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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발키리."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한 여름날. 우렁찬 매미 소리와 나뭇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 아스라히 들리는 야트막한 언덕에서, 조금씩 밀려오는 따분함을 떨쳐내고자 입을 열었다.


"네, 대장님."


내 옆에서 멍하니 서서 하늘 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발키리가 대답했다.


"네가 여기 합류한지 얼마나 됐지?"


"다다음주면 딱 두 달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큰 작전에는 투입된 적 없고?"


"제가 합류하기 직전에 연구소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고는 들었지만, 저는 그때 아직 이곳에 없었습니다. 직접 보고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군요."


"연구소 전투를 놓치다니, 그건 많이 아쉽겠네. 나도 가능만 했으면 꼭 참여해보고 싶었는데."


연구소 전투. 나 역시 그 전투에 대해 아는 점이라고는 작전보고서에 쓰여있던 내용이 전부이기는 하나, 그 적은 정보들도 내게 충격을 주기에는 차고 넘쳤다. 아군 사망자 없음, 적 전멸. 소설이라고 해도 믿었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문장이 보고서에 떡하니 박혀있었고, 세세히 적힌 작전 개요는 한 사람이 떠올렸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짜임새를 자랑했다. 발키리의 말마따나, 직접 보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도 사령관의 실력을 실전에서 직접 보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영 아니였네. 그럼 다른 작전은? 탐색이나 그런 건 나가본 적 없어?"


"탐색은 몇 번 나가봤지만, 가끔씩 철충 몇 기와 마주친 것 빼고는 별일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럴 때는 사렁관님이 아니라 분대장의 지시를 따르니, 사령관님이 직접 작전을 지휘하시는 모습은 저도 이번이 처음인 셈이군요. 다만..."


발키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나 역시 다음으로 나올 말이 무엇일지 알았기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지금까지 생긴 특이사항은 멧돼지밖에 없는 마당에 철충과 만날 일이 생기긴 할지가 의문이군요."


"그러게..."


그렇게 말하고는 또다시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터널의 수색이 끝났습니다, 각하. 곧바로 다음 구역으로 이동해 수색을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리 씨의 통신을 받자마자 지도의 한 구석에 붉은색으로 X자를 쳤다. 큼지막하게 쳐진 X자의 곁에는 또다른 X자들이 줄줄히 놓여져 있었다.


"네. 혹시 특이사항은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다만, 장기간의 수색으로 대원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세 시간 동안 라비아타 통령의 흔적은 고사하고 철충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벌써 세 시간이나...솔직히 이렇게까지 일이 없으면 좀 답답하긴 하네요. 이제 시설 내부만 빼면 더 이상 수색할 곳도 없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고선 지도를 다시 한번 봤다. 수색이 끝났음을 뜻하는 붉은색 X표가 지도에 빼곡히 차 있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 표시나 메모도 지도에 쓰여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철충들이 들끓어도 이상하지 않을 마당에 이렇게까지 주변이 조용한건 뭔가 이상하군요. 주변에 매복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뭔가 느낌이 영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직 그 거대 철충을 발견하지 못한것도 걱정이에요. 라비아타 씨의 말대로라면 최근까지도 시설 내부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었을텐데, 갑자기 얌전해진건지 통 보이지를 않네요."


[어쩌면 각하가 회의에서 말씀하셨던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이 부근의 철충들과 그 거대 철충을 지휘하는 연결체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만 제시한 거잖아요. 현실적으로 가능하긴 한 거에요?"


[지금으로선 그게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거대 철충이 여기서 혼자 날뛰었다 얌전해지는 동안 다른 철충들은 뒤에서 구경만 했다'라는 결론이 나오니 말입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철충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연결체가 있다 한들 위화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마리 씨의 말이 맞다. 이곳에 거대 철충이 날뛸 필요가 있을 정도로 철충들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면, 녀석을 돕기 위한 병력 역시 있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거대 철충만으로도 충분하다 판단하고 추가적인 병력 투입을 하지 않았다 하기에도 어색하다. 연구소에서 시험관 속 샘플을 위해 연결체를 셋이나 보냈던 행보와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적이 없어서 더 머리가 아픈 상황은 또 처음이네요...혹시 철충들이 서로 분열할 수도 있나요?"


[아뇨. 그건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겠군요. 놈들이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었던 단 한가지 이유를 꼽자면 바로 놈들의 단합력입니다. 100년이 넘게 놈들과 싸웠지만 녀석들끼리 분열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죠.]


"그럼 그 거대 철충의 곁에는 왜 아무도 없는 걸까요? 서로 분열한 게 아니라면 분명 무슨 의미가 있기는 할 텐데...그렇다고 매복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시설 안에 철충들이 없는 건 확실하죠?"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정찰을 맡은 레오나 대장에게 물어보는 편이 빠르실 겁니다. 저흰 이제 막 시설을 향해 출발한 참이니까요.]


"그렇겠네요. 그럼 잠시 레오나 씨랑 얘기 좀 하고 올 테니, 일단은 계속 시설 쪽으로 와 주세요. 무슨 일 있으면 비상통신으로 연락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죠.]


                                                                                               


마리 씨와 통신을 끊고는 곧바로 레오나 씨에게 연락했다. 두 번째 통신음이 끝날때쯤, 레오나 씨가 통신기 너머에서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 또 왜? 이번에는 멧돼지가 아니라 노루라도 봤어?]


"...노루요?"


통신을 받자마자 다짜고짜 노루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싶어 나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어, 어, 사령관이었구나? 어, 그래, 그, 별일 아니야! 그런 게 좀 있어서, 그, 신경쓰지 마! 그래서 무슨 일이야?]


