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끼던 고전 게임기가 황천을 건넜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내 생일을 기념하며 큰맘먹고 질렀던, 이젠 구하려 해도 못 구하는 물건.

 

바로 그 게임기 위에다가 물을 엎질러버렸다. 그 와중에 화분까지 바닥에 뒹구는 건 덤이다.

 

내 부주의로 그랬으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지도 않았을 거다. 범인은 내 앞에 있는 저 웬수같은 녀석, 브라우니다. 녀석도 지가 잘못한 건 아는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저...그...주인님...”

 

가정용 중고 브라우니 모델, 속칭 ‘브닐라’가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함다.”

 

‘뭐? 죄송? 죄에소옹? 이게 네 생각엔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냐?’로 시작해서 수 시간이 넘도록 이어지는 극한의 갈굼을 선사해줄까, 하는 충동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쩌리, 얘라고 일부러 이랬겠나. 태생이 덜렁이인데다, 중상까지 입어서 방출된 녀석인데 내가 참아야지, 내가.... 

 

(바이오로이드라곤 해도) 군대에서 뺑이칠거 다 치다 온 상이군인한테 그런 식으로 구는 것도 내가 할 짓은 못되고. 크게 한숨을 내뱉고 애써 태연한 척 대꾸한다. 

 

“됐어, 괜찮아. 이건 내가 치울 테니까 가서 다른 거 해.”

 

브닐라가 쓰라고 사왔던 빗자루 세트를 들고 화분의 파편을 치운다. 아무래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구만. 녀석은 빨래를 개면서 내 눈치를 살핀다. 꼴에 빨래 개는 건 빠릿빠릿한데다 칼각까지 잡혀있다. 

 

그러고 보니 이 빗자루, 어째 저 녀석보단 내가 더 자주 쓰는 느낌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저 자식이 오고 나서 일이 더 생기면 생겼지, 딱히 줄어들진 않은 것 같다. 아니, 쟤 식비랑 저 자식이 박살낸 집기 값만 계산 해봐도 지금쯤 저거 몸값 절반은 넘어갈텐데....아니, 애초에 가사 기능도 있다던 녀석이 제대로 하는 건 빨래 개는 거랑 걸레질 뿐이고ㅡ

 

아니 생각하니까 또 빡치네 이런 ㅆ 

 

 

.........................

 

 

모든 것은 가사 도우미가 하나 갖고싶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혼자 살면서 일개미처럼 일만 죽어라 한 결과 수중에 돈은 약간 생겼지만, 그 대가로 지독한 외로움과 따분함, 그리고 엉망이 되어버린 집구석이 따라오고 말았다.

 

그렇다고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귀하디 귀한 휴일을 집안일에 희생하기도 곤란한 노릇이었다.

 

이게, 내 일이 보기보다 할 것도 많고 업무 강도도 세단 말이지. 그런 이유에서 누가 귀찮은 일 좀 대신해주지 않으려나-하면서 웹서핑이나 하고 있으려니 마침 가정용 바이오로이드 광고가 눈에 들어오더라. 

 

가정용 바이오로이드라. 집안일은 물론, 말동무로도 상당히 괜찮다고 들었다. 당장 내 친구도 바이오로이드 하나 들이고 나선 외로움이 훨씬 덜 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었지.

 

좋다, 마침 모아놓은 돈도 있겠다. 적당한 모델이 있나 한번 둘러보자.

 

“(특가 할인) 삼안산업의 대표 가정용 메이드, 바닐라A1!”

 

배너에는 귀엽지만 은근히 성깔 있게 생긴 가시내 하나가 새겨져 있다. 출시된지는 좀 되었지만 여전히 저렴해서 인기만점이란다. 

 

어디보자, 범용 가사 모듈 기본 탑재, 기본 27개 언어 구사 가능, 사은품 무로 옵션으로 기본 전투 모듈과 AK 소총 증정...스펙은 좋네. 하지만 바닐라는 뭔가 께름칙하다.

 

나는 바이오로이드니 뭐니 하는 건 잘 모르지만, 바닐라 오너인 내 친구가 평소에 어떤 구박을 듣고 사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식으로 집에서까지 갈굼받는 건 사양이다. 고로 바닐라는 기각. 

 

어디보자, 콘스탄챠S2 모델도 할인 행사 중이란다. 상당한 수준의 비서 업무까지 수행 가능한데다 여러모로 바닐라와는 비교도 안 되는 플래그십 라인업이지만....얘 하나면 바닐라로 중대도 꾸리겠다. 내가 그 정도 예산이 있을 턱이 있나. 그런 관계로 콘스탄챠도 아웃.

