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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찰박"


기분 좋은 파도소리. 규칙적이고 잔잔한 리듬은 어머니의 뱃속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뺨을 가볍게 치는 물살. 입술에 짭짤하니 묻은 바닷물.

고운 모래에 반쯤 묻혀있는 머리를 들어 힘차게 흔든다.


"으으...여기가 어디지?"


끝없이 펼쳐진 해변. 짙은 이파리를 한껏 펼친 나무와 밝은 연두색의 들판. 평화롭게만 보이는 섬의 풍경이다.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요안나 아일랜드가 아니라는 것을.

몸에 묻은 모래를 가볍게 털고 목적지 없는 걸음을 내키는 대로 옮겨본다.

제법 아담한 섬이다. 혼자 살기엔 적당한 크기.

그리고 지금 사령관은 혼자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아픈 머리를 짚고 기억이라는 이름의 퍼즐 조각을 맞춰본다.

알바트로스가 거칠게 자신의 멱살을 잡아 허공에서 집어 던졌고...안 된다, 두통이 심해진다.


"아니야...그럴 리가 없어"


속이 메스껍다. 과거가 뒤죽박죽이다.

아까까지 평화롭다 못해 늘어질 것만 같던 섬의 모습도 가식으로만 느껴진다.

다양한 이유로 사령관을 겁박하고 몰아붙이던 오르카의 일원들.

노골적으로 반역을 암시하며 경고성 편지를 보낸 장성,

언제나 도움이 되던 조언을 거두고 뜬구름 잡는 대답만 하며 판단을 흐리게 한 아르망,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꾀해야 한다며 들고 일어난 하르페이아,

힘들게 모은 참치캔을 훔친 LRL,

다시금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난 하르페이아...왜 비슷한 기억이 두 개지?

뒤통수에 맛깔나게 날아차기를 박은 리앤과 안드바리,

자신을 소년의 몸으로 옮겨놓고 잠든 사이 일방적으로 능욕한 마리,

끔찍한 식고문을 벌인 레오나...

무시무시한 로봇을 만들고 사악하게 웃는 아자즈의 모습까지.

눈앞이 빙그르르 도는 가운데 엉망진창으로 맞춰진 기억의 퍼즐은 모양이 심하게 뒤틀렸지만 최소한 사실이었다.


"또르륵"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 떨어진다.

그걸 신호로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린다. 당장에라도 자신을 잡으러 모조리 몰려올 것만 같다.

저 멀리 수평선 끝에서 보이는 함대는 처형을 예고하는 군대일까?

다급히 뛴다. 도망친다.

이 작은 섬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작정 다리를 움직인다.

얼마나 달렸을까, 아담한 오두막이 눈에 들어온다. 섬에 이미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던 걸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거칠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진다.


"후우, 후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공황은 약간이나마 진정됐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는다. 당장에라도 저 창문에서 추적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 것만 같다.

시선을 살짝 떨구니 책상 위에 놓인 노트와 필기구가 보인다.


"...."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떨리는 손으로 펜을 잡는다.

기록이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을 남기고자 한다.

혹시 먼 훗날 발견할 누군가를 위해.


'...이 모든 건 내 탓이 아니야'


종이 위에서의 혼란스러운 달음박질이 끝났다.

이렇게라도 생각을 정리하고 내뱉으니 살짝 평온이 찾아온다.

그와 함께 일그러졌던 기억도 조금씩 본디 형태를 되찾으며 진실이 또렷해진다.


'아...그랬구나'


아까의 전투가 안겨준 극심한 부담과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소중한 오르카의 일원을 몹쓸 이들로 치부하고 말았다.

물론 이런저런 사건이 여럿 있긴 했지만 근간에는 사령관에 대한 진심 어린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평소 드러내지 못했던 솔직함, 숨겨왔던 욕망.

그걸 확인할 수 있는 나름의 계기였다.

