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뽀끄루와 봉봉 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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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의 도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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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유령들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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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 오르카 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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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플레이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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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주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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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아닌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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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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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닥터의 손짓과 함께 푸른 얼음의 창이 사령관을 향해 날아갔다.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춤을 추듯 휘둘러 얼음의 창을 베어낸 사령관이 한숨을 토해냈다.


  이매진 브레이커로 캔슬시킨 스킬에 영구 면역.


  처음의 이매진 브레이커로 지워진 스킬은 포티아의 익스플로전, 홍련의 페일노트, 아탈란테의 아스트라페, 팬텀의 섀도우 바인드. 하나같이 파티의 핵심 스킬이다. 준비해둔 작전 대부분이 무용지물이 되었군. 사령관이 쓰디쓴 침을 삼켰다.


  게다가 남은 이매진 브레이커는 두 번. 그 두 번을 어떻게든 깎아내지 않으면 닥터를 이길 수 없다.


  "그렇게 걱정할 틈이 없을걸!"


  두 팔을 크게 들어 올린 닥터가 망치처럼 바닥을 후려갈겼다. 가는 팔로 내리쳤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충격과 함께 바닥에 커다랗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적 소리가 나며 바닥이 갈라지고 바닥이 통째로 무너졌다. 불쾌한 부유감이 감돌고 무너지는 바닥과 함께 허공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홍련의 비명이 들렸다. 눈앞이 흔들리고 수많은 돌덩이가 눈앞을 어지럽히는 것과 동시에 저 멀리서 닥터가 커다란 돌덩이를 밟고 사령관을 향해 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끝이야, 오빠!"


  닥터가 사령관을 향해 기계팔을 휘둘렀다. 사령관도 물러서지 않고 검을 뽑아 닥터를 향해 휘둘렀다. 사령관의 검이 닥터를 두 동강 낼 듯 번뜩였다.


  순간 눈앞에서 닥터의 모습이 사라졌다.


  기계팔을 뻗어 떨어지는 암반을 붙잡은 닥터가 사령관의 검을 피해 쏘아내듯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마리아와 포티아의 앞에 도착한 닥터가 둘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안녕, 언니!"


  마리아와 포티아가 닥터의 공격에 미처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재가 되어 흩어졌다. 흩어지는 파편 사이로 경악에 물든 표정의 홍련을 본 닥터가 그녀에게도 기계팔을 휘둘렀다.


  "이런!"


  티에치엔이 아탈란테의 방패를 밟자 아탈란테가 방패를 휘둘러 그녀를 닥터를 향해 날려 보냈다. 닥터의 기계팔이 홍련의 목을 움켜쥐려는 순간 날아온 티에치엔이 닥터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유성이 떨어지듯 땅에 처박힌 닥터를 향해 아탈란테가 창을 집어던졌다.


  "흐읍!"


  쐐액 소리를 내며 날아간 창이 닥터의 머리를 향해 올곧게 날아갔다.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창을 본 닥터가 새된 비명을 내지르다 간신히 기계팔로 창을 낚아챘다. 땅에 내려앉은 사령관과 아탈란테를 향해 닥터가 창을 들고 폴짝폴짝 뛰며 볼멘소리를 터뜨렸다.


  "세상에, 아탈란테 언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 귀여운 얼굴을 향해서 창을 던질 수가 있어!"


  쿵쿵 바닥을 구르며 성을 낸 닥터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들을 보고 무안한 듯 헛기침하며 사령관을 향해 외쳤다.


  "후하하! 제법이구나, 용사여! 그렇다면 이제 이 마왕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도록 하지!"


  닥터가 하늘로 손을 뻗었다. 닥터의 손끝 허공이 거미줄처럼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산산이 깨져 흩어졌다.


  꾸드득.


  좁은 구멍에서 강철 덩어리의 손이 뻗어 나와 깨진 공간을 붙잡았다. 거대한 손이 깨진 공간을 붙잡아 억지로 벌리고 공간의 틈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현현하라! 태고의 거인, 타이탄!"


  [우오오오오오오오!!!]


