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https://arca.live/b/lastorigin/35936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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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자면 새까만 공간으로만 이뤄진 의문의 장소에서, 의자만 하나 덩그러니 놓여진 곳에 떨어지면 그 의자에 앉아 어제 동안 있었던 일을 잠을 자면서조차 고민하기만 할 뿐이다. 그것이 내 본위이자 성향이든, 내 상태가 좋지 못해서이든. 확실한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을 꿈이라고 칭하기는 애매할 수 있다.


오늘도 그랬다. 엉겁결에 내가 하던 게임으로 들어왔더니, 들어도 들어도 비현실적인 5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채로 방치 되어버린 오르카호로 들어왔다. 이게 비현실적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솔직히 자신이 없다.


물론 나의 기준으로는 500년 동안 떠나간 그 인간과 나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냥 많이 닮은 사람 1 정도로 밖에 인식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녀들은 나를 엄연히 그 인간으로 인식하고 있고, 나도 어쩌다가 그 상황에 자주 이입할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자신은 없다. 내가 그 인간이라면 나는 솔직히 지금 쪽팔려서라도 걔네한테 얼굴 보여주기도 무서웠을 것 같은데. 그래도 아이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서 다들 만나러 가자고 던져놓긴 했다만 그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는 잘 모르겠다.


사령관으로서의 고민도 마찬가지. 비록 설정상 사령관을 생각하면 일단 지휘를 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야 나도 모르게 술술 풀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이미 시작 전개부터 내가 알던 것과 많이 다른데 기우도 아닐테고. 나는 그냥 일개 라붕이일 뿐이다. 그렇게까지 정신력이 강하진 않다.


그래도... 정말 그래도, 나는 결국 이곳에 왔고 그녀들은 내가 필요하다는 입장인데 마냥 거절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보니 걱정을 하면서도 최소한 포기한다라는 선택지만큼은 죽어도 고를 수가 없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날 원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닿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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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셨나요, 주인님?"


"...? 아, 어어. 응..."


좀 생각이 깊어지다보니 꽤 오랜만에 아침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일어난 것 같다. 보통은 생각이 다 끝나자마자 일어나는 편이였고, 그러다보면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을 때 일어난 적이 더 많다보니. 아무튼 잠시 접어두고, 어제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고보니 오늘부터 애들 만나러 다니기로 했었나?"


"네, 그래도 주인님이 오시니 몸이 좀 성치 않은 분들도 직접 주인님을 만나러 오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그렇지만 주인님이 직접 만나러 가겠다고 했으니, 우선은 기다려달라고 말씀을 드렸죠. 정말로 직접 오면서까지 주인님을 만나뵙고 싶어했던 한 사람을 빼면 말이에요."


"...? 응, 그랬구나."


어째 콘스탄챠만 이야기하는가 싶었더니, 옆을 잠시 돌아보니까 그리폰은 아직도 자고 있다. 원래는 안그런데 오늘만 이런건지 평소에도 이런건진 모르겠지만 잠꼬대도 유독 바보 같아보인다만. 아무튼 그 한 명을 만나고 난 뒤 사령관실을 나서기로 가닥이 잡히고, 다시 콘스탄챠를 바라보며 좀 더 세세하게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해보기로 했다.


"그러고보니까 내가 없을 때는 다들 어떻게 지냈다고 했더라?"


"그게... 설명하자면 좀 긴데..."


정리해보자면 이랬다. 처음 몇주 동안은 다들 지칠지 언정 본인들의 역할에 충실하게 오르카호를 지키며 지냈고, 이것은 별다른 설명이 크게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별탈이 없었다고 한다. 평소보다 좀 길게 자리를 비우긴 했어도 요안나의 섬 개발 진척이 얼마 정도 되는지, 이런 것들을 시찰하기 위해서 머무른 것일거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을 했다더라.


