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39914780?category=%EC%B0%BD%EC%9E%91%EB%AC%BC&p=1 <-지난 이야기


"10만년의 조곡"

러시아 상공

코드네임 포르테 상장

삼안-블랙리버 연합

12월 21일


"조정간 자동운항 설정 완료, 이제 날아가기면 하면 되는군."


EMP를 맞았지만 화소가 조금 깨진 것을 제외하고는 주변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HUD 바이저를 벗은 나는 이 군용 수송기의 객실로 가는 문을 열었다.


"속도는?"


바로 날 반겨주는 이번 작전의 차선임자 메이 소장, 아니 그냥 자신을 메이라고 불러달라고 한 바이오로이드가 날 반겨줬다.


"어느 멍청이들이 대공미사일 스위치를 자동으로 올려놓고 영원한 초병들을 가동시키는 바람에 우회할 지역이 너무 많이 생겼어. 11시간 이상 비행해야 할 것이고.... 폭풍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할 것 같다."


"시속 300km 이상으로 날아가는데도 11시간?"


"나도 뭣같기는 한데 1000km 정도로 예상했던 항속거리가 2400km 이상으로 변해서 문제지. 지금 러시아 북부는 아에 비행금지야. 시뻘겋게 자동항법장치가 들어가지 말라고 노래를 부르더라."


잠깐 머릿속에 세뇌 수준으로 들어가 있을 메뉴얼을 뒤적인 메이가 대답했다.


"내 메뉴얼에 따르면 거기는 구 러시아, 지금은 블랙리버가 보유한 거의 모든 핵무기로 합쳐진 마경으로 변했을거야. 아마 멍청한 철충들이 핵지뢰 한번 밟고 불맛을 보고 나서는 진입도 시도하지 못하는 거겠지."


"그 핵지뢰의 맛을 본 개체들 중 연결체급도 꽤 있을거고 말이야."


"엄청나게 많을거야 포르테, 핵무기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떨구는 것 뿐만 아니라 하늘을 노리는 것도 가능하니 말이지."


"그리고 그 대공화기들 중 몇개가 핵이 물려있을지도 모르니...... 시간이 촉박할 것 같지만 우회를 시도해야겠다."


"합당한 판단이야, 뭣보다 착륙하는 것도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고."


"착륙하는 것도 문제인지라 눈폭풍이 몰아닥치는 발트해를 그대로 가로질러서 온칼로 상공까지 올라갈 계획이니까 말이야, 거기까지만 이 기체가 멀쩡하게 버텨줬으면 좋겠어."


한숨을 푹 쉰 나는 승객실, 그러니까 원래라면 24명의 건장한 바이오로이드가 3일동안 쉬지 않고 전투할 물자나 2량의 대형 군용 AGS를 투입할 만한 거대한 공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쉬고 있는 그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단 확정된 비행일정을 알려줄께, 11시간 정도 비행을 할 예정이고 중간에 눈폭풍 하나를 뚫고 가야 할 것 같아."


"시간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겨우 6~7시간 더 연장되는 것으로 부족하지는 않을거다, 우리가 그 안에서 버틸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 수도 있겠지만."


발키리 모델이 질문했고 난 그 질문에 대답해줬다.


그러고보니 이 팀은 정말 조용하구나. 아니 조용할 수 밖에 없겠지, 원래 대화하던 사람들 중 대다수가 사라졌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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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비행이 계속됐다, 기체는 방사능 가득한 황무지가 된 벨라루스를 넘어 1차 기업전쟁의 잔해 위를 넘어 천천히 발트해로 가는 선회를 시작했다.


조용히 자신의 장비를 꺼내서 총정비하는 X-00를 바라보던 나는 역시 자신의 저격소총을 정비하는 발키리 모델을 보다가 그녀가 뭔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발키리, 뭔가 불편해 보이는데."


"자매들이 당할때 왼쪽 눈이 실명됐습니다, 저격에 사용하는 오른쪽 눈에는 이상이 없으니 계속 싸울 수 있습니다."


"누구한테 당한......."


자신의 코트를 살짝 벗은 그녀의 팔을 바라본 나는 그녀의 팀이 뭐에 전멸했는지 알 수 있었다, 철충 개체들 중에 그 비싼 레오나 모델과 SOB 팀을 전멸시킬수 있는 존재는 극소수였으며 오리진더스트 오버도스(과투약)으로 급격하게 상승하는 재생력으로도 막 재생을 시작한 플라즈마 화상의 정체는 모스크바 전선에 투입됐던 군인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었다.


사실상 철충의 지정사수 겸 자주 얼굴을 비추는 것과 동시에 저런 팀을 조지는데 특화된 철충의 개체, 스토커의 짓이였다.


"조금만 빨랐다면 다 살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텐데."


발키리의 중얼거림을 들은 나는 악몽같던 기억이 떠올랐다, 1차 기업전쟁 당시 재수없이 정부군에 징병당해서 산악에서 SOB와 벌였던 지긋지긋한 저격전.