"아니, 별건 아니고, 그냥 연구소 내부의 정찰은 어디까지 됐나 궁금해서요..."


내 질문에 레오나 씨는 숨을 몇 번 들이쉬시고는 가볍게 목을 푸셨다. 


[그거라면 한창 진행중이야. 시설 입구 쪽은 전부 끝났고, 이제 조금씩 내부를 살펴보는 중이야. 다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혹시 모를 적에게 들키지 않고 내부를 훑을 수 있는 대원은 많지 않고, 그럼 아마 두 시간은 더 걸리지 않을까 싶네. 시설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넓지 않다는 전제 하에.]


'시설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넓지 않다는 전제 하에'라는 말은 아마 지난번 연구소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일 것이다. 그때도 연구소의 규모가 에이다 씨의 데이터에 기록된 것보다 더 컸으니.


"그럼 이 시설도 지난번 연구소처럼 비밀시설이라는 의미신가요?"


[그렇지 않으면 그 라비아타라는 바이오로이드가 굳이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겠어? 시설 전부가 비밀은 아니여도, 숨겨진 방 정도는 있을거라는게 내 생각이야. 그리고...아, 잠시만.]


레오나 씨는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잠시 말을 멈추셨다. 수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발키리 씨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노루에 관한 질문은 잠시 미뤄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보고할 거리가 생긴 것 같네.]


몇분 뒤 돌아온 레오나 씨는 뭔가 흥미롭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정찰대가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네. 철충을 찾진 못했지만, 철충들의 잔해를 꽤 발견했다나봐. 그것도 비교적 최근, 한 두달 전 쯤에 생긴 것들을.]


"혹시 라비아타 씨가 처리한 것들인가요?"


[그랬으면 내가 '이상하다'라고 했겠어? 라비아타의 무기는 대검인데, 이 잔해들은 전부 뜯겨나가거나 뭉게진 것들이라는 모양이야. 대검으로 처치한 건 아니라는 의미지. 그리고 하나 더. 이건 그냥 한 대원의 주관적인 의견인데, 철충 잔해들의 위치가 좀 묘하다 하더라고.]


"묘하다고요?"


[대열을 맞춘 채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교전 중 파괴된 건 더더욱 아니라는 것 같아. 굳이 따지자면 누군가에게서 허둥지둥 도망치다가 당한 느낌이려나?]


철충들이 누군가에게서 도망쳤다? 도대체 누구한테서? 설마 라비아타 씨는 아닐 테고, 애초에 라비아타 씨는 그 거대 철충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텐데? 애초에 거대 철충이 있는데 철충들이 도망갈 필요가 있나? 그냥 함께 싸우면 되지 않나? 아니면...


"...그 거대 철충이 전력이 못 된건가?"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어렴풋이 들린 레오나 씨의 질문을 무시하고 책상 위에 놓여있던 이면지 위에 펜으로 떠오른 생각을 마구 나열해놓았다.


철충들은 미지의 적인 A에게 전멸했다. 그것도 제대로 된 싸움도 하지 못한 채. 여기서 A는 철충이 아니다. 철충들끼리는 서로 싸우지 않으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대 철충인 B의 존재다. 라비아타 씨가 경계할 정도로 강한 철충인 B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밀렸다는 것은 둘 중 하나. B가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철충들이 전멸했거나 B가 전력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처음 가설은 뭔가 어설프다. B가 나서기도 전에 다른 철충을 처리했을 정도로 A가 강력하고 철충에게 적대적이었다면 철충이 그걸 내버려두고 있었을리가 없다. 최소한 그런 존재를 내버려두고 연구소의 시험관을 회수하겠다고 귀한 연결체를 셋이나 보낼 리는 없을 것이다. 즉, A가 그렇게 강력한 존재라는 가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다음은 B가 전력이 되지 못했을 경우. 이건 B가 먼저 A에게 당했거나 동족을 배신하고 돕지 않은 경우다. 하지만 라비아타 씨의 말에 의하면 B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난동을 부렸다. 먼저 당한 건 아니라는 의미다. 그리고 철충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B가 아군을 배신한 건 아니다. 


그럼 연결체의 지시로 아군을 돕지 않은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철충이 비정하다고 해도 그렇게나 강한 전력인 B를 쓰지 않고 병력을 버리는 행동은 부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이 가설도 뭔가 의심스럽다.


"..."


머리가 복잡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A와 B의 존재가 서로를 부정한다. 애초에 철충에 적대적이면서 그렇게 강한 존재는 많지 않다. 게다가 정찰대는 철충들이 뭉개졌거나 뜯겨나간 상태, 즉 어떠한 무기의 흔적도 없이 순수 힘으로 파괴된 상태라고 했다.


맨몸으로 철충을 파괴할 정도로 강하며 철충에게 적대적이고, 거대 철충인 B가 있었음에도 철충들이 난생 처음으로 도망을 쳤어야만 했던 존재...


"...?"


뭔가. 뭔가가 거슬렸다. 한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며 계속해서 위화감을 주었다.


난생처음?


난생처음?


아니다.


난생처음이 아니다.


"그거야!!!"


[으아,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래, 사렁관?!]


놀란듯한 레오나 씨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철충을 맨몸으로 파괴할 수 있으며, 철충에 적대적인 존재. 그리고 과거에도 철충들을 도망가게 했던 존재. A와 B의 모순을 해결해 줄 수 있으며, '철충은 철충을 공격하지 않는다'라는 전제를 유일하게 부정하는 존재.


나는 통신기를 부여잡았다.


"레오나 씨, 대원분들을 시설 밖까지 후퇴시키고 전파해주세요."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프레데터가 돌아온 모양이네요."


                                                                                               


여신전생 하고싶다

스위치가 없다

돈도 없다

시간도 없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