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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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겨울은 아주 추웠습니다.

 

“Everything normal here, ma’am. Nothing to report.”

(근무 중 이상 무. 특이사항 없습니다, 소위님.)

 

제 앞에는 양손을 겨드랑이에 끼워넣고 입김을 내뿜는 레프리콘 상병이 서 있습니다. 이 추운 날씨에 자기 밑의 브라우니들을 조금이라도 더 재우겠다고 혼자 경계근무를 서고 있네요. 그런 그녀가 저를 보자 제게 깍듯하게 경례를 붙였습니다. 지금은 굳이 이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죠.

 

“Stop with that ma’am thing, Lepy. We’re the only ones out here.”

(야, 레피. 낯간지럽게 소위님이 뭐야. 여기 지금 우리 뿐이잖아.)

 

“...Permission to speak freely?”

(...편하게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Shoot.”

(당근.)

 

그러자 레피가 우물쭈물하며 운을 띄웁니다.

 

“I’ve been thinking....what would you like to do after we’re done with all this?”

(생각하던 게 있는데...이게 다 끝나면 뭘 하고 싶으세요?)

 

“What do you mean?”

(무슨 말이야?)

 

“I mean.....when we can actually live a life, instead of... fighting everyday just to survive.”

(그러니까...우리가 정말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면요. 매일 살아남으려고 싸우는 거 말고요.)

 

“Ahaha, like that would ever happen.”

(아하하, 그게 진짜로 되겠냐.)

 

“.....I was being serious.”

(저 전지해요.)

 

실없는 소리를 하는 줄 알고 크게 웃었더니, 레피가 빈정이 상한 듯 목소리를 내리깔았습니다. 미안하게 되었네요.

 

“Ok....then, what do you wanna do with your civilian ass?”

(알았어....그럼, 민간인(진)이 되시면 뭘 어쩌려고 그러실까?)

 

“To....go shopping and wear pretty dresses like real people,”

(인간님들처럼 쇼핑도 가고, 예쁜 옷들도 입어보고 싶고요,)

 

그녀가 눈을 빛내며 하고 싶은 일들을 마구 나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지겠군요. 하품이 절로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저는 레피가 나불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And to find someone special, and spending some quality time with him.”

(...그리고 특별한 사람을 하나 찾아서, 그분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Seems like that‘d work only when there’s someone who would actually go on a date with us Bioroids.”

(그건 우리 바이오로이드들이랑 진짜 데이트라도 할 사람이 있어야 성립할 것 같은데.)

 

제가 장난기를 담아 지적하자, 레피가 고개를 내리고 대답합니다. 아까의 꿈 꾸는 소녀 같던 얼굴은 평소의 피곤한 표정으로 되돌아 왔네요. 

 

“Yeah....but who knows. Maybe there is one.”

(그렇죠....근데 혹시 아나요. 진짜 그런 분이 있을지.)

 

“...Maybe.”

(...그럴지도.)

 

저는 그녀에게 보온병에 담긴 따뜻한 커피를 건넸습니다.

 

“But he’s definitely not around here.”

(근데 그 사람, 절대로 이 근처엔 없을걸.)

 

“Haha, yeah.....definitely.”

(하하, 네....여기엔 절대로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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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이게 누구야!”

 

이비와 산책을 하다가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맞닥뜨렸다. 내 오랜 친구 H와 그의 바닐라 A1인 바니. 오랜만에 봐서 반갑긴 한데, 이 녀석들이 여긴 어쩐 일일까.

 

“여긴 무슨 일로 내려왔냐?”

 

“아, 최근에 정신없어서 연락을 못 했네. 이 근처 소프트웨어 개발사에 자리가 하나 생겨서 바로 그저께 이사 왔어.”

 

H 녀석이 너털스레 웃으며 대답해온다. 바로 그저께 이사 왔다.... 녀석도 꽤나 정신이 없었겠구만. H와 조금 더 안부를 주고받으려 했더니, 갑자기 이비가 눈을 빛내며 큰소리로 외쳤다.

 

“어, 바니 선배님! 그 옷은 뭠까? 너무 이쁘시지 말임다!”

 

 

 

 

 

이비가 바니에게 도도도 달려가서 마구 호들갑을 떨어댄다. 바니는 언제나 봐 왔던 메이드복이 아니라 노출이 많은 사복을 입고 있었다. 솔직히 어딘가 남사스러운 모양새다.

 

“오오, 뭔가 보이는 게 많슴다! 과감함다! 근데 어울림다! 귀여우심다!”

 

“아....아하하, 고-고맙습니다.”

 

바니가 평소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좀 깬다. 저건 내가 알던 바니가 아닌데. 그때, 이비가 바니의 손을 가리켰다. 

 

“어, 반지도 끼셨슴까? 반짝반짝한게 엄청 예쁨다!”

 

과연, 바니의 왼손 약지에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슬며시 H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진짜 끼워줬네, 반지.”

 

“하하, 한다고 했잖아. 조만간 정식으로 식도 올릴 생각이야. 아마 우리 부모님은 안 오려고 하시겠지만. 사람이 미물이랑 통혼하는 게 말이나 되냐면서 잔뜩 욕먹었거든.”

