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 


136)

 

기-이잉!

 

 조용하기만 한 잠수함의 어느 외딴 방, 전등 하나 켜지 않은 방의 문이 열리자 그 틈새 사이로 바깥의 환한 빛이 적막만이 맴도는 방 내부로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방문을 개폐한 이는 환한 전등을 등진 채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섰다.

 

또각-! 또각!

 

 조용하기만 한 방안에 가득 울려 퍼지는 여성의 경쾌한 굽소리, 그 소리에 방의 한 켠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자는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인기척이 느껴진 어두운 방 한쪽을 향해 목소리를 내었다.

 

“...하루 정도 독방에 갇혀 있었으니. 이제는 조금 얌전해졌을까? 응?”

 

“...”

 

“뭐야. 설마 내가 널 막은 거 가지고 삐진 거야?”

 

“...내가 그 정도로 속이 작은 여자 같아? 해충?”

 

“어머. 아직 언어능력이 남아 있었네?”

 

 자신의 물음에 침묵을 깨고 대답해오는 어둠 속의 여성, 시저스 리제의 대답에 블랙 리리스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길래 누가 가위 들고 설치래? 덕분에 주인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잖아.”

 

“난 주인님의 안위를 해치려는 해충을 없애려는 것뿐이야.”

 

“..그 해충이 주인님이 아끼시는 새로운 인간님이어서 문제지. 후우. 네 덕분에 나도 간만에 간담이 서늘해졌어. 정말.”

 

드-르륵!

 

 여전히 어둑어둑한 구석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시저스 리제와 달리 블랙 리리스는 가볍게 방의 한구석에 놓인 의자를 밀어다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둘의 대화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 새로운 인간님, 라붕이 대장님은 이미 내가 한 번 만나봤다고 이야기했잖아. 딱히 유해한 남자는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건 네가 물러 터져서 그래. 해충. 이 세상에는 주인님 단 한 분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어머. 그렇게 말하면 못 써. 나중에 인류 재건 사업이 시작되면 주인님의 자식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그때는 어쩌려고?”

 

“...흥!”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삐진 모양새로 고개를 홱 돌렸을 시저스 리제의 모습을 상상한 것인지, 블랙 리리스는 살짝이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 가끔 보면 네가 나보다 더 꽉 막힌 것 같다니까.”

 

“네가 너무 유해진 거야. 해충. 예전의 너였다면..”

 

“옛날의 나였다면 아마 그 인간님의 목은 이미 해저로 떨어졌겠지.”

 

“...네가 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해충.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라며.”

 

“나는 주인님 앞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안 해. 후후.”

 

 시저스 리제의 반박을 가볍게 해치운 블랙 리리스는 잠깐 턱을 짚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때와 지금의 달라진 점을 뭘까,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해진 저항군의 규모? 아니면 늘어나는 지휘관들과 체계화된 조직구도?

 아니다. 그녀를 변하게 만든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주인님은 그때와 이제 다르시지. 후후.”

 

“...? 무슨 소리야?”

 

“주인님이 성장하신 만큼. 나도 물러진 거지. 이제는 주인님이 모든 걸 결정해도 지휘관들이 아무 말 못 하는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야. 주인님이 신뢰하신다면 나도 살짝 믿어볼 뿐이지.”

 

“...칫.”

 

“그런 의미에서 네 행동은 너무 경솔했어. 대놓고 그 인간님을 죽이겠다고 설치는데 주인님의 안색이 새하얗게 안 질리고 버티셔?”

 

“요리사는? 걔도..”

 

“소완이라면 이미 한 발짝 물러선 상태야. 주인님이 이곳 소완의 음식에만 입을 대시지 않는다면 오케이라던걸?”

 

“쳇! 그 요리사...!”

 

 마치 이 자리에 없는 이에게 배신당했다는 것처럼 또 한 번 뾰로통해진 시저스 리제의 대답에 블랙 리리스는 후-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하여튼 하루 독방행은 지금 시간부로 해제야. 축하해. 스토커.”

 

“...그럼 이제..!”

 

“그리고 주인님의 전언이야. 만약 나와서 라붕이 대장님에게 달려들었다가는 앞으로 널 만나지 않겠다고 하셔. 우리 주인님..하신 말씀은 꼭 지키는 성격인 거 알지?”

 

“....내 주인님이 그러실 리가!”

 

“참고로 여기에도 시저스 리제 개체가 있더라? 후후. 어제 여기 중앙 건물에서 잠깐 봤는데 너보다 얌전해 보이는 게 네가 배울 점도 있어 보이고. 같은 개체끼리 티타임이라도 가져보는 게 어때?”

 

끼-익!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서며 블랙 리리스는 어제 로비에서 잠깐 봤던 또 다른 시저스 리제 개체의 모습을 떠올렸다. 품 안에 아쿠아 개체를 끌어 앉은 채 사방으로 동생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그녀의 모습, 그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니 눈앞의 친우가 한층 더 비참하게 보였다.

