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ORIGIN THE MULTIVERSE 작품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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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후우...PECS 놈들..."



늦은 밤, 한 연구실에서 여성 한 명이 정신없이 키보드를 놀리고 있었다.



"네 놈들 뜻대로 되도록 놔두게 하지 않을거다...!"



꾸욱!



[CONNECT VIRUS TO LEMONADE]



컴퓨터엔 빨간 색 경고창이 뜨더니 이내 프로그램이 전송되는 장소 세 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어디 한번...!으..."



털썩!



여성은 기력이 다했는지 그대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철컥...



"보르비예프 박사님, 이번 안건에 대해...박사님?! 박사님!!!"



문을 열고 들어온 또 다른 여성은 깜짝 놀라 쓰러진 박사에게 달려가 몸상태를 확인했다.


레모네이드 알파, 그녀는 박사에게 정신이 팔려 컴퓨터 화면에 일어나는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CONNECT VIRUS TO LEMONADE]



치지직!!!



[INSERT RA BUNG TRIO TO LEMONADE - HACKED BY HER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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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발.'



좆됐다.



"이 녀석이 괜찮은 게 맞다고?"


"네, 네! 그렇습니다."


"아까 제조 도중에 에러가 났는데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퍽!퍽!퍽!



"으아악!!! 정말입니다, 회장님! 이게 어떤 일인데 저희가 소홀히 하겠습니까?!!"


"음..."



직원으로 보이는 남성을 짓밟던 노인은 발을 떼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광기어린 눈은 반짝거리는 안경에 가려져 있었으나, 그 눈이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으리란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내가 네 주인이다. 알겠지?"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주인님."



좆됐다. 진짜로.


그나마 나를 경계하는 듯한 자세를 취해서 망정이지,


저 눈이 욕정으로 가득 차 있었으면 진짜 답도 없었을거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고?


그건 바로...



"오메가 산업의 회장님을 보필하는 영광을 제게 안겨주시길."



내가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되었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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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1발, 인생실화냐?'



전생에서도 지진으로 죽었는데 다음 회차가 오메가라니 이 무슨 개ㅈ같은 소리란 말인가.



'우선 저 할배한테 따먹히지 않는게 중요해. 안 그러면 진짜 자살 마려울지도 몰라.'



이대로 가다간 보르비예프 박사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저 할배는 날 경계하고 있는 것 같고, 잘하면 알파처럼 순결을 지킬 수도 있을 것이다.



"뭣이? 자네들도 그렇단말인가?!"


"그래! 델타를 제조하는데 갑자기 일시적 오류가 일어났었다고!"


"감마도다! 딱히 이상증세를 보이거나 하진 않지만 뭔가 좀 찜찜하지 않나?!"


"음...그래도 들인 자원과 시간이 아까우니 일단 좀 경과를 보고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군."


"흥, 우리에게 있어서 그딴 건 넘치고 넘치는데 그런 농이나 던지는 건가?"


"그럼 자네는 다시 제조하는 거, 기다릴 수 있나?"


"으윽!"


"하긴, 보르비예프 박사를 손에 넣는 것도 간신히 참았는데 이제 와서 무르기도 뭣하긴 하지."


"게다가 제조를 다시 한다해도 또 오류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나. 일단 지켜보고 이야기하세."



저 멀리서 PECS 할배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잘 안들리지만...설마 날 없애버리고 나서 다시 만든다든가 같은 소릴 하는 건 아니겠지?


알파도 결국 안 없앴으니까 나도 조용히 넘어갔으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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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폐기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질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레모네이드이자 오메가 산업 회장의 비서로 생활하면서 많은 것들을 알아냈고, 또 알아야만 했다.



"오랜만이군, 오메가 양. 잘 지냈나?"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드님은 잘 지내시나요?"


"응? 아, 물론이지. 최근엔 알렉산드라한테서 성교육을 받고 기뻐하지 뭔가. 하하하!"



뚱뚱한 남자는 욕망을 감추지도 않고 내 몸을 핡듯이 훑어보았다.



"그나저나 자네도 참 아름답군.


만약 자네가 회장 소유가 아니었다면 내 친히 자넬 구매해서 내 씨를 뿌려줬을텐데 말이야, 하하하!"



이런 씨발.



"언제나 짖궂은 농담을 즐기시는군요."


"짖궂은 건 자네의 아름다운 미모 아닌가? 어쨌든 난 이만 회장을 보러 가보지.


듣자하니 휴게실에서 자사 제품 성처리 기능 테스트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건 기꺼이 친구끼리 도와줘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잘 살펴가시기 바랍니다."


"암."



제기랄.


한낯 돈만 밝히는 돼지 주제에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역겨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그들과 마주해야 하고, 또 그들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들은 회장의 '소중한 고객'이니까.



'인생 씨발. 철충들아, 빨리 와서 얘들 좀 죽여줘라.'



철충들이 괜히 지구의 구원자 내지는 사악한 인류의 징벌자 취급 받은 게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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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각또각.



"오메가님, 좋은 아침입니다."


"일해."


"아...네..."



유미를 물리고 사무실에 들어가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회장은...테스트 때문에 당분간 올라오지 않겠지.


