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


120) 

 

웅성-웅성 

 

 수많은 인파가 몰린 어느 시내의 치킨집, 여자고 남자고 어른이고 청년이고 할 것없이 남녀노소가 저마다의 목청을 세우며 떠드는 가운데 나는 그곳을 뒤로 한 채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뚜벅-뚜벅 

 

"이 양반은 죽었나 살았나. 왜 안 와?" 

 

 혼자서 테이블을 지키기도 어언 15분, 잘 먹다 얼굴이 시퍼래진 양반이 황급히 뛰어 갔던 복도를 나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지나갔다. 

 

뚜벅-뚜벅 

 

 짧은 복도의 끝에 놓인 목조 문 위에는 '신사용'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그 문의 문고리를 벌컥 열어 재꼈다. 

 

딸-깍 

 

"..꼴초뱀. 살아 계십니까?" 

 

"그웨에엑...그에엑..." 

 

 좁디좁은 화장실의 좌변기 칸 문을 활짝이 열어 둔 채 변기를 붙잡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 맞선임의 추태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좌변기가 아니라 와변기인가. 나는 군복을 입은 채 볼썽사납게 쓰러진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좀비십니까? 대답 한 번 걸걸하네요." 

 

"미...미친 새끼야아아..." 

 

"제가 왜 미친놈입니까. 여기다 아무나 데려다 놔도 꼴초뱀이 미친놈이지. 제가 미친놈처럼 보일 까요." 

 

"너...너 이새끼. 얼굴이 왜 그렇게 멀쩡..그에엑!" 

 

"사준 거 아깝게 죄다 여기다 토했습니까? 쯔쯧." 

 

 이미 여러 차례 물을 내렸는지 더러운 외관과 달리 깔끔한 좌변기 내 물웅덩이를 확인한 나는 계속해서 헛구역질을 해대는 그를 벽면에 내던졌다. 

 

"나와 보십시오. 뒷정리는 제가 할 테니 정신줄이나 꽉 잡으십시오." 

 

"씨...바아아..또라이..새끼.." 

 

"그러길래 누가 주는 족족 먹으라 했습니까. 제 페이스 따라오려다 죽은 놈만 연병장을 가득 채울 겁니다." 

 

"호..혼자서 소주 4병에 맥줄...으에엑..다시 떠올리니까 머리가 또.." 

 

"오늘은 나름 천천히 마신 건데. 꼴초뱀 꼬라지를 보니 더 먹긴 글렀네요." 

 

"거..거기서 더 마시긴 미친.." 

 

"간 하나는 건강합니다. 꼴초뱀 폐보다 제 간이 더 멀쩡할 건데요." 

 

드르륵-! 

 

 꼴라가 되어버린 맞선임의 헛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온갖 토사물 범벅이 된 좌변기 주위를 화장지로 대충 닦아내었다. 더럽지 않냐고? 평소 친구 놈들 동기 놈들 것도 닦아내다 보니 내게는 별문제도 되지 않는다. 마지막 흔적까지 닦아낸 휴지를 좌변기 안에 내던지고 물까지 내린 나는 시선을 다시 그에게로 돌렸다.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무리. 부축 좀 해주라." 

 

"후우. 알겠습니다." 

 

 말 그대로 홍당무가 되어버린 선임의 오른 어깨를 부축해 나는 그를 이끌고 화장실 밖으로 걸어나왔다. 이 꼴을 보니 더 마시긴 글렀다. 

 

'숙소에 던져놓고 길에서 혼술이나 더 해야겠네.' 

 

뚜벅-뚜벅 

 

"꼴초뱀. 휴대폰 테이블에 뒀죠?" 

 

"어..좀 챙겨주라...으욱.." 

 

"그만큼 토하고도 더 하시려고요?" 

 

"내일 아침이 무섭다.." 

 

"담배나 피지 마십시오. 대가리 깨지기 싫으면." 

 

 군복 입은 두 남자가 시끌벅적한 로비로 들어서니 몇몇의 눈길이 우리를 향했다. 젊은 남자들은 애처롭다는 눈빛을 혹은 비웃음을, 여성들은 우리 모양새가 웃긴지 그냥 깔깔 웃기 바빴다. 

 

'..니들도 꼭 군복 입길 바란다. 에휴.' 

 

"꼴초뱀. 우선 계산대 앞에 계십시오. 휴대폰 챙겨 올 테니." 

 

"오냐아아아.." 

 

 나는 비틀대는 그를 계산대 앞 벤치에 대충 앉히곤 이 호프집을 벗어나기 위해 재빨리 내가 지키고 있었던 자리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디 보자. 꼴초뱀 휴대폰이..여기 있었네. 용케 밧데리 충전할 생각은 하고 있었나." 

 

딸-각! 

 

"..응? 이건 뭐야. 뭘 켜둔 것 같은데." 

 

 테이블 아래쪽에 비치된 충전 콘센트에서 그의 휴대폰을 뽑아내자 그의 휴대폰 화면 위로 무언가 흐릿한 마크가 떠올랐다. 이게 뭔가 싶어 내가 잠금 마크로 보이는 화면 위를 쓱 올리니 내 앞에 어느 게임의 화면이 떠올랐다. 

 

"..이게 뭐야? 무슨 게임이야?" 

 

 나름 이 게임 저 게임 다 해본 나도 모르는 처음 보는 게임 화면에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정확히는 게임 속 SD 디자인의 어느 캐릭터에게 내 관심이 쏠렸다. 

 

"...호오. SD퀄은 괜찮네." 

 

 보통 2D에 SD 캐릭터라면 메이플 도트만도 못한 그래픽으로 대충 만든 티가 팍팍 나는 싼내나는 게임밖에 보지 못했는데. 꼴초뱀이 하는 게임은 그 궤를 살짝 달리하는 듯 보였다. 게임 속 왼편에 위치한 여성은 이리저리 잽싸게 날아다니며 오른편에 있는 기괴한 놈들을 하나씩 해치우고 있었다. 