그렇지만 슬슬 개월 단위로 넘어가니 불안해진 오르카호에서 사령관을 찾아나서기로 했고, 이때부터 21 스쿼드는 다시 사령관을 찾으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요안나마저도 섬에 사령관이 방문한 적이 없다는 답변을 하자 다들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년 단위가 넘어서는 거의 전국을 찾아봤는데도 사령관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오르카호 전체가 절망에 빠지기 시작했다고. 다시 한 번 정신이 크게 붕괴 된 라비아타는 이 쯤부터 무슨 말을 해도 설득이 안 될 만큼 자신에게 크게 실망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지휘관끼리의 분쟁도 생기고, 사령관에게 원망을 쏟아내는 바이오로이드들도 생기는 등 점차 분위기가 좌불안석이 되어갔다고 한다. 이 시기부터 아예 본인 역할조차 포기해버리는 바이오로이드들이 다수 생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10년, 100년이 되어가자 싸우는 것에 대한 의미도 없고 있지도 않은 사령관을 미워해봐야 그냥 아집에 불과하다 느껴버린 바이오로이드들이 하나 둘 씩 제 풀에 지쳐 폐인이 되어가고,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활동만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소한의 생명 유지를 위한 자원 수급이나, 오르카호 근처에 나타나는 철충 무리를 구제하기 위해 극히 일부의 부대, 혹은 일부 바이오로이드들만이 계속 역할을 지키고 있었고. 그렇게 지내다보니 이런 비현실적인 세월이 흘렀다나.


"... 허어..."


"솔직히, 아직도 불안하긴 하죠. 제가 지금 헛 것을 보고 있는건지, 이게 꿈인지 싶으니..."


"최소한 이게 꿈은 아니라고 얘기할게. 그건 정말이야."


"... 고마워요."


결국 지금에 당장 시급한 것은 그거다. 최소한의 기능만 존재하는 오르카호를 수복 시키는 것, 정말 비현실적인 기간동안 자리를 비운 전 사령관 때문에 몸도 마음도 구멍이 많이 뚫린 아이들을 어떻게든 원래 상태로 돌려주는 것. 애초에 의도적인 다운그레이드라고 한 이상 전자는 크게 어렵지 않을텐데, 후자가 걱정이다. 얼굴 기억도 못하지 않을까 같은 좀 사소한 걱정부터, 이 정도로 자리를 비웠는데 미워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이 없을거란 보장이 있는가? 등등.


'... 아.'


뭐 아무튼, 나를 직접 만나러 오겠다던 한 바이오로이드를 기다리면서 누구일까 잠깐 생각을 해봤더니, 순간 크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맞다, LRL. 100년 동안 등대에 갇혀 살았다더니, 그 5배가 넘는 기간동안 자기가 믿고 따르던 사람이 난데없이 사라져버렸으니.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상심하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면 항상 안고 있는 그 도끼 갖다가 내 팔 하나 잘라버려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끼익-


"... LRL...?"


"... 으, 흑..."


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너무 처참해서 뭐라 위로해야할지도 순간적으로 막막했다. 그 때보다도 더 헤지다 못해 옷을 걸쳤다는 표현도 간신히 쓸 수 있을만큼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신발 한 짝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품에 안은 도끼도 어디에 어떻게 써댄건진 몰라도 날이 다 나가고 뭉툭해져서 차라리 도끼 모양의 몽둥이라 보는게 맞을 정도로 어디 하나 멀쩡한게 없었다.


"LRL..."


"흐끅, 으아아아앙-!"


더 이상 컨셉 유지조차 할 기운도 없는지, 날 다나간 도끼도 내동댕이 치고는 그대로 냅다 안겨 서럽게 우는 LRL. 그랬다. 그랬었지. 다소 가벼운 그 중2병 컨셉도 다 자기 스트레스 풀려고 유지하고 있던거지. 아이고 이 인간아. 뭐가 불만이라서 이런 애들 놔두고 탈주를 저질렀냐.


"... 미안."


"흐끅, 으아아아..."


