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어머니 할 말이 있다."




"할 말이라니 무엇인가?"


철충과의 전쟁이 끝나고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바이오로이드 대부분이 사령관의 아이를 가졌고, AL 레이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레이스가 사령관의 아이를 낳은 시기는 바이오로이드들 중 빠른 편이라, 그녀의 아들은 약관이 되어 소년 티를 벗어가고 있었다. 


어머니인 레이스를 닮은 금안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무엇이냐고 물은 후 꽤 오래 이어지는 침묵에, 모자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다."


결단이 빨랐던 쪽은 어머니인 레이스가 아닌 그녀의 아들이었다. 그 말을 들은 레이스는 평소처럼 무심한 듯 평온해 보였지만,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이라니. 벌써 자신의 아들이 사랑을 시작할 나이가 되었다는 말인가? 어떤 여인이길래 어머니인 자신에게까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 여인은 어떻게 생겼을까? 바이오로이드일까? 아니면 그의 누이일까. 후자라면 심각한 문제 아닌가?


레이스의 넓직하고 풍만한 가슴 속 심장이 두근, 두근 하고 뛰고 있었다. 생각은 머리가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가슴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이럴 때 선배가 있었다면......'


레이스는 잠시나마 그리 생각하다가 금방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자신을 버린 존재였다. 선배, 아니 AL 팬텀에 대해 생각해 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그녀는 문 앞에 있다.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라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부끄러움이 많아?'



"그녀를 집 안에 들여도 괜찮겠는가?"



"괜찮다.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어머니께서 그렇다고 한다."


레이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기 시작하자,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이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



"선배.....?"


*

 시간을 과거로 돌려 보자. 처음 제조되었을 때부터 전쟁이 끝날 때 까지, 팬텀과 레이스는 함께 시간을 보내왔다. 그동안 둘은 많은 추억을 만들어 왔다. 그와 함께 우정도 둘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왔다.


그리고 종전 선언 전날, 팬텀과 레이스는 약속을 했다. 전쟁이 끝나도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사령관의 아이를 낳아 기르자고. 



'내가 어머니가 된다니. 상상만으로도 긴장된다.'



'아니다! 선배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옆에 있을 테니 잘 해나갈 수 있다.'



'말뿐이라도 고맙다, 후배.'


그렇게 앞으로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건만. 다음 날 레이스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팬텀은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져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후배.]


쪽지에 적힌 단 한 문장의 전언. 그 한 마디는 레이스의 마음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 



"선배 선배 어째서......"


그때 레이스가 느꼈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당황? 두려움? 아니면 배신감? 전부 아니었다. 


그동안 상상해 왔던 미래를 전부 빼앗긴, 허탈감이었다.


하지만 그 허탈감이 레이스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사령관이 있었고, 둠 브링어의 동료들도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안에 깃든, 아이가 있었다. 


그들에게 힘을 얻은 레이스는 절망하는 대신 팬텀을 기다리기로 했다. 재건되는 도시로 이주하지 않고, 관리인을 자처해 오르카 호에 남았다. 



'선배에게는 돌아올 곳이 있다. 그 곳에 내가 있어야 한다.'


레이스는 거의 텅 비다시피한 오르카 호에서 아이를 키우며 팬텀을 기다렸다. 허나 아들이 처음으로 뒤집기를 성공한 날에도, 걷기 시작한 날에도, 유치원이며 학교에 갈 때도 팬텀은 오지 않았다.


결국 오르카 호에서 나와 아무리 수소문해도 팬텀의 소식이 레이스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팬텀은 뛰어난 암살자였다. 그녀가 작정하고 숨으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것은 분명했다.


허탈감으로 인해 텅 비워졌던 마음은, 실망과 분노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



"선배라니 무슨 의미인가, 어머니?"



"아들 아들, 부탁이 있다."



"부탁?"



"잠시 자리를 피해 주지 않겠는가. 그녀와 할 이야기가 있다."


도대체 팬텀과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곧게 그녀를 향하고 있는 어머니의 눈빛을 본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것은 안다, 후배."



"후배라고 부르지 마라. 선배, 아니 당신은 나를 그렇게 부를 자격이 없다."



"미안하다, AL 레이스."



"AL 팬텀, 왜 나를 버리고 떠났는가? 그리고 하필이면 왜 내 아들인가?"



"......"



"대답하기 싫으면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내 아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답하겠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


 


"내가 멸망 전 개체라는 것은 알 것이다."



"......"



"멸망 전부터 나는 암살자로서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목표를 죽였다. 그리고 그 후로는 살아남기 위해 철충들을 죽여왔고, 오르카 호에 온 후로부터는 인류재건을 위해 싸워왔다.


그동안 나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 본적이 없었다. 너무나도 이기적인 소리지만, 나는 그때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내가 원하는 것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내 아들이었나? 나는 인정할 수 없다. 나와 사령관, 그리고 다른 자매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것인가?"



"면목이 없다...... 하지만 나는 레이스, 너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게 무엇인가."



"그의 아이를 가졌다."


 


"아이?"



"나는 그동안 내가 팽개치고 온 모든 것들에게서 도망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을 계기로 책임을 질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나."



"......"


레이스의 주먹이 떨렸다. 그녀의 선택은 무엇일까. 팬텀의 아이를 통해, 둘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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