 

'총잡이인가. SD지만 생긴 것도 꽤 이쁘고.' 

 

"..무슨 게임이래. 이거. 나중에 꼴초뱀한테 물어나 봐야겠는데." 

 

 게임 속 어느 캐릭터가 유독 눈에 밟힌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딱 봐도 과금 할 것 같은데, 천장이 얼마인지나 나중에 그에게 물어봐야겠다. 혹시 이게 저 양반이 그렇게나 같이 하자고 쪼아대던 모바일 게임이었나. 이런 게임이라면 그냥 플레이 영상만 보여줘도 알아서 했을 텐데 괜히 남사스러운 일러스트나 보여주기는.

 

"저 녀석을 뽑는데 얼마 안 들면 좋겠는데.." 

 

"야아아..빨리 와..나 죽는다." 

 

"예예." 

 

뚜벅-뚜벅 

 

 이미 반쯤은 시체가 되어버린 선임에게로 걸어가며 나는 지루한 군생활 속에서 시간을 떼울 게임을 찾아내었다는 생각에 볼 위에 보조개를 피웠다. 

 

'해보고 딱히 재미가 없다 싶으면 곧장 삭제하면 그만, 재밌으면 군 생활 동안만 하면 그만이니.' 

 

 그리고 전역 이후에도 그 게임은 내 휴대폰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의 나로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121) 

 

 넓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또 그리 좁지는 않은 어느 한적한 방안, 그 방안의 중앙에 놓인 소파에 엉덩이를 걸터앉은 짙푸른 머릿결의 여성은 말없이 제 손에 들린 유리잔의 안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흐음." 

 

딸-그락! 

 

 갈색빛의 영롱한 액체 사이로 투명한 얼음이 굴러다니는 그 모양새가 그녀가 보기에도 썩 좋은 장면이었으나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로 눈썹 사이를 좁혀들었다. 짙푸른 머릿결과 백색 바탕의 멋들어진 제복을 걸친 여성, 무적의 용에게 있어서 이 갈색빛 액체는 그녀에게 어떠한 남성을 떠올리게 했으니 말이다. 

 

'그 무뢰한의 유산이구려. 이 술은.' 

 

 일찍이 그녀가 오랜 잠에 빠져들기 전, 그녀를 만들어낸 장본인인 어느 남성은 세계 각지에서 오만가지의 보물들을 수집해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이 잔에 담긴 액체 역시 그의 컬렉션 중 하나였다. 

 

'...술을 입에 댄 지는 오래 되었으나 설마하니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 그 쓰레기의 유산이 될 줄은 몰랐구려.' 

 

 그녀가 기억하는 그 남성은 언제나 타인에 대한 자기 과시욕과 오만방자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구제할 방도가 없는 쓰레기 중에 쓰레기, 그런 그가 종종 남들에게도 쉽사리 내어주지 않던 것이 이 카라멜색의 액체였다. 한 병에 수백 수천은 호가하는 고급지다 못 해 사람 목숨값보다 비싼 이 액체를 목구멍에 들이킬 때마다 그는 듣기 거북한 웃음소리를 터트리곤 했다.

 그 웃음에는 분명 자신의 끝 모를 과시욕과 제 발밑을 설설 기어 다니는 약자에 대한 모욕이 담겨 있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찌나 역겨웠는지, 무적의 용은 머릿속 한 켠에 남아 있던 불쾌한 기억에 저도 모르게 눈썹을 한껏 구겼다. 

 

'그 멍청한 인간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허욕에 찌들어 있었구려. 쯧, 불쌍하다 해야 할지.' 

 

"..용. 무적의 용 중장님. 왜 그러십니까?" 

 

"용? 왜 그래? 혹시 술이 입에 안 맞아?" 

 

"...음?" 

 

 불쾌한 기억을 더듬던 무적의 용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 톤으로 자신을 부르는 남성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는 어둡고 칙칙하기만 한 과거의 그 불쾌했던 광경 대신 밝은 전등을 반사하는 유리 테이블과 그 주변을 둘러앉은 두 명의 남성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미안하오. 잠깐 수심에 빠졌구려." 

 

 이제는 익숙하디익숙한 자신의 주군과 이제 얼굴을 익혀가고 있는 남성이 저마다 다른 눈빛으로 자신을 빤히 주시하고 있자 무적의 용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떠올랐다. 

 

"정말 괜찮은 거야?" 

 

"물론이오. 주군. 소관이 괜히 분위기를 망친 것 같구려." 

 

"중장님. 혹시 안주가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신지.." 

 

"그런 말씀 하지 마시오. 대장. 내 이 나이를 먹고 반찬 투정할 일은 없다오." 

 

'이것참. 이곳 역시 잠시도 방심하지 못할 전장이었구려. 후후.' 

 

 한쪽에서는 걱정이 담긴 눈빛이 다른 쪽에서는 행여 자신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에 대해 겁내는 눈빛이, 무적의 용의 입가에 걸린 쓴웃음이 더욱더 커져만 갔다. 

 

"소관은 이 자리의 게스트일 뿐이오. 그리 눈치 보지 마시구려." 

 

"...그래도 이곳을 담당하는 책임자로서 손님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소완, 혹시 다른 안주가 있나?" 

 

"작전관, 그리 눈치 볼 필요가 없다하지.." 

 

"그래. 라붕이 형. 여기 지금 안주로도 충분히.."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이 땅의 주방장을 찾는 라붕이 작전관의 모습에 무적의 용과 사령관이라 불리는 남성이 손사래를 치려 들자 그들의 목소리 사이로 앙증맞은 소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라붕이 오빠! 나는 과일! 시원한 열대과일!" 

 

"...들었지? 소완." 

