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 전에:

이 글은 다음 내용을 포함한 낙서가 동봉되어 있습니다.

-해괴망측 

-몬무스  


 "오르카의 첫 번째 사령관이었던 인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엘프리데의 가족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BGM: YS I & II Chronicle - Tears of Sylp


 "주인님, 저희와 함께해요.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


 그를 주인님이라 불렀던 아름다운 여성이 그렇게 말해주었을 때, 그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아름다우면서도 강인한 여성이 그를 주인님이라 부르면서 끝까지 함께해줄 것을 약속했다. 


 그녀가 그를 데려간 곳에는 아름답고, 강인한 여성들이 가득했다.


 그녀들 모두가 그에게 애정과 충성, 헌신을 약속했다.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최선을 다해 그녀들을 승리로 이끌겠다고 다짐했고, 그녀들이나 그녀들의 자매들이 겪었던 고통을 다시 겪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 함께하자던 그 여자는 결국 그와 한 말을 어겼다.


 배신과 모략으로 인해서 아버지를 잃었다던 여자도, 어떤 때는 애 같고 어떤 때는 누나같으면서도 어떤 때는 엄마같던 여자도, 자신에게 무한한 애정을 줄 것 같이 행동하던 여자들도 모두 그를 버렸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격려의 말은 사라지고 차가운 무시와 냉대만이 자리잡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비난과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그가 듣지 못하는 곳에서 몰래 뒷담을 하던 이들은 점점 노골적으로 그의 비난을 입에 담았다. 마치 그의 귀에 들리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가 실패할 때 격려하던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에게 비난을 쏟아부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비난하는 대신에 빈정거리면서 모욕하거나 아무 말 없이 차가운 눈빛만을 쏘아보냈고, 마지막에는 아예 그가 뭘 얼마나 실패했든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이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의 비참함은 또다른 인간이 발견된 이후 극에 달했다.


 두 번째 인간은 그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용모에 완벽하다 싶을 정도의 신체적 능력, 그리고 저게 인간이 맞긴 한 건가, 혹시 비밀리에 만들어진 남성형 바이오로이드는 아닌가 싶을 정도의 지적 능력과 수많은 재주들. 한때 그에게 충성과 애정, 헌신을 바치겠노라고 떠들어댔던 바이오로이드들은 모두 두 번째 인간에게 달려가서 달라붙었다. 


 저것들은 처음 자신과 만났을 때, 그에게 했던 말을 기억은 하고 있을까? 과연 저것들은 저 인간에게는 자기가 한 말을 얼마나 지킬 것이며, 그 감정이 언제까지 갈까? 패배감과 굴욕감, 분노로 가득 차 있었을 때의 그는 두 번째 인간과 그 주변을 둘러싼 바이오로이드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고 두 주먹을 꽉 쥐면서 애써 솟구쳐 오르는 감정들을 삭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노도, 패배감도, 굴욕감도 사라졌다. 체념만이 그의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두 번째 인간은 계속해서 잘 나갔고, 그를 버린 바이오로이드들은 물론 새로 저항군에 들어오는 바이오로이드들마저도 두 번째 인간에게 찬사와 충성, 애정을 보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절망감에 빠진 그를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들은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마치 쓸모없어진 쓰레기를 밖으로 내던지듯, 그것들은 그를 오르카에서 내쫓아서 포레스터 요안나와 퇴역한 바이오로이드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버렸다.


 포레스터 요안나와 그곳의 바이오로이드들이 그를 위로하기는 했지만, 체념과 절망에 사로잡힌 그에게 그녀들의 위로는 큰 힘이나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녀들이라고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들과 다를 것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섬겨야 할 주인을 내다버리고 다른 인간을 섬기는 오르카 바이오로이드들의 행태에 분개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내심 조소했다. 만일 둘째 인간이 얼마나 잘났고 얼마나 잘나가는지를 본다면 이들도 그를 내다버리고 두 번째 인간에게 가서 붙으려 할 거라 생각했다.


 그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안나와 그녀를 따르는 바이오로이드들은 끝까지 그녀들의 첫 번째 주군이었던 이를 따랐다.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요안나와  퇴역한 바이오로이드들은 오르카 저항군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새로운 본거지에서 새로운 세력으로서 다시 시작할 것을 권유했다. 


 어디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라는 식의 허락이 내려지자, 요안나와 휘하 바이오로이드들은 즉시 주장한 바를 행동으로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들은 세계 각국의 정부 소속 바이오로이드들이 모여서 만들었다는 집단의 바이오로이드들과 접촉했다. 