 

그 외에도 사이트에는 금란이니 뭐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여러 메이드 모델들이 많았지만 다들 가성비가 맞지 않았다. 나는 적당히 빨래 돌리고 청소하고, 저녁밥 차려주는 정도면 족하다. 회계 업무 대행이니 긴급 의료 시술이니 하는 건 나한텐 너무 오버 스펙이라고. 

 

그렇게 이리저리 고민하던 와중, 카탈로그 구석에 다른 모델들보다 훨씬 저렴한 모델이 하나 눈에 띄었다. 

 




“(초특가) 가정용 보급형 메이드 브닐라 T2” 

 

제품 사진란에는 바닐라A1의 의상을 입은 한 바이오로이드가 올라와 있었다. 갈색 단발에 해맑고 생글생글한 표정...어딘가 바닐라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게 참 묘하게 생겼다. 

 

상세 설명란을 보자니... 7개 언어 구사 가능, 전투 모듈 기본 탑재, 가사 기능 보유. 무엇보다 ‘기존 바닐라A1 모델에 비해 부드러운 말투와 긍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 이 정도면 아주 매력적인 조건이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점이....이거 가격이 말이 안 되게 저렴한데? 

 

바닐라의 1/20, 인도네시아산 보급형 메이드의 1/3 가격이다. 중고인가 의심했더니 중고는 아니고 ’리퍼 상품‘이랜다. 바이오로이드도 리퍼비시가 다 있나. 

 

어쨌든 가격도 좋고 기능도 딱 좋고, 뭣보다 성격도 바닐라보다 유들유들하고 다 좋은데, 이렇게 싸니까 의심이 안 될 수가 없단 말이지. 

 

이걸 어째야 되나 고민하고 있으려니 문득 눈에 들어오는 한 가지.

 

’재고 수량: 1 (매진임박!)‘

 

아니 인간적으로 이건 반칙 아닙니까. 

 

급한 마음에 부랴부랴 인터넷에 ’브닐라 T2‘를 검색해봐도 쓸만한 정보가 없었다. 기껏해야 ”아 브닐라 귀여워 죽겠네ㅋㅋㅋ“ ”브닐라 꿀밤마렵다“ 같은 영양가 없는 글 뿐. 그나마 건진 거라곤 스팸하고 양파튀김을 아주 좋아한다는 정도. 거 참 특이한 식성 다 보겠네.

 

오히려 연관 항목으로 나오는 건 군용 바이오로이드인 T-2 브라우니다. 얼굴은 완전히 똑같이 생겨먹었다. 얘들 민수용 라인업이 브닐라인건가? 자동차도 그렇고 군용 기반인 거 함부로 샀다간 불편한 게 한두 개가 아니던데....

 

솔직히 수상하다. 엄청 수상하긴 한데, 그렇다고 내일까지 고민하다 보면 누가 먼저 홀랑 집어갈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까지 고민만 하다가 눈앞에서 놓친 매물이 몇 개였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는 새에 이미 결제가 완료되어 있었다. 역시 손은 머리보다 빨랐다. 이번달 카드값을 어쩐다...

 

.........................

 

구매일로부터 2주 정도가 지났을 때였나, 업체 쪽에서 연락이 왔다. 자기네 쪽에서 이미 등록과 기타 서류 절차는 마쳐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상품이 ’곧 댁으로 방문할 테니‘ 잊지 말고 수령해 주시란다.

 

”엥, 얘가 직접 여기로 온다고요? 배송돼서 오는 게 아니고요?“

 

”얘들 크기랑 무게 생각하면 그냥 차비 쥐어주고 직접 보내는 게 훨씬 싸고 빠르죠.“

 

그 말도 일리는 있네. 

 

마침 토요일이라 일도 없겠다, 얘가 언제 오려나 기다려 보기로 했다. 곧 온다고 했으니 오래 걸리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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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오긴 개1뿔이. 지금 밤 10시가 넘었다. 이 자식들 내 주소는 제대로 적어준 거 맞나? 내일이든 모레든 한 번 전화해서 따져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갑작스레 도어벨이 울리더니, 어느 여자의 맥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함다, 여기가 삼안 트리플 레져빌 A동 711호 맞슴까? 제발 맞다고 해주십쇼, 저 너무 힘듬다...“

 

아마 얘가 걘갑다. 거 오래도 걸렸네.