 

"후훗. 조금만 기다려주시옵소서. 곧장 손질에 들어가겠나이다." 

 

"그렇단다. 닥터. 조금만 기다려라. 여기 땅의 과일은 무척이나 달거든." 

 

"헤헤헤! 여기 오길 잘 했네. 낮부터 이곳저곳 다녀서 힘들었는데!" 

 

앙증맞은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앙증맞기 짝이 없는 두 다리를 흔들어대는 백의 소녀, 닥터의 얼굴에 미소가 꽃피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얼굴에도 근심 대신 헤픈 미소가 걸렸다.

 그렇다. 이 자리에는 이제 그 남자가 없다. 이제 그 남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어느 무인도 아래서 홀로 죽었다. 정말로 그 남자다운 외로운 최후라고, 무적의 용은 그 사실을 한번 곱씹은 채 제 손에 들린 위스키를 조용히 한 모금 삼켰다. 

 

꿀-꺽!

 

 그리고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이들 역시 재빨리 술자리를 재개했다. 

 

"..사령관님? 술잔이 비셨군요. 채워 드리겠습니다." 

 

"어? 어..형님? 그..벌써 우리 한 병 비웠지 않아?" 

 

"? 사령관님이 보내주신 술이라면 아직 한참 남아 있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와앗! 나도! 나도! 치사하게 오빠들끼리만 마시고! 나도 술!" 

 

"안돼! 닥터!" 

 

"쓰읍! 어린이가 마실 음료가 아니야." 

 

"...힝. 나만 애 취급이야?!" 

 

'...후후. 그 남자는 상상조차 못 했겠구려.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이 술이 이리도 쉽사리 사라지고 있을 거란 걸.' 

 

 이미 텅텅 비어버린 고급술의 술병이 하나, 라붕이 작전관은 이 술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눈치였으나 마시는 것 하나는 빨랐다. 그와 반대로 사령관은 그의 페이스를 따라가다 벌써 지쳐버린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 리오보로스와 같이 물질에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저 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떠들고 웃고 즐긴다. 그 광경이 무적의 용에게 있어 보기 매우 흡족했다. 

 

'..소관이 바랬던 미래란 것이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구려. 후훗.' 

 

딸그락! 

 

"여기 냉동 열대과일로 만든 안주이옵니다. 부디 만끽하여주시길." 

 

"와앗! 파인애플은 내 꺼! 바나나도 내 꺼!" 

 

"..닥터. 그렇게 먹다간 살찐다." 

 

"말이 너무 심해! 라붕이 오빠!" 

 

"하하하! 형님 말대로 닥터는 하루 내내 책상에만 앉아 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 

 

"짓궂음이라는 거 옮는 거였어?!" 

 

"...과식은 금물이라오. 닥터양." 

 

"용 언니까지! 정말!" 

 

 즐겁다. 무적의 용은 떠들썩한 술자리의 분위기에 취해 다시 한번 술잔을 기울였다. 이런 자리라면 언제든 출석할 용의가 있다. 이제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때의 불쾌한 기억 따위는 더 이상 자리매김하지 않았다. 

 

122) 

 

'...우엑. 수..술이란 거 원래 이렇게 막 들이키는 거였나.' 

 

 사령관은 기본적으로 술을 즐기지 않는다. 술이 딱히 싫다기보다는 몇몇 이유 탓에 그동안 멀리해왔다.

 첫 번째 이유는 본인이 결재해야 하는 지옥과도 같은 업무량. 사령관이라는 자리를 꿰차고 있는 만큼 그에게 올라오는 결재의 양은 살인적인 레벨이었다. 잦은 소규모 전투와 다량의 보급 물자 현황 보고서, 그리고 크고 작은 합동훈련 허가까지. 거기에 더해 전선의 전투 지휘와 원격 조종까지. 사령관에게 있어 술 한잔의 여유란 잠들기 전에 가지는 잠깐의 순간이었다. 

 

"사령관님. 위스키가 입맛에 맞으십니까?" 

 

"...어..응. 하하하! 괘..괜찮네!" 

 

'사실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맥주보다 더 취하는 건 알겠어!' 

 

 두 번째 이유는 꽤 단순하다. 사령관 본인은 모르나 자신의 주사가 꽤 심각하다는 이야기가 함 내에 만연했다. 워울프가 술에 취한 자신한테 실려 나갔다는 이야기부터 유미와 키르케가 술에 취한 자신에게 패배했다는 이야기까지. 물론 철혈의 레오나 역시 술로 자신을 유혹해 왔으나 그녀와의 이야기는 그녀의 몸무게와 같이 1급 기밀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령관은 평소 술을 멀리하고 살아왔다. 눈앞의 남성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령관님이 여기로 보내주신 위스키들은 저같이 무식한 놈도 곧장 눈치챌 만큼 비싸 보이는 물건이더군요. 이런 걸 혼자 마시기에는 아까웠는데.." 

 

'혼...혼자서 다 마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붕이 형은...' 

 

 자신의 앞에서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위스키병을 바라보는 남성, 라붕이 작전관은 밝은 햇빛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시꺼먼 복장을 차려입었던 낮과 달리 가벼운 츄리닝 차림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다만 얼굴색이 꽤 어두웠던 것이 괜한 자리를 만들었나 싶었지만 이내 방안 인원들을 한번 훑어보곤 얼굴색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마 그것은 일부러 이곳에 불러들인 닥터와 이곳의 소완 덕택일 것이리라. 

 

'닥터야 형님과 연이 가장 닿아있는 아이고. 소완은 굳이 형님이 안 불렀어도 어느새 쏙 들어와 술자리를 차렸으니까.' 

 

 어디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온갖 술병들과 안줏거리들이 놓인 식기 카트를 들고 들어온 그녀의 행동에 당시 사령관은 당황했으나 이내 그녀의 합석을 허락했다. 물론 그의 경호원은 불쾌감을 표했으나 사령관에게 있어 그녀는 매우 흥미로운 존재였다. 

