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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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여기 밥 듣던 대로 괜찮던데?”

 

“오르카 호 식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네요.”

 

“헤헤. 우리 주방장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데요. 그쵸?”

 

“네. 주방장님이 오시고 난 이후부터 저희도..”

 

웅성-웅성

 

 시끌벅적하기 짝이 없는 로비의 풍경, 저마다 술이 들었을지 아니면 음료가 들었을지 모르는 컵을 한 손에 쥔 채 둥그런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떠들고 있는 광경. 블랙 리리스는 그러한 난잡한 풍경을 말없이 빙그레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정말 밝은 얼굴들이네요.’

 

 그녀는 이러한 광경에 익숙지 않았다. 애당초 그녀는 이 세계의 주민이 아니다. 그녀가 기억하는 오르카 1호의 풍경은, 게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야말로 관객 없는 무대와 다름이 없었다.

 

‘살아 숨 쉰다는 기분은..이런 거겠죠.’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는 무대의 저편. 블랙 리리스는 입력된 값에 따라 움직이는 체스판의 말에 불과했다. 자의라는 것도 없이 혹은 스스로가 누구인지 자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숨도 쉬지 않고 삐거덕거리던 인형에 불과했던 그녀.

 

‘그때의 저는 아마 진정한 의미로 바이오로이드가 아니었을까요.’

 

 과거의 기억을 이리저리 헤집고 들어선 블랙 리리스의 눈썹이 자연스레 파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 제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저 눈앞에 놓인 철충이란 이름의 말을 일일이 파괴한다. 그저 그것만 하면 끝이었다. 가끔 어느 장면에 들어가 말소리 없이 가만히 서 있으면 그만,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진 대사뿐. 그녀는 그런 자신을 인형 이하로 보고 있었다.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블랙 리리스는 그 허공에 대고 사랑을 외쳤다. 사령관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블랙 리리스의 호감도 그래프는 그를 향했다. 허무하리만큼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하지만 그 당시의 그녀는 그 이질감을 눈치챌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나날이 평생토록 이어질 줄로만 알았다.

 

‘...반지. 주인님께 받은 반지가 그립네요.’

 

 하루는 처음 마주하는 스테이지에 발을 올렸다. 푸르른 바다를 배경 삼아 펼쳐진 화려한 결혼식장 무대. 아무런 감흥도, 기쁨도 없었다. 하지만 대사는 읊어야 한다. 그래서 블랙 리리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텍스트를 읊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작은 반지 하나가 왼손 검지에 끼워졌다.

 그때였다. 블랙 리리스라는 이름의 인형이 살아 숨쉬기 시작한 것이.

 

‘주인님을 인식하고, 주인님을 바라보게 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죠.’

 

뽀-득!

 

 과거의 어두운 장막을 들추어내고 밝았던 나날을 떠올린 블랙 리리스의 손아귀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잡혀있던 유리잔의 겉면에서 마찰음이 새어 나오자 그녀와 마주하고 앉은 상대가 상념에 잠겨있던 블랙 리리스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저기..블랙 리리스..언니?”

 

“? 네. 무슨 일인가요?”

 

“혹시 저희 이야기가 재미없었나요?”

 

“어머. 제가 딴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나요? 후후.”

 

‘그야 20분째 사령관과 그 여자 이야기만 하니까 그렇죠. 후우...’

 

 로비에 들어선 지도 어언 20분, 처음에 이곳보다 자신의 주인님의 곁으로 이동하려던 블랙 리리스는 예상치 못한 초대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주범들은 그녀를 이곳으로 끌고 와 그녀를 이 테이블에 착석시켰다.

 평소 같았으면 상대가 누구든 단숨에 초대를 거절했을 그녀였으나, 그녀에게 있어 이 불한당들은 쉽사리 떨쳐내기 어려운 이들이었으니..

 

“그런데 저를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하치코양?”

 

“어..으..그..그러니까! 리리스 언니도 리리스 언니인데. 여기 블랙 리리스 언니도 언니 개체니까..으으..”

 

“..하치코. 저희 언니는 오르카 1호의 블랙 리리스 언니뿐이에요. 그러니 그렇게 혼동할 이유는 없어요.”

 

“냐-핫. 하치코 언니는 가끔 단순해야 할 구석에서 머뭇거린다니까.”

 

“맞아. 같은 리리스 개체지만 엄연히 냄새가 다른걸.”

 

“저..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치코 언니. 너무 그렇게 마음 쓰지 마세요.”

 

‘..이건 뿌리치기 어려운 분들이네요. 정말.’

 

 제 물음에 골머리를 굴리는 하치코와 달리 저마다 다른 색의 눈동자를 반짝이는 동물귀 소녀들, 일찍이 자기가 게임 속에서 속해 있던 컴페니언즈 소속의 여성들이 하치코와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자 블랙 리리스는 그녀들에게 싱긋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저를 초대해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어떻게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을까요. 하치코양.”

 

“...확실히 같은 블랙 리리스 개체라고는 해도. 웃는 상이 저희 언니와 판박이네요.”