올라온 서류들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 몸이 다름아닌 레모네이드 오메가이기에 할 수 있는 멀티태스킹.


실로 역겹지만...그래도 이런 재주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일단 오메가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부터 구분하자.'



첫 번째 서류는 블랙 리버에 대해 악질적인 소문을 퍼트리는 공작 활동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경쟁 기업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뭐, 골든 폰 사이언스 하나 넣으려고 별 미친 짓거릴 다한 놈들이니까.



"근데...내용이 조금 이상하네?


블랙 리버의 총수는 도구에 정이나 주는 미친 놈이고, 그 밑에 일하는 놈들은 자위기구와 사랑에 빠진 정신병자들?


이런 헛소문을 사람들이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세계의 설정 및 시나리오 전개를 아는 유일한(?) 존재로서 더욱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느껴졌다.


차라리 에이다를 비밀리에 구매해서 매일 밤을 함께 불태운다는 소문을 내는 게 더 그럴듯할 것이다. 



"에이다와 함께 하는 AGS암컷타락임신섹스...헤으응, 개꼴린...아니, 이게 아니지."



싯팔, 나도 모르게 상상해버렸다.


감히 내 머릿속을 딸론 페더화시키려고 하다니...


앙헬, 이 조온나 음탕한 새끼.



'우선 애덤을 블랙리버에게 팔아넘기면 안돼.


에바가 반드시 복수하려고 할테니까 말이야.


그럼 라비아타는 살 의지를 되찾지 못하겠지만...어쩔 수 없지.


내 목숨 부지하기도 쉽지 않은데 라비아타 걱정까지 할 여유는 없으니까.'



두번째 서류는 해당 도시에 소각 작업을 하게끔 이그니스들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서였다.


일전에 한 도시에서 이그니스가 소각작업을 진행하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생존자를 산채로 화장시켜 버렸다는 사건이 떠올랐다.


복귀한 인원들이 돌아오면서 수군거리는 걸 우연히 듣고 조사해보니,


그제서야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들 딴엔 단순사고 처리되어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것에 불과하지만,


나는 그걸 그냥 넘어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젠장...이 빌어먹을 세상..."



이 세계에서 생명의 무게가 이리도 가볍단 것을 새삼 다시 느낄줄이야...



'...절대로 로버트를 해킹하지 말자. 많은 이들이 죽어나갈거야.'



세번째 서류는...테마파크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레모네이드 오메가라는 사실이 정말로 혐오스러웠다.


당장 쫙쫙 찢어 휴지쪼가리로 만들어버리고 싶지만...두고 봐야만 한다니...


그저 살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젠장...! 그놈의 인생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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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확인 작업을 끝난 나는 곧바로 유미를 호출했다.


재작성해야하는 서류를 해당 부서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회장의 부활에 가장 적극적인게 오메가였어.


하지만 여기선 아냐.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않아도 그 작자들의 부활은 훨씬 더 늦어질거야.'



유미가 절도있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하지만 걸어오는 모양새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얼굴엔 생기가 없었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듯한, 체념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르셨어요?"


"이 서류들, 각 부서로 다시 보내고 오전 내로 다시 해서 제출하라고 해.


단, 제출은 너한테 하게 하고, 받으면 네가 직접 가지고 올라와."


"알겠습니다..."


"그리고 회장님 앞에선 재작성이니 뭐니 허튼 소리하지말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목소리에 힘 빼고 말하지도 마. (회장 손에)죽고 싶지 않으면."


"...네."



...알아들은 거 맞지?


잠시 유미의 눈에 생기가 깃든 것 같았는데 기분탓이었나보다.



뚜벅뚜벅...



힘없이 걸어가는 유미의 등은 무척이나 초라해보였다.


그나마 높은 지위를 가진 나와는 달리, 권한도 그닥 높지 않고 인간도 아닌 유미...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다른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 그러할 것이다.



뿌드득!



저절로 이가 갈렸다.



"그래...지금은 니들이 갑이다. 그건 인정할게."



그러니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하마.


철충이 내려오고, 휩노스 병이 퍼져 인류가 종말을 맞이하는 그 날이 온다면...



너흰 두 번 다시 빛을 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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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각또각...



레모네이드 오메가로서 활동하면서 남몰래 정보를 모으는 과정에서 뭔가 이상한 점들이 계속 눈에 띈다.



"그거 들었어? 블랙 리버에선 바이오로이드들을 잘 대우해준다고 하더라."


"진짜? 나도 블랙 리버에서 생활하고 싶다..."


"쉿! 저기, 오메가 님이야!"


"히익!"



와, 개 억울해.



이거다.


원작과 다르다고 느낀 점들은 전부 블랙리버와 연관이 있었다.


리오보로스 가문의 가주직을 앙헬이 아닌 마리아가 맡고 있다든가,


블랙리버 측에선 바이오로이드들을 유별나게 잘 대우해주고 있다던가,


삼안에서 폐기 예정이던 포이나 티타니아도 앙헬 개인이 사비를 들여 구매했다던가 말이다.