 

'여기의 소완이나 리제는 우리 애들하곤 전혀 다르다는 보고가 요안나한테서 왔으니..별다른 문제가 없겠지.' 

 

 사령관은 매번 요안나 아일랜드의 보고를 두 가지 루트로 받는다. 하나는 눈앞의 라붕이 작전관 혹은 그의 부관인 아르망 개체.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루트는 이곳의 전 책임자 요안나. 

 

'형님에게서는 대리 결재된 행정업무를. 그리고 요안나에게선 이곳 아이들의 생활을. 음. 생각하고 보니 왠지 형님을 의심하는 듯한 행동 같기도 한데..' 

 

 요안나에게서 받은 보고서에는 삼얀과 이곳 아이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중 삼얀의 이야기가 사령관에게 매우 색다르게 다가왔다. 각 생산시설의 팀장을 맡아 제 업무에 충실하다는 이야기와 서로 다투는 일이 적다는 이야기가 사령관이 겪은 그녀들의 동일 개체와는 정반대였었다. 

 

'우리 애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 치기 바쁜데..후우. 환경의 차이인지, 아니면 개체마다 차이인지. 그것도 아니면 형님과 나의 차이인가?' 

 

 당장 오늘만 해도 리제가 가위를 들고 라붕이 작전관을 해충이라 부르며 달려들려 해서 지금 함 내에 구금되었다. 하지만 이곳의 리제는 사령관의 예상과는 달리 얌전한 성격에 속했다. 사령관은 둘의 차이가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생각을 해봤자야. 우선 지금은 이 자리에서..' 

 

"사령관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응?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라붕이 형." 

 

"..역시 그 형이라는 호칭은 조금 부담스럽군요. 차라리 절 라붕이라고 부르시면 안 되겠습니까?" 

 

"히히. 우리 오빠의 성격상 뒤로 무르진 않을걸? 얌전히 형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지셔라!" 

 

"후훗. 여전히 낮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구려. 작전관은." 

 

'역시 이 둘을 부르기 잘 했다니까!' 

 

 사령관이 라붕이 작전관과 술자리를 가진다는 소식은 지휘관급들의 귀에도 들어갔었다. 불굴의 마리를 비롯한 몇몇 지휘관이 이 자리에 참석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나 사령관은 그녀들의 희망 사항을 단호히 거절했다.

 회의실과 같이 그를 압박하고픈 마음도 없었을뿐더러 괜히 대화 내용이 삭막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 중에서도 무적의 용만큼은 대표의 자격으로 허가했다. 그 이유는 그녀만큼 그와 담소를 가볍게 나눌 인물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붕이 작전관은 여전히 소관에게 중장님이라 부르는구려." 

 

"...참모총장님이라는 직함을 어떻게 무시하겠습니까?" 

 

"자네는 그 불굴의 마리마저도 인정한 사내이오. 그러니 너무 그렇게 소관에게 딱딱하게 굴지 마시오." 

 

"...그래도 저처럼 갓 부임한 대장이 중장님께 말을 놓을 수 없습니다. 튀어나온 돌부리가 되는 건 제 쪽에서 사양입니다." 

 

"후후.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이전보다 더 부드러워졌구려. 좋소. 지금은 이걸로 합의를 보도록 하겠소." 

 

"선처에 감사드립니다. 아, 술잔을 그사이 비우셨군요.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고맙구려. 감사히 받겠소." 

 

쪼르륵-! 

 

'..역시 용이야. 형님과 대화가 안 끊겨.' 

 

 오랜 세월 살아온 내공 덕분인지, 아니면 둘의 성격이 합이 잘 맞는 것인지. 라붕이 작전관과 무적의 용은 쉼 없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이것으로 라붕이 작전관이 지휘관급들과도 한층 더 가까워졌으면 좋으련만. 사령관은 그런 희망을 머릿속 한편으로 치워두곤 곧장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시샘 어린 눈으로 술병을 빤히 바라보는 갈색 머리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닥터. 그렇게 노려본다고 해서 이걸 너한테 줄 순 없어." 

 

"흥! 술자리에서 술을 못 마신다니! 이게 무슨 말장난일까? 오빠!" 

 

"그건 나도 사령관님과 동감이다. 닥터. 넌 아직 어.." 

 

"나 꼬마 아니거든! 그리고 나는 바이오로이드란 말이야! 라붕이 오빠보다 간이 더 세면 더 세다구!" 

 

"...그래?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어째 오빠들은 나한테 되게 엄격하다?!" 

 

 양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두 남성의 엄중한 지적에 닥터의 얼굴에 다시 한번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그들에게 있어 술안주의 하나에 불과했다. 

 

"자자. 그렇게 화내지 말고. 소완, 이 꼬마에게 과일 쥬스 한 잔 추가." 

 

"알겠사옵니다. 후훗." 

 

"우씨! 저 소완 언니도 날 보고 비웃잖아! 씨잉! 나 대우 너무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아래서 여기 사람들이랑 과자나 먹을걸!" 

 

 입술을 삐죽이다 못해 턱을 앞으로 쭉 밀어내는 여동생의 투정에 사령관은 못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눈앞에 놓인 과일 안주는 포기 못 하겠다는 듯 손을 열심히 놀리고 있었던 소녀에게 사령관은 그녀를 이곳에 부른 이유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닥터, 여기 방호시설 점검은 마쳤어?"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오빠! 물론..다 못 끝냈지. 히잉." 

 

"..방호시설이요?" 

 

"응. 형님. 여기에도 방호시설은 있거든. 형님은 미처 몰랐다는 눈치인데?"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벙커 설비는 알고 있었습니다만." 

 

'에휴. 이럴 줄 알았어.' 