그리고 이 중심에 있던 멘탈 보조 장치...나중엔 뒤틀린 자아를 가지고 깨어나 

오르카를 위험으로 몰아넣었던 사악한 알바포스는 알바트로스의 장렬한 희생으로 최후를 맞았다.

이제 모든 게 떠오른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모두가 나를 찾고 있을 거야'


사령관이 사라진 오르카는 지금쯤 큰 혼란에 빠져있겠지. 다들 걱정하며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당장 밖으로 나가 해변에 조난신호라도 적어야겠다. 어쩌면 아까 봤던 수평선의 함대가 용일지도 모른다.


"분명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아!"


떠밀려왔던 해변으로 돌아오니 거대한 함선이 벌써 정박해있다. 역시 날 구하러 왔구나.

그리운 얼굴을 보고자 두리번거리는 사령관의 앞에 나타난 바이오로이드는 레모네이드 감마였다.


"어?!"


"이야, 오래간만이야?...좀 작아진 것 같은데?"


다급히 반대 방향으로 뛰어보지만 발을 뻗기도 전에 거대한 손에 사로잡혔다.

바동거려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건틀릿. 소년의 몸인 게 지금처럼 한스러웠던 적이 없다.

이대로 쥐어짜여 죽는 걸까?


"제법 재치있는 한 수였어. 스스로 전력을 깎아내 함정을 파고 예기치 못한 기습으로 날카로운 일격을 날리다니...

보기 좋게 당했지 뭐야"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감마는 참으로 흥미롭다는 듯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데 빈집털이범께선 얌전히 섬에 박혀 나오지 말 것이지, 여기까진 어인 일로 행차하셨을까? 그것도 호위 병력 하나 없이 혼자?"


몸을 조이는 힘이 점점 강해진다. 숨이 막혀온다.


"뭐,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오르카의 사령관이라면 좋은 인질이 되겠지.

네 신병을 쥐고 있다 협박하면 용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테고. 

아니지...괜히 인질 때문에 전력을 내지 못하면 그것도 곤란하니 머리만 잘라 던져주는 게 더 나을까?"


눈의 실핏줄이 터졌는지 시야가 붉어진다. 손끝의 감각이 없다.


"어나이얼레이터를 또 날려 먹긴 했지만 나머지 전력은 온전하니 당장에라도 전투를 벌일 수야 있어.

모처럼 찾아온 기회인데 이대로 얌전히 물러나면 섭하지.

그런데 말이야...지난번에 봤을 때도 그랬지만 난 네가 제법 마음에 들거든"


감마가 히죽거리며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한마디만 해. 그럼 전부 없던 일로 하고 가던 길 갈 테니까"


기대감을 한껏 담은 눈동자가 빛난다.

어깨가 바스라질 것 같다. 척추가 끊어질 것 같다.

말을 하려 해도 고통에 짓눌려 그럴 수가 없다. 마음 같아선 당장 신발이라도 핥고 싶은데, 이렇게 쥐포로 생을 마쳐야 한다니.

이게 다 마리 때문이다. 추잡한 욕망에 눈이 멀어 내가 잠든 사이 육체를 옮겨? 영원히 저주할 테다.


"......하, 제법인걸"


구속이 풀린다. 예고 없이 찾아온 자유에 힘없이 나동그라져 거칠게 호흡을 갈구한다.


"역시 저항군의 우두머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건가. 그래, 남자가 그 정도 강단은 있어야지"


강단이 목숨을 구해주는 것도 아니고. 당장에라도 엎드려 절하고 감마를 섬기고 싶지만 멋대로 뻗은 팔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어쩐지 그간 운이 좋다 했어. 그 운도 이제 다했구나.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면 바로 사지를 찢어 물고기 밥으로 줬을 텐데, 용케 버티던걸.

용의 상관이라면 그 정도는 돼야지. 마음 같아선 남편으로 삼고 싶을 정도야"


뭐?


"특별히 이번은 조용히 돌아가 주지. 그 섬도 너 가져"


예상치 못한 전개에 크게 심호흡한다. 공기가 참 달다.

