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륵거리는 풀벌레의 가락이 바람을 타고 퍼져나가던 한여름 밤, 한 정자(亭子)에 여인 한 명이 오두커니 서 달빛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평화롭고 어찌보면 아름답지만 어찌보면 기괴한 이 공간만큼은 냉기와 정적(靜寂)으로 가득하니, 무형장막(無形帳幕)에 감싸인 정자는 감히 침입을 시도한 범인(凡人)의 살을 찢고 뼈를 으깨는 무음(無音)의 덫이요, 감옥이었다.


그러니 그런 그녀의 등뒤에 홀연히 나타난 두 복면인(發露人) 또한 고수(高手)일 것임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절대고수(絕對高手)라 할지라도 호흡과 내공(內功)의 운용에 따르는 미세한 기(氣)의 흐름까지 통제할 수는 없는 법. 기의 장막(帳幕)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침입자의 존재는 물론이요 손짓 하나, 호흡 한 번까지 모든 것이 속속히 읽혔을 것이 분명하니, 여전히 달구경하는 여인이 뒤돌아보지 않는 것은 광오한 자신감의 발로(發露)가 틀림없었다. 


숨소리 하나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을 차갑게 가른 것은 것은 돌아보고 있던 여인의 청아한 목소리였다. "죽이기 위해 왔다면 죽이면 될 것이고, 대화를 위해 왔다면 강소성(江蘇省)에서 보내온 벽라춘(碧螺春) 한 잔 정도는 대접할 터이니, 두 낭자는 오늘 무슨 일로 오셨나?" 음성과 함께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선 여인의 귀를 빗겨간 암기(暗器)는 어느새 처음부터 날아간 적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들어가 있었다.


이 정도는 인사치레나 다름없다는 것인지 더이상 암기는 날아오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숙여 손안의 물체를 가볍게 흝던 여인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뒤돌아본 것은 암기에 새겨진 문양을 찾아낸 이후였다. 달빛 아래에서 물결치는 여인의 은발과 빛나는 백옥(白玉)같은 살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담아내는 미모는 가히 항아(姮娥)에 견주어도 손색(遜色)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6척에 달하는 장신과 어둠 속에서 맹수처럼 빛나는 금안(金眼)을 마주한다면, 그 안에 담긴 흉포함을 찾아낸다면, 감히 그녀를 그저 아름답기만 한 여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복면인, 그리고 여인의 말에 따르자면 두 낭자를 마주한 여인의 포개진 입술이 다시 한 번 벌어졌다. "그래, 문양을 보니 알겠구나. 너희들이 천신(天神)의 힘을 받아 모든 마(魔)를 멸()하는 자라며 멸절신녀(滅切仙女)라 칭해진다던 두 아이겠구나?" 재밌다는 듯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두 복면인의 정체를 묻는 여인의 금안이 다시 한 번 빛났다.


수신자는 있으되 답신자는 없는 일방적인 대화가 끝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허나, 한가지 묻지." 마침내 입을 연 것은 동행인보다는 반 척에 조금 못미치게 크지만 은발의 여인에게는 머리 하나 정도 모자란 여인, 아니 목소리로 보아 소녀였다. 드디어 답변이 돌아온 것이 기쁘다는 것인지 가볍게 미소짓던 은발 여인이 대답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만 아니라면." 그러자 소녀가 되물었다. "네 눈, 완성된 화안금정(火眼金睛)으로 보아 대법(大法)의 대성(大聖)에 이른 것 같은데, 그걸 위해 얼마나 죽였지?"


그러나 은발 여인의 대답은 단박에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대답이 돌아온 것은 턱을 쓰다듬으며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여인에게 소녀가 다시 한 번 물어보려던 순간이었다. "으음~ 미안하지만 그건 굉장히 난처한 질문인데?" 칼날같은 눈빛으로 두 소녀를 노려보던 맹수가 교태어린 목소리로 대답하는 여우로 돌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순간적이지만 두 소녀는 내공을 끌어올려 내장을 진탕해오려는 마기(魔氣)를 밀어내야 했으니 진정한 사냥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장난치듯 가볍게 내공을 섞은 음공(音功), 아니 음공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단순한 수법의 위력이 예상 외라는 사실에 살짝 주먹을 쥐던 소녀는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어째서지? 그 마공, 아니 혈공(血功)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소아(小兒)와 처녀의 생혈(生血)이 얼마나 되는지 모를리가 없지 않나?" 그러자 여인은 다시 한 번 돌변해 두려움에 떠는 아낙네의 흉내를 내며 말했다. "어머나! 어떻게 그런 무서운 말을? 하지만 소녀(小女)는 정말로 대답할 수 없사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은 즐거움에 젖어 있었고, 마침내 또다른 소녀의 입을 열었다. "장난치지 마! 네가 뭐라고 하건 넌 오늘 죽어. 하지만 네가 집어삼킨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들의 사기(邪氣)를 정화하는 것 또한 신녀(仙女)의 임무. 그러니까, 네게 조금이라도 인간성이 남아있다면 너 또한 기꺼이 정화해주겠어."