  닥터의 등 뒤에서 거대한 로봇이 울부짖었다. 특유의 톱날 기계팔 외에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닥터의 호쾌한 재해석이 엿보이는 디자인이었다. 닥터가 소환한 타이탄을 보며 사령관이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예상대로다.


  이전의 공격으로 대강 파악한 이매진 브레이커의 사정거리는 닥터를 중심으로 약 10m. 지금 닥터와 사령관의 거리라면 닥터의 이매진 브레이커는 닿지 않는다. 사령관이 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크게 외쳤다.


  "계획대로 진행한다!"


  사령관의 등 뒤로 푸른 게이트가 열렸다. 게이트 너머로 보인 것은 닥터의 방 밖. 그 게이트 한가운데 서 있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보고 닥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작은 키. 푸른 머리칼. 한쪽 눈을 가리는 작은 안대.


  작은 소녀가 닥터를 향해 팔을 뻗고 크게 소리쳤다.


  "깨어나라, 폭룡이여! 파멸의 멸절의 봉인을 푸노라!"


  LRL의 외침과 함께 닥터의 방 한가운데에 나타난 타이런트가 타이탄을 향해 울부짖었다.



  *

  NPC는 보스에게 대미지를 줄 수 없다.


  그렇다면 보스는 어떨까? 보스는 같은 보스에게 대미지를 줄 수 없는 것인가?


  사령관의 물음에 리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에게 말했다.


  "생각도 못했네."


  게임의 자잘한 밸런싱 부분은 리앤의 영역. 그런 리앤이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은 닥터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보스는 NPC와 달리 보스를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승률이 낮은 도박이지만.


  그리고 지금, 사령관의 도박이 성공했다.


  타이탄과 타이런트가 울부짖으며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 타이탄의 주먹이 타이런트의 머리를 후려갈기고 타이런트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다시 주먹을 날리는 타이탄을 본 타이런트가 머리를 치켜들어 타이탄의 허리를 물어뜯었다. 느닷없이 펼쳐진 괴수 열전에 닥터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외쳤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게... 게이트는 NPC나 보스가 통과할 수 없는 거 아니었어?!"


  그래. NPC나 보스는 게이트를 통과할 수 없다. 이는 보스의 소환수 판정인 타이런트에게도 해당한다. 그렇다면 타이런트는 어떻게 게이트를 넘어 닥터의 방에 들어올 수 있었나.


  "...그렇구나! 타이런트를 소환하는 것 자체는 마법이니까!"


  "그래! 좌표를 게이트 너머로 지정해 소환하는 건 가능하단 말이지!"


  게이트는 용사의 파티원이 아니면 통과할 수 없지만, 공격은 피아를 막론하고 통과할 수 있다. 적의 화살이나 마법이 게이트를 타고 넘어와 사용자를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다.


  소환된 타이런트는 사령관의 게이트를 넘을 수 없지만, 타이런트를 소환하는 마법 자체는 게이트를 넘을 수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왜 오빠는 나를 보자마자 타이런트를 소환하지 않고 내가 타이탄을 부르고 나서야... 아니, 내가 타이탄을 불렀기 때문에 타이런트를 부를 수 있었던 거구나!`


  사령관이 타이런트를 이용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위험 요소. 타이런트를 소환한 것은 어디까지나 LRL, 사령관도 닥터도 타이런트에게 있어서는 모두 제거해야 할 대상일 뿐. 허나 타이탄이 있다면 타이런트의 주의는 모두 타이탄에게 쏠리게 된다. 타이탄을 상대하기 위해 타이런트를 부른 것이 아니다. 타이탄이 있기 때문에 타이런트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불찰이었어! 타이탄을 꺼내지 않았다면 아마 오빠는 끝까지 타이런트를 부르지 않았겠지!`


  타이런트가 타이탄의 허리를 물어뜯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타이런트가 머리를 하늘로 치켜올리자 타이탄의 거대한 몸이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 타이런트가 그대로 고개를 휘둘러 타이탄을 땅에 처박았다. 바닥이 커다랗게 갈라지며 성이 흔들렸다. 두 기의 거대한 AGS가 뒤엉켜 싸우는 충격에 성이 무너지지 않을지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타이탄이 톱니가 달린 기계팔로 타이탄의 목을 공격했다. 타이탄의 톱니팔이 타이런트의 목을 움켜쥐고 톱니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타이런트의 목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지만 타이런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타이탄의 허리를 두 동강 낼 듯 턱에 힘을 넣기 시작했다.