 

”아, 응, 맞게 찾아왔어. 지금 문 열어줄게.“

 

 



 

문을 열었더니 이 바이오로이드가 현관에서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으아앙“하고 우는 소리를 내길래 자세히 살펴보니, 머리도 살짝 헝클어져 있고 옷매무새도 너저분하다. 바리바리 싸들고 온 짐짝들도 뭐가 들어있는지 하나같이 엄청나게 무거워 보인다. 

 

...이 자식들 차비도 안 주고 보냈구만. 제 몸무게 이상 나가는 짐을 들고 하루 종일 걸어왔으니 진이 안 빠지는 게 이상하지.

 

”진짜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슴다. 목도 마르고, 팔이랑 허리도 하프고, 발목도 너무 아픔다! 예전에 행군할 때도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지 말임다!“ 

 

근데 이 녀석, 가만 보니 말투도 특이하고 분위기도 뭔가 메이드하곤 거리가 멀어보인다. 뭔가 느낌이 쎄-한데. 

 

그런데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이 분야의 대표주자인 바닐라부터가 메이드로서의 싸가지는 엿 바꿔먹지 않았나. 우선은 이 지치고 힘든 것부터 안에 들이고 봐야지. 힘들다고 발버둥치는 녀석을 도와 신발도 벗겨주고, 군용 냄새가 풀풀나는 배낭도 들어주었다.

 

...안에 금괴라도 들었나, 뭐가 이렇게 무겁지?

 

애초에 내 힘으론 들 수조차 없을 것 같다. 계속 힘을 줬다간 가방끈만 찢어질 듯한 느낌이라 우선은 조심히 구석으로 밀어둔다. 이것도 쉽지않다. 

 

무거운 배낭과 다른 짐가방들을 낑낑거리며 겨우 구석에 밀어놓고 브닐라를 슬쩍 돌아보니, 하이힐을 신고 걷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울상을 하고선 발목을 계속 주무르고 있다. 

 

뭔가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한심하기도 한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문득 녀석의 매끈하게 뻗은 다리와 거기에 걸쳐진 흰 스타킹이 눈에 들어온다. 히잉, 하며 온갖 엄살은 다 부리는 그 얼굴도 그렇고. 새삼스레 느끼는 거지만 바이오로이드들이 다들 예쁘긴 참 예쁘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얘들도 생물학적으론 인간 여자들이랑 완벽히 똑같다고 했지. 그럼...

 

아니야,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애초에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생각으로 산 것도 아니고, 초장부터 그런 식으로 손대면 나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다.

 

어느새 브닐라가 내 앞에 차렷자세로 서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석이 내게 경례를 붙이며 우렁찬 목소리로 뭔가를 외치기 시작했다.

 

”가정용 메이드 모델 브!라- 아니 브!닐!라! 제조번호 4077번!“ 

 

...뭔가 소름끼치게 익숙한 어조인데. 살면서 들어본 기억은 없지만 뭔가 마음에 안든다.

 

“...금일 부로 주인님의 소유가 되어 이에 신고합니다!“

 

멍 때리고 있었더니 그새 다 읊은 모양이다.

 

”어...음, 반가워. 앞으로 잘 부탁할게.“

 

뭐라고 해야될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했던 메이드는 이런 게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오늘은 날도 늦었으니 브닐라를 씻겨놓고 바로 재울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녀석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나왔다. 녀석이 겁먹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나를 올려다 본다.

 

”저...처음부터 이런 말씀 드리고 싶진 않았는데....배가 너무 고프지 말임다.“

 

...일단은 뭘 좀 먹여야 쓰겠구만.

 

브닐라는 기다리면서 샤워라도 하라고 욕실에 넣어놓고, 급한대로 밥통에 남아있던 쌀밥과 내일 먹으려고 남겨둔 김치찌개를 데우고, 기왕 가스렌지 켠 김에 계란 후라이 두 점도 차려 주기로 했다. 

 

잠시 후 세상 개운한 표정으로 욕실에서 나온 브닐라는 내 낡은 티셔츠와 잠옷 바지를 걸치고 있었다. 내가 갖다놓긴 했지만, 헐렁헐렁한게 어째 아빠 옷을 걸친 꼬마아이 같아서 웃음이 나온다. 