전우들을 발키리 모델에게 수도 없이 잃었고, 나도 수많은 발키리 모델들과 SOB 대원들을 처리했다. 스코프의 십자 안에서 머리가 뚫려 사망한 레오나와 발키리 모델들에게 떼어낸 약장들만 해도 내 어께 패드에 실컷 감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전우들 중 어떤 미친놈은 발키리 모델의 오른쪽 눈을 뽑아서 수집하기도 했지만, 소문에 따르면 저격으로 1개 팀을 농락하고 눈을 뽑으려다가 역으로 간신히 살아있던 레오나 모델에게 당했다고 들었다.


나도 오른쪽 눈을 노리는 습관 아닌 습관이 있기는 했지만........


1차 기업전쟁이 기업측의 패전으로 끝났지만 난 오히려 내 실력을 높게 산 블랙리버에게 고용됐고 다음 세대의 발키리 모델들에 적용할 유전자를 제공하는 것으로 라이센스비를 받아 평생 떵떵거릴 정도의 재산을 쌓았다.


어떤 의미로 2차 기업전쟁에서 투입된 발키리 모델들은 내 딸, 아니 내 자매들이나 다름없었다. 딸이라고 하기에는 유전자의 유사성이 부자관계보다는 남매관계와 유사했으니까.


"그런 후회는 도움이 되지 않아, 잃어버린 사람들도 돌아오지 않고. 그저 우리는 묵묵히 앞으로 나갈 뿐이야."


"알겠습니다."


"뒤를 돌아보는건 우리가 쓰러져서 먼저 쓰러진 망자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나서지, 살아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발버둥쳐보자고."


어떻게든 총을 손질하고 있던 발키리가 보이지 않는 눈과 보이는 눈 둘 모두를 나에게 집중했다.


"뭐 혼잣말일지도 모르겠고, 복잡한 윤리적 문제는 인류가 멸종할 예정이니 빠빠이지만 난 가끔 바이오로이드들이 부러웠어."


"뭐가 말씀이십니까?"


"너희들은 만들어진 목적이 있잖아, 군인이면 군인, 예술가면 예술가, 요리사면 요리사, 서비스업이면 서비스업에 여러가지 이유들까지. 그런데 우리는 아니야."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난 그런게 부러워, 평생 내가 가야 할 길을. 내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을까라는 생각을 우리는 끊임없이 하며 자유의 무개를 끊임없이 감당하는 거야. 정말로, 이런 세상의 마지막에 서서 보면 너희들이 참 부러웠어."


이 말을 마지막으로 발키리와 나는 대화를 멈췄다, 각자의 총을 점검하며 싸울 준비를 할 뿐.


"그러면 발할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싸워보자고, 빌어먹을 철충 놈들을 하나라도 더 저승길 길동무로 대리고 가면서 말이야. 그래도 난 걱정 없겠어, 내 마지막 전장에 발키리가 있어주다니. 발할라 특체라도 되나?"


"우리는 눈보라 속에서 명예를 기다리니."


**************


내일이면 확실하게 죽을것이 분명한데도 태평하게 자고 있는 이프리트 모델과, 쌕쌕 자고 있는 엘리 퀵핸드를 바라보던 나는 정말 내가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 대열에 들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엇다.


무전기에서 들리는 신호는 그래도 '사람의 흔적'에서 알 수 없는 괴성들과 그저 지직거림으로 변했고 진즉에 철충에게 점령당한 중부 유럽으로 들어서자 이제는 칠흑같은 침묵 속에 잠겨들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그 빌어먹을 자식들 면상에 휴가증 던지고 멸망전쟁이고 자시고 간에 비스마르크의 낙원으로 놀러가는건데."


아마 1차 기업전쟁이 끝나고 1년정도 지난 시점이었을 거다. 우연한 기회로 타 회사와의 교류라는 명목으로 사원 연수의 탈을 쓴 우리 사장의 '낙원' 여행에서 만난 그 바이오로이드가 생각났다.


그 뒤로 기업전쟁이 절찬리에 터졌지만 두 또라이인 삼안과 블랙워터에 끼여죽기 싫어서 중립을 지키고 있는 비스마르크의 특성상 비스마르크로 가는 휴가는 자유로웠다.


아마 내가 약 두 달 전 휴가를 냈다면 낙원에서 푹 쉬고 있었겠지. 그리고 세상이 철충의 침공으로 멸망하는 꼬라지를 거기에서 지켜보면서 휩노스로 천천히 죽어갈 수 있었을거다.


"물론 휩노스가 방사능으로 타죽는것보다는 훨씬 온건한 죽음이겠지."


기체의 외부 카메라를 동체 내부를 구성하는 홀로그렘에 대응시켜 바깥 풍경을 바라본 나는 칠흑같은 어둠속에 잠긴 유럽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방사능 지옥으로 걸어들어갈, 그것도 살아서 나올 가능성조차 없는 상황이기에 갑자기 나한테 저격당해 사망한 SOB들이나 삼안 놈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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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테 특수임무팀 현 상황


포르테 상장: 정상

멸망의 메이: 전투력 상실

P-49 슬레이프니르: M.I.A(작전중 실종)

T-9W 발키리: 정상(한쪽 눈이 실명했으나 임무 수행에는 지장 없음)

엘리 퀵핸드: 정상(비전투인력)

P-22 하르페이아: 정상

X-00: 정상

M-5 이프리트: 정상

커넥터 유미: 정상(비전투인력)


휩노스로 죽기 vs 방사능에 문자 그대로 타죽기, 어쨋거나 Requiescat in pace verna m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