  "이게...!"


  닥터가 타이런트를 공격하기 위해 뛰어올랐다. 순간 사령관 쪽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강렬한 무언가가 닥터의 몸을 휩쓸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처 알아차리기 전에 두 번째 빛이 닥터의 몸을 휩쓸었다. 인정사정없는 공격에 순식간에 닥터의 HP가 절반 이하로 깎여나갔다. 통각 제한이 걸려있음에도 따끔따끔 몸을 괴롭히는 작열통에 닥터가 고개를 들어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작렬하라 사안이여! 파멸의 멸절의 봉인을 푸노라!"


  사령관의 등 뒤에서 빛이 번쩍이고 또다시 광선이 닥터를 향해 날아왔다. LRL의 눈이 번쩍이기 전에 간신히 몸을 던져 날아오는 빛을 피해낸 닥터의 눈앞에 순식간에 사령관이 날아들었다.


  "하늘 구경 좀 해볼까, 닥터!"


  닥터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사령관이 닥터의 멱살을 잡아채 하늘 높이 그녀를 집어던졌다. 순식간에 공중으로 떠오른 닥터를 향해 LRL이 눈을 번쩍였다.


  "이런...!"


  닥터가 날아오는 빛을 피하기 위해 벽을 향해 기계팔을 뻗었다. 기계팔이 벽을 붙잡기 직전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창이 닥터의 기계팔을 꿰뚫었다. 스파크가 튀며 움직이지 않는 기계팔을 본 닥터가 창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탈란테 언니, 미워!"


  "너무 네 멋대로 아니냐, 닥터!"


  사령관의 외침과 함께 LRL의 빛이 하늘을 불태우며 번쩍였다. 강렬한 빛에 닥터가 눈을 찡그리며 빛을 향해 팔을 뻗고 크게 외쳤다.


  "이매진 브레이커!"


  투웅! 소리가 울려 퍼지며 닥터의 눈을 찌르던 빛이 사라졌다. 가늘게 눈을 뜨고 사령관과 LRL을 본 닥터에게 다시 한번 LRL의 광선이 날아왔다.


  "흥! 이제 LRL의 빛은 나한테 안통하... 으꺄아아악!!"


  공중에서 허리춤에 손을 얹고 가슴을 펴며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던 닥터가 LRL의 빛에 휩쓸렸다. 온몸을 휩쓰는 따끔한 고통에 닥터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터뜨렸다. 닥터가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집요하게 노린 LRL은 기어이 닥터가 바닥에 닿기 전까지 두 번이나 빛으로 맞추었다. 바닥에 떨어진 닥터가 길길이 날뛰며 사령관과 LRL을 노려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분에 차 발을 구르는 닥터의 눈에 LRL의 손에 들린 붉은 색 작은 권총이 들어왔다. 총구에서 하얀 연기를 토해내는 작은 권총이.


  닥터가 그제야 사건의 전말을 파악했다.


  "내가 지워낸 건..."


  "LRL의 신호탄이었다는 소리지."


  사령관이 닥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닥터가 번뜩이는 두 자루의 검을 간신히 피해내자 바윗덩어리가 잘게 썰려나갔다. 검을 휘두르는 것에 한 치의 망설임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닥터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무해, 오빠! 나같이 귀여운 미소녀한테 칼을 휘두르다니!"


  "정말 가슴이 찢어질 것 같구나."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슬픈 목소리와는 달리 사령관의 검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사령관을 향해 닥터가 하늘로 손을 뻗으며 외쳤다.


  "3천만 볼트, 뇌조!"


  닥터의 손끝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커다랗게 튀어 오른 스파크가 제 몸을 불려 어느새 푸른 번개의 새로 자라났다. 커다랗게 울부짖은 푸른 새가 부리를 벌리고 잡아먹을 듯 사령관을 향해 날아갔다. 사령관이 닥터에게 달려들어 기계팔에 꽂힌 창을 뽑아들자마자 푸른 번개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사령관을 집어삼켰다. 날뛰는 푸른 뇌조의 품속에서 사령관이 아탈란테의 창을 들어 올렸다.