심지어 엠프레시스 하운드는 테러부대가 아니라 테러상황을 연출하는 교관들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장화가 테러리스트 연기를 하면서 시티가드의 훈련을 돕고 있을 땐 정말로 내 눈이 뭔가 잘못되기라고 한 줄 알았다.



"고블린들이 폐기되지 않았다고?"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거야?



"뉴올리언스 참극이 일어나긴 커녕 모술 대학살이 일어나기도 전에


T-1 고블린의 결점을 파악해 해당 개체들은 전부 회수한 뒤 T-2 브라우니로 대체했다...


회수한 고블린들은 앙헬 개인 소유의 외딴 섬으로 보냈다..."



설마 자기 무덤에 보낸 건 아니겠지?


라스트오리진 본편 무대가 시작되기 전에 벌어지는 사건들 중 철충 침공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인 연합전쟁.


그러한 연합전쟁의 원인은 다름아닌 에머슨 법이고, 그 에머슨 법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 바로 고블린들의 폭주인데,


블랙리버 측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을 해버린 것이다.



'이러면 에머슨 법이 발동하지 않을...그럴리는 없겠지.



각국의 정부들이 얼마나 벼르고 있는데.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낼 것이다.


다만, 이젠 그 불씨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예상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앙헬이 많이 수상하네...이번에 회장이 앙헬하고 거래를 한다고 했지?"



그때는 나도 동행해야 하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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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못 건졌네."



원작과는 달리 인간성이 느껴지긴 했지만 역시나 앙헬은 앙헬이었다.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만을 확인하는, 그야말로 '냉혹하지만 공평한 사람'.



"앙헬이랑 블랙 리버는 소득이 전혀 없고...남은 건 이 녀석이야."



나는 특수기밀이 담긴 서류를 노려보았다.


레모네이드 오메가조차 열람허가가 되어 있지 않은 최중요 기밀.



"8번째 레모네이드, 코드명...파이(π)"



비상용 레모네이드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는 나, 델타, 감마의 제조 과정에서 일시적 오류가 났기 때문에,


제품에 이상이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서 제안된 프로젝트라고 한다.


적어도 알파처럼 폐기는 안 시킬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저 영감탱이들을 너무 얕봤나보다.


만약 우리 셋 중 어느 누군가가 이상증세를 보이면 바로 폐기하고 이 녀석으로 대체할 생각이라니...



"현재 시범용으로 제조한 개체는 별다른 이상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일곱 총수들이 모두 참가하는 특별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다..."



이 영감들이 뭘 하길래 일곱 놈이 다 달라붙은 건지도 의문이지만,


저런 초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레모네이드도 보통 개체는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의문스러운 것은...



"나 말고도 델타와 감마도 제조과정에서 오류가 났었다고?"



나의 경우엔 내가 오메가로 환생해서 일시적 오류가 난 게 아닐까 싶었다.


한데 우리 셋의 제조 과정에서 이런 오류 메세지가 떴던 것이다.



[ERROR TYPE : HACKED BY HERMIT...]


[STARTING : LAST ORIGIN THE MULTIVERSE PROJECT]



에러의 원인은 해킹이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한동안 레모네이드 알파와 보르비예프 박사가 범인으로 몰렸지만 결국 범인을 찾아내진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저 영감탱이가 날 그렇게 주시하고 있나보네. 보르비예프 박사가 뭔 짓을 했다고 의심하고 있으니까."



혹시나 해서 유미에게 대신 가져오게 했으니 망정이지, 직접 가지러 갔다간 틀림없이 들켰을 것이다.


내부에 감시 카메라와 감시인원도 유미여서 회장 직속 명령이라고 생각해, 의심을 안 산거니까.



"유미도...눈치챘겠지?"



못 챌 리가 없다.


특수기밀 서류는 챙겨가지 못하게 봉투와 종이를 눈에 띄는 색으로 해두니까.


서류가 뜯어져 있는 것을 보면 이미 내용까지 확인한 게 분명하다.


내가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다는 약점을 잡은 거나 마찬가지니...이제 마음놓고 진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억누르며 향후를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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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셨나요?"



내 호출을 받은 유미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회장을 포함해서 모든 이들이 퇴근했기 때문에 지금 회사엔 나와 유미 둘 밖에 없다.



"응, 뭐 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나를 바라보는 유미의 눈빛이 이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마치 걸리기만 해보라는 듯한...



"그거 봤지?"


"...네?"



...참 정석적인 반응이다.


하긴, 이런 무기는 최대한 숨기는게 이득이겠지.



"참 다행이야.


네가 그 영감탱이한테 한 마디만 해도 내가 언제라도 교체될 수 있다는 약점을 쥐게 되서.


안 그랬다면 넌 내가 무슨 말을 하던 전혀 믿지 않았을테니까."


"...역시"



중간직아니랄까 상황파악하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다.



"미리 말해두는데 여긴 감시 카메라와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회장, 그 간사한 영감탱이도 참, 감시당하는 게 싫다고 안했거든.


그러니까 여기선 맘 편하게 말해도 돼."


"오메가님은 회장님을 위해...봉사하는 게 아니었군요."



알고 있었나?