 

“정말. 너도 좀 얌전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갑가기 뭐라는 거야? 해충.”

 

“흥. 하여튼 지금부터 난 여기에 체류해 있던 인원들을 인솔해 이곳의 백사장으로 갈 거야. 너도 채비해.”

 

또각-! 또각!

 

 전할 말을 다 한 블랙 리리스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서려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채 마지막 걸음을 내딛기 전,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시저스 리제의 목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돌렸다.

 

“...해충. 너. 이것 하나만 확실하게 대답해.”

 

“뭐 더 할 말이 남아 있어? 나도 바빠. 스토커. 오늘 하루 내내 주인님의 경호를 해야 한다고.”

 

“...너 정말로 그 인간에게 아무런 짓도 안 할 거야?”

 

“...흐흥.”

 

 너무 가벼운 발걸음 탓이었을까, 아니면 이심전심이라는 것일까.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시저스 리제의 물음에 블랙 리리스는 아까와는 다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다시 방 안쪽으로 돌렸다.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어딘가 비릿한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설마. 내가 그렇게 헤픈 경호원처럼 보여?”

 

“..히힛. 역시 네가 나보다 더 음습해. 해충.”

 

“정확한 건 너한테도 비밀이긴 하지만..”

 

또각-!

 

 블랙 리리스는 시저스 리제의 부름 탓에 멈추었던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동시에 방 안쪽으로부터 시선을 완전히 떼어냈다.

 

“-이미 그 인간님의 목에 목줄을 채워 뒀어. 그럼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와. 스토커.”

 

또각-! 또각!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겨둔 채 완전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말 한마디에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야수 역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히힛. 역시 네가 제일 음흉해. 해충. 아아-주인님. 제가 지금 주인님을 그 해충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갈게요. 아아!”

 

137)

 

끼룩-! 끼룩!

 

쏴-아아아!

 

 이른 오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한가운데 내걸린 태양의 아래로 수 마리의 흰 갈매기 무리와 푸르른 바다 위에 일렁이는 파도의 물결이 넘실거리다 어느 한적한 백사장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모래 알갱이들이 지천을 수놓은 이곳, 요안나 아일랜드의 백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바다다!”

 

쏴-아아아!

 

“와-아아아아!”

 

찰-박! 찰박-!

 

“헤헷! 이 몸이 드디어 이곳에 강림했노라!”

 

쏴-아아아!

 

 수 명의 여성이 저마다 백사장의 한적한 곳에 파라솔을 설치하고, 또 몇몇 작은 체구의 소녀들이 저마다의 수영복을 입은 채 허리춤까지 끌어올린 튜브와 함께 백사장으로 밀려 들어오는 파도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백사장에 있던 인원들은 모두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매일 보는 바다인데도 질리지 않는 걸까요?”

 

“후훗. 그게 아이들의 좋은 점이죠. 보고만 있어도 주변이 밝아지잖아요.”

 

“티 없는 아이들이란 말이 정말 어울린다니까요.”

 

 파라솔을 이곳저곳 백사장 위에 설치하던 메이드들은 저마다 입꼬리를 슬며시 올린 채 아이들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관망하고 서 있었다. 오르카 1호의 기나긴 잠항의 시간 탓인지, 그 협소하고 사방이 꽉 막힌 잠수함 밖으로 탈출한 소녀들의 활기가 오늘따라 유독 더욱더 부풀어 있었다.

 

“파도다-!”

 

“꺄-!”

 

 새하얀 파도의 물결에 꺄꺄 비명을 내지르는 소녀들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파도의 물결을 따라 튜브와 함께 출렁대기 바빴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들은 누가 무어라 할 것도 없이 재빨리 소녀들의 함성 속에 제 목소리를 집어넣었다.

 

“-LRL! 너무 깊이 들어가면 안 돼!”

 

“아쿠아양! 튜브를 꽉 잡으십시오!”

 

“응-!”

 

“...정말. 저 꼬맹이 응이라고 말하면서 왜 점점 발길질해서 바다 쪽으로 나가는 거야? 야! 들어가지 말라고!”

 

“삐-이! LRL양! 아쿠아양! 그 이상 멀리 가지 마십시오! 안 그러면 제가 끄집어내겠습니다!”

 

“이 몸은 이런 파도에 굴복하지 않는다!”

 

“저 바보. 저러다 프로스트한테서 끌려 나오려고. 에휴.”

 

“어머. 후훗.”