  "아직 내 기술은 막아본 적 없지, 닥터?"


  아탈란테의 최고위 기술인 천신의 창 아스트라페. 실제로 번개가 창에 내리치는 효과를 이용해 번개 공격을 무효화 할 수 있다는 것은 골타리온과 싸우며 확인했다. 번개를 휘감은 창을 휘두르는 사령관을 본 닥터가 그를 향해 거대한 화염 덩어리를 집어던졌다.


  "내리쳐라! 천신의 창, 아스트라페!"


  "대염계, 염제!"


  화염과 번개가 충돌하며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다가가기만 해도 녹아내릴 것 같은 고열의 폭풍에 사령관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기계팔을 바닥에 박아넣어 폭풍을 버텨낸 닥터가 아직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사령관을 향해 달려 나갔다.


  "끝이야, 오빠!"


  거대한 주먹으로 사령관을 짓이기기 직전, 푸른 화살이 날아와 닥터의 관자놀이를 후려갈겼다. 시야가 뒤틀리며 기계팔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사령관이 몸을 일으켜 닥터를 붙잡고 바닥에 메다꽂았다. 닥터를 거의 바닥에 심듯이 꽂아버린 사령관이 닥터를 짓누르며 비릿하게 웃었다.


  "누가 더 튼튼한지, 참기 대결을 한 번 해볼까?"


  그 말과 동시에 LRL의 눈이 번쩍였다. 사령관의 속셈을 눈치챈 닥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닥터의 남은 HP는 절반 이하. 아무리 보스라도 이대로 사령관과 함께 LRL의 공격을 맞는다면 닥터 쪽의 피해가 막심한 것은 자명. 사령관은 틀림없이 회복 스킬을 가지고 있으리라. 사령관을 떨어뜨리기 위해 몸부림치던 닥터가 강해지는 LRL의 빛을 보고 이를 악물며 외쳤다.


  "이매진 브레이커!"


  투웅! 소리와 함께 사령관과 닥터를 향해 날아오던 빛이 산산이 부서졌다. 사령관을 걷어차 떼어낸 닥터가 LRL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홍련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던 닥터가 커다란 흔들림과 함께 휘청거리더니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닥터의 주먹이 홍련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고 닥터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아니, 닥터가 떠오른 것이 아니다.


  "성이... 추락하고 있어?!"


  저 멀리 게이트 너머로 어디선가 나타난 슬레이프니르가 LRL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이 눈에 보였다. LRL이 멀리 사라지며 타이탄과 끈질기게 싸우던 타이런트도 먼지처럼 사라지며 그 모습을 감추었다.


  닥터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공중을 떠도는 사령관의 손에 주먹만 한 구슬이 쥐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황금빛 광채를 뿜어내며 찬란하게 빛나던 구슬이 마지막 한숨처럼 미약한 빛을 파르르 뱉어내다 이내 그 광채를 잃고 회색으로 물들었다.


  "부유석...?"


  라퓨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잠들어있는, 라퓨타 전체를 떠받치는 반중력의 돌. 설정 속에서만 등장하는 물건이니 사령관이 해당 물건에 대해 알 방법은 없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그가 부유석을 손에 넣게 된 걸까?


  `리앤 언니겠지! 리앤 언니도 오빠가 부유석을 저렇게 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지만...!`


  닥터의 이매진 브레이커에 휘말려 힘을 잃은 부유석. 그 영향으로 대지를 향해 추락하기 시작한 라퓨타. 닥터의 HP는 절반 이하. 허나 그 피해의 대부분은 LRL의 공격에 의한 것. 사령관과 그의 파티가 준 피해는 미약하기 그지없다. 이매진 브레이커가 없다고는 하나 이제 내밀 수 있는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그가 노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게 오빠의 마지막 수단이야?"


  공중을 떠도는 돌덩이를 밟고 튀어 나간 닥터가 사령관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기계팔의 주먹을 막아낸 사령관을 향해 닥터가 비웃는 목소리로 외쳤다.