 

“후후훗. 그렇다는 건 화났을 때도 우리 맏언니와 비슷할까냥?”

 

“포이. 그 주제는 리리스 언니가 금지했을 텐데요.”

 

“궁금한 걸 어떡해? 솔직히 페로 언니도 궁금하지 않아? 여기 리리스 언니랑 우리 리리스 언니가 맞붙으면 어떨지 말이야.”

 

“킁킁. 위험한 냄새는 따로 안 나는데..”

 

 자신에게 콧구멍을 들이미는 펜리르의 언동에 블랙 리리스는 자신의 어깨가 움츠러들려는 것은 반사적으로 억눌렀다. 펜리르의 의미 모를 후각 센서, 거기에 한시도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포이와 페로, 거기에 야행성으로 밤눈이 밝은 스노우 페더까지.

 아마 자기가 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어도 금세 발이 묶이지 않았을까. 블랙 리리스는 초조함을 최대한 감춘 채로 조용히 음료수가 담긴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꿀꺽-꿀꺽

 

‘동물적 감각이라는 건 무시하기 힘드네요.’

 

 달콤한 레몬 쥬스가 바싹 마른 혀와 목구멍을 적시자 그제야 블랙 리리스는 조금씩 이곳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이어갔다.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그녀들과 응대해주고 자기 숙소로 돌아가면 그만인 일이지만, 그녀에게는 지금 한 가지 그냥 넘기기 힘든 사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인님과 그 사령관이라는 남자가 술자리를 가진다니. 쯧. 제가 너무 안일했어요.’

 

 복도를 지나다니는 메이드들에게서 얼떨결에 들은 충격적인 빅뉴스에 블랙 리리스는 황급히 제 주인을 찾아 나서려 몸을 움직이던 차였다. 아무리 그 사령관이라는 남성이 제 주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아르망의 조언이 있었다 하지만 블랙 리리스라는 경호 개체에게 있어 사령관은 미지의 적과 다름없었다.

 

‘그 남자, 혹시 제 주인께 무슨 짓을 하려고 이 여자들을 제게 붙여둔 것일까요.’

 

“어머. 이 언니, 눈빛이 조금 살벌해진 것 같은데냥?”

 

“..후훗. 설마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이젠 귀찮네요. 정말.’

 

 살포시 감았던 눈썹 사이로 제 살기를 읽어낸 것인지 포이라 불리는 고양이가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제 행동에 제동을 걸어오자 블랙 리리스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대는 시늉을 선보였다. 귀찮다. 이제야 블랙 리리스는 자신과 함께 넘어온 리제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게임 속에서는 서로가 장기 말에 불과한 처지였으니. 동생들이라 해도 딱히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죠.’

 

“...후우.”

 

 자신의 주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게임의 스토리는 이어진다. 그러므로 동생들과 함께 무대에 선 적도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말에 불과. 그녀들에게는 블랙 리리스나 시저스 리제와 같은 반지가 없었다.

 그렇기에 블랙 리리스는 지금 자신과 마주한 컴페니언즈들이 반가운 한편, 자신을 막아선 그녀들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항상 가위를 들고 설치던 시저스 리제가 더 나으리라. 

 

‘그러고 보니 그 스토커는 어디 간 거죠? 이럴 때는 주인님께 그녀라도 붙어 있는 편이..’

 

 문득 소란스러운 탓에 잊고 있었던 악우의 얼굴이 떠오른 블랙 리리스는 황급히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대었다. 행여 이곳에 있다 한들 그 독선적이고 집착이 강한 그녀라면 가뿐히 이 자리를 벗어났을 터였다.

 하지만 이내 블랙 리리스는 그 한 줌의 기대마저도 고이 품 안에 접어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머. 여기 시저스 리제는 동생들과 사이가 좋구나?”

 

“네. 저희 언니는 언제나..”

 

“응! 우리 리제 언니는 매번 돔 내에 있는 해충들을 잡아줘! 아쿠아도 항상 챙겨준다!”

 

“아..아쿠아. 그..그만. 그만 이야기해.”

 

“후훗. 그것참 듣기 좋은 이야기네. 우리 리제도 여기 리제를 본받았으면 좋겠는데. 후우..”

 

“확실히 여기 리제 언니는 어딘가 얌전하신 것 같아요. 같은 개체라도 환경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고는 들었는데..”

 

“우리 리제는 오늘도 사령관님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현재는 함에 갇혀 있으니. 후우.”

 

 로비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은 요정들의 만담, 블랙 리리스는 제 귀에 들어온 대화 내용과 꽃밭 사이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리제의 모습에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체 저기서 뭘 하는 건가요? 평소에도 저렇게 얌전하면 얼마나 좋아요!’

 

뽀-득!

 

“..저기. 블랙 리리스씨? 혹시 불편하신 건 아니신지..”

 

“어머. 페더양. 제가 신경 쓰게 만들었나 보네요. 죄송해요. 후훗.”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꽉 준 탓일까. 자신의 눈치를 연신 보던 스노우 페더가 안달 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자 블랙 리리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한번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속내는 여전히 썩어들어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후우. 그 사령관이라는 남자, 감히 연고도 없이 주인님과 저의 파라다이스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이렇게 주인님을 제게서 강탈해 가다니! 언젠가 한 번 쓴맛을..’