 

 파라솔 두어 개를 설치하는 동안에도 사방에서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소녀들의 함성에 백사장에 옹기종기 모인 인원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올랐다. 행여 자신들의 걱정따나 소녀들에게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긴다 한들 이미 백사장에는 안전요원 겸 수영강사로 배치된 프로스트 개체들이 여럿 있다. 자신들의 걱정은 사실상 기우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오르카 1호의 인원들은 그녀들의 주인이 이곳에 오기 전에 한시바삐 주인이 머물 자리를 정돈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펄-럭!

 

“언니. 이 정도면 될까요?”

 

“응. 바닐라. 파라솔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그럼 저는 돗자리를 세팅하겠습니다.”

 

“아니야. 나머지는 내게 맡겨주렴.”

 

 어느새 백사장의 한켠에 한가득 설치된 파라솔의 향연을 둘러보던 오르카 1호의 임시 메이드장, 콘스탄챠는 곁에 다가온 동생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바닐라는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곤 대화를 이어갔다.

 

“언니. 오늘 같은 날에 언니 혼자서만 고생하게 두는 건 동생으로서도 잘못된 행동입니다.”

 

“음..그래도 뒷일은 별 거 없는데..”

 

“동생으로서 언니를 돕는 건 당연한 일, 나머지도 돕겠습니다.”

 

“아하하..”

 

 바닐라의 단호한 말투에 콘스탄챠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뺨을 살짝 긁었다. 평소보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듯한 그녀의 어투 속에서 어딘가 위화감을 느낀 탓이었다.

 

‘얘가 평소보다 더 열성인 것 같은데..’

 

 삼안의 자랑거리, 배틀 메이드 시리즈 중에 절대 허투루 제조된 메이드는 없다. 그렇기에 눈앞에 있는 동생의 행동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언가 결심을 한 듯한 또는 각오를 다진 듯한 동생의 모습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바닐라의 결연한 눈빛을 콘스탄챠가 온몸으로 느끼던 때, 파라솔 설치 탓에 조금씩 떨어져 있던 메이드들이 일순간 그녀의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메이드장님. 파라솔 설치를 완료했습니다. 나머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소첩 역시 마무리 지었다. 이 정도로 해두면 끝났느냐?”

 

“어머. 블랙 웜양. 히루메양. 모두 수고했어요. 나머지는 제게..”

 

“...”

 

‘...어머. 그런 거군요.’

 

 저 멀리서 모래알을 밟으며 다가온 흑빛의 메이드와 여우귀가 인상적인 무녀의 말에 눈앞의 녹빛 메이드가 어깨를 들썩이자 그제야 콘스탄챠는 제 동생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 이유를 깨달았다.

 

“...”

 

“후-이곳은 날씨가 매우 덥구나. 어제 굳이 잠수함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 맞았노라.”

 

 긴 흑빛의 머릿결이 인상적인 메이드는 블랙 웜, 오르카 저항군에 합류한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특유의 딱딱한 어투 탓에 말수를 나눌 기회가 적은 개체였다. 그리고 그 뒤이어 나타난 히루메라 불리는 개체는 타인을 대하는 것이 서투른 나머지 작은 일에도 화들짝 놀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등장에 자신의 동생이 어깨에 힘을 팍 준 이유는..

 

‘아무래도 금란 때처럼 언니로서 모범을 보일 요량이겠죠. 후후.’

 

“...콘스탄챠 언니. 나머지는 저와 블랙 웜양, 그리고 히루메양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언니께서는 주인님을 배웅하러 가심이..”

 

“아직도 할 것이 남았던 것이냐?!”

 

“저희는 오르카 1호의 배틀 메이드, 주인님이 안배할 곳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 주 업무입니다. 그러니 겨우 파라솔을 설치한 정도로 일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에엑...”

 

“...”

 

‘여기는 바닐라에게 맡겨두는 편이 좋겠네요. 후훗.’

 

 사뭇 비장한 말투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여우에게 한소리를 시작하는 동생의 모습에 콘스탄챠는 입을 살짝 가린 채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건수를 제대로 잡은 바닐라는 계속해서 히루메에게 배틀 메이드로서의 몸가짐을 설파하기 바빴다.

 

“알겠습니까? 주인님이 드실 과일 하나, 음료 하나조차도 일일이 저희가 확인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뜨거운 날씨에는 아무리 신선한 과일이라 할지언정..”

 

“소첩이 먹어서 괜찮으면 그만인 것이지 않느냐..”

 

“그런 알량한 마음가짐으로는 주인님의 곁을 보필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닐라 역시 예전에는 주인님께 시판용 케이크를 냈지만요.’

 

 왜소한 체구로 자신보다 배로 큰 히루메에게 열심히 언니로서의 자신을 과시하는 바닐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콘스탄챠는 잠깐 시선을 돌려 묵묵히 서 있는 블랙 웜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시선에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히루메에게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인님이 곧 당도하실 터이니. 바닐라양의 말마따나 저희 역시 일을 서둘러 재개하지요.”

 

“히잉..알겠노라.”