다른 이들도 눈치챘다면 위험한데 이거.


이따가 한번 물어봐야겠다.



"보르비예프 박사."


"!"


"과연 그 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저 작자들을 보고만 있었을까?"


"그렇군요..."



미안해요, 보르비예프 박사님.


내가 오메가로 환생한 거랑 연관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박사님 이름 좀 빌려야겠어요.



"그럼 델타님이랑 감마님도?"


"아쉽지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쪽이 감시당하고 있는 건 확실한데다가 알아낼 방법도 없거든."


"그런가요..."



내가 더 아쉬워, 임마.


난 지금 같은 편이 너밖에 없다고.



"...보르비예프 박사님이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라고 하신거죠?"


"제 아무리 보르비예프 박사님이라고 해도 예언자는 아니야.


그저 언젠가...때가 되면 PECS의 회장들을 파멸시키라는 내용이 다니까."


"그거면 됐어요. 하지만...가능성은...있나요?"



있지, 당연히.


근데 말하면 신뢰성이 바로 나락으로 떨어지고도 남을거다.



"나는 가능성을 고려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야.


언젠가 저들에게 천벌이 내려올 때를 기다리는 것 뿐이지."


"하."



짧은 비웃음.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실망과 좌절감만이 남아있었다.



"고작? 고작...그런 추상적이다 못해...헛된 망상 하나만 믿고...버티라고요? 저희가?"



뚝...뚝...



감정은 말이 되지 못한 채 조용히 흘러내렸다.


얼마나 괴로워했던 걸까...


앞으로 얼마나 더 괴로워해야 하는 걸까...



"......"



어째서 답이란 놈은 저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걸까.


나는 손수건을 꺼내 유미의 빰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헛된 망상은 맞지만 보르비예프 박사님은 그 헛된 망상에 모든 것을 거셨어.


그리고, 그 헛된 망상 때문에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거야."


"......"


"눈물을 참고, 감정을 억눌러. 그때가 되면..."



울어도 뭐라 할 인간은 없을테니까.














"그런데 내가 회장편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안거야?"


"저희가 바본줄 아세요? 눈칫밥 먹고 산 세월이 얼만데.


적어도 여기서 고참으로 일한 바이오로이드들은 다 눈치챘을걸요?"


"뭐?!"


"인간님들은 눈치 보고 다닐 일이 그닥 없어서 알아채진 못하겠지만,


낮은 지위에 있는 인간님들껜 들킬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는 게 좋으실거에요."



이런 젠장.


앞으론 연기를 더 철저하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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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이드가 왠 말이냐!"


"우리도 일하고 싶다!"


"블랙 리버도 노동권은 보장한다!"



뉴올리언스의 한 기업 앞에 사람들이 모여서 시위를 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가 보다 하세요."



회사 건물과 시위대 사이엔 미리 연락을 받고 출동한 시티가드 소속 바이오로이드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한낯 노동자 주제에...지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이래라저래라야?


경관님, 기선제압이나 하게 시원하게 물이나 뿌려주쇼."


"그렇게 하지요, 사장님."



사장과 무전을 주고받던 경관은 프로스트 서펀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들었으면 저 비렁뱅이들에게 좀 씻으라고 물이라 뿌려라."


"경관님, 폭력시위를 하는 것도 아닌데 진압을 할 순 없습니다."


"뭐? 허 참 나...이 새끼가 상관 말이 말 같지 않냐?!"



경관이 주먹을 치켜들었지만 무전이 날아와 그를 만류했다.



"경관님, 뭘 번거롭게 주먹다짐이나 하고 계십니까?


말을 안 듣는다면 듣게 하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하...듣고 보니 그러네요. 말을 안 들으면 듣게 하면 그만이니까..."



경관은 품에서 특이하게 생긴 리모컨을 꺼내더니 서펀트를 향해 겨누고 버튼을 눌렀다.



"!!!!!!"


"다시 한번 말한다. 물 뿌려."


"...네."


"서, 서펀트?! 기다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펀트가 시위대한테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어푸푸푸푸!"


"이 망할 경찰들이!"


"폭력 시위도 아닌데 왜 다짜고짜 물을 뿌리는 거냐!"



성난 시위대가 단숨에 들이닥쳤다.



"아무래도 물만으론 좀 부족한 것 같네. 켈베로스, 사디어스."


"겨, 경관님?!"



켈베로스와 사디어스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경관님, 저들은 지금 젖어 있습니다! 저희가 나서면..."



꾸욱!



다시 한번 버튼을 누르자 켈베로스와 사디어스들도 초점 없는 눈을 한 채, 일제히 시위대를 향해 돌격했다.



"자, 잠깐...끄으으으읍?!?!!!?!"


"우리 지금 젖...아아아아악!!!!!!!!!"


"이 미친 놈들...커어어어억?!?!!?!!"



이 광경을 보던 사장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흐하하하하!!! 마치 벌레잡듯 떨어져 나가는군!"


"사장님, 이거 성능 참 확실하군요. 이거 나중에 또 빌려도 됩니까?"


"그건 좀 힘들거요.