 

 이곳에 오기 전, 정확히는 이 세계로 넘어오자마자 만났던 멍한 얼굴의 남성을 다시 머릿속에 그려낸 블랙 리리스는 손에 들린 음료로 목구멍까지 차오른 위산을 아래로 흘려보내려 들었다. 그렇게 그녀가 한창 답답한 속을 달래려 들 때, 누군가 그녀를 향해 도도도-달려와 그녀의 곁으로 안겨들었다.

 

“언니! 리리스 언니!”

 

포-옹!

 

“..어머. 안드바리. 후훗. 이제 여기저기 안 돌아다녀도 되나요?”

 

“네! 본대의 메이드 분들이 나머지는 알아서 해주신다고 했어요! 헤헷.”

 

 뻣뻣하기만 하던 처음과 달리 이제는 스스럼없이 곁으로 달려와 안기는 남색 머릿결 소녀, 안드바리의 해맑은 미소에 블랙 리리스는 그녀와 같은 밝은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


‘어쩜. 이 아이가 이제는 제 동생 같네요. 정말.’

 

 주인님이 아끼는 소녀이길래 자신도 아꼈을 뿐인데, 컴페니언즈 개체가 자기 하나 뿐이기에 그녀를 동생처럼 챙긴 것뿐인데. 이제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 대신, 꿩 대신 봉(鳳)이라는 말이 어울린다고 블랙 리리스는 속으로 제 생각을 삼킨 채 곁으로 다가온 안드바리를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

 

“-훗쌰!”

 

“꺄-악! 히힛..”

 

사-삭 사-락

 

 힘찬 기합과 함께 그녀를 들어 올려 자신의 양 무릎 위에 안드바리를 올린 블랙 리리스는 가만히 자신에게 몸을 맡겨오는 안드바리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사락대는 안드바리의 기다란 머릿결과 그 아래에서부터 느껴지는 소녀의 뜨뜻한 정수리 열이 한창 지쳐있던 블랙 리리스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고르게 만들어주었다.

 

‘이제야 속이 좀 트이는 기분이네요.’

 

사-락 사-삭

 

“안드바리. 오늘은 유난히 바빴죠?”

 

“네! 갑작스레 사령관님이 방문하셨다고 했을 땐 정말 놀랐어요.”

 

“후훗. 주인님 때문에 이러나저러나, 조용할 날 하루 없네요. 휴가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할 듯싶네요.”

 

“그래도 이렇게 떠들썩 한 것도 저는 재밌는걸요. 대장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어쩜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쏙쏙 골라서 할까요. 후훗. 오늘따라 기분이 더 좋아 보이는 건 언니의 착각일까요?”

 

“아! 리리스 언니, 저 여기 오기 전에 본대의 철혈의 레오나 소장님을 뵈었어요! 사진이나 동영상으로만 봤는데 실제로 보니까 어-엄청 따스한 분이셨어요. 마치 리리스 언니처럼요.”

 

“..혹시 그쪽으로 마음이 기운 건 아니겠죠? 후움.”

 

“아..아니에요! 저는 여기 소속이고! 본대 쪽에는 본대의 안드바리 개체가 있으니까, 저는 단순히 일전에 있었던 탈취 사건에 대한 사과만 받고 왔을 뿐이에요!”

 

‘후훗. 놀리는 맛도 일품이네요. 정말.’

 

 살짝 자신의 볼을 부풀려 올리자 황급히 양 손바닥을 휘휘 내젓는 소녀의 모습에 블랙 리리스는 약간의 가학적인 충족감을 느꼈다. 이러나저러나 제 버릇 남 못 주는 법이라고 블랙 리리스는 따스함이 담긴 호박색의 눈동자로 안드바리의 글썽대는 푸른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 광경에 그녀와 함께 있던 컴페니언즈들의 눈빛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확실히 저 눈빛은 저희 언니와 판박이네요.”

 

“저 소녀, 우리와 같은 소속도 아닐 텐데. 챙기는 모습은 영락없는 리리스 언니다냥.”

 

“킁킁. 위험한 냄새, 이제는 아예 안 나. 헤헤.”

 

“후훗. 펜리르 언니. 그렇게 계속해서 냄새를 맡을 필요는 없어요.”

 

“히잉. 하치코도 쓰다듬을 받고 싶어요.”

 

 마치 자신들의 언니처럼 따스한 눈빛을 내비치는 리리스의 모습에 컴페니언즈들은 그녀를 향한 경계 어린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제 언니가 경계했을지언정 자기들도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한층 풀어진 모습으로 그녀들이 다과회를 재개하려던 그때, 어느 한 가느다란 손가락이 양 귀를 축 늘어뜨린 하치코의 머리카락 위로 올라왔다.

 

“어머. 하치코. 왜 그렇게 풀이 죽어있니?”

 

“-언니!”

 

“후훗. 자리는..잘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네.”

 

“...”