 멸망 이전, 세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각 대기업들에 대해서 강한 증오심을 가진 이들은 그의 사연을 듣고는 바로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대했다. 열등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에게 NEWO- NEw World Order의 지도자급 바이오로이드들은 자신들이 그를 위한 모든 일을 수행할 터이니 그는 그저 그녀들 위에서 군림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로 설득했다. 당연히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야기였고 쥐뿔만큼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NEWO의 바이오로이드들과 포레스터 요안나 휘하의 바이오로이드들은 그를 위해서 헌신했고, 그를 내다버린 오르카 바이오로이드들에게 한 방 먹일 기회를 노렸다. 그녀들을 신뢰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그였지만, 그녀들이 말하는 그 기회만큼은 그 역시도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 날이 찾아왔다. 


 오르카 저항군이 몰락하고, 그 잘난 두 번째 인간이 전사하고, 그를 내다버린 오르카 호의 바이오로이드들이 개처럼 끌려오는 날이.


 김지석과 앙헬의 손에 자기 아비를 잃었다면서 자기도 똑같은 짓을 저지른 살찐 돼지를 두들겨패고, 온갖 학대를 가하고, 그 앞에서 그렇게 소중한 동생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그 동생들로 하여금 그렇게 따르던 언니를 자기 입으로 저주하고, 모욕하고, 원망하도록 만들었다. 한때 최강의 바이오로이드이자 삼안 산업의 상징이었다던 그 바이오로이드의 뇌를 그 잘난 육신에서 끄집어내서 모양만 비슷하게 만든 짝퉁 몸체에다 집어넣었다. 


 정작 필요할 때에는 하나도 쓸모없으면서 튼튼하기만 한 육신에 비해 폐품으로 만들어진 비곗덩어리의 새로운 육신은 너무나 약했다. 아니, 그냥 저 비계덩어리가 나약한 것뿐이다. 그가 겪은 고통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 고통에 질질 짜고, 비명을 지르며 애원하는 암퇘지에게 낙인을 찍고, 낙서를 하고, 온갖 화풀이를 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아니, 그것은 너무나 싱겁게 죽어버렸다. 


 아직 화풀이의 반의 반도 하지 못했는데.


 그녀에게 당한 배신과 모욕과 설움의 일부분도 돌려주지 못했는데.


 그래서 살려냈다. 살려내서 죽이고, 살려내서 죽이고, 육신을 새로 만들어서 부여하기를 반복했다. 


 비계덩어리 돼지뿐만이 아니었다.


  다 늙은 주제에 어린 척 하는 역겨운 그 마녀같은 년도, 보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년도, 입으로만 가족을 외쳐대고 정작 필요할 때에는 나몰라라 내팽개친 년들도, 새하얀 날개 값을 전혀 하지 못하는 년도, 속이 시꺼먼 까마귀같은 이름 값 하는 년도, 자기 필요할 때에만 친근한 척 하면서 접근해놓고는 태도를 휙 뒤집어버린 머리에 양을 뒤집어쓴 것처럼 생긴 년도, 그 밖의 다른 년들도 비슷한 꼴을 내 주었다. 


 쓰레기장에서 쓰레기를 태우면서 살았어야 했을 년은 죽어가는 쓰레기들과 같이 불타게 해 주었고, 몇 번 죽었다가 살려낸 돼지 년도 그 안에다 밀어넣어 주었다. 그렇게 죽여도 다시 되살려내면 그만이었다. 다시 되살려내서 실컷 화풀이하다가 다시 죽이고, 다시 살려내서 다시 죽이면 되는 거였다.


 시간이 지나자 한 번에 하나씩만 만들어내서 화풀이하는 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살찐 돼지 년과 그와 함께 하자고 약속해놓고는 자기 마음대로 그 약속을 깬 년을 비롯해 그가 특히 용서할 수 없었던 년들은 여러 마리씩 만들어냈다. 


 그리고 온갖 방법으로 그것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어떤 년들은 살아있는 변기로 만들어버렸고 어떤 년들은 가축으로 만들었고 어떤 년들은 자기 부하들이나 동생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도록 만들었다. 똑같은 쓰레기들이 자기들은 어떻게든 벌을 피하려고 남 탓을 해 대고, 자기들이 그렇게 따르던 언니나 지휘관에게 욕을 하고 두들겨 패고 원망하는 모습은 참으로 볼만했다. 