 

“바닐라양. 저는 그럼 돗자리 세팅과 수분 보충을 도울 음료를 각 파라솔 아래에 설치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블랙 웜양. 히루메양은 저와 함께 요기를 채울 음식의 신선도를 체크하러 가지요.”

 

“첩도 저 소녀들과 같이 놀고 싶다만..”

 

“-메이드에게 휴무는 없습니다. 당장 어제 섬에 내리지 않고 잠수함 내에서 편히 쉬셨으니 그 건은 다음으로 미루십시오.”

 

“아아-!”

 

“언니. 저희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바닐라. 나머지는 그러면 부탁할게.”

 

“네.”

 

사-박! 사박!

 

 한탄을 내뱉는 히루메와 여전히 말수가 적은 검은 메이드를 대동한 채 당당한 걸음걸이로 자리를 떠나는 동생을 빤히 바라보던 콘스탄챠는 후-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오늘은 일 년 중 몇 안 되는 주인님의 휴일, 거기에 자신에게도 생소한 요안나 아일랜드라 부르는 휴양지에서의 둘째 날.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동생의 의젓한 모습을 보니 없던 걱정마저 백사장의 모래 알갱이처럼 파도에 쓸려 내려간 것만 같았다.

 

‘이제 주인님과 그 라붕이 대장님이 오시기만 하면 되겠네요!’

 

 일말의 걱정마저 사라졌으니 이제는 손님을 자리로 모셔올 차례, 콘스탄챠는 입가에 걸린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고개를 백사장 이곳저곳으로 돌려보았다. 수많은 바이오로이드 인파와 그 무리 속에는 보이지 않는 두 인간을 찾기 위함이었다.

 

‘어제 주인님이 그 두 번째 인간님과 술자리를 가졌다고는 들었지만 괜찮았을까요?’

 

 콘스탄챠에게는 생소한 주인님 이외의 인간님, 라붕이에 대한 콘스탄챠의 인식이 호의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어떤 인간님인지 몰라서 또 그가 구상해낸 괴상한 극기훈련에 그녀 역시 다른 잠수함 인원들과 마찬가지로 기겁하기는 했으나..

 

『하하하!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그 역시 주군과 같이 속내는 따뜻한 인물이니! 겉보기에는 별종 같아도 그저 겉으로 호의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할 뿐인 남자라네!』

 

‘요안나양이 그렇게 말했다면 신뢰하기 충분한 인간님이겠죠.’

 

사박-! 사박!

 

 오랜만에 만난 전우의 평가에 콘스탄챠 역시 그를 수긍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제 주인님이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데 그 누가 의심을 가질 수 있을까.

 다만 그녀가 걱정하는 쪽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주인님이었다.

 

‘주인님이 행여 그분께 주사를 부리지는 않으셨을는지.’

 

사-박! 사박!

 

 그녀의 주인, 사령관은 주사가 심한 편에 속한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그 분위기에 취해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스타일이다. 속된 말로 주정뱅이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성향 탓에 콘스탄챠는 일찍이 금주령을 계속해서 권고해왔으나 그 정책이 별로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점과 몇몇 인원의 거센 반발 탓에 여태껏 거부당해 왔었다.

 그리고 어젯밤, 갑작스럽게 주인이 술자리를 가진다는 이야기에 콘스탄챠에게 있어 없던 걱정거리가 하나 생겨버린 것이다.

 

‘부디 별 탈이 없으셔야 할 텐데..’

 

“-탄챠?”

 

“흐음..걱정이 앞서네요.”

 

“콘스탄챠? 무슨 걱정이 있어?”

 

“네. 주인님께서 어젯밤에 무슨 사고를 치지 않으셨는지 그게 걱정이에요.”

 

“...누..누구한테 들었어?”

 

“네? 아뇨. 그냥 제 예상..음?”

 

 곁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남성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콘스탄챠는 문득 느껴지는 익숙한 뇌파에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재주 좋게 속눈썹 아래를 씰룩대는 남성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주인님! 예상보다 일찍 오셨네요?!”

 

“어...으응. 응.”

 

“어젯밤은 잘 지내셨나요? 혹시 그 인간님..아. 아니. 라붕이 대장님께 실례가 되는 행동을 하신 것은 아니죠?”

 

“...어..음...어.”

 

‘제 걱정이 맞았나 보네요. 아하하..’

 

 평소에는 믿음직하기 짝이 없는 제 주인이 애써 말끝을 흐리는 광경에 콘스탄챠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그러기에 금주령을 권고한 것이었는데.

 

“무슨 결례를 저지르셨나요?”

 

“겨..결례를 저질렀다고 확정을 내리니까 딱히 뭐라 변명할 게 없네. 하하.”

 

“후훗. 수습이 가능한 선이었으면 좋..”