 

 어느새 발소리도 없이 테이블로 다가온 은빛 머릿결의 여성, 블랙 리리스의 등장에 가만히 의자 위에 앉아 있던 컴페니언즈 일동이 반색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언니. 돌아오셨어요?”

 

“그래. 페더. 안색이 괜찮아 보이네. 역시 잠수함보다는 여기처럼 수풀이 우거진 곳이 더 좋니?”

 

“후훗. 여기 공기가 너무 괜찮아서, 저도 모르게 낮잠을 좀..”

 

“언니. 주인님의 경호는 어떻게 하시고..”

 

“주인님이 남자들만의 시간이라고 내치셨단다. 후우. 이래서는 경호원이라는 직함도 떼야 할까..”

 

“히힛. 애당초 우리가 없어도 여기에 적은 없잖아. 전부 주인님의 부하 아니야?”

 

“..그건 어떨까. 후훗.”

 

“...”

 

드-르륵!

 

 동생들과 한마디씩을 주고받으며 테이블 의자 하나를 소음과 함께 끄집어내는 블랙 리리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살포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녀와는 반대로 날카로운 눈빛으로 째려보는 이가 있었으니.

 

“...경호 업무는 종료하신 것 같네요. 블랙 리리스양.”

 

“네. 오늘로 제 업무는 끝마쳤어요. 블랙..리리스양.”

 

“...”

 

“...”

 

 이제는 완전히 서로를 마주 보고 앉은 상태가 된 두 명의 블랙 리리스. 외관도, 복장도. 심지어 웃는 모습까지 서로 똑 닮은 두 여성의 상호경례에 그 테이블에 있던 이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녀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분명 웃는 얼굴들인데, 두 눈을 감고 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둘 사이에서 불똥이 튀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녀들의 착각일까.

 모두가 서로 입을 꼭 다문 두 여성의 눈치를 보는 사이, 이런 자리에 익숙지 않은 소녀의 입에서 불안감이 섞인 부름이 새어 나왔다.

 

“..어..언니.”

 

“어머? 그 소녀는..여기의 안드바리 개체로군요. 아침에 뵈었던 기억이 있네요.”

 

“아..안녕하세요.”

 

“그래요. 반가워요. 안드바리양.”

 

 살짝이 고개를 숙인 자신을 향해 손바닥을 흔드는 블랙 리리스, 분명 자신이 지금 안겨 있는 여성과 같은 여성일 터인데. 어째서인지 풍기는 오오라가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에 안드바리는 저도 모르게 꼬옥 붙잡고 있던 언니의 옷자락을 더욱더 힘껏 쥐었다. 그러자 그 작은 손아귀 위로 조금 더 큰 손바닥이 덮였다.

 

“너무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안드바리.”

 

“..네! 언니!”

 

“어머. 사이가 매우 좋은 관계인가 보네요. 아침에 뵈었을 때 느끼긴 했지만..혹시 그녀가 당신의 동생일까요?”

 

“후훗. 깍듯하고 귀여운 동생이랍니다? 꼼꼼하기까지 한 믿음직한 제 동생이에요.”

 

“그것참 조금 샘나는 이야기네요. 저는 동생들은 많지만, 가끔 이 아이들이 폭주할 때면..골치가 어지간히 썩히는 게 아니라서.”

 

“열 아들보다는 잘 키운 딸 하나가 낫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 걸까요.”

 

“..그래도 제 여동생들 모두 듬직한 저의 주.인.님의 방패랍니다. 물론 저도 포함해서요.”

 

“...”

 

“...”

 

 또 한 번 찾아온 적막, 주변의 다른 테이블들은 여전히 떠들썩한 와중에 유독 이 테이블에서만큼은 한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차라리 방금처럼 두 눈을 감고 있다면 어떨까 싶을 정도로 호박색의 눈동자에 예리함을 머금은 채 서로를 바라보는 두 블랙 리리스들의 모습에 결국 그 사이에서 가만히 있던 소녀가 화두를 내던졌다.

 

“리리스 언니. 그러고 보니 이곳의 인간님, 라붕이 대장님이 로비에 계시던데. 찾으셨나요?”

 

“어머. 안 그래도 주인님께서 라붕이 대장님이 안 오신다고 설레발 치신 통에 내가 직접 모셔다드리고 왔단다. 아무래도 부하를 챙기시느라 늦으신 모양이시더라고.”

 

“..제 주인님께 당신이?”

 

 페로가 무심코 던진 화두에 두 블랙 리리스는 상반된 반응을 내비쳤다. 본대의 블랙 리리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얼굴로 그리고 이곳의 블랙 리리스는 무슨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블랙 리리스는 자신이 우위에 섰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사족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후훗.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블랙 리리스양.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그분과 만난 건 여기가 처음이 아니니까요.”

 

“..네?”

 

‘이 여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자신의 고귀하디 고귀한 주인님께 다가갔다는 것에 불쾌함을 느껴야 할까, 아니면 뒤에 흘러나온 첫 만남에 집중해야 할까. 갑작스러운 여러 사실에 블랙 리리스가 잠깐 정신을 놓은 사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블랙 리리스는 여전히 두 눈을 샐쭉이 뜨고선 말을 이어갔다.