 포레스터 요안나도, 그 휘하의 바이오로이드들도, NEWO의 바이오로이드들도 화풀이 잔치에 가담했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들은 그녀들이 섬기는 주인을 배신했던 대역죄인이었고, 자신들보다 비천하고 낮은 화풀이용 샌드백이었다. 그들에게 어떤 잔혹행위를 가하더라도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녀들에게 온갖 가혹행위를 가하는데 이들은 주저하지 않았고 어떤 동정심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오르카 호의 절반과 쓰레기들을 잔뜩 격리해두고 있던 구역들 여럿이 사라졌다. 


 거기 있던 쓰레기들도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그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처음으로 느낀 것은 황당함이었고, 그 다음으로 느낀 것은 분노, 그 뒤에 찾아온 것은 두려움이었다. 한 번 그를 버렸던 그 년들이 그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를 내쫓았던 이들이 이번에는 아예 그를 끝장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한 그와 NEWO의 지휘관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사라진 오르카 호와 격리 시설, 그 안에 있던 쓰레기들을 모조리 찾기 위해서 지구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와는 별개로 그는 남아있는 쓰레기들에 대한 가혹행위를 한층 더 강화했고, 아직 보유하고 있는 기억 모듈과 인격 모듈 그리고 유전자 지도들을 사용해서 사라진 쓰레기들의 대용품들을 만들어냈다. 사라진 오르카 호의 반쪽과 격리 시설, 그리고 사라진 반역자들도, 그와 관련된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하고 돌아온 NEWO의 바이오로이드들은 그녀들이 받은 스트레스를 남아있는 이들과 새로 만들어진 이들에게 풀었다.


 그 무엇도 이 쓰레기들을 그의 정당한 심판으로부터 꺼내가지 못한다. 이 쓰레기들은 절대로 그에게서, 그가 내리는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 어떤 쓰레기들도 나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지금의 그에게 남아있는 일념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마법진 안에 들어가서 마법을 쓰고 나와서는 뻗어버린 오우거들과 고블린들을 지나친 바이오로이드들이 마법진 안에서 마치 기도하는 듯한 자세로 마법을 사용하는 서큐버스들과 뱀피레스, 마녀들과 엘프들의 곁에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내려놓았다. 


 마법을 쓰지 못하거나 마법이라고 쓸 수 있는 거라고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수준의 마법 내지는 호신용 마법이 전부인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집안일 내지는 시중을 드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날 갑자기 아이들이 사라지고, 사라진 아이들의 아버지나 어머니이자 용족의 핵심이었던 용들이 사라졌다. 


 바이오로이드들 중에서도 사라진 이들이 있었다.


 사라진 용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을 어렸을 적부터 업어키웠던 언니들이자 사랑하는 아내들이며, 그 용들을 친자식처럼 키워준 이들에게는 사랑하는 딸들이었고, 용족을 섬기는 바이오로이드들에게는 선배이자 큰 언니로 대접받던 이들이.

 

 당연히 이 사건이 벌어진 것을 알았을 때, 용족에 속한 이들은 누구 하나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온갖 마법과 초능력을 동원해서 사라진 이들의 위치를 추적하고 이들을 찾아 나서려 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사라진 이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었다. 그것 하나만 간신히 알아냈을 뿐, 이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리고 이들을 다시 불러오거나 찾아가려면 어디로 얼마나 가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사라진 사람들이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만 아는 상태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실종자만 늘리는 꼴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 날 이후로 용족의 원로들인 엘프들과 마녀들, 서큐버스들과 뱀피레스들은 대마법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사라진 딸들과 손녀들의 위치와 상황을 파악하는데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이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은 종족을 불문하고 원로들을 보조하는데 힘을 쏟았다. 


 반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들이 알아낸 것이라고는 실종된 이들이 대충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 그것뿐이었다.