 

 정말로 처음 들었다는 것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라붕이 작전관의 모습에 사령관의 쓴웃음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사령관이 이 땅에 굳이 찾아온 이유 중 하나, 당장에 그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사안은 이곳의 수비 문제였다. 

 

'예전에는 형님이 없었으니까 여기가 공격당할 위험도 적었지만..' 

 

"형님. 여기에는 파견 인원이라는 수비 병력도 있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의 수비 설비가 수면 아래에 준비되어 있어." 

 

"..호오.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만." 

 

"아마 요안나 언니도 잘 모르고 있었겠지. 애당초 수면 아래에 있으니 보일 일도 없고. 여기가 외부의 공격을 받은 사례도 없었으니까." 

 

 연신 손가락을 테이블 위에 놓인 열대과일 위로 놀리던 닥터는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는 와중에도 재주 좋게 자신의 설명을 이어갔다. 

 

"뭐 대충 있는 게 외부 방벽 설비랑..미사일을 격추할 이지스 제어 시스템이랑..섬 전체를 두를 쉴드 설비? 아. 이건 손 봐야겠어. 아마 설치한 지 3년이 다 되어가니까 아마 구식에 가까울 테니까." 

 

"..삼 년 만에 구식이 되는 거냐? 그게." 

 

"흐흥. 우리 오르카 1호의 대천재님을 얕보지 마시라! HQ-1 알바트로스 개체의 절대 보호 시스템을 본 떠 만들면 지금의 배로 튼튼해질 거란 말씀!" 

 

"소관들이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단순히 휴가를 즐기기만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오. 후후." 

 

"...허. 전 단지 놀러오신 줄로만.." 

 

"그게 우리 오빠의 가장 큰 희망 사항이긴 했지! 히힛!" 

 

"..부정은 못 하겠네. 하하!" 

 

 낮 동안 끼고 다니던 선글라스가 없어진 탓일까. 라붕이 작전관의 가려져 있던 눈동자에 띄워진 어이가 없다는 시선을 받아내던 사령관은 다급히 제 손에 들린 위스키를 목구멍 아래로 넘겼다.

 쓰다. 쓰지만 어딘가 인생에 충실하다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사령관은 어째 이 감각에 중독될 것만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한층 업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형님이 이제 이곳에 지내는 이상, 외적들의 습격이 없을 거라고 단정하기 어렵거든." 

 

"소관들의 의견도 같소. 아무리 망망대해의 가운데라 할지언정 우리에겐 그 끝을 모를 외적이 셋이나 있소." 

 

“오빠도 만나봤지? 철충! 근데 걔들뿐만 아니야. 요 바다 밑에는..”

 

 접시에 담긴 새하얗게 얼은 파인애플들을 하나둘 남김없이 처리해가며 설명을 주르륵 읊어대는 닥터의 행동에 사령관과 무적의 용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저 천재소녀의 설명이라면 자신들이 굳이 장황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해서! 그 철충과 별의 아이라는 초월적인 존재! 거기에 레모네이드 세력이라는 바이오로이드들까지!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우리 적들이야!”

 

“..그랬구나. 생각보다 적이 많았네.”

 

“응!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마! 그 녀석들이 여길 침공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온 거니까! 히힛!”

 

“...음.”

 

‘생각보다 담담하시네. 역시 형님은 담이 크셔서 아무렇지도 않으신 걸까?’

 

 몇 잔째인지 모를 위스키를 힘겹게 목구멍 아래로 훑어내리던 사령관은 조금 흐릿해진 시야를 온 힘으로 붙잡으며 라붕이 작전관의 안색을 두루 살폈다. 어딘가 초연한 듯하면서도 담담하게 적들에 대한 정보를 듣고 있는 그의 모습이 여간 믿음직스러운 것이, 사령관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뺨 위로 끌어올렸다.

 

“형님. 너무 그렇게 진지하게 들을 필요는 없어. 우리도 가만히 있는 건 아니니까.”

 

“맞아! 이래 보여도 우리 세력은 그 어디도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구!”

 

“..아직 레모네이드 세력에 비하면 적은 수나, 그 질과 경험이 다르다오. 정확히는 주군이라는 기둥이 있는 한 우리가 무너질 일은 없소.”

 

 자신의 북돋움에 힘을 실어주려는 두 여성의 덕분인지 라붕이 작전관의 안색이 평상시처럼 돌아섰다. 눈매가 살짝이 풀린 것이 사령관의 눈에는 그가 살짝 기쁜 듯한 눈치로 비쳤다.

 

‘그래. 나는 어쩌면 저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걸지도.’

 

-나는 그때 친구라는 말이 국산말인 줄 알았는데, 국어선생 얌생이가 칠판에 ‘친할 친’자에 ‘옛 구’자를 써서 오래 두고 가깝게 사귄 벗이라고 썼던 게 기억난다. 억수로 멋있는 말 아이가?

 

‘이게..친구라는 걸까. 아니면 형제라는 걸까? 헤헷.’

 

 일찍이 봤던 여러 영화 중에 친구라는 영화의 대사가 사령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등을 맡길 수 있는 동성이 눈앞에 있다. 듬직하고, 굳세고 자신처럼 그녀들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멋진 인간이다. 사령관은 그 사실을 속으로 곱씹으며 기세를 타 빈 술잔에 제 손으로 위스키를 채워 넣었다.

 

쪼-르륵!

 

“흐-흐흥! 흐흥-!”

 

“...오빠?”

 

“주군?”

 

‘이제 정말로 무서울 게 없어. 레모네이드든 철충이든! 별의 아이든 간에 형님과 나라면 무적이라고! 헤헤헤!’

 

 닥터와 무적의 용이 자신을 불렀으나 사령관은 그녀들의 부름을 무시한 채 잔의 끄트머리까지 차오른 위스키를 가볍게 들어 올려 다시 위 속으로 들이부었다. 오랜 시간 숙성된 매캐한 알코올의 향이 위를 가득 채우다 못해 이제는 아예 뇌까지 파고 들어오는 듯한 감각. 그 감각에 사령관은 자신의 의식을 붕-날려 보내었다.