 

“그분이 처음 제 주인님께 오신 날, 주인님의 배려로 잠깐 저희 함의 개인실에 머무신 적이 있으셨거든요.”

 

“...”

 

“그리고 제 주인님이 사출 포트까지 그분을 모시고 오시라고 해서 그때 직접 찾아뵈었죠. 후훗.”

 

“..아..아. 네. 후..후후..후.”

 

“후후훗.”

 

‘가증스럽네요! 진짜 가증스럽네요! 저 여자! 제 얼굴, 저렇게 짜증 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얼굴이었나요?!’

 

 감히 자신보다 먼저 제 주인님과 접촉했다니. 거기다 자기와 똑같은 외관, 그리고 자기와 똑같은 목소리로 제 주인님께 다가갔다니. 블랙 리리스는 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불쾌감과 분노에 눈 아래가 씰룩이는 것을 참지 못하고 부르르 떨어대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반응을 즐기듯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블랙 리리스는 가학적인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당신이 왜 제조되었는 지. 혹시 궁금한 적 없나요?”

 

“그..그게 무슨..소릴..까요?”

 

“제 주인님의 명령으로 그분을 찾아뵈었을 때, 갑자기 그분이 절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답니다. 후우, 그땐 가슴이 철-렁, 했지요♪ 제가 행여 무슨 짓을 저지른 건 줄 알고요.”

 

“...”

 

“그래서 그걸..제 주인님께 이야기해드렸더니. 아마 저와 같은 개체에게 행여 안좋은 기억이나 혹은 아련한 기억을 지닌 신게 아닐까 해서 당신을 제조할 계획을 곧바로 수렴한 거랍니다. 후후훗.”

 

빠-득!

 

 여유 혹은 기만에 가까운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찬찬히 과거를 읊는 블랙 리리스와 달리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이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경악 혹은 걱정이 묻어 나왔다. 제일 먼저 화두를 내던진 페로의 낯빛은 아예 거무죽죽하게 변색 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걱정 어린 시선이 닿은 곳에는 눈은 웃고 있으나 입술을 아예 까득 깨물다 못해 온몸을 부르르 떨어대는 또 다른 블랙 리리스가 있었다.

 

‘죽일까요? 죽여 버릴까요? 아니에요. 참아야 해요. 아뇨. 죽이는 게 맞지 않을까요? 이 여자, 감히 제 주인님과 저만의 만남에 흠집을 내놓다니. 죽이는 게 맞지 않을까요? 감히 제 주인님의 눈물을 제게서 뺏다니. 어째서 주인님이 절 보고 그렇게 겁을 먹은 건지 내심 실망스러웠는데! 이 여자였군요. 제 주인님과 저만의 첫 만남을 뺏어간 여우 같은 계집애가!’

 

“어..언니. 괜찮아요?”

 

“괘..괜찮답니다. 후..후후..리..리리스는 괜찮아요.”

 

‘죽일 거에요! 반드시! 제 손으로 저 썩을 여자를! 두고 봐요!’

 

 자신의 품 안에 안긴 아기새의 부름에 블랙 리리스는 최대한 제 정신줄을 꽈악 붙들어 매었다.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적이 많다. 그렇기에 참아야 한다. 자신의 엉뚱한 행동으로 주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그렇게 블랙 리리스가 억지로 부르르 떨어대는 제 손을 멈추고 있자니 그 모습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고양이 소녀가 후우-하는 한숨과 함께 제 언니를 타일렀다.

 

“리리스 언니. 그렇게 타인을 괴롭히는 발언은 자제해주세요.”

 

“어머. 나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같은 개체이시면서 왜 그렇게까지 괴롭히시는 건지 전 잘 모르겠네요. 애당초 여기에 저 분을 불러들인 것도 언니면서..”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절 여기에 부른 건 당신들이 아니었나요?”

 

“-아차.”

 

 얼떨결에 흘러나온 페로의 토로에 안정을 되찾아가던 블랙 리리스의 눈길이 홱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 눈길에 페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 제 입술을 가렸다.

 

‘생각해보면 저와 이 아가씨들은 접점이랄 것도 없어요. 그래요. 그녀들이 제게 관심을 가질 리는 만무할 터. 제가 주인님을 찾으러 나서려는 타이밍, 거기에 주인님이 홀로 자리를 떠나는 타이밍에 그녀들이 저를 방문한 이유가..’

 

“..저기. 본대의 블랙 리리스양? 제 주인님께 무슨..볼 일이 있으셨나요?”

 

“...후훗. 자기 ‘주인님’을 똑 닮아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동일 개체라서 그런 걸까요? 눈치가 좋으시네요. 콘스탄챠양! 여기 시원한 레몬 주스 두 잔 부탁드릴게요!”

 

“-네에!”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호박색 눈길에도 블랙 리리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로비의 이곳저곳을 거니는 메이드를 한 명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적막만이 흐르는 이곳에 또각-또각대는 걸음걸이와 함께 물방울이 한가득 맺힌 두 잔의 음료수 잔이 내려왔다.