당찬 소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는 듯 순진한 처녀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여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마침내 본성을 드러내고 경멸과 조소(嘲笑)가 뒤섞인 표정으로 두 소녀를 바라보던 여인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는 조금씩 커져가며 물리적인 압박으로 이어지더니 마침내는 무형의 기운으로 실체를 얻어 정자(亭子)를 뒤흔들고 여인의 발밑이 움푹 파이게 만들었다. 휘몰아치는 광풍과도 같은 기의 폭주가 마침내 끝났을 즈음에는 지붕은 사라지고 정적 속에서 의기양양하게 모습을 드러낸 둥근 달만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다시 바뀐 여인은 목을 기괴하게 꺾은 채 무감정한 광기만이 가득찬 사백안(四白眼)으로 응시하며 헛소리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얼굴을 보고 대화해야지. 그래, 그래야지... 오호라 쌈박질만 아는 아이들이라기에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건만 제법 반반하구나 반반해. 키가 작은 적발의 아이가 모모, 흑발... 아니, 금발과 흑발의 아이가 필시 백토겠구나? 물론 그렇겠지. 스스로를 월궁(月宮)에서 내려온 월인(月人)이라 지칭한다더니 확실히 특이한 이름이구나. 혈연은 아닌 것 같은데 적안은 심법(心法)의 영향일까나. 아니면 월인이라서? 푸흐흐... 왠지 그럴듯하네? " 그 말대로 본래의 자리에서 세 발짝 밀려난 두 소녀의 복면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본래라면 잘 묶어 감추었을 머리카락은 풀어헤쳐져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칫! 전투 준비해 백토, 저 여자, 미쳤지만 강해. 지금까지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어쩌면 우리 둘이 전력을 다해도 힘들 정도로. 그러니까... 꼭 이기자!" 그 말과 함께 허리춤의 검을 빼어든 적발의 소녀 모모의 뒤로 양쪽에 톱날이 달린 거대한 곤(棍)을 꺼내든 백토가 자세를 잡았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보라는 듯 무심히 바라보던 여인이 마침내 양손을 들고 주먹을 쥐었다 펴자 그곳에는 검은 불꽃, 천하를 잠식하는 불꽃이라던 흑화(黑華)가 일렁이며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침내 처음의 모습, 조용한 맹수로 돌아간 여인은 양손의 흑화를 잠시 응시하다 무감정한, 어쩌면 미안함이 담긴 것도 같은 표정으로 두 소녀에게 말했다. "못 볼 꼴을 보여서 미안하구나, 나는... 뭐, 됐다. 그리고 알려주마, 삼천. 그 이후로는 귀찮아서 안 새봤다." 여인의 말에 흑금발(髪)의 소녀 백토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삼 천 명이라니? 천 명이면 충분한 대법을..." 의문에 대한 해답은 어렵지 않았다. 경악에 휩싸인 얼굴로 여인을 바라보던 백토는 제발 부정해달라는 듯 말을 이었다. "설마... 당신, 그냥... 살인을 즐기고 있던 거야? 천 명의 무고한 이들을 죽이고도 모자라서?"


그러나 여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나는 죽이는 것이 즐겁다. 내 밑에서 복종하는 것들을 벌레처럼 밟아 죽이는 것이 즐겁다. 피를 통해 힘을 얻고, 힘을 통해 피를 취하니 이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 내 살육은 내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이어질 것이니, 아이들아, 너희가 과연 나를 멈출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가볍게 발을 교차해 검기(劍氣)가 실린 모모의 찌르기와 백토의 휘두르기를 피한 여인의 두 손에 담긴 불꽃이 두 소녀에게 날아가는 것을 시작으로 끝없이 이어지던 폭음은 반 시진이 지나서야 끝내 멈췄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청년이 고기를 잡기 위해 강가로 나선 것은 한나절이 지난 새벽녘이었다.













덴세츠 엔터테인먼트는 천마신교의 교주인 뽀끄루가 자신에게 도전장을 보내온 백토와 모모를 상대해 승리하고 둘의 무공을 폐하고 운이 좋으면 살 것이라며 절벽에서 던진 것을 지나가던 사씨 성의 청년이 발견한 뒤 고통과 성장의 반복 끝에 최종보스인 줄 알았던 뽀끄루의 세뇌를 풀고 진정한 흑막을 찾아내 물리친 뒤 3명의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산다는 스토리를 기반으로 중국 수출을 목표로 한 무협 드라마의 1화짜리 파일럿 에피소드를 제작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수출에 실패해 이어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아쉽다 아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