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충으로 인해 인류가 멸망하고 나서,하나의 좋은 소식과 하나의 나쁜 소식이 있었다.

 좋은 소식은 오르카호가 마지막 인류를 찾았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그 인류가 멸망전 시대를 살아가던,추잡한 본성을 지닌 인간중 하나였단 것이다.

 그 인간은 지휘능력을 인정받아 사령관 자리까지 올라갔고 지금와서는 오르카호의 완전장악을 위하여 지휘관들을 포섭,제거 할 계획을 짜고있다. 가족애가 넘치는 개체나 멸망전의 세상을 알고 그 참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바이오로이드들을,자신의 낙원에선 최대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스틸라인 마음의 편지 '훈련 줄여주세요.' 127장..  '사령관님 얼굴 좀 보고 싶습니다.' 221장.."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녀들의 지휘모듈과 수많은 경험들을 경계하였다. 만일 명령권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간접적 우회방법을 이미 찾았을지도 모르고,혹은 명령을 내리는 도중에 입을 막는 등 저항의 방법은 무수히 많았다.
  그런 불확실한 요소들을 못본 채 명령권만으로 낙원을 세우려 한다면 최후의 인류가 인간이었던 고깃덩어리가 될 여지를 그는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령관은 최대한 본심을 숨기고,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편이 되어줄 광신도가 생기기 전까지는 상냥한 사령관을 연기하기로 결심하였다. 

"익명 게시판 '사령관님은 아무와도 안하신 걸로 아는데 고자맞습니까?' 32건..  리리스,이거 쓴 애들 못잡냐?
..아니 농담이였으니까 총은 좀 집어넣고."
  그것이 그가 지금 자질구래하고,무례하기도 한 건의들을 읽으며 답장을 고민하는 이유이다.

"리리스,이 일 다음으론 뭐가 남았지?"

"출격 스쿼드 검토,재배치만 하시면 오늘 일은 끝나요 주인님."

 리리스와 짧은 대화를 몇번 주고받자 사령관은 드디어 마지막 업무만이 남았다. 잠기운 때문인지 화면의 글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딱히 변경사항은 없었기에 사령관은 무지성으로 패널을 연타했고 거의 모든 것은 평소와 같았다. 단지 하품하느라 눈을 감을 때,몇번의 조작을 실수한 것 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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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사령관을 포함한 지휘관들의 회의가 시작되기 전,레오나는 사령관을 은밀히 불러냈다."


"사령관. 단순한 검토도 못하다니,정신이라도 잠깐 놓은거야?"

레오나는 어제 사령관이 작성한 목록을 눈앞에 띄웠다.

어디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사령관은 예정표를 눈으로 쭉 훑어 내려가던 그때,사령관은 이제서야 발키리의 단독출격을 확인하였다. 아직 철충소탕이 완전히 되지 않은 지역으로 말이다.

"난 사령관이 더 특별한 사람이길 바라. 특히 이런 실수는 안하는 사람 말이야."
 

날카로운 레오나의 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였고 매번 저자세로 웃어넘겼지만,피로에 쩔은 사령관은 무심코 생각에도 없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실수 아닌데."

그것은 어쩌면 자기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일수도 있고,혹은  레오나에 대한 반항,아니면 스트레스로 인한 무언가일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레오나는 그 작은 중얼거림을 들었고,더 날을 세웠다는 것이다.

"뭐? 사령관,머리에 구멍 필요해?"

 

그리고 그런 레오나를 더 두고만 볼 수 없던 리리스가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주인님께서 아니라 하셨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죠? 지나치게 무례하네요."

 

레오나는 발을 구르듯 앞으로 내딛었고 리리스가 뻗은 팔은 레오나와 사령관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남의 자매를 홀로 사지로 몰어넣을 뻔 하고 실수가 아니라고? 사령관,지금이라도 고개 숙이면 넘어가줄게."

"주인님이 조금만 덜 자비로우셨다면 지금 서있지도 못했을탠데. 이제는 위아래도 구분 못하시나요? 누가 누구한태.."

사령관은 아직도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아 지끈거리는 머리로 돌파구를 찾으려했다. 지금 있을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리리스가 레오나를 힘으로 제압하고 그로인한 분쟁이 팀 단위로 번지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리리스,물러나. 그리고 레오나도."

그리고 사령관은 그 짧은 시간동안 제한된 두뇌의 기능을 사용해 어떻게든 나름의 답을 도출해냈다.

"나는 발키리를 레오나가 생각하는 것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어."


사령관은 억지로 하품을 참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곳에 여러명을 투입하는 것보다 발키리 한명이 잘할거라 생각하고 있어. 효율과 다른 것들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말이야.

철혈이라 불리는 레오나도,발언자는 사령관도 잠시 정신이 나가있을 만한 발언이 지나고,셋중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리리스였다.

"주인님께서 더 하실 말은 없으시다네요. 곧 있으면 회의인데,여기서 계속 느긋하게 있을지 움직일지는 알아서하세요."


보호를 위해 사령관을 자신의 자신의 뒤로 보낸 리리스는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을 한 레오나에게 그렇게 쏘아붙이고,사령관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이 무슨..."

레오나는 뭐라 말을 하려다가도 그 말을 입밖으로 끝내 꺼내지 못하고 사령관의 뒷모습을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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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레오나가 회의 도중 멍해있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때때로 등뒤의 커맨드 프레임이 번쩍거리기는 하였으나 그 이외에는 평소와 같이 철혈이라는 이명에 어울리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문제는 레오나가 아닌 발키리였다.
 발키리는 때때로 허공을 응시하듯 멍해 있기도 하였고,알비스의 증언에 의하면 밤중 총기를 손질하며 혼잣말까지 했다고 한다.

"각하....각하... 각하께서 저를 골라주시다니.. 절 그렇게 까지 높게 평가를..!"

발키리의 방의 불이 꺼지고 나서,발할라 숙소의 복도에는 얇고도 끈적한 집착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