 

“..동생에게 보호받는 형이라니. 이것도 나름의 아이러니군요.”

 

“어허! 형님. 그렇게 말하지 마시라! 동생도 형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단 말씀!”

 

“...?”

 

“형님 덕분에 우리 본대의 안드바리한테 쪼이는 횟수도 줄었고! 후방을 도맡아 주니 이전의 탈취 사건 때처럼 군대의 기강에 대해 걱정할 일도 없어졌고!”

 

“오빠? 오빠 얼굴이..”

 

“-이제 내가! 형님의 덕택을 봤으니까 돌려주는 거라고! 그러니까 이 아우의 선의를 부담스러워하지 마시라!”

 

“주군! 얼굴이 붉소! 잠..잠깐. 어느새 이 병을 다 비운 것이오?!”

 

‘어라. 왜 이러지. 혀가 안 멈추네.’

 

 왜인지 몽롱한 기분이다. 하지만 그리 나쁜 감각은 아니다. 사령관은 어딘가 익숙한 이 감각에 기대어 자신의 이야기를 매우 빠른 속도로 읊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라붕이 작전관의 얼굴은 이미 일그러진 상태이지만.

 

“아! 이것도 깜박할 뻔했네! 형님! 형님네에 이제 상비군이 주둔 될 거야!”

 

“예? 상..상비군이요? 잠깐만요. 대화가 너무..”

 

“우선은 각 전선에 뛰어난 인재들을 지원받는 형식을 채택했거든! 아마 형님의 위명이 단시간 안에 퍼진 탓에 애들이 지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거 위명이 아니라 악명..”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이 내가 누구냐! 사령관이야! 사령관! 형님의 요안나 아일랜드에 각 전선의 유능한 애들로 꽉꽉 채워줄게! 동생이 그 정도 능력은 있어! 하하하!”

 

“주..주군. 오늘은 너무 과음한 듯하오. 이제 그만..”

 

“오빠?! 지금 되게 추한 거 알아?!”

 

“소완! 얼른 냉수를! 얼음 한가득 담은 걸로!”

 

“..알겠사옵니다. 잠시만..”

 

 왜지. 술자리는 이제 시작이지 않은가. 시계의 초침을 봐도 이제 겨우 4바퀴를 돌았다. 어? 시계를 읽을 땐 초침을 읽었어야 했었나? 아니다. 분침을 봐도 겨우 20바퀴다. 유미와 키르케들은 하루 내내 마신다고 하던데. 왜 자기는 안 되는가. 애당초 오늘은 휴가이지 않은가.

 

“싫-어! 싫어! 더 마실 거야! 술도 많이 남았잖아!”

 

쿵-! 쿵!

 

“오빠! 애처럼 굴지 마! 갑자기 왜 이래?!”

 

“이래서 이전에 콘스탄챠양이 금주령을 내렸던 거구려. 후우...”

 

“주인이시여. 여기 냉수이옵..”

 

“사령관님! 냉수입니다. 이걸 어서 드십시..”

 

 라붕이 작전관의 다급함이 한껏 묻어나오는 목소리, 그리고 일그러지다 못해 당혹스러움이 묻어나오는 눈가와 입가. 사령관은 그런 그의 손에 들린 얼음컵을 빤히 응시하다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는 이내 다른 무언가를 테이블 위에서 발견하고는 그것을 가뿐히 낚아챘다.

 

타-악!

 

“-그건 안 됩니다! 사령관님! 내려 놓으..”

 

“주군-!”

 

“오빠-아!”

 

“-싫다! 난 술 더 마실 테다! 흥!”

 

벌-컥! 벌컥!

 

 위스키병을 통째로 집어 들곤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선 사령관은 허리춤에 왼손을 얹고선 오른손에 들린 위스키병의 아랫부분을 천장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곤 그의 목울대가 쉼 없이 움직이는 광경에 그 자리에 있던 일동들은 경악 아닌 탄식을 흘리며 그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이마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오 마이 갓.”

 

“-크으! 이게 술맛이구나! 하하하하!”

 

“..오빠. 진짜 추해.”

 

“..콘스탄챠양이 재건의했던 금주령을 재고해봐야겠소.”

 

 그렇게 아무도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어느 한적한 방안에서 한 남성의 광소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를 듣던 라붕이 작전관은 한껏 뭉개진 미간을 손가락을 살살 문지르며 한숨을 푸푸-내쉬었다.

 

“...하아아아.”

 

“-오늘은 마시고 죽는 날이야! 형님! 아하하하하!”

 

“...예. 죽겠습니다. 예. 제가 죽겠습니다.”

 

‘...주사 개 심하네. 사령관 자식! 오메가고 나발이고, 너 때문에 죽겠다.’

 

 그렇게 사령관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술자리는 시작된 지 겨우 30분 채도 되지 않아 그의 난동을 막는 닥터와 무적의 용의 손에 의해 끝마치고 말았다. 물론 그 뒷수습은 모두 라붕이 작전관의 몫이 되었다.

 

123)

 

또각-또각!

 

 회색빛 도색이 전등 아래서 번쩍대는 어느 기다란 철제 복도, 한적함만이 물씬 흘러넘치던 복도의 안에 갑자기 어떤 이의 발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을씨년스럽던 복도에 생동감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

 

 삭막한 복도의 안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어느 한 여성, 분홍빛의 머릿결과 매혹스러움이 묻어나오는 육감적인 몸매, 거기에 새초롬한 눈매까지 곁들여진 여성의 발소리는 끝을 모를 복도 전체로 서서히 울려 퍼져 이내 복도 전체가 그녀만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입술에는 어딘가 불만족스럽다는 듯한 혹은 부루퉁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입술뿐만 아니라 이내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도 여지없이 묻혀 나왔다.