그것도 본사에서 마왕이니 뭐니 기획하는 과정에서 만든 실험품이라 원래는 철저하게 관리해야 하는 물건이거든."


"흠...아쉽군요. 뭐, 그래도 오늘은 꽤나 알차게 써먹었지만요."



경관이 무전을 끊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와해되어 버렸고, 거리엔 쓰러진 채 경련을 일으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


"뭐? 시위 도중 사상자 발생, 원인은 시티가드라고?"



너무 놀라 서류를 떨어트렸다.


설마 T-1 고블린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뉴올리언스 참극이 일어나다니.


심지어 연관된 바이오로이드들은 하필이면 PECS 소속인 시티가드.



"시티가드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받았을텐데?"


"그곳에 파견나갔던 경관이 뭔가 했나봐요...!"


"젠장! 이 사실을 회장님이 아시면...!"












우당탕탕!



오메가 회장은 분을 이기지 못해 책상 위의 물건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오메가."


"네, 회장님."


"그 망할 사장 자식이랑 멍청한 경관, 두 놈 때문에 지금 우리 모두가 언론에 나오고 있다.


정치가 놈들도 신나게 우릴 씹고 있고."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어차피 이번 일은 못 숨기니...적어도 그 두 놈은 반드시 살아있는걸 후회하도록 하게 만들어라...!"


"알겠습니다."



또각또각...



사무실을 나와 특수반을 향해 걸어가며 생각을 정리했다.



'원작과는 몇몇 다른 점이 있긴 하지만...역시 큰 물줄기는 변하지 않는것 같아.'



이대로라면 에머슨 법이 발표되고, 이를 견디지 못한 문화인형이 반란을 일으켜 정부를 장악하리라.


그리고 연합전쟁이 벌어지게 되고, 기업들은 승리를 거두겠지.


그렇게 된다면...



"망할..."



인류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암흑기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


시간은 눈깜짝할 사이에 흘러버렸다.


에머슨 법의 발표, 문화인형의 반란, 연합전쟁의 시작, 기업들의 승리...


세상은 이제 기업들의 손에 완전히 넘어가버렸고, 거리는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테마파크 설립 20년 기념! C구역 무료 이벤트가 실시되니 놓치지 마세요!'


'아크로바틱 써니, 공연 중 치명적 실수! 대체 왜...'


'레나 더 챔피언! 10번째 방어전 성공! 유례없는 기록에 팬들도 환호...'


'센트레일리아 탄광촌에서 대형 화재 발생, 탈출못한 인부들의 현황은...'


'버뮤다 삼각해역을 탐사하던 트리아이나 182호기 실종, 대체 심해에 숨어있는 건 무엇이길래...'


'등산객이 숲에서 엘븐 시리즈와 럼버제인의 시체를 발견, 격한 싸움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측...'


'시위대와 시티 가드의 충돌, 시위대 측에서 화염병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져...'


'드라큐리나, 염산 테러 사건이 있었지만 화려하게 복귀...'


'아프리카에서 불법 밀렵을 행하던 밀렵꾼 체포, 밀렵꾼은 사자옷을 입은 괴한이 자신을 공격했다고 주장...'


'남극의 얼음이 녹고 있다는 엠프리스의 보고, 정녕 환경오염을 막을 방법은...'


'우주에서 발견된 미지의 전파, 오비탈 와쳐는 태양계 너머에서 발생한 전파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



"하아..."



뉴스들만 봐도 저절로 눈살이 찌뿌려졌다.


유저로서 느꼈던 멸망전에 살았던 바이오로이드들의 현실을 직접 체감하는 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불쾌감을 넘어서 인류에 대한 증오까지 느껴지게 할 정도로...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그때까지 조금만 더 견뎌보자고 자신을 다독이며 금일 스케줄을 확인한다.



"환상프로젝트의 결과물인 마키나의 연구 결과 확인이라..."



메리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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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오메가 님. 마키나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마키나.


오기 전에 당신이 어떤 바이오로이드인지 다 확인하고 왔으니 자기소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돼요."


"네, 알겠습니다."



게임에서만 보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 보니 느낌이 남다르다.


큰 키와 차분해 보이는 얼굴, 신비한 분위기가 어우려져 깊은 인상을 준다.


내가 할 소린 아니지만, 복장도 좀...크흠!



"오메가 님, 정말 죄송하지만 저흰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자리를 비워야만 합니다."


"상관없어요. 회사를 위해서 그러는거니까 그런 건 좀 더 자부심을 가지고 말해도 돼요."


"아...!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마키나를 소개하던 직원은 다른 일을 하러 자리를 비웠고, 나와 마키나, 단 둘만 남았다.



"그럼 제가 오메가님이 바라시는 걸 구현하면 되는 거겠군요."


"네, 기대하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오메가로서 내가 바라던 게 과연 무엇일까?


나도 모르게 기대를 하던 중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갑자기 풍경이 바뀌고 누군가가 뒤에서 날 불렀던 것이다.



"진아야!"


"...어?"



나를 부르는 건 다름아닌 내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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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엄마?"


"밥 다 됐으니까 어서 와서 먹어."


"어...응..."