 

별 것 아닌 남정네 자취밥인데도 브닐라는 시장이 반찬이란 것인지 아주 맛나게 먹어주었다. 보는 내가 숨이 다 넘어갈 지경으로 허겁지겁 넘겨대는 게 이러다 탈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그래도 저렇게 해맑은 표정으로 ”진짜 맛있슴다! 예전에 먹었던 깡통 수프보다 훨씬 맛있지 말임다!“라고 해주니 뿌듯한 기분이 든다. 

 

”주인님 요리도 엄청 잘하시지 말임다!“

 

녀석이 입가에 밥풀을 붙인 채로 헤벌레 웃어보인다. 이빨 사이에 고춧가루도 보인다.

 

”하하, 뭘 이런 거 가지고. 천천히 먹어. 모자라다 싶으면 말 하고.“

 

....근데 내 저녁밥 차려달라고 데려온 녀석한테 내가 야식을 차려주고 있네. 아이러니하구만.

 

..................................

 

때늦은 식사를 마친 브닐라를 방으로 데려갔다. 이 녀석을 위해 장만해둔 저렴한 침대가 보인다. 그래도 매트리스는 나름 푹신한 걸로 얹어놨으니 그리 불편하진 않을 거다.

 

...그런데 얘는 뜬금없이 바닥에 국방색 모포를 깔고 있다. 

 

잉?

 

”침대는 주인님 쓰셔야지 말임다. 저는 바닥에서 자면 되니까 걱정 안하셔도 됨다.“

 

내 침대는 내 방에 따로 있고, 이건 너 쓰라고 새로 갖다놓은 거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브닐라는 감격에 찬 눈으로 날 올려다 보았다. 눈가가 촉촉한 게 가식이 아니라 진짜로 감동한 느낌이다. 

 

...이 자식은 이전까지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이렇게 편한 데는 처음 누워보지 말임다. 수복실 침대도 이것처럼 포근하진 않았슴다!“라며 행복하게 재잘대는 브닐라. 중고로 적당히 가져온 싸구려 침대에 진심으로 온갖 감사의 멘트를 날려대니 듣는 내가 더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어...음...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오늘은 일단 푹 자고, 내일 마저 얘기하자.“

 

”넵...주인님도 잘....주무십쇼....“

 

인사를 건넨 브닐라는 곧바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이 녀석 온다고 침대를 하나 더 장만해두길 잘 했지. 아주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졌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건지, 미소짓는 얼굴로 곤히 자는 모습이 얼핏보면 무슨 천사 같기도 하다. 이렇게 예쁘장한 아가씨가 자는 걸 가까이서 본 것도 처음이고. 

 

뭐, 여러모로 미심쩍은 구석도 많지만, 확실히 첫 인상은 귀엽ㅡ 

 

...얘 코도 고는구나.

 

...그것도 무지 시끄럽게 고는구나.

 

....방문을 닫아도 들리는구나.

 

이런 ㅆ

 

..............................

 

...으으음.

 

뭔가 특이한 냄새가 집 안에 퍼진다. 덕분에 확 잠기운은 확 가셨구만.

 

머리가 다 아프다. 또 피곤해 죽겠다. 그럴만도 하지. 브닐라가 꿀잠을 자는 동안 막상 나는 우렁차디 우렁찬 저 녀석의 코골음에 한참동안 잠을 설쳐야 했으니까. 

 

그래도 저 녀석이 무슨 죄가 있으랴. 죄가 있다면 그 썩을 놈의 업체쪽이겠지. 주말도 영업한다니까 전화라도 넣어서 좀 따져야겠다. 애한테 차비도 안 주고 보내서 녹초를 만들어 놓은 것도 그렇지만, 고객을 하루 종일 기다리게 만든 건 꼭 클레임을 걸어야지, 도저히 그냥은 못 넘어가겠다. 

 

...근데 이 역한 냄새는 뭐냐.

 

비틀비틀 침대에서 걸어나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광경은 주방에서 허둥지둥 어쩔 줄 몰라하는 브닐라.

 

그리고 이 냄새는 뭔가 타는 냄새 같기도 하고...어 잠깐

 

 

이 새끼 부엌에 불냈다

 

 

브닐라의 앞에는 지옥불마냥 타오르는 후라이팬이 흉흉한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벤틸레이션 후드에까지 닿을 기세로 넘실대는 화염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나 깨끗하게 관리해왔던 내 부엌에 저런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뭐지 시밤 꿈인가.