 

또각-! 또각!

 

“...흥. 정말이지. 시시하기 짝이 없는 나날의 연속이네요.”

 

 고혹적이다 못해 이성을 단숨에 매료시킬 만큼 아름답고 청초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불만족스럽다는 듯한 음색이 섞여 구두굽 소리가 울려 퍼지는 복도의 내부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발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그저 불만족스러울 뿐, 그녀가 가야하는 목적지는 단 한 군데뿐이었다.

 

또각-! 또각!

 

“...또 무슨 일로 절 부르시는 걸까요. 흥. 괜히 또 철충 기지 하나 박살내고 오라는 귀찮은 명령만 아니면 좋을 텐데.”

 

또각-!

 

 이내 그녀가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장식 하나 없는 투박한 철제문의 앞. 분홍빛 머릿결을 휘날리며 걷던 그녀는 곧장 자신의 슈트와 외관 매무새를 매만지고선 그 문의 위를 살짝이 두들겼다.

 

똑-! 똑!

 

“...세라피어스 앨리스. 그쪽의 부름을 받고 왔어요. 들어갈게요.”

 

지-잉!

 

 스스로를 세라피어스 앨리스라 밝힌 여성은 방 내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거침없이 철제문의 개폐장치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개폐장치는 조용히 그녀의 앞에 놓인 장애물을 치워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온갖 전술지도가 펼쳐져 있는 정신없는 공간, 그리고 그 가운데 서 있는 어느 장교 코트를 걸친 이였다.

 

“...여전히 무례하군. 그대는.”

 

“어머. 이 정도 행동은 예상 내 아니셨을까요? 하루 이틀 보고 지낸 것도 아닌데.”

 

“...흠. 그런가. 그럴 수도 있군. 들어오게.”

 

“말 안 해도 그럴 셈이었답니다.”

 

또각-! 또각!

 

 새초롬한 앨리스의 대답에도 방의 중앙 테이블 앞에 서 있던 여성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을 뿐 별다른 쓴소리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자신을 앨리스라 칭한 여성은 방에 들어서기 전과 마찬가지로 부루퉁한 얼굴로 방 한가운데 놓인 소파로 직행했다.

 

푸-웅!

 

“..여전히 질감 안 좋은 소파네. 본대에서는 가구 취급이 영 형편없나 봐.”

 

“후우. 대장의 밑에서 구르고 돌아왔을 땐 독기가 한가득 담겨 있더니. 이제는 조금 풀린 모양이로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쯧.”

 

 자신의 역린을 건드린 것인지, 무심하던 앨리스의 연푸른빛 눈동자가 일순간 푸른빛을 내뿜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반응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어깨에 장교 코트를 걸친 금발의 여성은 말없이 그녀의 맞은편에 놓인 소파에 자신도 엉덩이를 앉혔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앨리스는 눈에 서려 있던 독기를 다시 제 눈 아래로 감추었다. 어차피 그녀에게 이런 행동은 아이의 투정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또 날 부른 이유가 뭐야? 대령.”

 

“..사령관 각하께서 요안나 아일랜드로 향하신 모양이다.”

 

“어머. 그 엉덩이 무거운 오르카 1호가 용케 해수면 위로 올라갔네? 난 평생 바다 밑에만 겉도는 줄 알았는데.”

 

“불경한 말은 입에 함부로 담지 마라. 세라피어스 앨리스. 감당도 못 할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칫. 어차피 듣는 귀라고 해봐야 여기서 당신과 나 말고 또 있어?”

 

 자신의 관심 밖이라는 것처럼 꼬아놓은 왼 다리를 앞으로 툭툭-내던지는 세라피어스 앨리스의 언동에 그녀와 마주 보고 앉은 그녀의 상관의 두 눈에 푸른 전자기가 일순간 일렁였으나 그녀 역시 앨리스와 마찬가지로 곧장 그것을 거두었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에게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그걸 뭐 어쩌라고? 나보고? 거기에는 그 잘난 본대 경호원들과 메이드들이 넘쳐나잖아. 설마 나보고 거기까지 날아가서 경계 근무 서라는 건 아니지?”

 

“...후우. 자네와 전장을 헤맨 나날이 짧지는 않지만. 정말이지. 자네는 항상 불만이 가득하군.”

 

“흥! 그거야 당연하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마리 대령. 난 세라피어스 앨리스, 모든 욕망에 충실하고 또 그것을 끝없이 갈구하는 여자라고.”

 

 앨리스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표현하며 제 양손을 살포시 가슴께 위로 얹어 보였다. 마치 앙칼진 고양이처럼 새초롬하게 찢어진 눈매와 그 아래 드리운 옅은 그림자가 그녀를 영락없는 악마와 같이 보이게 만들었으나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오르카 저항군의 동부전선 지휘관, 마리 대령은 피식-하고 코웃음을 내칠 뿐이었다.

 

“..훗.”

 

“..뭐야. 뭐가 웃긴 거야?”

 

“...그 욕망이 과거에는 적들을 부수는 것으로 채워진 것 같으나.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군. 나날이 얼굴에 심통만 가득해지는 꼴이 마치 간식을 못 먹은 고양이와 같아.”

 

“무..무슨! 날 그런 식으로 모욕했다가는 앞으로의 작전에 불참하겠어! 당장 철회해!”

 

 드높은 자신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는 것처럼 씩씩거리는 숨을 연신 내뱉는 앨리스의 항의에도 마리 대령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대응에 앨리스의 얼굴이 점차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음. 그런가. 불참인가.” 

 

“당신! 지금껏 당신의 전과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게 누군지 잊었어?! 바로..!”

 

“자네 덕이네. 음. 그건 부정할 길이 없네.”

 

“...어?”

