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설정과 다를 수 있음

*새드 엔딩

*그동안 쓴 창작 글 모음



가볍게 호흡을 할 때마다 천아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입김이 춥고 매서운 겨울의 한파를 느끼게 해주었다.


평생을 떠돌아다니며 혼자가 익숙했던 그녀에게 함께 시간을 보내는 기쁨을 알려준 상대방은

이제 기력이 쇠하여 홀로 거동이 불편했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오늘도 그녀를 집 밖까지 나와 반겨주었다.


"오늘도 고생했어 천아... 콜록콜록!"


흰머리와 깊게 패인 이마 주름들 덕분에 천아의 앞에 힘겹게 서있는 남성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따뜻한 남자. 천아는 냉큼 달려와 그를 부축하며 팔짱을 끼었다.


"미안해.."


"피~ 미안하면 미안할 짓을 하지 마!"


가볍게 톡 쏘아붙이지만 천아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웠다. 긴 세월을 계속 바라보며 살았지만,

언제 보아도 그의 얼굴이란 그녀를 웃게 만드는 몇 안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천아의 허리에 거칠고 주름이 잡힌 손이 감겨오며 체온을 전하고, 그 손길에 천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옆에 달라붙은 남자에게 더욱 안겨들었다.


"이젠 말 안 해도 알아서 안아주는 거야? 누구 남친인지 되게 눈치 빠르네~"


예전과 같았다면 이런 사소한 스킨십도 기쁘게 받아들이겠지만, 지금의 천아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그의 체온을 느낀다. 그가 이렇게 안기는 것은 애정 표현의 목적도 있지만 한걸음 한걸음이 고된

노동이나 다름없는 그가 이제 그녀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는 증거였으니.


'....엄청 가볍네.'


몸이 아프면 체중이 빠진다고 하던가, 노쇠한 그는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넓고 듬직하던 어깨는 작게 움츠러들어

좁아졌고, 두툼하고 다부진 손은 꽉 잡으면 툭 부러질 것 같이 얇아졌다.


하루하루 야속하게 흘러가는 세월, 그 세월 속에서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


'이제 끝이 다가오는 건가 봐.'


그럼에도 천아는 슬퍼하는 모습을 그에게 보일 수 없었다. 그녀의 눈물은 그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길테니 오직 슬픔을 삼키고, 

찢어진 마음의 상처를 견디며 웃어야 한다. 적어도 그가 떠나갈 시간까지 천아는 그를 슬프게 만들 수 없었다.


"영차~ 어때? 불편하지는 않아?"


따뜻한 벽난로 앞 마련된 침대에 남자를 눕히며 천아가 미소 짓는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은 따뜻하고 온화했다. 그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담겨서 그런 것일까.


"응.. 하아.. 하아.. 천아.."


"응 남친~ 불렀어?"


그의 곁에서 그가 먹을 죽과 약을 꺼내는 천아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천아의 손을 잡고 쓰다듬으며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먼저.. 돌아가서 쉬어.. 오늘도.. 힘들었지?"


"먼저 돌아가서 쉬기는~ 남친이 아파서 누워있는데 혼자 어떻게 푹 쉬냐?"


남자의 말에 가볍게 대꾸한 천아가 죽을 들어 올리고 호호 입김을 불어 넣으며 그의 입가에 내밀었다.


"아~ 해봐. 아직도 요리는 잘 못하지만 나름 열심히 만든 거야!"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녀가 내민 죽을 거부했다. 이미 노화와 병이 심하게 진행되어

잘 먹지도 못하는 그에게, 따뜻한 죽 역시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피~ 좀 먹어야 잘 낫지! 흥이다! 그래도 대신 계속 옆에 있을 거야. 이건 양보 못한다~?"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천아의 본능은 강하게 그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가 계속해서 돌아가서 쉬라고 권하는 것 역시, 마지막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그의 의지가 담겼다는 것을

천아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리 슬프더라도...'


천아는 양보할 수 없었다. 그에게 받은 사랑만큼, 그녀는 그에게 충분히 돌려주지 못했기에

아직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살며시 몸을 일으켜 그의 곁에 누운 천아가 그를 끌어안았다. 옛날에는 그의 품에 그녀가 쏙 들어갔지만,

이제 그녀의 품에 그가 쏙 들어올 정도로 그는 나약해져 있었다.


"하아~ 따뜻하다~"


"천아..."


남자는 여전히 천아에게 돌아가라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천아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그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생각해보니, 남친이랑 이렇게 둘이 있을 때는 점퍼도 필요 없네. 핫팩 때문에 입는 건데 이렇게

남친이랑 있으면 필요 없잖아."


여전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 천아의 마음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그는 결국 포기한 듯

역시 손을 뻗어 그녀에게 밀착하며 서로 체온을 나누었다.


"자세 불편하면 남친이 바꿔~ 편한대로 해..."


한동안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시간을 보내자 어느덧 남자의 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천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드디어 참아왔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푹 쉬어.. 아픔도, 슬픔도 없는 그곳에서.. 먼저 쉬고 있어..."


대답 없는 남자, 서서히 식어가는 그의 온기. 천아는 더욱 그를 끌어안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아무것도 내게 해줄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 평온하게... 쉬도록 해..."


지나온 세월들을 함께 보내며 언제나 남자는 천아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아낌 없는 헌신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를 정도로, 그는 언제나 천아에게 헌신적이었다.


그런 그에게 천아 역시 무언가 나누고, 또 베풀고 싶었지만 이제 그는 받지 못한다.

무엇을 줘야 할지 역시 잘 몰랐고, 무언가 준다 하더라도 그는 이제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나는 남친한테 너무 많이 받아서... 어떻게 보답해야 될지 모르겠네..."




'만약 하늘이 허락하여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번엔 내가 남친에게 모든 것들을 나누어줄게.'


당신이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