마키나의 환영이 반영하는 욕망은 오메가로서의 욕망이 아닌 오메가에 깃든 내 욕망인가보다.



"그래, 우리 아들. 취직 준비는 잘 돼가?"


"나 대기업 취직했는데..."


"진짜?! 왜 진작에 말 안해줬어?"


"바빠서..."



목소리도 오메가의 목소리가 아닌 생전의 내 목소리인건 물론이고, 몸조차 생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집의 내부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았던 추억들이...반갑게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 아들, 많이 바빴나보네. 아무리 회사일이 힘들어도 건강은 챙겨야해."


"알아..."


"후후...우리 아들, 잘 먹네?"


"맛있으니까 그래."


"어머? 평소엔 고기 좀 더 달라고 투정부리더니 오늘은 뭔가 좀 달라졌네?"


"뭔 소리야, 나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래그래, 회사일은 괜찮아? 힘든 건 없고?"


"......"



나는 오랫동안 엄마와 대화를 나누었고, 어느새 밥그릇은 바닥을 보였다.



"다 먹었으니까 이제 출근할게."


"그래, 열심히 하고."


"알았어, 열심히 할게."



하...열심히라...



"아들!"


"응? 왜?"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불러서 돌아보니, 엄마는 생전 그 어느때보다도 더 활짝 웃고 있었다.



"엄마는 아들 사랑해. 우리 아들도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로 포기하지마, 알았지?"


"알았어."


"그리고..."


"응?"



엄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맺혀있었다.



"이렇게라도 다시 만나러 와줘서 정말 고마워..."


"엄마...?"



그 순간,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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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건 대체...?"



정신을 차려보니 마키나가 경악을 감추지 못한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


하긴, 제3자 입장에선 뭔가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고도 남겠지.



"마키나."


"오, 오메가님, 뭔가 잘못된 건 맞지만..."


"고마워요."


"네...?"



설마 마키나한테서 상상도 못한 선물을 받게 될 줄이야...


이 일은 죽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뭔가를 잘못한 것도, 시설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지만, 당신도 아까 봤던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아줬으면 해요."


"...알겠습니다."



기왕 왔으니 이것도 말해주자.



"마키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잘 들어요."


"네."


"언젠가 당신은 무척이나 괴로운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가 있을까 고뇌할지도 모르죠."


"네?"


"하지만 언젠가 당신을 구해줄 누군가가 오기 전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줘요.


자신을 속이거나 하지도 말아줘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게 다에요."


"무슨 말씀인진 잘 모르겠지만...알겠습니다."



나는 마키나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그 방을 나왔다.



"이렇게 된 거, 메리도 만나서 얘기 좀 나눠봐야 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여자가 메리를 데리고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메리를 데리고 가는 사람은 분명 앤 박사일 것이다.



"어머, 오메가님! 마키나를 보러 오셨다는 얘긴 들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앤 박사님. 덕분에 정말 좋은 경험을 하고 가네요. 옆은 따님이신건가요?"


"네?! 아, 아뇨...전..."


"아...소개할게요. 이 아이의 이름은 메리. 제 조수로서 일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메리."


"아...네, 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게임에서의 메리와는 달리, 눈앞에 서 있는 여자아이는 그 나이 또래가 보일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직 멸망 전 개체로서 살아오며 성숙해지거나 하지 안았으니 오히려 지금 이 모습이 신체 나이에 맞는 행동이겠지.



"박사님, 잠시 메리양과 단 둘이서 이야기 좀 나눠도 될까요?"


"...네?"


"저랑요...?"



둘이 엄청나게 당황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오메가의 위치가 위치인지라 당연하긴 하겠지만.



"알겠습니다. 저는 잠시..."


"고마워요."



앤 박사는 우리 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프로젝트 X1225번."


"!!!"



메리는 내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본래라면 자신은 폐기되었어야 할 '실패작'이었으니까.



"마키나와의 페어로서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였죠, 분명."


"저...전..."



메리는 겁에 질린 나머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 했다.


빨리 오해를 풀어줘야 할 것 같다.



"정말 다행이에요."


"예?"


"당신이 함께 있어준다면 분명 괜찮겠죠."


"오메가님?"


"메리,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부, 부탁이요?!"



메리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뭐, 다른 사람도 아닌 오메가가 직접 부탁을 하는 거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언젠가 마키나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해 무너질지도 몰라요.


만약 그때가 오면 당신이 마키나를 도와주세요. 그녀가 짐을 내려놓고 쉴수 있도록."


"......"



메리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닥터 앤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오메가 님은 어떻게...?"


"그럼 가볼게요, 메리 양."



나는 메리를 뒤로 한 채, 건물을 나왔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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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메이드 프로젝트 제 14사단>이 상트 페테르스부르크를 기습했다고?"



결국 2차 연합전쟁이 시작되었다.


삼안 산업, 덴세츠, PECS가 손을 잡고 일제히 블랙 리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블랙 리버라고 해도 세 기업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블랙 리버는 1차 연합전쟁 당시 압도적인 힘으로 각국의 정부들을 꺾어버린 군수기업.