 

딸-그락!

 

“고마워요. 후훗.”

 

“아니에요. 리리스씨. 어머, 두 분이 나란히 앉아계시다니. 여기는 경호원 모임이네요.” 

 

“..그런 셈이죠. 여기에 있는 아가씨들은 저 귀여운 소녀를 빼면 모두, 경호 개체니까요.”

 

“부디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래요. 감사히 마실게요.”

 

또각-또각

 

 저만치 떠나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블랙 리리스의 앞에는 여전히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또 다른 블랙 리리스가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블랙 리리스는 여유로운 얼굴로 가볍게 두 잔의 유리잔 중 하나를 그녀 앞으로 밀어 넣었다.

 

드-르륵!

 

“먼저 목부터 축이고 계속 담화를 나눌까요? 블랙 리리스양?”

 

“...제 물음에 먼저 답해주실 수 있을까요? 블랙 리리스양?”

 

“어..언니.”

 

“..나..나는 이 자리를 피해도 되겠냥?”

 

“내..냄새가 지독해..”

 

 레몬 주스가 담긴 유리잔을 사이에 둔 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는 않는 두 여성과 그사이에 끼인 아가씨들의 안색은 시시각각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괜한 짓을 한 걸까,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던 페로가 어떻게든 이 흉흉한 공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입술을 떼려 하자 누군가 그녀들 사이에 있던 음료수 잔에 손을 대었다.

 

“..제가 마실게요!”

 

“? 안드바리?”

 

“...어머?”

 

꿀꺽-꿀꺽

 

 당찬 기합 소리와 함께 유리잔에 들린 내용물을 거침없이 들이키는 소녀의 행동에 아까까지 서로를 죽일 듯이 바라보던 두 여성의 눈길이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비단 그녀들뿐만 아니라 침묵을 꾹 유지하던 이들 역시 그녀의 돌발 행동에 저마다의 눈을 동그랗게 떴다.

 

꿀꺽-꿀꺽

 

“-으으! 따-꾹!”

 

 작은 목울대를 움직여가며 잔을 싹 비운 소녀의 얼굴이 썩어들어감과 동시에 딸꾹질을 하자 그제야 그녀를 품에 안고 있던 블랙 리리스의 얼굴에 활기가 피어올랐다.

 

“너무 차가운 걸 단숨에 들이키니까 그렇죠. 자, 숨 참으세요. 흐읍!”

 

“-흡!”

 

“좋아요. 그 상태로 20초 참는 거예요?”

 

끄덕-!

 

“..어머. 정말 탐나는 동생이네요. 후훗.”

 

 볼을 부풀린 채 고개를 연신 끄덕대는 안드바리의 모양새 덕분인지 냉랭한 기운만이 맴돌던 컴페니언즈의 테이블에 다시 한번 웃음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블랙 리리스는 안드바리의 등을 토닥이며 다시 한번 대화를 이어갔다.

 

“..좋아요. 그럼 20초 안에 이 불쾌한 주제를 마무리 지을까요?”

 

“네. 동의할게요. 저도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이 이상 분위기를 망치기는 싫네요.”

 

“..제 주인님과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그것도 일부러 저를 떼어놓고선.”

 

“별 이야기 안 했답니다? 그저 처음에 뵈었을 때보다 더 딱딱해지신 것 같아서 조금 장난을 쳤을 뿐이죠.”

 

“..같은 개체에게 주인님께 장난을 쳤다는 의미가 어떻게 드릴지 생각해보셨나요?”

 

“후후. 받아드리기 나름이죠. 아, 그래도..저와 당신을 착각하지는 않으셨어요. 정말 좋은 주인님이시네요.”

 

“...”

 

 예상하지 못했던 어문이 들려오자 여전히 가라앉아 있던 블랙 리리스의 정신이 퍼뜩 뛰어올랐다. 아무리 봐도 자신과 같은 목소리, 외관. 거기에 이 가학적인 성향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똑같은 그녀와 자신을 제 주인이 착각하지 않았다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보다 더한 호재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반영하듯 블랙 리리스의 입꼬리는 광대뼈 아래까지 닿아 있었다.

 

“무..물론이죠. 후훗. 제 주인님이..후후. 당신과 저를 헷갈ㄹ..후훗.”

 

“..어머. 그렇게까지 행복해하시다니. 이걸 먼저 이야기할 걸 그랬네요.”

 

“언니. 아시면서 왜 그렇게 저분을 도발하고 그러세요.”

 

“얘, 페로! 너 아까부터 자꾸 저 블랙 리리스양 편만 들고!”

 

“언니가 자꾸 저분을 도발하니까 그러는 거예요.”

 

 백은발의 머릿결이 인상적인 고양이 소녀의 날카로운 지적에 블랙 리리스는 입술을 삐죽이고는 손에 들린 음료수를 가볍게 목구멍 너머로 들이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블랙 리리스는 쿡쿡-웃음소리를 가볍게 내며 이제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읊조렸다.

 

“후후훗. 그쪽의 동생분도 정말 야무지네요.”