 

“자네의 폭격 능력은 아무리 수적 열세에 몰려 있다 한들 단숨에 전황을 뒤엎기 충분했지. 그렇기에 우리 동부전선이 그간 무리 없이 전투 업무를 수행해 왔네.”

 

“...?”

 

 홧김에 내뱉은 말에 딸려오는 낯간지러운 칭찬의 연속에 한껏 일그러져 있던 앨리스의 얼굴이 일순간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삿대질을 하려 준비했던 그녀의 오른 검지는 어느새 반쯤 꺾인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날 부른 거야? 날 놀리려는 거야? 아니면..”

 

“무얼. 앞으로 그대와 함께할 날이 머지않을 것 같기에 미리 그간의 전공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걸세.”

 

“...? 당신. 뭐 어디로 전출이라도 가는 거야? 하지만 본대에는 이미..”

 

“전출이라, 후훗. 그것도 맞는 말이겠군. 하지만 내가 아닐세.”

 

“??”

 

부스럭-부스럭

 

 영문 모를 소리를 계속해서 지껄이는 상관의 행동에 세라피어스 앨리스의 눈썹이 점차 안으로 휘어 들어갔다. 그녀가 전출을 나가는 게 아니라면 당장 여기에 있는 자신이 간다는 소리인가. 혹시 북방 전선인가? 아니면 남방 전선인가. 결국에는 돌고 돌아 어차피 여기로 돌아올 것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을 끝마친 세라피어스 앨리스는 입꼬리를 삐죽인 채 커다란 제 가슴을 떠받치듯 팔짱을 끼었다.

 

“흥! 또 어디 전선에서 구멍이라도 났나 봐? 내가 여기저기 조리돌림이나 당하게.”

 

“...후훗. 그렇군. 구멍이라면 구멍이겠지.”

 

“뭘 그렇게 뜸 들이는 거야? 얼른 전출 서류나 내놔. 당장 챙겨가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니까. 아, 혹시 한 명 더 동행 정도는 가능하지? 우리 분대의 탈론 페더 개체는 나한테 붙여줘. 걔랑은 어째서인지 합이 잘 맞으니까. 쯧.”

 

“딱히 만족스러워 보이지는 않는군.”

 

“아무렴. 그런 딸딸이에 미친년이랑 제일 합죽이 잘 맞을 줄이야. 성벽이야 어떻든. 능력 하나만큼은 확실하니 어디 가서도 내 발목은 안 붙잡겠지.”

 

“좋다. 그 정도의 부탁이라면 자네의 전공에 비해 싼 편이지. 하여튼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보도록. 이건 전출이긴 하나 자네의 선택이다.”

 

“...선택?”

 

 예상외의 단어가 상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세라피어스 앨리스는 한껏 찌푸리고 있던 눈썹에서 힘을 잠깐 풀어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선택적 전출 제의, 뭔가 뒤가 구린 임무에라도 넣으려는 것인가. 앨리스가 홀로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자니 연신 서류를 뒤적이던 마리 대령은 그 사이에서 무언가를 쏙 꺼내어 그녀의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보게나.”

 

“...이건?”

 

“선택이라네. 갈지 말지. 그것은 자네의 선택이지. 후후. 바이오로이드에게 선택이라..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야.”

 

“...잠깐만. 조용히 해 봐. 이거...”

 

 바이오로이드의 숙명이니 뭐니. 그런 것에는 하등 관심 없다는 것처럼 세라피어스 앨리스는 상관의 독백을 다물게 하고선 이제 제 손에 들린 서류 한 장을 유심히 읽어내렸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서류를 계속해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 읽던 것을 반복하던 그녀는-

 

꽈-직!

 

“-가겠어! 이거! 가고말고! 하-하하핫!”

 

 -제 손에 들린 서류를 있는 힘껏 구겨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두 연푸른빛 눈동자에는 그 어느 때보다 시퍼렇게 달아오른 생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마리 대령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오랜만에 보는 부하의 생기 넘치는 모습에 흡족했기에.

 

“..그럴 줄 알았네. 좋네. 서류는 다시 준비해서 작성하는 것으로 하지. 그리고..”

 

“-그리고 이 서류, 몇 장만 더 준비해줘. 대령.”

 

“음? 몇 장 더 준비해달라니.”

 

“...북부에도 이 서류가 가는 거겠지? 그렇다면..우리가 먼저 몇 석 정도는 선점을 해둬야겠어.”

 

“호오. 솔직히 끌리는 제안처럼 보이진 않았네만. 좋다. 여분을 그대에게 나눠주도록 하지. 알아서 차출해 가도록.”

 

“...여기 와서 처음으로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할게. 후훗. 그래. 그렇단 말이지. 훗. 후훗.”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군. 물론 가기 전에 적의 몇 거점 정도는..”

 

“가뿐히 즈려 밟아 줄게. 포인트만 넘겨. 그러면 그 녀석이랑 둘이서도 충분하니까.”

 

“...좋은 거래로군.”

 

 여전히 자신의 제안이 만족스러운 건지, 평소 같았으면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는 데에만 이틀을 소비하게 하던 에이스가 선뜻 자신의 거래를 받아들이자 마리 대령은 가만히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이 일찍이 보아두었던 까다로운 거점을 하나둘 짚어나갔다. 뒷일이야 어차피 자기에겐 별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 그 남자, 그 남자야. 꼭, 반드시! 내 발아래서 끙끙 앓게 만들어 주겠어! 후-후훗. 후하하하하!”

 

“...대장도 여성 편력이 극심하군. 그래.”

 

“후-호호호! 호호호!”

 

 방에 들어서기 전까지 멈춰 있던 세라피어스 앨리스의 시계가, 종이 한 장으로부터 다시금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각 지역에 숨죽여 있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모더나 2차 접종 탓에 오른팔이 작살났었다. 다음편이 2부 마지막 편임. 후기는 그때 쓸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