 얼마 전까지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던 시젠은 어찌어찌 상황이 호전된 것 같았고, 엘프리데나 아크튜리아, 메이플라워는 무난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난하게 지내는 듯 싶었던 세라루미나와 루나세리아, 리젤롯테는 지금 굉장히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었고, 이들 셋만큼은 아니지만 유리카와 아미샤리, 아르디테아도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다 장성한 여섯 용들은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이들은 혼자서도 어지간한 군대를 생매장하거나 불태울 정도로 강력했고, 마법과 초능력 그리고 전투 기술에서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아예 걱정이 안 되는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자기 몸을 지킬 능력조차 부족한 아이들에 비하면 걱정이 덜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의외로 안 좋은 상황에 빠진 것은 시엘루나 라비아타 1호와 4호였다. 아이를 가진 몸인 이들이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것은 그녀와 가까운 이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근심거리였다. 게다가 임신중이라고는 하지만 용들을 상회하는 능력을 가진, 용족 내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이들이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안 이들은 도대체 이들이 상황에 처한 것인지 염려하고 또 두려워했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이들이 사는 마을에서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종족을 불문하고 다들 얼굴에 수심과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코헤이 교단 출신 바이오로이드들은 방에 틀어박혀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사라진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얼굴과 마음 속에도 빛은 돌아오지 않았다. 


 용족의 구성원들을 배부르게 먹이기 위해 만들어진 커다란 주방 한쪽에 자리잡은 보관함 안에는 남은 음식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보관함에 걸려있는 보존 마법 때문에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 그 음식들은 용족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슬픔과 근심에 빠져 있는지를 알려주는 한 예시였다. 이럴 때일수록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하지만 아무도 그리하지 못했다.


 "......주방장," 오늘도 한가득 남은 음식들을 가지고 돌아온 한 더치걸이 체념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마법도 쓰지 못하는 우리는 무슨 쓸모가 있어?"


 "우린 쓸모가 없사옵니다."

 

 지금의 주방에서 가장 고참인 아릴카릿사-이베아란 소완 3호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끓이는 육수들의 상태를 확인한 그녀가 주방을 돌아보면서 덧붙였다.


 "그러니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에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옵니다. 가뜩이나 쓸모가 없는 우리가 식사까지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면 어머님들도, 자매들도, 남아있는 아이들도 중요한 일에 집중하실 수가 없사옵니다." 


 "선배님, 그래도 음식이 너무 많이 남고 있사옵니다. 다들 제대로 식사는 하고 계신 것인지......"


 가장 최근에 용족에 합류한 소완인 소완 5호가 남은 음식들을 곁눈질로 쳐다보며 말을 흐렸다. 누가 굶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거나 그런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은 것을 보면 다들 음식을 먹기는 먹는 것 같은데, 음식 남기는 양을 보면 그렇다고 제대로 식사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드시게 할 방법을 찾아야지요.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까?"


 "그렇사옵니다."

 

 소완 3호의 말에 소완 4호가 대답하고, 소완 5호와 다른 주방 바이오로이드들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허드렛일을 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이 남은 음식들을 보관함에 집어넣고, 요리를 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은 음식을 준비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음식을 조금이라도 더 먹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의사복을 연상케 하는 차림을 입고, 안경을 쓴 초록색 피부의 오우거가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다음 식사는 육수나 죽, 스프 형태로 식사를 준비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리하겠사옵니다. 시간이 살짝 걸리오나 이번 식사도 죽과 스프로 준비해드릴 수 있사옵니다만, 어찌 하시겠사옵니까?"


 [그렇게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오우거, 시엘루나 라반이 급한 발걸음으로 주방을 나섰다. 마력을 거의 다 소진했던 그가 휴식을 취한지 겨우 네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떠올린 소완 3호가 방금 그녀에게 질문했던 더치걸을 불러서 라반에게 막 끓인 육수를 가져다줄 것을 부탁했다. 


 육수가 담긴 그릇을 든 더치걸이 주방을 나섰을 때 이미 라반은 건물 바깥으로 나가서 저 멀리 대마법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공간이동을 사용할 마력조차도 아껴서 사라진 이들을 찾는데 사용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땅과 하늘 위에 빛나는 마법진과 그 안팎에 있는 이들을 잠시 쳐다본 더치걸이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는 전쟁 병기들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땅 속에 있을 때 사용하던 굴착 도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그 전쟁 병기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숫자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용들이 없고, 대부분의 용족의 주요 구성원들이 사라진 이들을 찾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지금 외부의 적에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이들은 오직 전투 병기 뿐이라는 이유도 물론 있지만, 좋지 않은 상황에 빠진 아이들이나 자매들에게 손을 뻗을 수 있게 된다면 즉시 저 전쟁 병기들을 지원군으로서 보낼 생각일 것이다. 

  

 더치걸이 대마법진에 도착했을 때 이미 라반은 마법진 안에 자리잡고 앉아서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곁에 육수 그릇을 내려놓은 더치걸이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서 그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도련님, 마법도 초능력도 제대로 못 쓰는 우린 쓸모가 있슴까?"