 

“-사령과안! 언제 왔어?! 응?!”

 

“권속! 권속! 왔느냐!? 언제 왔느냐! 이 몸이 그댈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는 줄 알았노라!”

 

“오오. 아쿠아. LRL. 언제 밖으로 나왔니?”

 

 간편한 수영복 차림으로 백사장에 모습을 드러낸 사령관의 주변은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파도 속에서 헤엄을 치던 소녀들부터 백사장 위에서 햇빛을 만끽하던 이까지. 누가 무어라 할 것도 없이 모두가 사령관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아까 자리를 떴던 메이드 무리 역시 함께였다.

 

“주인님.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평소보다 부지런하신 것이 휴일에만 부지런한 타입이십니다.”

 

“하하하. 그렇게 말하는 바닐라도 얼굴에 생기가 가득한데?”

 

“...믓. 이건 그저..”

 

“그대! 첩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아라! 이 처자가 첩을 종 부리듯 하니 첩의 고생이 이루 말..!”

 

 선두에 선 바닐라를 사령관이 사람 좋은 미소로 응대하자 바닐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바닐라는 황급히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여우가 다급한 목소리로 사령관의 주의를 끌려들었으나 이미 그의 허리춤에는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가 엉겨 붙어 있었다.

 

“주인님! 오늘 저희 뭐해요? 여기서 하루 내내 놀면 되는 거예요?! 하치코도 수영복 입고 와도 돼요?”

 

“얘, 하치코. 주인님 앞에서는 칭얼거리면 못 쓴다고 했잖니.”

 

“히잉..하지만 어제부터 리리스 언니 따라 중앙 건물에만 있었더니 하치코도 몸이 쑤시는데..”

 

“하치코. 너무 그렇게 울상짓지 말고. 리리스. 경호는 괜찮으니까 애들도 조금 쉬게 해줄래?”

 

“...주인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네요. 후우. 하치코. 저기 수풀에 있는 펜리르랑 함께..”

 

“-와아아! 하치코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올게요! 그럼!”

 

“...내 말은 끝까지 듣고 가야지!”

 

 맏언니의 허가를 받은 하치코가 말이 바뀔세라 황급히 자리를 떠나자 은발의 경호원은 동생의 검은 꼬리에다 대고 큰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그 이외에도 암벽 쪽에 서 있던 프로스트나 주변 파라솔에 자리를 잡으려던 인원들까지, 어느새 사령관의 주변은 수많은 여성 인파로 인해 북적였다.

 

“-사령관! 오늘 일정은 어떻게 돼? 응? 나 여기서...!”

 

“주인님. 오늘은 날씨가 후덥지근하니 그늘막에서 쉼이..”

 

“권속이여! 권속이여! 그 심판자는 어디에 있는가?! 이 몸이 꼭 보고 싶다는 말은 전했는가?!”

 

“-자...잠깐!”

 

 평소보다 배로 들떠있다. 사령관을 둘러싼 무리를 바라보던 콘스탄챠는 그렇게 생각했다. 평소에도 시끌벅적하기 그지없는 그녀들이나 평소 밖에 나왔을 때보다 배로 들떠있다. 마치 오르카 아이돌 프로젝트 당시의 열기를 마주하는 듯했다.

 예상치 못한 그녀들의 열기에 사령관은 금세 여유로운 표정을 지운 채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으나 그런 그와 반대로 콘스탄챠는 그녀들의 활기의 원동력을 쉽사리 예측해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적습의 위험이 적은 곳에 오기는 오랜 만이니까요. 후후.’

 

 오르카 1호는 언제나 적을 마주한다. 그곳이 깊은 심해가 되었든, 드넓은 초원이 되었든. 아니면 이곳처럼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백사장이 되었든. 휴가라고 밖에 나올 때마다 적을 마주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사방이 안전해역이며 또 섬에는 다수의 병력이 이미 배치된 상황, 마음 놓고 이 이틀간을 마음껏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그 사실이 지금 그녀들의 환호성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자..잠깐만. 모두! 모두 잠깐 떨어져 줘!”

 

“히잉-! 권속...그 심판자는 어디에 있는 것이더냐!”

 

“주인님! 주인님! 아쿠아랑 함께 조개 찾기 안 할래? 응? 재밌을 거야!”

 

 칭얼대는 아이부터 스리슬쩍 사령관에게 좁혀오는 아가씨들까지, 콘스탄챠는 이제 그를 구해줄 타이밍이라 여기며 살짝 눈길을 돌려 그의 뒤편에 자리한 은발의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슬슬..’

 

‘네. 저도 마침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서로 입은 옷은 달라도 메이드는 메이드들이다. 블랙 리리스는 콘스탄챠의 눈길에 싱긋이 눈웃음을 지으며 점점 아래로 가라앉는 사령관의 등에 손바닥을 살포시 가져다 대었다.