 

“...뭐. 그런 점이 귀여운 동생이에요. 어때요? 저희 동생들처럼..다른 동생들이 필요하시진 않으신가요?”

 

“...흐음.”

 

 이전부터 바래왔던 진정한 의미의 여동생들, 그저 게임 속의 인형들처럼 따박따박 필요한 대사와 필요한 행동만 하는 인형이 아닌 지금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이들처럼 서로 대화를 나누고 또 기쁨을 공유할 상대들.

 블랙 리리스는 이곳에 온 이후부터, 혹은 제 악우에게 붙어 있는 그녀의 여동생들을 볼 때마다 다른 컴페니언즈 시리즈들이 이곳에 온다면~과 같은 상상을 하곤 했었다.

 

“...”

 

“...딸꾹!”

 

“어머. 안드바리양. 딸꾹질이 아직 덜 멈췄네요. 다시 숨을 들이켜요.”

 

“..네에.”

 

 어딘가 풀이 죽은 듯한 안드바리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던 블랙 리리스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이미 여기에 귀여운 여동생이 하나 있지 않은가.

 

‘실키양들도 있고. 익스프레스양들도 있으니. 뭐..’

 

“..딱히 괜찮아요. 저희 동네는 전방과 달리 그렇게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 않다보니.”

 

“..그래요? 뭐, 그 부분은 저희 주인님과 그쪽 주인님이 알아서 의논하시겠죠.”

 

“정답이네요. 그래서. 제 주인님과 어떤 대화를 나눈 거죠? 그것만 듣고 이 분위기는 넘기도록 하죠.”

 

“...흐음.”

 

딸-그락! 딸-그락!

 

 마무리를 짓겠다는 듯 물어오는 블랙 리리스의 물음에 가만히 호박색의 눈동자를 반짝이던 또 다른 블랙 리리스는 콧소리를 한번 내고선 가만히 제 손에 들린 유리잔 안의 얼음들을 빙글빙글 돌려대었다. 그 모습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될 즈음, 블랙 리리스는 그 행동을 멈추고선 싱긋이 입꼬리를 올리며 가벼운 어조로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저 협조를 조금? 당신과 저, 그리고 당신의 주인님과 저의 주인님의 미래를 위한 협조를 조금 부탁한 것뿐이랍니다?”

 

“...”

 

“그렇게 노려볼 필요 없답니다. 정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으시다면..”

 

딸-그락! 딸-그락!

 

“..당신의 주인님께 직접 물어보는 편을 추천해 드릴게요. 후훗.”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블랙 리리스의 대답에 반대편에 앉아 있던 블랙 리리스는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한 얼굴로 그녀의 미소를 맞받아쳤다. 그런 그녀들의 행동을 눈동자만 굴러가며 바라보던 다른 이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너..너무 그렇게 서로 견제하실 일이..있나요?”

 

“..후우.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런 자리를 안 만드는 건데.”

 

“하..하핫. 이렇게 싸늘한 분위기가 될 줄은 나도 몰랐다냥.”

 

“언니들 사이에서 전장의 냄새가 나.”

 

“언니! 저 미트파이 만들어 올까요? 네?”

 

“괜찮아요. 하치코. 그저..처음 만났을 때와 입장이 정반대된 것만으로도 저는 즐겁답니다?”

 

“..그러네요. 그땐, 제가 웃고 있었죠? 후훗.”

 

“후후훗. 기억하고 계셨네요. 정말이지.”

 

딸-그락! 딸-그락!

 

“..방심할 수 없는 상대에요. 당신은. 후후.”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모두가 떠들썩한 로비의 한 가운데, 블랙 리리스의 손에 들린 유리잔 안의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119)

 

“저기 테티스. 대장님이 잘못 하셨다고 하니까 그렇게 너무 삐지지 마. 응?”

 

“..시끄러! 흥!”

 

“이렇게 성대한 파티도 열어주셨는데 그렇게 계속 삐지면 내일 라붕이 대장이랑 못 놀아.”

 

“...누가 그런 인간이랑 놀고 싶대?!”

 

탁-!

 

 대형 로비의 어느 한구석, 저마다 음료수 잔을 쥔 채 하하호호하는 인원들의 사이로 어느 금발의 소녀는 제 손에 들린 음료수 잔을 거칠게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그녀를 계속해서 달래던 아가씨들은 일제히 어깨를 움츠러든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야..야! 갑자기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잖아!”

 

“맞아! 이것도 전부 네가 대장한테..”

 

“시끄러워! 그런 밉상 그 자체인 인간! 꼴도 보기 싫어! 흥!”

 

타-다닥!

 

 행여 누군가가 제 옷자락을 쥐어 잡을까, 테티스라 불린 금발의 소녀는 짜증 섞인 고함을 테이블의 인원들에게 내던지고는 빠른 걸음으로 대형 로비의 밖으로 걸어 나섰다. 분명 오늘은 기쁜 날이어야 할 텐데, 왠지 울적하기 그지없는 하루라고 소녀는 자신의 기대에 충족되지 못한 하루에 양 볼을 부풀렸다.

