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때가 있다.
부탁하면 해결될 일이지만, 괜히 혼자서 해결하고 싶은 그런날.

오늘은 사령관에게 있어 그런 날이었다.

'라면을 끓여먹을거야'

정말 하찮고 단순한 이야기지만, 오르카호의 최고권자이자 현존하는 유일한 인간에겐 이런 단순한 일이 오히려 하기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주방에는 사령관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소완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주방에 들어가 불을 키고 물을 올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도 봐야하는 상황.

하지만, 사령관에게 불가능은 없다.
앨리스와 샬럿에게 3일 밤낮으로 쥐어짜일때에도, 스카이나이츠 전원과 하룻밤을 보낼때에도 이제 정말 죽었구나 하던 순간이 있었지만, 보다싶이 사령관은 살아남아있다.

그래, 고작 라면이다. 라면 하나 끓여먹겠다는데 감히 누가 사령관을 말리겠는가!

주방을 향해 다가갈수록 사령관은 왠지 모를 자신감이 솟구쳤고, 마치 숨쉬듯 자연스럽게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이는 상상까지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주방이 위치한 식당칸에 도착하고 사령관은 문을 밀며 안에 입장했다.

이미 뒷정리까지 끝나고 불까지 꺼져있는 주방, 라면 하나 끓여먹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그래, 그깟 라면 하난데"

혼자 있는 식당에서 왠지 모를 한기를 느낀 사령관은 애써 괜찮은 척 혼잣말까지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던 사령관의 발은 어느새 주방의 입구에 도달했고, 점점 크게만 느껴지는 압박감에 답답한 듯 목부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아, 난방이 너무 센데"

이제는 난방탓까지 해가며 어찌해야할지 고민하던 사령관의 발은 마침내 주방의 입구를 향해 힘차게 내딛었다.

"이 늦은밤에 어인 일이신지요, 주인님"

딱 한 걸음, 주방에 왼발을 걸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소완이 사령관 뒤로 나타나 귓가에 속삭였다.

"아아악!! 노...놀랬잖아!!!!"

그녀의 급작스러운 등장에 사령관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넘어졌다.

"늦은 시간에 여길 오셨다는건.....야식이 드시고 싶으셨나이까? 그런거라면 소첩에게 부탁하시면 될 것을....섭섭하옵니다"

"그냥 간단하게 먹을까해서. 맨날 부탁만 하는것도 미안하고"

"호오.....그렇사옵니까??그런것치곤 많이 수상쩍어보이옵니다만"

소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령관을 의심하는 눈초리로 살폈다.

"무슨 눈을 그렇게 떠??내가 뭐 죄 졌나?"

"냄새가 나옵니다....몸에 안좋은 냄새.....그래, 브라우니들한테서 펄펄 풍기는 이 냄새......기름에 튀긴 밀가루와 가공제품 특유의 msg냄새는 음.....
이리 내시지요"

소완은 사령관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사령관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거부했다.

"어허, 그런 백해무익한 음식으로 몸을 망치시면 저희에게도 책임이 있사옵니다"

"라면 한개 가지고 별 생각을 다하네. 그 정도는 괜찮아"

"한개가 두개 되고, 10개가 되고 습관이 되는 것이란걸 왜 모르십니까. 면요리가 드시고 싶으신거라면 소첩이 얼마든 만들어드릴수 있사온데, 참으로 답답합니다"

소완은 사령관의 고집에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번만 먹을게, 별거 아니라니깐"

"안되는건 안되는 것이옵니다.

"진짜?"

"참말이옵니다"


두 사람 다 한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어보이는 상황, 서로를 마주한 채 팽팽한 대립을 이어나가던 중 사령관은 잽싸게 바지 사이에 숨겨둔 라면을 꺼냈다.

"에이씨, 몰라!!!"

봉지채로 라면을 부수더니 이내 봉지를 뜯고 튀긴 면을 입에 넣더니, 이내 스프까지 입에 넣고는 그대로 복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기어이 그걸 먹으셔야 속이 풀리시는 겁니까!!!"

두 사람의 추격이 이어지고, 사령관은 입에 문 면과 스프를 실수로라도 넘길까 걱정된 듯 최대한 입을 부풀린 채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고, 소완은 혹여 먹더라도 뱃속에 있는걸 빼낼 기세로 한참을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두 사람이 멈춰선 곳은 브라우니들이 사용하는 온수기가 있는 곳이었다.

"헤엑....헤엑.....정녕 이렇게까지 해야겠사옵니까"

사령관의 속샘이 무엇인지 단번에 눈치챈 소완은 칼을 꺼내 온수기를 조준했다.
그러자 사령관은 온수기를 그대로 들어올리며 자신의 등 뒤로 가렸고, 차마 사령관을 조준할 수 없던 소완은 칼을 내려놓으며 마지막 무기를 꺼내들었다.


"흑.....흑흑.....어쩜 이리도 무심하시옵니까......소첩의 충정을 짓밟고 그런 음식을 먹어야 속이 풀리시는것이란 말이옵니까"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소완을 보며 사령관도 미안한 마음이 든 건지 슬픈 눈망울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두번이면 모를까.
매번 같은 방식에 당하진않는 사령관이었고, 바로 고개를 숙여 입을 벌린 뒤 입안에 온수를 넣어버리는 미친짓을 벌였다.

"으으윽....흡 크흡"

뜨거운 물과 익지도 않은 면, 그리고 스프까지 어우러져 말그대로 환장의 삼박자로 입과 목을 박살내고 있었지만, 사령관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렇다. 저것은 승리의 미소다.

소완은 생전 처음으로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저게 사람새낀가.....'

그렇게 사령관은 생라면도 아니고 끓인 라면도 아닌 찐 라면을 맛보며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