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것은 갑자기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격 모듈도, 음성 모듈도. 그 어떤 모듈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빈자리에 들어가 언제든지 대체 되기 위해 사람의 모습만을 갖추고 있던 그것은 갑자기 살아 움직여 내게 찾아왔고, 자아를 가지기 시작한 그것은 글자를 이용해 나와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그것을 흥미롭게 느낌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나는, 닥터와의 연락 끝에 그것을 하루종일 관찰해보기로 했었다.


첫 번째로 이뤄졌던 실험은 코어 링크.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다를바 없이 코어 링크 자체는 정상적으로 끝마쳤지만, 능력 향상 혹은 의식의 동기화 등이 이뤄지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달리 그것은 어떠한 능력의 향상도 이뤄지지 않았고, 새로이 자신과 동기화 되는 인격도 없었는지 그저 느낌이 이상하다는 텍스트만을 띄울 뿐이였다.


두 번째로 이뤄진 것은 나의 일지를 포함한 여러 선물들을 제공하는 것. 나의 일지를 제공 받은 그것은 이 선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의아해하면서도 일지를 전부 읽어보았고, 연이어 나는 케이크나 꽃다발 등의 여러 선물을 바쳐보았다. 감정 모듈도 없고, 그렇기에 호감도가 오르는 듯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감정 모듈이 없을터임에도 그것은 묘하게 기뻐보였다. 눈은 고글로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입가에는 분명 다른 바이오로이드들 못지 않은 천진난만한 미소가 띄어져있었다.


이 후에도 시답잖은 농담이나 내가 오늘 겪은 사소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털어놓으며 그것의 반응을 관찰해보았다. 최소한의 자아만을 갖췄을 뿐,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었는지 웃지도 울지도 화내지도 않는 미묘한 반응만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텍스트의 내용은 점차 어딘가 인간적인 모습을 찾아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그 날 관찰한 여러 반응들을 닥터에게 보내고 내일은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며 잠에 들었다가 깨어났을 땐, 그 자리에 있었던 그것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닥터에게 연락을 해본 결과, 어디선가 발견 된 그것은 이전처럼 자아를 잃어버린 더미로 돌아갔다고 한다. 갑자기 냅다 자아를 가지게 된 이유도, 그렇게 형성 된 자아가 하루 만에 갑자기 사라진 이유도 알 수 없지만 좋은 경험을 한 것 같다나. 언젠가 쓸 곳이 있어보여 관찰한 데이터 들을 굳이 폐기하진 않았고, 다시 더미로 돌아간 그것도 언젠가 똑같은 반응이 일어날거라 예상해 자체적으로 수거해가고 싶었지만 다시 돌아와보니 이상하게도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딱히 미련은 없으면서도 어딘가 아쉬움이 느껴지던 찰나, 오늘 새로이 오르카호에 합류한 브라우니를 만났다. 그런데 이 브라우니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내가 그것에게 바친 선물들과 시시콜콜 건넸던 농담과 잡다한 이야기들을 모두 기억하는 듯한 언행을 보였고,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건넸을 때 그저 평범한 브라우니일 뿐이라고 대답하면서도 어딘가 아련해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기도 했다.


과연 그 브라우니는 무엇이였을까? 내가 어제동안 모든 관심을 쏟아부었던 그것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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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a.live/b/lastorigin/36902015

- 5시까지 퍼자다가 갑자기 연장점검한다길래 그냥 이거 보고 간단히 써봤음


* 2부는 제대로 점검 끝내더니만 왜 갑자기 7시 점검이래 ㅅ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