사랑스러운 마리 덕에 살았다. 신체가 건장해 말할 여력이 있었다면 지금쯤 목과 몸이 작별했겠지.


"아, 그리고 하나 더"


멀어지던 감마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다시 돌아온다.


"작은 선물이야"


쓰러진 사령관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넘기더니 쪽 하고 키스한다.


"다음엔 기필코 모든 걸 쏟아부은 전투를 벌일 테니 용에게 안부 전해"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멀어지는 감마.

밀려오는 파도처럼 안도감이 몸을 뒤덮는다.

흐릿해지는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멀어지는 포세이돈 함대.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오르카의 반가운 얼굴들....




요안나 아일랜드의 미래는 밝다.

비록 몇몇 바이오로이드가 우당탕 대소동을 벌였다고는 하나, 그건 지나간 일.

치열한 전투로 인해 기껏 일군 섬의 시설도 엉망진창이 됐지만 다시 세우면 그만이다.


"...뭐, 알바포스가 합체 목적으로 건물을 마구 뽑아간 타격이 훨씬 컸지만 말이야"


석양을 바라보며 사령관이 나지막이 읊조린다.


"미안해요, 다음부턴 미리 요청서를 올릴게요"


비키니를 입은 아자즈가 볼을 한껏 상기한 채 머리를 사령관의 어깨에 지긋이 기댄다.

아까까지 격렬히 사랑을 나눈 여운이 아직도 진하게 남아있는 듯하다.


저 멀리서 어렴풋이 들린 폭발음과 함께 정신을 차린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가 가장 먼저 행한건 

근처의 작은 섬에 표류해있던 사령관의 구출.

정성 어린 간호는 금방 효과를 봤고 산재한 문제의 해결과 함께 그간 쌓인 공과 벌이 하나씩 정산됐다.

참치캔 절도를 사주한 LRL은 한 달 동안 간식 금지.

이를 수락한 실행범 카엔에겐 작은 초밥집을 차려줬다.

미래의 초밥왕이 되고 싶다는 의도였으니 소원도 미리 들어줌과 동시에 무상으로 손님에게 봉사하라는 조건을 붙였다.

어차피 금전에는 별 관심이 없고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선보일 기회라 여긴 건지 살짝 좋아하는 눈치다.

사령관의 사주를 받아 창고의 참치캔을 털려 했지만 하르페이아에게 감화되어 일을 키운 제로는 특별히 강한 경고로 눈감아줬다.

배후로 지목된 둘의 책임이 훨씬 무거웠기 때문이다.

사령관이야 그동안 장대에 묶여 조리돌림도 당하고 온갖 고생을 했으니 적당히 넘어가자는 분위기.

하르페이아는 태워 먹은 참치캔만큼의 업무 할당량이 추가로 붙었다.

당연히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일일 최소 근무시간을 식사시간 제외 10시간으로 보장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에 마지못해 수긍했다.

사실 저지른 죄가 워낙 커 내심 두려움에 떨고 있던지라 기존보다 확연히 처우개선이 된 현 상황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이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됐으니.


"그럼 다녀올게, 사령관~"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손을 흔들며 아직 남아있는 오늘치 작업량을 소화하러 날아가는 금색 빛줄기.

사령관이 안드바리와 작당해 참치캔 할당량을 부풀린 건 꿈에도 모를 거다.

하르페이아도 행복하고 사령관도 행복하고 안드바리도 행복하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평등사회이자 지상낙원이 아닐까.

알바포스의 창조자라 할 수 있는 아자즈는 계약상 딱히 문제는 없었지만 해당 사태를 야기한 책임을 묻지 않기도 애매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원인은 인공지능 학습 도중 발생한 의문의 폭발사고였다는 리앤의 수사 결과도 나왔기에.

혹여 그릇된 판단으로 치우칠까 공정함을 기하기 위해 다른 지휘관급 개체를 모아 의견을 모아봤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


"그 건은 각하의 판단에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고민을 거듭하다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한숨 돌리고자 해변이 보이는 언덕에 앉아있던 그때.