  "추락하는 대미지로 게임판을 뒤엎으려는 거야? 안됐지만 나는 추락에는 대미지를 입지 않거든! 죽는 건 오빠 뿐이라는 거야, 바보 바보!"


  "너 캐릭터가 바뀌지 않았냐?!"


  닥터의 손목을 움켜쥔 사령관이 닥터를 휘둘러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닥터를 공중에서 낚아챈 티에치엔이 몸이 움직이지 않도록 벽에 발을 박아넣고 팔로 닥터를 옭아매었다.


  "이익! 이번엔 또 뭐야!"


  "글쎄? 나도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거라."


  티에치엔의 말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사령관에게 마지막 카드가 남아있다. 집요하게 이매진 브레이커를 깎아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닥터에게 내밀 마지막 카드가.


  닥터의 머리 위, 추락하는 성 한가운데 드높은 허공에서 사령관이 찬란히 빛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세계수의 숲 가장 깊은 곳 이그드라실의 뿌리 아래 잠들어있는 검.


  마왕을 물리칠 용사를 위한 검.


  약속된 승리의 검.


  가상 현실 게임이 완성되고 마왕을 물리칠 용사를 위해 준비된 필승의 검.


  "...뭐야! 그게 왜 오빠한테 있어! 그건 오빠가 쓰라고 만든 게 아니라구!"


  "엑스칼리버!"


  사령관이 닥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모든 것을 꿰뚫는 거대한 빛이 닥터를 향해 날아갔다. 찬란한 빛무리를 바라본 닥터가 지은 표정은 절망도, 실망도, 분노도 아닌 승리를 예감한 희열의 눈빛이었다.


  "하! 오빠가 언제나 그랬지! 비장의 무기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숨겨두는 법이라고!"


  닥터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쏟아지는 빛을 향해 손을 치켜든 닥터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이매진 브레이커!"


  세 번의 이매진 브레이커를 모두 깎아낸 사령관을 비웃기라도 하듯 활시위를 튕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찬란한 빛이 산산이 부서졌다. 숨겨진 비장의 무기.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네 번째 이매진 브레이커. 눈송이처럼 흩어지는 빛무리 사이에서 닥터가 승리를 예견하며 미소 지었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티에치엔을 집어던진 닥터가 사령관을 향해 크게 외쳤다.


  "내가 이겼어! 오ㅃ..."


  푸욱.


  날붙이가 근육과 장기를 밀어젖히며 파고드는 불쾌한 소리가 닥터의 말을 잘게 끊어냈다. 떨리는 고개를 간신히 숙여 가슴을 바라보니 명치를 뚫고 솟아오른 날붙이가 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쉿. 조용히."


  닥터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비 독이야. 아무리 너라도 제대로 맞았으니 잠깐은 움직이지 못하겠지."


  팬텀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평소의 어리숙하고도 다정한 눈빛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하게.


  "어... 어떻게... 팬텀 언니는 분명..."


  "분신이라는 스킬이 있던데, 아마 네가 나보다 잘 알지 않을까?"


  닥터가 움직이지 않는 팔을 채찍질해 팬텀을 밀어냈다. 팬텀이 순순히 칼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독이 온몸에 퍼지는 느낌과 함께 닥터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닥터의 뺨에 닿았다. 떨어지는 성에 휩쓸려 닥터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고 독에 젖어 몽롱한 눈빛으로 닥터가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그때, 사령관이 닥터를 향해 속삭였다. 낮고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저 멀리서 말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닥터의 귓가를 맴돌았다.


  "내가 늘 그랬지, 닥터? 비장의 무기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겨두는 법이라고."


  사령관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커다랗게 열리는 푸른 게이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누군가를 보고 닥터가 커다랗게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닥터가 사령관의 계획을 눈치챘다.


  사령관이 이 성을 떨어뜨린 것은 추락사도, 승리의 검을 뽑기 위한 빈틈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는걸.


  그저 지상에 게이트가 닿는 높이까지 이 성을 끌어내리기 위함이었다는걸.