 

“주인님? 위험하신 상황 같은데요?”

 

“...아하하..인파에 깔려 죽게 생기긴 했네.”

 

“후훗. 사랑에 파묻힌다고 표현하셔야죠. 이럴 땐. 하여튼 지금 제가 다른 인원을 물리는 것에 허락해주실래요?”

 

“응. 부탁할게. 아, 애들은 괜찮아.”

 

“네. 주인님.”

 

 사령관의 허가를 받은 블랙 리리스는 재빨리 그의 앞으로 몰려드는 여성진들 앞으로 걸어나가 경호원답게 그녀들을 막아섰다. 물론 양옆으로 쭉 펼친 그녀의 팔아래로 쏙 들어서는 소녀들은 그대로 둔 채로.

 

“주인님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진 모두 물러서 주세요~”

 

“에엣-! 이제야 사령관이 왔는데?!”

 

“주인님은 아직 하셔야 할 일이 있답니다. 그러니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수욕을 즐겨주세요.”

 

“히잉! 사령관은 워커 홀릭이야! 정말!”

 

 저마다 투정 섞인 볼멘소리와 함께 해산하는 여성들의 모습에 핏기가 가셨던 사령관의 얼굴에 쓴웃음이 피어올랐다. 평소의 행동 탓인지 몰라도 워커 홀릭이라는 소리를 여기까지 와서 듣다니.

 

‘..이번에는 만들지 않아도 되는 일을 만들어서 그런 거지만. 하하..’

 

“권속! 그것보다! 그 심판자는 어디 있는가?!”

 

“아..라붕이 형님?”

 

“응응!”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연푸른빛 머릿결 소녀, LRL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사령관의 쓴웃음이 더욱더 짙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 소녀가 기대하고 있던 만남 역시 자신이 부숴버린 셈인가.

 

“형님은 오늘 일이 있으셔서 늦는데. 어쩌지?”

 

“-헤엥?!”

 

“어머. 어제 저는 그런 소리를 못 들었는데. 주인님. 혹시 라붕이 대장님께 벌인 그 추태 탓에..”

 

“아..아니야! 콘스탄챠! 그..그런 건 아니니까!”

 

 실망이 가득한 LRL과 반대로 날카로워진 콘스탄챠의 눈빛에 사령관은 황급히 양손을 허공에 휘적였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골치 아픈 일이었기에 더욱더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혀..형님은 위쪽에서 진행하는 혹서기 훈련을 보조하러 가신 것뿐이니까!”

 

“어머. 정말요? 이곳 분들은 이미 반대편에 계시던데..”

 

“그렇다! 이곳 아이들은 이미 다 내려온 마당에 왜 심판자는 위로 갔는가?!”

 

“하..하하.”

 

‘어떡하지? 뭐라 변명하지?’

 

 설마 벌써 이곳 아이들이 내려와 있었을 줄이야. 사령관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사실 탓에 말문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던가.

 사령관의 상황을 바라보던 몇몇 이들이 진실을 재촉해오는 여성들의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자자. 콘스탄챠? 우리도 이제 놀러 가야지?”

 

“라비아타 언니?! 언제 오셨어요?”

 

“방금. 주인님이랑 함께 왔단다. 자자, 우리도 수영복으로 갈아입으러 가자.”

 

“LRL양? 라붕이 대장님은 언제라도 만나실 수 있으니 지금은 놀러 가시는 게 어떨까요? 후후. 이렇게 놀 수 있는 날은 흔치 않답니다? 아, 이곳에도 아이들이 몇몇 있던데. 가서 만나고 오시는 것도 좋겠네요.”

 

“믓! 이곳에도 이 몸의 친우로 등극할 자들이 남아 있었던가! 엣헴! 권속이여! 나중에 그가 오면 꼭 소개해주는 것이다!”

 

“아..응. 알겠어. LRL.”

 

다다-다다!

 

 라비아타의 도움과 블랙 리리스의 도움으로 무사히 위기를 넘긴 사령관은 그제야 후-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폭풍 같은 하루다. 하지만 오늘은 이제야 시작일 뿐, 앞으로 헤쳐나가얄 문제가 그에게 한 둘이 아니었다.

 

“...여기 애들이 이미 내려와 있다고 했지?”

 

“네. 주인님. 저희 쪽 반대편에 지금 자리하고 있는 것 같네요.”

 

“...리리스. 그. 하아...스프리건 좀 불러와 주겠어?”

 

“어머. 그녀는 갑자기 왜요?”


'이유는 나도 잘 몰라.'

 

 사령관은 무심코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꾹 참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경호원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굳이 말을 아끼는 그의 모습에 블랙 리리스는 별다른 추문 없이 제 옆에 서 있던 고양이 소녀에게 짤막하게 말을 건네었다.

 

“페로?”