염치는 있었는지 쭈뼛거리며 다가와 옆에 조용히 앉은 아자즈가 골반을 튕기며 사령관을 툭 쳤다.

차마 마주치지 못하는 시선, 선정적인 몸매.

이성은 잠시 치워두고 짐승과도 같은 유열의 시간을 보내는 걸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쯤이면 얼추 정리된 것 같고...이제 온전히 앞만 바라보며 섬을 다시 개척하면 되겠지"


닥터에게 갚아야 할 밀린 빚과 다들 쓰러진 가운데 꿋꿋하게 분전한 아스널에게 줄 포상도 남아있긴 하지만

그건 내일의 나에게 맡기도록 하자.


"...주인님"


고개를 돌려보니 스노우 페더가 한 손에 피리를 들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고백할 게 있어요"


"뭔데?"


"전...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짓고 말았어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일이 커져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애처롭다.


"진정해, 스노우 페더. 그 죄로 인해 생긴 문제가 지금은 해결됐니?"


"네? 네...."


"그럼 됐어. 다음부터 조금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면 돼"


"하지만...!"


인자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마음씨만큼이나 곱다.


"지금 이렇게 나에게 와서 고백하는 시점에서 넌 충분히 반성하고 있는 거야. 그걸로 충분해.

문제도 해결됐다면 더 이상 내가 내릴 벌은 없어. 정 마음에 걸린다면...그렇지, 그 피리로 멋진 연주를 해줄래?"


"...정말 감사해요, 주인님"


눈가를 슥 훔치더니 가볍게 숨을 내쉬고 피리를 분다. 

약간 어색하고 더 다듬을 구석이 있지만 그럼에도 아름답고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선율.


"삐이~"


우수에 젖어 노을로 붉게 물든 바다를 바라본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단 하나, 알바트로스의 부재만 제외한다면.


"...매번 뺀질거리고 허세가 심한 친구였지만 그래도 있어서 참 든든했어.

이번에도 알바트로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난 죽었을 거야"


"사령관...."


아자즈가 지긋이 바라보다 어깨를 토닥여준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어. 그저 날 집어던지는 줄로만 알았지.

하지만 뒤늦게 깨달은 거야, 남아있는 에너지를 쥐어짜 나를 보호할 에너지 필드를 전개해준걸.

그게 알바트로스의 마지막이었어"


"마지막 순간엔 최강 지휘관다운 모습을 보였네요"


"그래...항상 입버릇처럼 하던 그 장광설이 그리워. 지치지도 않고 스스로를 추켜세우던 기개.

그 녀석이 있어서 답답하고 짜증도 났지만 한편으로는 든든했거든"


"지금이라도 저 하늘에서 돌아왔으면 하나요?"


"그럼 정말 소원이 없겠어. 뻔뻔한 만담을 다시 주고받을 수만 있다면...."


사령관의 말이 멎었다.

아자즈가 손을 뻗어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말도 안 돼"


저 멀리서 보이는 작은 점.

하늘을 가로지르며 점차 다가오는 귀환자는 분명 엉망진창으로 누더기가 됐지만 분명 익숙한 그 모습이었다.


"...죽는줄 알았다"


"멋지게 돌아와 놓고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 이런 때야말로 평소의 당당한 허세를 부려야지"


반가움에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 알바트로스를 안는다.

그 충격 때문인지 남아있던 팔 하나가 떨어져 바닥을 뒹군다.


""아""


"...약간 긁힌 것뿐이다"


"약간? 너의 팔이 날아갔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래? 그럼 저건 뭔데?"


"난 원래 팔이 없었다"


"이 거짓말쟁이"


평소와 다름없는 뻔뻔함. 이 뻔뻔함이 너무나 반갑다.


"정말 대단한 여정을 거쳤겠지, 알바트로스. 오늘은 밤새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걸"


"드디어 나의 진가를 알아주는군. 내가 전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가보자 그곳에는 장대한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안나 아일랜드는 오늘도 평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