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라는 사치스러운 물건으로 주인님께 인사를 올리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요.

갑작스러운 편지에 놀라셨나요?


네. 주인님 다운 반응이네요.


바보는 옮는다고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으니 주인님과의 지난날이 떠오릅니다.

좋았던 기억, 싫었던 기억.

매일 아침 까치 머리가 되어 일어나시는 주인님의 모습.

감정이 고조되어 심한 말을 드렸음에도 웃으며 받아주시는 모습.


이렇게 한심한 남자가 침대에서는....


....주인님 다운 반응이네요. 이 편지를 읽으며 실실 웃으시는 꼴 하고는.

이렇게 바보 같은 남자는 평생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꼴인가요?

인류 최후의 희망이라는 남자가 빈틈 투성이에 자신보다 인간님의 피조물인 저희들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꼴이라니요.

이렇게 자신은 챙길 생각도 않는 바보 같은 남자가 시한부를 선고 받고 이별을 재촉하려 하다니요.

영원할 것 같던 행복에 종지부를 찍는 당신의 모습에, 길어야 3개월이라는 진단을 내린 닥터양이 지었던 얼굴을 기억하고 계십니까?초상집이나 다름 없는 분위기가 되어버린 오르카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겠지요.


....주인님 다운 반응이네요. 그런 주제에 당신은 괜찮다며 배틀 메이드의 자매들을, 오르카호의 전투원들을 위로하는 당신이라니.

걱정하지 말라며 제 머리를 쓰다듬는 당신이라니.


답이 없을 정도로 바보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바보 같은 미소였습니다.


회의에 참석하지 못 하는 날이 늘어나고, 함장실을 비우는 날이 늘어나고, 회복실에만 계시게 되었을때, 주인님께서는 저를 조용히 부르셨지요.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군요.


주인님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제가 솔직해지길 기대라도 하신 겁니까?

산소 마스크를 쓴 채 간신히 미소를 지으면, 제가 울기라도 할 줄 아셨던 겁니까?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주인님의 몸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면,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이라도 더 해 드릴 줄 아셨던 겁니까?


....주인님 다운 반응이네요. 그래요. 이제 대답은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죠.


주인님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반 년이나 지났으니까요.

아쉽게도 주인님 같은 한심한 분이 안 계셔도 오르카호는 평화롭습니다.

이전보다 활기가 줄었을 뿐, 주인님께서 거동을 못 하게 되기 직전까지 작성해두신 문서의 지침대로 모두가 작전을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어디를 가도 주인님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어디를 가도 주인님의 흔적이 보입니다.

그런데, 주인님은 이 세상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재미있으십니까?

공허함에 모든것을 포기하고 좌절이라도 하길 바라십니까?


아쉽게 됐군요. 의지하던 이가 사라지면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가 될거라고, 지능이 낮은 분들은 종종 그렇게 생각하시고는 하더군요.

걱정마시죠. 저도, 배틀 메이드의 자매들도, 오르카호의 모두가 주인님이 안 계신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으니까요.

그저,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따스하게 안아주시던 손길이 사라졌을 분이니까요.


'누가 저 같은 것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줄까?' 와 같은 덜 떨어진 생각은 하지도 않는답니다.

생전의 모습을 1초라도 더 카메라에 담아둘 걸 그랬다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이런 저희를 어디에선가 지켜보고 계실까요?

...그래요. 주인님이라면 틀림없이 일찍 잠자리에 드실 것이 분명하겠군요.


주인님 다운 반응이네요.


그러니까, 실은 자신보다 남을 걱정하여 실은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바보 같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던 인간님은 볼 수 없는 제 마음을 적고 편지를 마칠까 합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걱정마세요. 주인님 같은 남자는 읽을 수 없는 마법을 키르케님께 배워 왔으니까요.





보고 싶어요.

정말 사랑합니다, 주인님.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까지, 그 곳에서는 편히 쉬실 수 있기를.







[ 바닐라와 결혼한 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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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단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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