 

나도 모르게 쌍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괴상한 표정을 지은 브닐라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주인님, 일어나셨지 말임다?“

 

그 순간 정신을 차린 나는 재빨리 소화기를 가져왔고, 브닐라를 밀쳐낸 후 겨우 불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내 팔뚝에 있던 잔털들이 홀라당 타버렸다. 무슨 오징어타는 냄새가 나네.

 

잠시 숨을 돌린 후 난장판이 된 현장을 살펴보자니, 화재의 근원지인 후라이팬 위엔 납작한 숯검댕 같은 것이 여러 개 들러붙어 있었다. 그리고 도마 위에 흥건한 기름기와 네모난 깡통이 보인다. 이건 분명....

 

쟤들이 그리도 환장한다던 스팸을 굽다가 저 참사를 일으킨 모양이다. 

 

아니 근데 대체 뭔 짓을 해야 스팸 굽다가 저 지랄을 낼 수가 있지?

 

흘깃, 옆쪽을 째려보니 앞치마를 그러쥐고 불안해하는 브닐라가 보인다.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

 

”그게...실수로 식용유를 너무 많이 흘렸더니 갑자기 불이 붙어서...물을 부어서 끄려고 했더니 불길이 더 세졌지 말임다...“

 

...엥?

 

아무리 저가형 메이드라곤 해도 저런 실수를 하나? 아니 애초에 옷만 바닐라처럼 입었지 저거 아무리 봐도 하는 게 그냥 멍청한 군바ㄹ

 

....그 순간 인터넷에서 보았던 T-2 브라우니 모델에 관한 정보가 머릿속을 스쳤다.

 

사고 많이 치고, 멍청하고, 엄살 자주 부리고, 그러면서도 대책 없이 낙천적이며 스팸과 튀긴 양파에 환장한다는. 이거 그냥 브닐라 그 자체잖아.

 

얘 하는 짓이 보니 가사모듈 이식도 안 받은 모양새인데, 아무래도 사기 당했나보다.

 

잔뜩 풀이죽어서는 사과를 건네오는 브닐라, 아니 브라우니를 무시하며 판매 업체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날 기다리게 만든 건 이제 중요하지도 않다. 이 자식들 군 방출품에 옷만 입혀서 팔아치워? 

 

”...‘해피 메이드 샵’입니다.“

 

오냐. 이틀 아니 하루동안 응어리진 분노를 맛보아라.

 

”그쪽 샵에서 구매한 브닐라 모델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바닐라요?“

 

”아뇨, 브닐라. 브닐라 T2요. 그쪽이 군바리한테 바닐라 옷 입혀서 팔아치운 거요.“

 

업체 사장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오자, 갑자기 브닐라는 눈에 띄게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하, 무슨 문제가 있으실까요?“

 

”우선 차비 주고 보내셨다면서 얘가 도보로 왔더라고요. 물어봐도 차비같은 건 받은 적도 없다고 하고. 그거 때문에 제가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아,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짜증 가득한 눈길로 브닐라를 쏘아보자 녀석은 ‘힉,’하고 몸서리쳤다. 

 

”전 어느정도 가사 업무가 가능한 모델을 구하고 싶었던 건데, 얜 보아하니 상품설명이랑 다르게 가사 능력이 아예 없는 것 같더라구요. 지금도 대낮부터 얘가 부엌에 불 낸 거 겨우 끄고 전화드린 겁니다.“

 

갑자기 브닐라가 바닥에 꿇어앉아 ‘주인님, 주인님,’ 하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을 한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넌 내가 감당이 안 될 것 같다.

 

”저도 수령하자마자 이런 말씀 드리고 싶진 않은데, 아무래도 얘는 반품...“

 

 

 

 

‘반품’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갑자기 브닐라가 내 다리를 와락 끌어안고 하늘이 떨어져라 울어대기 시작했다. 어어 얘 왜 이래, 우리 얼굴 본지 얼마나 됐다고.

 

”으아아아앙 반품은 안 됨다! 절대 안 됨다! 이번에도 빠꾸먹으면 저 진짜로 죽슴다!“

 

”잠깐만요. 아니 미안한데, 혼나는 건 네 사정이고. 나도 내 사정이 있는데 첫날부터 집안에 불내는 메이드 조무사를 데리고 있을 순 없잖아.“

 

”으흐으으윽....혼이라니 무슨 말씀이심까! 진짜로, 문자 그대로, 그냥 죽는 검다! 심하게 망가져서 반품된 애들처럼 어디로 끌려가서 지독한 일 당하다가 죽어버린다 이 말이지 말임다!“

 

 

이건 또 뭔 소리여

 

”못 믿으시겠으면 사장님한테 물어보지 말임다! 이번에도 빠꾸되면 바로 그짝으로 보내버린다고 분명히 그러셨지 말임다!“

 

”....들으셨죠? 얘가 말한 거 진짭니까?“

 

반신반의하며 물어봤더니 그쪽에선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하더라.