  이 모든 것은, 푸른 강철의 용을 불러내기 위해서.


  "내 마지막 비장의 수다, 닥터."


  그 말을 끝으로 글라시아스의 푸른 숨결이 닥터를 휩쓸었다.



  *

  닥터가 글라시아스의 공격에 쓰러지자 사령관은 가상현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가상현실에서 벗어나자마자 닥터의 엉덩이를 두들겨주기 위해 연구실로 들이닥친 사령관은 상상도 못 한 광경을 마주쳤다.


  "히끅... 히끅... 오빠는 바보야!! 으아아앙!!"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사령관에게 패배한 것이 분해서인지, 끝까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은 사령관을 향한 원망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닥터는 연구실 한가운데에서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닥터를 본 사령관이 마치 조신한 바바리아나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기괴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화내지 않던 사람이 화내면 무서운 것처럼, 평소에 울지 않던 사람이 울면 끝이 없는지 사령관이 닥터를 어르고 달래는 데 자그마치 한 시간이 걸렸다. 간신히 울음을 그친 닥터를 품에 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사령관이 닥터를 향해 다정하게 물었다.


  "이제 충분히 울었어?"


  "으... 으응..."


  "좋아. 그러면 이제 엉덩이 맞자."


  "에?"


  사령관은 간신히 울음을 그친 닥터의 엉덩이를 기어이 손이 얼얼해질 때까지 때렸고, 닥터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홍련은 닥터가 잘못한 것은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령관이 심했다고 질책했으며, 결국 사령관은 닥터를 호되게 혼낸 죄로 콘스탄챠와 페로에게 불려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우는 어린애를 울음을 그치게 한 다음에 엉덩이를 때리는 건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가요?!"


  "아무리 닥터가 잘못했어도 그건 조금 심했다고 생각해요, 주인님!"


  콘스탄챠와 페로에게 호되게 혼난 사령관은 닥터에게 돌아가 그녀를 다시 어르고 달랬고, 닥터의 가상 현실 게임을 완성하는데 협력하기로 약속하여 간신히 달랠 수 있었다.


  석 달가량의 투자와 개발 끝에 닥터의 게임은 완성될 수 있었고, 커다란 투자와 스케일 만큼이나 커다란 반응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한 브라우니가 닥터가 원인 모를 이유로 자신의 계정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며 사령관에게 신세 한탄하러 온 것은 덤이다.


  "후우... 이제 좀 살겠군."


  어둑한 복도에서 사령관이 달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밀린 일을 처리하랴 닥터와 게임을 만들랴 끝없이 밀려오는 일거리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에 과로사하지 않을지 진지하게 걱정할 지경이었다. 닥터의 게임을 완성하고 간신히 찾아온 휴일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기분이었다. 다 마신 맥주를 쓰레기통에 던져넣으니 달빛 없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만나다니 별일이네, 용."


  "만난 게 아니라 찾으러 온 것이오. 그대를 만나고 싶었으니."


  뜻밖의 말에 사령관이 눈썹을 치켜들며 용을 바라보자 그녀가 살포시 웃었다.


  "술자리에 그대가 없다고 찾는 사람이 많소. 이리 말하는 나도 시끌벅적한 술자리에서 한숨 돌리기 위해 벗어난 것이지만."


  그러고 보니 저 멀리서 음악 소리가 잔향처럼 들려온다. 여기까지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시끄러운 모양이지. 달을 올려다보며 웃던 사령관이 문득 미소를 지으며 용에게 손을 내밀었다.


  "음악도 들려오겠다, 저번처럼 한 곡 춰볼까?"


  "...두 번 다시 하기 싫다고 말했던 것 같소만."


  "내 앞이 아니라면 두 번 다시 하기 싫다는 소리였지?"


  사령관의 말에 망설이던 용이 얼굴을 붉히며 사령관의 손을 맞잡았다. 사령관의 품에 안긴 용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부드럽게 해 주시오."


  "걱정하지 마. 한없이 부드럽게 안아줄 테니까."


  그렇게 용과 사령관의 달빛만이 들이치는 복도의 작은 무도회는 왁자지껄한 술자리의 음악 소리가 끊길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