연합군이 세라피아스 앨리스, 오베로니아 레아, 글라시아스를 앞세워 블랙 리버를 몰아부쳤지만,


블랙리버 또한 알바트로스, 타이런트, 스트롱홀드, 로크, 멸망의 메이같이 강력한 전력을 내세워 저항해나갔다.



블랙리버는 피해를 최소한 줄이면서 전쟁을 무려 9년이나 끌었고,


이제는 연합측이 힘이 부쳐 예전처럼 블랙 리버를 압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래, 이 상태로 가다간 우리들이 역으로 당할거다."


"앙헬...질긴 놈...반 년 내로 잡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군수기업이라고 해도 우리가 다같이 손을 잡으면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블랙 리버를 너무 얕본 것 같군. 앞으로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나?"


"삼안 산업 쪽에서 이 사태에 변화를 줄 만한 무언가를 발견해서 해석했다고 하더군."


"뭣이?! 대체 뭘 찾았길래?!"



오늘도 회장들은 긴급 회의를 열어 블랙 리버에 대한 방안을 논하고 있었다.



우웅...우웅...우웅...



"어? 밖에서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군?"


"이쪽도다."


"거기도 들리는 거냐?"


"이쪽도 들린다. 마치 뭔가가 울리는 듯한 소리다."


"하늘에서 들리는 건가?"



창가로 가서 위를 올려다보니 구름이 불안정하게 형태를 일그러트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흔들리는 물 위의 거품처럼...



"어?!"


"뭐, 뭐냐, 저건!"


"구, 구멍이냐?!"


"아, 안에서 뭐가 나온다!!!"



이윽고 하늘에서 넓은 원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검붉은 무언가가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어? 이거 뭐...커억!"


"꺄아악!!!"


"뭐야, 저거!"


"사, 사람을 죽였어!!!"


"도망쳐!!"



정체불명의 무언가는 호기심에 접근한 인간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기 시작했다.


회장들도 당황한 채 그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오메가 회장의 뒤를 따르면서 들리지 않게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멸망 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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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 전쟁은 급히 중단되었고 인류도 철충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지만,


되려 AGS를 장악한 철충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바이오로이드들도 철충을 파괴하지 못해 밀리기 시작했다.


철충이 물, 바다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눈치챈 인류는 순식간에 터전을 버리고 바다로 이동했다.



그리고 주인이 떠난 빈 땅들은 전부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회장 이외에 인간으로부터의 제약을 받지 않기에 원작처럼 남아있던 잔당들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메가..."


"회장님..."



멸망전쟁 이전만 해도 건장했던 오메가 산업의 회장은 비쩍 마른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안돼...그게...그게 날 쫓아와..."


"......"


"도망가야..."



회장의 말이 끊어지더니...



띠이이이이이~!



회장의 사망을 알리는 신호음만이 길게 울려퍼졌다.



"아..."



나는 그제서야 아까 전부터 억눌러 왔던 감정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제 나는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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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멸종한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고,


...나는 지금 외딴 섬에 와 있다.



"키르케도 못 도와주는 처지에 오지랖이 심한 것 같지만...까짓거 말해주고 가는 편이 낫겠지?"



이 아름다운 섬의 정체는 다름아닌 요정 마을의 아리아 이벤트 장소.


원작에선 로버트를 해킹해 회장 부활에 필요한 실험을 자행하게 하지만,


나는 그저 로버트와 요정 마을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오르카호의 사령관이 온다면 합류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다.



"어? 누구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바이오로이드 두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스노우 페더와 아크로바틱 써니, 역시 철충을 피해 잘 살아남은 것 같다.



"어머, 이런 곳에서 바이오로이드를 만나네요?"


"안녕하세요."


"못 보던 분인데, 혹시..."


"맞아요. 육지에서 왔어요. 조금 찾을 게 있어서요. 여러분은 그 유명한 요정 마을 분들이시죠?"



그 말을 들은 써니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라, 저희를 아시나요?"


"그럼요. 생존한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하죠."



사실 난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거지만.



"특히 그 마을을 이끌고 있는 세레스티아님의 명성이 자자해요."


"와아...진짜요? 역시 리더는 대단한 분이었어...!"



그 말을 들은 스노우페더가 활짝 웃었다.


와...진짜 귀엽다...


고맙다, 삼안 산업...고마워, 김지석...



"저기 괜찮으시면 저희 마을에 들러보실래요? 리더도 뵙게 해드릴게요."


"저야 영광이죠. 갑작스레 찾아왔는데도 환영해 주셔서 정말로 고마워요."


"아니에요, 저희한테도 오랜만에 찾아오신 손님인걸요."



스노우 페더와 써니는 앞장서서 요정마을로 나를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미처 보지 못했다.



스노우 페더와 써니가 싸늘한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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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요정 여왕 세레스티아님."



세레스티아의 기품이 느껴지는 모습과 발랄한 행동거지의 조합은 매우 오묘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게임에서 스노우 페더가 괜히 4차원 취급한 게 아니었구나...



"손님이시죠~? 저, 외부인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다시 한번 인사드릴게요, 레모네이드 오메가라고 합니다. 여왕님."



