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 곧 델타의 세력권을 벗어납니다."

"응, 알려줘서 고마워. 리리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밀도 높은 어둠 속에서 리리스의 목소리가 소곤소곤 들려왔다. 귓불에 와닿는 옅은 숨결, 고막을 간지럽히는 조곤조곤한 목소리, 볼가에 사락사락 스치는 부드러운 머리칼, 코끝을 스치는 은은하고 달달한 향수 냄새가 리리스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델타의 세력권인 북극해를 가로질러서 스발바르 제도로 향하는 오르카 호는, 적의 탐지자산을 우려해 여러 은폐 조치를 실행하기로 했다. 조명을 제한하는 등화관제 훈련도 그 일환이었다. 초기에는 정전된 상황에 들뜬 나머지 아이들이 여러 소동을 일으키거나, 불빛이 없는 환경에 익숙치 않은 승조원들이 작은 사고를 일으키고는 했다. 하지만 훈련을 거듭하다 보니 다들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실제 상황임에도 묘한 긴장감 하나 흐르지 않고 모두들 의젓하게 암흑 속에서 제 할 일들을 해주고 있었다.


"아, 아. 관제실에서 알려드립니다. 2분 후에 등화관제 조치를 해제하고 다시 점등할 예정입니다. 모두들 깜깜한 곳에서 수고 많으셨어요!"


...처음에는 의연하고 사무적인 투로 말하다가, 끝에 가서 이상하게 들떠 올라가는 오렌지에이드의 함내 방송을 듣고 사령관은 작게 피식 웃었다. 함교 내 이곳저곳에서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다들 겉으로는 의연한 척 보여도,(사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긴장들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령관도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정도로 멀어졌으면 뒤늦게 눈치챈 델타가 군사행동을 하더라도 대응에 늦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안도감에 빠지며 느긋하게 눈을 감으려는 찰나였다.


턱!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코앞까지 들이닥쳐오며 팔걸이 위에 둔 두 손목을 잡아눌렀다. 돌발적인 행동에 사령관이 놀라서 뭐라고 하기도 전에, 습격자는 사령관의 입을 틀어막았다.


"웁...! 우굽...!"


입으로.


"믑...! 부훕...!"


거칠고 버석버석한 남자의 입술에 비하면 보드랍고 말랑말랑했지만, 놀리는 모양은 결코 사근사근하지 않았다. 수백 일을 주린 맹수처럼 거칠게 쥐어뜯다시피 아랫입술을 잡아물고 당겨대는 통에 사령관의 입이 아픔으로 살짝 벌어졌다. 그리고 그 틈으로 지체 없이 혀가 불쑥 들어왔다.


"쿱...! 커헙...!"


당황해서 혀를 밀어내며 입을 닫아보려고 했지만, 괴한은 놀라운 괴력을 발휘하며 닫혀오는 앞니를 오로지 혓심만으로 들어올려 버텨버렸다. 턱힘을 혀끝으로 이겨내는 그 저력을 실감한 사령관은 무시무시한 기세와 정욕에 압도되어서 저항할 의지를 잃고 말았다. 하찮은 반항마저 멎으니 다음부터는 그냥 자신의 세계였다. 멋대로 폐 속의 숨을 훔쳐 들이마시고, 어금니를 도로록 훑어오고, 겁먹어서 움츠러든 혀를 감아대고, 입술을 잡아먹듯 덮어서 빨아들이는 게걸스러운 흉포함에 사령관은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고 있었다.


입으로 강간당한다는게 이런 건가...? 사령관은 강간하는 입장에서는 7배의 힘을 발휘한다는 어디선가 본 실없는 유머를 떠올리며 그저 풍랑에 휩쓸리는 돛단배처럼 몸을 맡기고 있었다. 추잡하고 음흉한 정도가 좀 많이 지나쳐서 정욕마저 일지 않고 혐오감이 올라오는 그런 키스였다.


"...? 파하!"


그리고, 끝이 보일 것 같지 않던 그 추행은 들이쳐왔던 것처럼 빠르게 중단되었다.


"썅년이 뭐 하는 거야!"


쿠당탕!


리리스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곧 보이지는 않지만 소리로 들으면 상당히 치열한 드잡이질이 벌어졌다. 함교 내의 승조원들은 때아닌 소동의 중심부로부터 본능적으로 물러서며 웅성거렸다. 쿵! 다시 한번 큰 소리가 울렸고, 함교는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리리스가 다가와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죄송스럽게 고했다.


"하아, 하아... 죄송해요. 주인님... 놓쳐버렸어요..."

"그, 그래?"


여전히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령관은 손수건으로 입가에 남은 잔해를 닦아냈다. 아무리 깜깜하다지만 리리스랑 몸싸움을 벌여놓고도 빠져나갈 수 있는 아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이 함교 안에서는 상당히 후보를 좁힐 수 있을 터였다. 기어들어가던 리리스의 목소리에 다시금 힘이 실렸다.