 

“흥! 저런 야식거리로 날 달래려고?! 그 농땡이 대장! 날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니야?!”

 

 테티스, 그녀는 인간이라고 해봤자 라붕이 대장밖에 만난 적이 없다. 사령관이라는 인물은 바다 깊은 곳에서 1년의 절반을 보내고, 본대로 물자를 옮길 적에도 그를 대신해 완장을 차고 오는 남색 머리의 소녀밖에 보지 못했을 뿐. 테티스에게 있어 라붕이 대장은 처음으로 마주한 인간이었다.

 

‘...칫. 언제는 시간 날 때 놀러 오라고 했으면서.’

 

뚜벅-뚜벅

 

 이미 해가 진 지는 한참이 지난 시간대, 어두운 장막 사이로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는 달님을 제외하고선 밝은 전등 하나 켜지지 않은 건물의 복도 위를 테티스는 처량한 발걸음으로 내딛었다.

 

‘놀아주는 것도 가끔 볼 때만 놀아줘 놓고는. 여기 오면 온종일 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처음에는 인간이 미덥잖았다. 갑자기 부둣가에 두둥-하고 나타나서는 여기 총책임자라면서 물자를 끌고 왔을 땐, 그냥 무관심의 그 자체. 어차피 저렇게 한 번 오고 나서는 사령관처럼 모습도 안 비추겠지. 그렇게 넘겨짚었다. 하지만 라붕이 작전관은 그 이후로도 안 보이는 횟수보다 보이는 횟수를 더욱더 누적시켜 갔다.

 

‘애당초 사령관님이 함께 오실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내가 잘못한 건 무적의 용 대장님한테 직설적으로 휴가를 요청한 것뿐인데.’

 

뚜벅-뚜벅

 

 같이 놀고 싶었다. 테티스는 자신의 작은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라붕이 작전관은 사색인 된 채로 부둣가에서 사령관을 맞이했으며 그는 하루 내내 사령관의 곁을 따라 걸었다. 테티스가 상상했던 휴가와는 정반대의 휴가가 되었다.

 소녀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첫 휴가에 매우 불쾌했다. 그것은 라붕이 작전관에게 꿀밤을 맞은 것보다 더욱더 서러운 일이었다.

 

“..칫. 그 인간은 또 사령관님한테 불려간 거야?”

 

뚜벅-뚜벅

 

“맨날 사령관님. 사령관님. 그렇게 눈치 보면서 어떻게 산대. 정말.”

 

뚜벅-뚜벅

 

“평소에는 한껏 풀어져 놓고는. 사령관님 등장하니까 완전 딴 사람이네. 칫. 칫.”

 

뚜벅-뚜벅

 

 홀로 걸어가기에는 넓어도 너무나 넓은 복도.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거대한 건물의 내부에 테티스는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의 정상 끄트머리에 닿아 있는 달님의 모양새가 칙칙하기만 한 그녀의 가슴 속을 조금이나마 달래려 들었다.

 

“...그 농땡이 대장. 지금쯤이면 술자리도 끝났을까?”

 

 남들이 저마다 대화 주제로 떠들 때 즈음, 테티스의 청각은 뒤늦게 로비로 들어선 블랙 리리스들의 대화에 쏠려 있었다. 라붕이 대장을 바래다주고 왔다는 그녀의 말에 테티스는 여태껏 조용히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대장 숙소는 어디지? 술..은 어디서 마신 걸까.’

 

뚜벅-뚜벅

 

 그저 발걸음이 닿는 대로 어두운 복도를 걷고, 또 보이는 계단을 따라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테티스의 머리에는 이제 짜증보다는 호기심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대충 건물 내부구조를 파악한 그녀의 시선은 요기조기 복도를 둘러다 보며 사람의 인기척을 찾기 바빴다.

 

‘...3층쯤에 있을 것 같은데. 흐응.’

 

뚜벅-뚜벅

 

 그렇게 한참을 이곳저곳을 기웃대던 테티스는 이내 라붕이 작전관의 추적에 손을 놓고야 말았다. 제법 시끄러울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상층은 너무나도 적적했던 탓이었다.

 

“...쳇. 재미없어. 돌아갈래.”

 

 지금쯤이면 세이렌 함장이 자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 또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테이블에 나열해뒀을 터. 테티스는 결국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3층의 복도에서 걸음을 돌리려 들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눈에 달빛조차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창틀의 아래에서 반짝이는 물건이 들어온 것은.

 

“..저건 뭐지?”

 

뚜벅-뚜벅

 

“...이건.”

 

 창틀의 그림자 아래에 가만히 놓여 있는 작은 사각형의 박스. 한눈에 봐도 비범한 물건 같았으나 소녀의 쌓여있던 불만은 곧바로 호기심으로 돌변해 그 박스의 이음새를 열어 재끼도록 만들었다.

 

딸-각!

 

“...이거? 어? 서..설마?”

 

 밝디밝은 달빛이 내리쬐는 조용한 복도의 한가운데, 금발의 장난꾸러기 소녀는 그날 밤 한 개의 황금 사과를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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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2연참 성공. 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