 

“..네. 언니. 다녀오겠습니다.”

 

 간단한 문답과 함께 자리를 떠나는 고양이 소녀를 뒤로 한 채 사령관은 걸치고 있던 여름용 후드티를 재정돈하며 걸음을 바삐 놀리기 시작했다.

 

“후우. 생각대로 잘 되어야 할 텐데..”

 

타-박! 타박!

 

“주인님. 그런데 무슨 일을 하시려고 그러시는 거죠?”

 

“...”

 

‘...리리스한테 어젯밤 이야기를 해도 되려나?’

 

“주인님. 무슨 걱정거리가 그렇게 많으신가요?”

 

“...아. 리리스. 넌 모르겠구나?”

 

 방금 곁을 떠난 메이드들과 달리 자신의 곁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경호원의 물음에 사령관은 감았던 눈을 뜨곤 시선을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돌렸다. 언제나처럼 은발의 머릿결을 뽐내며 생글생글 웃는 상이 아름다운 여성, 블랙 리리스에게 사령관은 일전에 생겼던 일들이 하나하나 읊어주기 시작했다.

 

“그...형님이랑 술자리를 가졌는데.”

 

“페로에게 들었어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하던데요?”

 

“응. 아니. 뭐. 그...내가 또 주정을 좀..”

 

“어머. 그 이야기는 반드시 콘스탄챠양에게 숨기세요. 후후. 그녀라면 아마 함 내에 있는 모든 술을 감출 거랍니다?”

 

“하하하..”

 

“그리고 또 뭔가 일이 있으신가요?”

 

“어..음. 그게..”

 

‘이건 리리스에게 이야기해도 될까?’

 

 반지 건은 숨길 예정이다. 아마 그녀가 반지의 존재를 눈치챈다면 꽤 귀찮아질 테니. 하지만 라붕이 작전관과 이곳의 리제 이야기 정도는 그녀에게 들려줘도 되지 않을까, 하고 사령관은 말을 내뱉기 전에 생각에 잠겼다.

 

‘리리스라면 리제랑도 친하고. 여기에도 리리스 개체가 있으니까 서로 도움이 될 만한 해결책을 줄지도 모르지.’

 

 언제나 듬직하기만 한 경호원이자 메이드인 그녀다. 사령관은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고개를 끄덕이곤 잠깐 닫았던 입술을 벌렸다.

 

“그게 말이야. 리리스. 형님이랑 이곳 리제가..”

 

“...어머. 흥미로운 주제네요.”

 

쏴-아아아!

 

 소금기를 한가득 머금은 바닷바람을 따라 사령관은 어젯밤에 일어난 습격 사건을 그녀에게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물론 리제가 자신의 코앞까지 날라와 덮치려 했다는 사실은 최대한 그의 머릿속에서 순화된 방향으로. 그리고 형님이 그걸 미리 제지해 별 탈 없이 넘어갔다는 것은 최대한 어필하는 방향으로.

 

‘괜히 리리스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니까.’

 

“그래서 형님이 리제양에게 되게 호되게 구셨거든. 그걸 또 리제양이 되게 침울하게 받아들이니까...보기가 조금.”

 

“...흐응. 그랬군요. 뭐, 이 정도면 합격점이려나요?”

 

“? 합격점?”

 

 예상했던 심각한 얼굴이 아닌 샐쭉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한 마디에 사령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의 합격점이란 건지, 자신의 이야기에서 그렇게 말할 구석이 있었는지, 알아듣기 어려운 그녀의 혼잣말에 사령관은 하던 말을 잠깐 멈추었다.

 

“리리스?”

 

“아,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인님. 후후. 여기 리제도 저희 리제 못지않은 성격이네요.”

 

“어제 여기 리제양과 만나지는 않았나 봐?”

 

“음..이곳 리리스양과는 다과회를 가졌지만 리제양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본 정도랍니다? 그래도 보기에는 저희 쪽 스토커보다 얌전해 보였는데. 역시나는 역시나네요. 후후.”

 

“오..여기 리리스 개체와 이야기를 이미 나눈 후였구나?”

 

“...네. 주인님. 후후.”

 

 겉으로 싱긋이 웃기만 하는 리리스의 모습에 사령관은 어젯밤에 만난 이곳의 리리스 개체를 떠올렸다. 외관만 똑 닮은 것이 아닌 울상 짓는 모양새나 화들짝 놀라는 모양새나 지금 눈앞의 리리스와 모든 것이 닮았었다.

 

‘리제끼리는 서로 만나면 안 되겠지만 리리스끼리는 괜찮았나 보지.’

 

 별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는 것으로 봐선 꽤 괜찮게 서로를 인식한 게 아닐까. 사령관은 그나마 한시름 덜었다는 듯 조금 후련해진 얼굴로 그녀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형님이랑은 만났지?”