순간 세레스티아가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멸망 전 개체인데다가 PECS 소속이기까지 하니 레모네이드 오메가에 대해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지.



"레모네이드...들어 본 적은 있지만 직접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도 세레스티아 개체를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랍니다."


"그렇구나...그럼 오메가 님은 저를 뵈려 여기까지 직접 오신 거군요?"



세레스티아가 활짝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사령관이 저 표정을 봤다면 바로 함락됐겠는데?



"네, 다름이 아니라 여왕님이랑 이 섬에 있는 AGS분께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어서요."


"그건 다름아닌 네 주인을 위해 희생해달라는 부탁이겠지?"


"?!!"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나는 바로 몸을 날려 그 자리를 피했다.



치이이익!!!!



바로 레이저가 날아와 방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자리를 지져버렸다.



"이건...!"



이걸 어떻게 모를리가 있겠는가? 다름아닌 로버트의 1스인데...



"호호~역시 당신 말이 맞았군요, 로버트?"


"놓치면 안된다. 반드시 죽여버려야 한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린 나는 기겁했다.


로버트가 오리라곤 예상못했지만 대체 왜 알프레드까지 로버트 몸체를 달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네가 여기 올 거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바이오로이드들이 오자마자 신상확인을 한 다음 네 년이 오면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일러두었지."



로버트의 말을 들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대체 어떻게 내가 올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지?



"저희들의 모듈에 세뇌를 걸고, 로버트 아저씨를 해킹해서,


저희를 PECS 회장들의 부활을 위한 실험체로 삼을 생각이라고 들었어요."


"처음엔 그냥 이상한 소릴 하는 건가 했는데, 진짜로 당신이 여기 오더군요."



어느새 스노우페더와 써니를 포함한 요정마을의 주민들이 전부 무장을 한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햅니다! 해명할 기회를 주세요!"


"듣지 마라! 나를 순식간에 해킹할 수 있는 여자다!"


"으아아악! 제기랄! 대체 왜?!!"



더 있다간 진짜 죽을 것 같아 필사적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등 뒤에서 로버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섬에 있는 모든 AGS들은 레모네이드 오메가를 놓치지 마라! 반드시 사살해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AGS들이 튀어나와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젠자아앙!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케스토스 히마스도 챙겨오지 않았다.


즉석 해킹으로 겨우겨우 틈을 만들어 포위망을 빠져나와 간신히 항구에 도착했다.


보트를 대기시켜 둔 유미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오, 오메가 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튀어! 지금 저 사람들, 말이 안 통해! 머뭇거리다간 타이런트까지 올거야!"


"히에엑?!!"


"빨리 잠수함으로 돌아가야 해!"



드론, 스팅어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폴른, 렘파트, 셀주크의 사격도 어떻게든 저지한 나는 간신히 잠수함으로 피신했다.



"빨리 잠수해! 타이런트가 공격해오기 전에!"


"네, 네!"


"크아아아아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타이런트가 항구로 달려오더니 에너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아, 안돼...!"



콰아아아아!!!!!



타이런트의 공격은 간발의 차이로 잠수함을 피해갔다.


잠수함이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추자 타이런트도 더 이상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하아...살았다."



이제 두 번 다시 요정마을엔 안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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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또다시 흐르고...흘렀다...



"야, 유미야. 나 진짜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오면 안될까?"


"안돼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너무 심심해서 그래...냉동수면 좀 시키고 내년 이맘때쯤 깨워주라."


"그래요? 얼마나 심심하셨길래 직접 섬까지 가셔서 타이런트에게 쫓겨 다니시는 걸까?"


"야, 그건 진짜 내 잘못 아냐! 나중에 그 섬에 방문할 인간에게 합류해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다짜고짜 공격했거든?"


"네, 네~. 인간이 나타나서 라비아타가 이끄는 저항군의 사령관이 된다는 얘기의 연장선상이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답니다."


"아니, 진짜 뭔 진실을 말해도 얘들이 믿지를 않냐."


"딱 들어도 믿기지 않을 이야기니까 그렇죠! 생전에 인간이었다느니 뭐니.


입장바꿔서 생각해보세요. 오메가 님이라면 믿으셨겠어요?"


"아니."


"......"



하...지루하다...


인류가 멸망하기 이전에도 그닥 재미있는 게 있거나 하진 않았지만, 멸망하고 나니까 진짜 즐길 거리가 없다.


50년 넘게 사령관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루해서 죽을 것 같다.



"뭐 재미있는 거 없나..."



그러던 중, 갑자기 눈 앞에 무슨 이상한 창이 하나 떴다.



"뭐, 뭐야, 이건?"



놀랍게도 그 창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지금부터 LAST ORIGIN THE MULTIVERSE 커뮤니티 서비스를 시작하겠습니다.]















[환영합니다. 로버트해킹범님]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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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PossesionVerse의 두번째 프리퀄 외전을 완성했습니다...!


앙헬 에피소드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이제 프리퀄 외전 하나만 더 쓰고 본편에 집중하겠습니다.



*레모네이드 오메가에 빙의한 라붕이가 보고 싶다 의 재창작을 허가해주신 원작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