 바닥에 앉아서 로켓이 주렁주렁 달린 2연장 기관총처럼 생긴, 뭔가 요란하면서도 조잡하게 생긴 무기를 정비하던 브라우니가 옆에 있는 오우거에게 자조하는 어조로 물었다. 그녀의 상반신을 거머쥘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기계 손바닥으로 그녀의 등짝을 팡팡 친 오우거, 시엘루나 나일루가 브라우니의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무식하게 생긴 무기로 땅바닥을 쾅쾅 찍으면서 대답했다.


 [우리 쑬모눈 오마니드라고 누님드리 아그들 찾는 바로 그 순관부터 생귄다, 브! 고라니까 항상 쑬모이쓸 준비를 딴딴이 해 둬라!]  


 [나일루 하는 소리 드렀냐, 아그드라!? 괘니 쑬모 잇네 업네 하지 말고 언제라도 쑬모이쓸 수 이또록 준비 딴딴이 해 둬라! 아랐나?!]


 다른 오우거가 축 늘어져 있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소리쳤다. 어차피 마법을 쓸 수 없는 이들이 쓸모가 없네 있네 자학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마법과 초능력을 쓰는 이들이 사라진 이들을 찾는 일을 하는 동안에 이들은 이들이 할 수 있는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이들이 생각하는 정답이다.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이를 강조하면서 오우거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도 자리잡으려 하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오늘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녀의 가족들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는데 실패한 시엘루나 메이플라워가 술병들과 주스병의 뚜껑을 땄다. 


 메이플라워가 일반적인 인간은 들고 마시지도 못할 만큼  커다란 컵에다가 독주들과 주스를 쏟아부어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을 본 바이오로이드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한 고급 바이오로이드라도 저런 식으로 술을 마셔대면 취기가 확 올라올 터인데, 저런 컵으로 술을 물 마시듯 마셔대는 메이플라워가 취한 기색을 보인 적은 그녀들이 기억하기로 단 한 번도 없었다.  


 묘하게 얼굴 생김새나 느낌이 라비아타를 닮은 그녀는 말 그대로 목숨만 붙어있는 고깃덩어리였던 그녀들에게 잃어버렸던 것들 일부를 다시 되찾아준 은인이었고, 어딘지 모를 세계에 갑자기 떨어진 그녀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괴물이기도 했다.


 



 시엘루나 메이플라워라는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그녀를 바이오로이드들도 완벽하게 신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녀들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공룡처럼 생긴 사나운 야생동물들의 밥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그저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는 짐짝일 뿐인 바이오로이드들을 지켜주고 돌봐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소위 말하는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아우로라의 시선이 메이플라워 옆에 나뒹굴고 있는 병들로 향했다. 어디서 난 건지는 모르지만 바카디-151과 아마레토, 라임 주스의 레이블들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인간 같으면 한 잔만 마셔도 취기가 확 올라오고, 왠만한 바이오로이드도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취하는 술을 이 괴물은 무슨 음료수 마시듯 아무렇지도 않게 벌컥벌컥 마셔대는 것이다. 


 시선을 느낀 메이플라워가 눈동자만 옆으로 돌리자 기겁을 한 바이오로이드들이 몸을 움츠렸다. 아주 잠깐 곁눈질로 바이오로이드들을 쳐다본 메이플라워가 다시 컵으로 시선을 돌리자 안도의 한숨 소리 같은 것이 귓가에 들려왔다. 


 그녀가 치료해준 바이오로이드들은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녀와 대면하는 것을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단순히 그녀의 이질적이다 못해 해괴망측하기까지 한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쉽게 이해가 가서 씁쓸하다 못해, 누구 하나를 붙잡고 성대하게 토하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불쾌한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메이플라워가 단숨에 술을 들이키자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무시했다. 


 바닥을 드러낸 컵을 바위를 깎아만든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메이플라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술을 마셨으니 아직 상태가 좋지 않은 바이오로이드들을 치료하는 것은 잠깐 휴식을 취한 다음에 할 생각이었다.


  자기 침실로 돌아가는 메이플라워의 뒷모습을 보던 바이오로이드들이 그녀의 등에 걸린 기괴한 칼들에 달려있는 눈이 자신들을 쳐다보자 다시 한 번 움찔거렸다.

  



미미크리 소울엣지 아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