돕고 있는 본대의 발키리 개체, 그리고 본대의 메이드들.

 그 광경을 유심히 바라보던 이프리트의 입가에는 어느새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말 인간 한 명 늘었다고 이런 장면을 볼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그렇지. 설마하니 네가 오늘 우리 대장님이랑 겸상까지 할 줄이야.”

 

“...중사님. 그 이야기는 그만. 다시 생각해도 토 쏠리니까.”

 

“헤헤. 그러게요. 설마 저희를 옆에 두고 식사를 하자고 하실 줄이야..으으.”

 

 라붕이 작전관이 억지로 동행시킨 행군의 끝, 마지막으로 들린 섬 내의 취사장 이야기가 임펫 중사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그 자리에 있었던 이프리트와 노움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갔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그녀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저를 여기에 부른 이유가?”

 

“...그저 이곳에 다른 블랙 리리스 개체가 있다고 들어서, 궁금하던 차에 티타임을 제안해보았습니다. 혹여 무례하게 여기신다면..”

 

“아..아니요. 괜찮아요. 페로양. 자자, 그렇게 서 계시지 마시고. 저기, 저 자리에 앉죠.”

 

“네. 감사합니다. 블랙 리리스씨.”

 

또각-또각!

 

“와! 여기에 다 모여 있었네요! 넓다!”

 

“냐하핫. 주인님의 경호보다는..이쪽이 더 재밌을 거 같다냥.”

 

“이야. 좋은 냄새가 풀풀 나. 헤헤. 고기는 없어?”

 

“펜리르 언니. 고기보다는 여기선 다과 쪽을 찾으시는게..”

 

 로비의 문을 열고 일제히 들어선 색색의 머릿결을 휘날리는 여성들, 그리고 그녀들의 머리 위에 달린 저마다의 독특한 동물 귀. 컴페니언즈는 시끌벅적한 로비로 들어섬과 동시에 앞서 걸어가는 블랙 리리스의 뒤를 따라 로비의 한구석으로 걸어갔다. 물론 그 선두를 차지하고 걸어가는 블랙 리리스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가고 있었다.

 

‘이 아가씨들..갑자기 왜 절 찾아온 거죠?! 저는..지금 매우 바쁘단 말이에요!’

 

 당장이라도 발을 동동 구르고만 싶은 그녀의 의사와는 반대로 그녀의 몸은 올곧게 둥그런 원형 테이블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의사보다는 그녀의 뒤를 따르는 컴페니언즈들의 날이 선 눈동자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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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라면 이번 편의 첫 번째가 되어야 할 115번째 플룻은 6시간 이내로 업데이트 될 예정(완료). 39편은 12시간 이내로 업데이트 될 예정(완료). 1달 넘게 휴재 때린 이유는 40편에서 읊조리도록 할게. 늦어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