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께처럼 쌓인 어둠 위로 불티가 낮게 흩날렸다.


비명처럼 연기를 내뿜고 있는 군용 트럭과 파괴된 바리게이트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란아..."


낡고 때가 탄 연구용 가운 위로, 검은 동심원이 천천히 커져가고 있었다.


쿨럭-


낮은 기침 소리와 함께 남자는 들썩이며 피를 토했다.


"박사님! 정신 차리세요 박사님!"


무릎을 내어준 여인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남자는 입가를 닦지도 못한 채 붉게 물든 이를 내보이며 씨익 웃었다.


"괜찮다. 너도 알고 있지 않았느냐."


"하지만..."


목을 타고 흐른 핏줄기가 하얀 앞섬을 적셨다.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왜... 박사님이..."


박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그야, 저 멍청이들이 만든 깡통이니... 내가 막아서면 에러를 일으키지 않겠느냐? 간단한 이치지."


발치에는 사지와 상반신을 잃은 블랙 리리스 암살형 모델의 파편이 아직도 전류를 튀기며 깜빡이고 있었다.


쓰으윽-


이미 눈앞이 흐려오고 있건만, 박사는 흐릿한 실루엣도 보기 싫은 듯 미약한 발길질로 파편을 밀어내었다.


"네가 처음으로 눈을 뜨던 날... 나는 이런 결말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단다."


박사는 바르르 떨리는 손길로 여인의 부드러운 뺨을 덮어주었다.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아... 너를 만든 것도, 너희를 해방하고자 했던 것도, 너를 위해... 커억-!"


쿨럭! 쿨럭! 쿨럭! 쿨럭!


한계까지 폐를 쥐어짜며 어떻게든 새로운 공기를 집어넣으려는 기도가 조였다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흔들리는 고개가 무릎에 부딪칠 때마다 여인은 외면하고 싶은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커어어어어억!


거친 토악질과 함께 내장 조각이 섞여나왔다.


박사는 떨리는 입가를 멈추려 아랫니를 세게 깨물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다행이구나..."


뺨에 닿은 온기가 사라지는 게 두려워 여인은 두 손을 포개었다.


고개를 돌린 박사는 도로가 사라지고 있는 굽잇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 너머에... 연못...이... 내가 나고 자란... 곳이야..."


박사가 가리킨 산등성이는 이미 해가 넘어가 깜깜해진 채였다.


"너와... 여기 와서... 말...하고...싶.... 쿨럭!"


"박사님!"


여인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턱을 간질이는 미약한 숨소리가 콧대를 타고 부서졌다.


볼가를 덮은 손길이 점점 빠르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하구나..."


박사는 안경을 제 때 바꾸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웃어...주...고... 싶은...데...."


딸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물건을 팔다니, 단골 가게가 망하기 전에 여분을 사뒀어야 했는데.


"널...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흐르는...구나..."


금빛 안경테 위로 떨어진 물방울이 부딪혀 비산했다.


"박....으흑....사님...."


보드라운 언덕배기처럼 곱게 감겨있던 눈가 사이로 흘러나온 눈물이 여인의 턱을 타고 떨어졌다.


"울...지 말고..."


박사는 마지막까지 짜낸 힘으로 손을 들어 밤하늘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웃어... 주려무나..."


급한 헐떡임 사이로 가지취의 냄새가 났다.


"란아..."


"네, 박사님! 저 여기 있어요!"


"아...빠...에게..."


박사는 고통으로 헝클어진 얼굴을 쥐어짜냈다.


"노...래......."


호선을 그리는 입가 위로 얼룩진 핏기의 색이 옅어지고 있었다.


여인은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헝클어진 고름을 다시 매고, 이마에 흐르는 핏자국도 문질러 없앴다.


박사의 품 사이로 손을 넣어 몸을 일으킨 여인은 차가운 몸을 안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아빠."


익숙한 곡조가 흘러나왔다. 너무나도 지겹고, 꿈에서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입에 붙어버린 가락이.


막혀오는 목을 트이기 위해, 여인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하늘로 올라가는 검은 연기가 먹구름에 일필을 더했다.


짧은 독창이 끝났다. 여인은 곱게 다물어진 입이 어느새 벽처럼 달라붙었다는 것을 느꼈다.


제 몸을 살라 향불을 태우던 불길도 어느새 숨을 다한 뒤였다.


남자의 머리를 품 속에 끌어안으며 여인은 오열했다.


산꿩이 섧게 울던, 차가운 가을밤이었다.
















나무는 제 가지 아래로 쌓인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를 품에 안아든 여인의 당혜가 천천히 벗겨져 땅에 놓였다.


거추장스러운 주립도 벗어 걸고, 여인은 입술을 떼었다.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석 장생전 궁궐에서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 만난다면 비익조가 되기를 원했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 만난다면 연리지가 되기를 바랐지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하늘 땅이 장구해도 끝이 있건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선선무절기    이 한은 끝없이 이어져 다함이 없구나




핏자국이 말라붙은 손을 모아 여인은 조용히 합장했다.


금란은 손을 들어 동여멘 머리를 풀고 댕기를 꺼내 가지에 묶었다.


"사랑해요, 아빠."


여인의 몸이 연못 아래로 사라졌다.


수면을 타고 퍼지는 파동도 금세 멎고 다시금 고즈넉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둘이 엮여 하나가 된 나뭇가지 아래로, 작은 도라지꽃 하나가 바람에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