"하지만... 몸싸움하다가 그 년 명찰을 뜯어냈어요."


"점등까지 1분 남았습니다!"


오렌지에이드의 쾌활한 알림이 사형집행일까지의 카운트다운처럼 울렸다.


"...불 들어오면 바로 그 씨발년 붙잡아서 주인님 앞에 대령할게요. 주인님이 당하신 것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음은 안 되겠지만... 정말 죄송해요... 감마 때도 그렇고... 저는 쓸모없는 년이에요..."

"아니야. 진정해, 리리스. 덕분에 살았는걸. 또 구해줘서 고마워."

"주인님..."


리리스의 머릿결을 더듬어 찾아낸 사령관은, 자기혐오로 빠져들려던 경호대장을 천천히 진정시켰다. 그러면서도 어둠을 돌아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꼭 잡아내서 댓가를 치르게 할게요..."

"리리스."

"네...?"

"명령이야. 지금 당장 손에 든 명찰을 가운데로 던져버려."

"주인님!"


항의의 표현과는 별개로 리리스의 몸이 이성보다 빠르게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따그르르 명찰이 땅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점등까지 30초 남았습니다~ 어우! 드디어 지긋지긋한 등화관제에서 해방이네요~"


"자, 함교에 있는 모두들. 사령관으로서 명령할게."

"주인님! 그렇지만...!"

"모두 자기 명찰 떼서 함교 중앙으로 던져."

"주인님...!"

"점등합니다!"


덜컹!


불이 켜지는 소리와 함께 함교 한가운데에 무더기로 쌓인 명찰 더미만이 남았다. 영문을 모르는 승조원들은 모두 사령관과 리리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리리스는 죄스러움 반, 원망 반으로 사령관에게 불만스럽게 꿍얼거렸다.


"주인님의 넓은 아량에는 매번 새롭게 감탄하고 있어요. 하지만..."

"괜찮아, 리리스. 무슨 말 하고 싶은건지 알겠어. 내가 잘 해결해 볼게."


사령관은 여전히 아릿한 입술을 쓰다듬으며 그 난폭했던 감각을 되짚어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감촉이었다. 그러고보니 그때 이후로 오래도록 상대해주지 않았었지...


사령관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




쩌억!


"꺄아악!"


쫘아악!


"끼... 끼흐윽!"


살과 살이 강렬하게 부딪히는 소리. 본래 다른 방식으로 서로 마주치는 소리가 가득한 방이어야 했지만, 오늘 나는 소리는 많이 달랐다. 교성은 비명으로, 파찰음은 채찍소리로.


몸에 열이 오른 사령관이 겉옷을 벗어던지며 숨을 골랐다. 채찍을 다시 두어 마디 감아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개 같은 년이... 사람 가지고 노니까 재밌냐?"

"하... 흐으... 윽!"

"오냐오냐 해주니까 아예 호구로 보이지? 야, 썅년아. 말이라도 좀 해봐. 어? 좆같이 뻔뻔한 상판떼기나 하고 말이야. 안 그래?






리리스."

"주... 인님...!"


짜아악!


"꺄하앗!"

"씨발년이... 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주인 놀려먹으니까 재밌냐? 대체 어느 경호원이 경호 대상을 덮치냐? 아주 니가 상전이지! 좆 박아달라면 박아주고, 옆구리가 허전하면 끼고 자게도 해주고. 아니야, 어?"

"아... 니요... 죄송..."

"아니긴 뭐가 아니야 창년아!"


쩌어억!


"끼햐악?!"

"뭐가 죄송한데? 할거 다 해놓고 원하는 것도 다 받아서 좋아 죽으려고 하면서. 너는 참회의 눈물을 아랫구멍으로 흘리냐? 별 말같잖은 소릴 하고 있어!"

"죄... 송해요!"

"허."


사령관의 코웃음과 함께 리리스의 고해성사가 이어졌다.


"주...인님께 벌 받고 싶어서... 혼자 같잖은 자작극 벌이고... 주인님께 제 저열한 욕구를 제멋대로 풀고... 리리스는 구제할 길 없는 쓰레기에 답도 없는 썅년이에요..."

"잘 아네 썅년아!"


쫘악!


"꺄으윽!"

"그래서 벌 받으니까 좋냐? 더러운 년아!"


파아앙!


"하악...! 좋아요, 좋아요 주인님! 지저분하고 저열한 마조 취향 해소하겠다고 주인님을 이용한 이 쓰레기년을 더 벌해주세요!"

"오냐, 씨발년아! 언제까지 좋아할 수 있나 보자! 진짜로 멈춰달라고 울고불고 빌어도 뒤질 때까지 안 멈춘다?"


쫘악! 쫘악! 쩌어억!


"아, 흐으윽!"


리리스의 엉덩이와 등허리에 핀 빨간 열꽃처럼, 비명이 성욕으로 물들어 섞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