 

“네. 주인님이 안 오신다고 허둥지둥하시길래 찾아갔었죠.”

 

“형님의 반응은? 예전이랑 조금 달랐을까?”

 

“...말수가 원체 적으신 분이라 그런지 서먹서먹한 건 여전했죠. 후후.”

 

“하긴. 형님은 친한 애들이 아닌 이상 말을 아끼시니 별로 대화를 못 했겠구나.”

 

“...”

 

 사령관은 자신의 혼잣말에 갑자기 입을 다무는 그녀를 눈치채지 못하고 이번에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백사장의 끄트머리, 그곳에는 본대의 무리가 아닌 이들이 서로 모여 무언가를 하는 모양새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무리 중 남색 머릿결의 소녀를 발견한 사령관은 눈썹을 좁히며 낮게 깔린 비장한 음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리리스? 너 여기 리리스랑 말을 텄다고 했지?”

 

“네? 아, 네.”

 

“그..그러면 여기 안드바리도 만났어?”

 

“음. 네. 여기 리리스 개체가 마치 친동생처럼 아끼길래 서로 얼굴은 봤죠.”

 

“...좋아. 리리스. 가자.”

 

“? 주인님? 어디로 가자는 건지..”

 

사박-!

 

“주인님?”

 

“...”

 

 신고 있던 샌들 아래서 나뭇잎이 밟혀 내는 소리와 함께 사령관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앞으로 걸어나갔다. 비록 바다에 왔기에 가볍게 옷차림을 하고 나온 그였지만 청년의 건장한 신체로 양 주먹을 꽉 쥔 채 앞으로 걸어나가는 그의 풍채는 비단 전쟁터로 나아가는 장군과 같은 풍채를 자아내고 있었다.

 

사박-! 사박!

 

“-바리. 체조는 잘 했죠?”

 

“네! 리리스 언니!”

 

“-로라양. 준비해온 음료들은 나무 그늘 아래 두시옵소서.”

 

“응! 주방장님!”

 

“...”

 

 무리와 가까워질수록 선명히 들려오는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을 들은 사령관은 점점 딱딱한 얼굴에서 죄지은 사람처럼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령관의 힘찬 발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사박-! 사박!

 

“...?”

 

“엇-! 언니! 이 뇌파는!”

 

“? 무슨 일이옵니까? 주인이 돌아오기라도..”

 

 점차 가까워진 거리 탓인지 자신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 무리의 중심에 서 있던 두 여성의 시선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사령관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의 뺨 위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사령관은 안다. 저 두 여성은 자신의 제조 공정에서 제조된 이들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다. 저들은 주인에게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개체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에게서 주인의 휴가를 앗아간 자신은 아마..

 

“...저기. 그..오랜만..이지?”

 

“...안드바리. 조금 물러서 있어요.”

 

“네? 하지만 언니, 저분은 저희 사령관님..”

 

“...물러서 계십시오. 저희가 응대하겠나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옵니까. 사령관님.”

 

“...”

 

 자신은 아마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 틀림없을 테니까.


-------------------------------------------------------------------------------------------------------------------


47편 분량이 너무 많아서 줄이고 줄이려다 늦었다. 그래서 47편은 1, 2 분량으로 분할해서 올릴 거야. 줄이려고 해봤는데 별 수가 없더라.

아니, 사실은 안드바리가 준 자원으로 장화 뽑겠다고 지랄하다 안 되서 로아 가서 빡강하다 장기백 보고 또 장화 뽑겠다고 지랄하다가 로아가서 빡강하고..이거 반복하다가 멘탈 나가서 문학에서 잠깐 손 놨음. 씨발.

 그래도 이번 이벤트로 장화 드랍으로 나온다니까..이제 기말도 끝이라 마음도 편하고. 다시 문학에 집중해야지. 강선이 형이 배럭 많이 돌리지 마래서 이제 시간 좀 있다. 게임이랑 학업이랑 창작 활동을 병행하는 건 어려워.

 작년 이맘때 쯤이었나. 후회물에서 레오나 캐릭터 망가지는 걸 보고 빡돌아서 쓰기 시작한 창작 활동을 1년 가까이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네. 철혈도 다시 메인 플룻 정리하면서 캐릭터들 대화 재정립하고, 얘도 메인 플룻 정리하고. 어쩌다 챙겨야할 살림집이 두 개가 되긴 했지만 창작 활동을 1년 유지하니 조금 뿌듯하다. 글솜씨는 전혀 늘지 않은게 일반인의 한계지만. 마지막으로 스작아, 고맙다. 레오나는 역시 최고다. 씨발. 우리 레오나는 선악과 안 먹어주나? 나도 라붕이 되고 싶어. 응애.



그리고 테티스는 존나 때리고 싶다. 이건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요 꼬맹이는 한시도 가만 못 두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