 

”아, 네, 뭐...그쵸. C구역 아시죠? 그 어디 브랜드 테마파크에 있는 곳. 보통 수복이 힘들 정도로 망가졌거나 심각한 하자가 있는 애들을 보내는데...“

 

C구역. 인터넷 썰로는 들어봤다. 바이오로이드들을 상대로 차마 인간으로서 입에 담지 못할 일을 벌인다는 그곳, 그야말로 현세에 강림한 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장소.

 

”뭐 그런 일을 겪으셨다니 아셨겠지만 걔도 하자가 좀 심해요. 원래는 바로 C구역 납품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얘가 워낙 난리를 피워대면서 자기도 메이드 시켜달라고 난동을 피우더라고요. 

 

보통은 그래도 적당히 약 먹여서 보내는데, 얘는 도저히 제압이 안 되어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소원대로 ‘브닐라’ 모델 개조 시술을 해 줬죠.

 

결과는 보신 그대로입니다. 가사 모듈이 무슨 오류를 일으켰는지 인식이 안 돼요. 저로써도 달리 드릴 말씀은 없고...나름대로 빡세게 교육을 시켰는데 워낙에 머리가 나빠놔서...

 

그래서 이런 녀석이라도 적당히 쓰실 분들 가져가시라고 싸게 내놨던 겁니다.

 

그런데 저로서도 이런 하자품을, 그것도 이미 반품된 물건을 다시 팔 수도 없는 노릇이니... 원가라도 건지려면 C구역밖엔 답이 없죠.“ 

 

...이쯤되면 솔직히 사장이랑 이 녀석이랑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단 생각도 든다.

 

근데 브닐라의 저 절박한 표정과 처절한 울음은 도저히 연기로는 보이지 않는다. 최상급 연예용 바이오로이드가 아니고서야 저 정도 연기를 할 순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게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난 이 불쌍한 녀석을 지옥보다 더한 곳에 내모는 셈이 될 것이고, 그럼 꽤 오랫동안 기분이 더럽겠지.

 

...난 뻔뻔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며, 마음이 너무 유해서 문제라는 얘길 숱하게 들어왔다. 그것 때문에 손해도 이래저래 많이 봤고. 

 

이번에도 난 손해를 볼 모양이다.

 

난 그 정도로 뻔뻔하지도, 모질지도 못해서 말이야.

 

”...그럼 됐습니다. 계속 써 보죠, 뭐.“

 

마음이 바뀌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브닐라는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 여전히 내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어...어헣...쥬인님...감사함다.... 감사흐어어어엉“

 

괜찮아, 괜찮아, 하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사실 나야말로 지금 울고 싶지만. 

 

우린 지금 네가 낸 불 때문에 작살난 집구석에서 이렇게 청승을 떨고 앉아 있단다.

 

”저 진짜...진짜로 열심히 노력할검다! 절 구매하신 거, 후회하지 않게 해드릴거지 말임다! 그러니까....그러니까....아흐흐흑....“

 

그래, 그래, 하며 나는 통곡하는 브닐라를 안아주었다. 그러고 있기를 잠시, 이윽고 내 눈에서도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쥬인님...히끅, 저 때문에...울어주시는 검까?“

 

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브닐라의 등을 쓸어주었다.

 

”주인님은 정말 착하신 분이지 말임다...“

 

왜냐면 네가 작살낸 후라이팬이 존내 비싼 물건이고, 네가 그을려먹은 주방 타일도 비싸게 주고 시공한 건데다, 네가 태운 그 스팸이 내가 울적할 때 먹으려고 아껴둔 별미여서 운 거라곤 차마 말할 수 없었으니까.

 

이 웬수같은 년...이 웬수같은 년...

 

나는 이 순간 마음이 약해졌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에라이 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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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눈팅하다 입문한 뉴비가 처음 써본 라오문학입니다.


글 써본지 참 오래 됐네요 ㅠ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피드백과 의견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좋은 주말 보내시고, 원스출첵 잊지마셔요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