현실성 전혀 없는 세월의 숫자 때문에 잠깐 풀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500년만이였지. 만나는 바이오로이드들마다 보이는 격한 반응을 느끼다보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수치의 세월인지 다시금 상기하게 해주는 것 같다. 그리폰 때처럼 미웠냐는 얘기도 지금은 꺼내기가 영 그렇다. 맞든 아니든간에 뭔 말이라도 잘못했다가는 상처를 더 후벼파는 짓이 될 것 같으니. 우선은 이대로 LRL을 그저 껴안아주기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조금 시간이 흘러 진정이 약간은 된 것 같자, LRL을 안은채로 자리에 앉고는 콘스탄챠와의 대화를 다시 이어나갔다.


"... 확실히 비현실적이라서 잊고 있었구나."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은 하지만요..."


"지금 다른 부대들을 들러도 반응이 괜찮을지, 조금 걱정은 되는데..."


"음..."


"그것도 그런게, 어쨌든 내 행방 때문에 서로 싸우고 원망도 했다고 하니까. 이 정도면 아직도 앙금이 남아있을게 아닐까란 생각이 좀 들거든."


"... 잠깐만요, 주인님."


잠시 내 뒷편으로 와서는, 살포시 날 뒤에서 껴안으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콘스탄챠.


"이것만큼은 확실히 얘기할 수 있어요. 설령 그런 태도라고 한들, 정말로 주인님을 미워하는 아이들은 없어요. 그저 하나 뿐인 마지막 인간이라서가 아니에요.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무슨 일이든 함께하면서 서로 울고 웃은 사이였으니까요. 갑작스러운 일이라 아무도 미워할 일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으며, 마지막엔 결국 그래서는 안된다고들 했어요."


"이 긴 시간동안 자리를 비운 것이 괴롭지 않았냐면, 그건 절대로 아니죠. 절대 아니에요. 다들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걸 풀어주는 것은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간단할지도 모르죠."


적어도 나는 자신들을 믿어줘야한다고, 그렇게 조언을 끝마치는 콘스탄챠. 아무래도 그 말대로인 것 같다. 그렇다고 얘네들을 피해야하나? 그건 아니잖아. 나도 그 아이들을 보고 싶고, 그 아이들도 결국 궁극적으로는 내가 보고 싶은 것 뿐이다. 내가 생각보다 너무 움츠러 들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만은, 확실하게 느낀 것 같다. 걱정해봐야 걱정으로 끝나면 변하는건 사실 별로 없었으니.


"... 그렇지, 그렇네. 일깨워줘서 고마워."


"감사한 사람은, 항상 주인님이 아니고 저희니까요. 지금도 그랬고, 훨씬 전에도 그랬으니까요."


"... 그러고보니 그리폰은?"


"아."


이렇게까지 소란이 있었는데도 잘만 자고 있는걸보면 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잠깐 웃음이 새어나오려는걸 참으려 그리폰을 본다. 그나마 깨우니까 비몽사몽 일어나기는 하는구나.


"... 꿈이 아니였네?"


"아니지. 그럼 뭐라고 생각한거야."


"아니 그냥..."


"... 좋다구."


길게도 안보니까 츤데레에서 메가데레가 된건가. 그래도 보다보니 정말 귀엽다. 그래도 다들 어찌저찌 나를 좋아하기는 하나보네. 생각을 하다보니 뭔가 셋이서 내 옆에 엉겨붙어 떨어지질 않는게 느껴진다.


"... 지금이 좋으면 좀 더 있다가 나갈까."


"그, 그럴까...?"


"저는... 그랬으면 좋겠어요."


"ㅈ, 지, 짐도 마찬가지이느니라..."


그럼 뭐... 조금만 더 있다가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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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떡밥이 굉장히 크게 타고 있길래 일단 생각한 것이라도 최대한 풀어써본 것


* 이게 트릴로지 조기종결로 끝나진 않았으면 좋겠어,,,


* 근데 단편만 쓰다가 이런거 써봐서 그런지 진짜 스토리 전개도 그렇고 길게 쓰기도 힘들고 많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