 

멋쩍은 듯 머리를 매만지는 녀석의 손에도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뭐...좀 늦었지만 축하해. 결혼식 날짜 잡히면 불러줘. 봉투도 좀 채워갈게.” 

 

“짜식, 네 형편에 축의금은 무슨. 그래도 고맙다.”

 

싱글벙글 미소짓던 H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친다.

 

“아, 메이드 씨는 잘 지내? 그.....별 사고는 안 쳤고?”

 

“그럼. 오히려 요샌 일솜씨가 많이 늘었어. 이름도 생겼구....‘이비’라고.”

 

“헤헤, 이름 이쁘네.”

 

H와 나는 즐거운 얼굴로 수다를 떠는 두 메이드, 아니 우리의 연인들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바니는 우리집 브닐라에게 제대로 ‘이비 씨’ 라고 이름까지 불러주며 살갑게 대하고 있었다. 

 

“아, 바니 선배. 그러고 보니 저, 요즘 집안일도 엄청 잘하게 됐슴다! 다 선배님 덕분임다!”

 

“후훗, 별말씀을요, 이비 씨.”

 

“그러고 보니 접때 하셨던 말씀 기억나심까? 제가 제대로 된 메이드가 되면 ‘언니’라고 불러도 된다고 말임다.”

 

“...그런 건 참 잘도 기억하시네요.”

 

“그래서 그...저, 언니라고 불러도 되겠슴까?”

 

“.....”

 

“아...역시 싫으심까?”

 

“...아-아닙니다. 그럴리가요.”

 

“헤헹,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바니 언니!”

 

“그 호칭을 허락한 걸 곧바로 후회하게 하시는군요.”

 

“엥, 전 진심임다, 바니 언니!”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그동안에도 나는 바니의 사복차림과 약혼 반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우리 이비에게 예쁜 옷 하나 사 준 적도 없고, 제대로 둘이서 데이트를 해 본 기억도 없다. 그리고 반지, 이비의 고운 손에 예쁜 반지가 하나 걸려 있다면.....

 

문득, 조만간 시간을 내서 이비와 제대로 된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금 들어놓은 것도 하나 깨둬야 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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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아앗, 정말임까, 주인님? 옷도 사고 데이트도 하는 검까? 

 저도 그런 거 꼭 한번 해 보고 싶었지 말임다! 가슴이 막 콩닥거림다!”

 

마침내 찾아온 다음 주말. 

 

오늘은 시내 쪽으로 나가서 이비와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이 생각을 이비에게 말해주었더니 문자 그대로 기뻐서 펄쩍 뛰고 있다. ‘아싸! 아싸!’ 하면서 방방 뛰는 게 무슨 어린애 같아서 웃음이 나온다.

 

꼭 들러야 할 몇 곳은 이미 정해뒀고, 출퇴근길에 사전답사도 대충 해 놓았다. 나머지는 직접 가서 정하면 되겠지. 다만 한가지, 추천받은 식당이 뭔가 마음에 걸리긴 한다.

 

나보다 이 동네에서 오래 산 유미에게 메신저로 시내 쪽에 괜찮은 식당이 있는지 물었더니, 어제 그녀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우리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서 유명한 맛집이 하나 있어요 ㅎㅎ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많은데, 퀄리티까지 웬만한 고급 레스토랑 저리가라 할 정도예요! 

 근데...인간님들 입장?에서는 어떨지 잘 모르겠네요.

 음...제가 설명드리는 것보단 직접 가보시는 쪽이 이해가 빠를 것 같아요.]]

 

인간들 입장에서.....혹시 인간이랑 바이오로이드랑 입맛이 다른 건가? 그런 것 같진 않던데.

 

상념에 빠져있으려니 어느새 이비가 외출 준비를 마쳤다. 에라 모르겠다, 가서 부딪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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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와 내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옷가게였다. 이 동네가 산업단지 비슷한 곳이라 바이오로이드 인구가 인간보다 많았고, 그래서인지 바이오로이드에 특화된 가게들이 널려있었다. 이 옷가게도 그 중 하나였고.

 

잠시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더니, 피팅룸의 막이 걷히고 이비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에헤헹! 주인님, 저 어떻슴까? 어울림까?” 

 

바이오로이드 종업원이 추천해준 의상들을 걸친 이비. 그 모습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걸까.

 

“.....엄청 이뻐. 귀엽기도 하고.”

 

“히힛, 저도 너무 마음에 들지 말임다! 감사함다, 주인님!”

 

솔직히 말해 내 예상보다 값은 좀 세게 나갔지만, 이비의 모습을 보니 그 돈이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근처 구두점에서 예쁜 구두까지 하나 새로 사 주고 나니, 이제야 처음으로 뭔가 제대로 된 선물을 해 줬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진짜 선물’은 오늘의 마지막 순간에 꺼낼 예정이다.

 

우리는 한동안 잡담을 나누며 시내 곳곳을 거닐었다. 호기심 많고 천진한 이비는 조금이라도 궁금한 곳은 기어이 가봐야 직성이 풀렸던 관계로, 거의 삼보일배 수준으로 가다 서기를 반복하기는 했지만. 

 

 

 

 

 

“자, 그럼 치장도 예쁘게 했겠다. 혹시 뭐 따로 가고 싶었던 데나 해 보고 싶었던 거 있어?”

 

기분이 들떠 촐싹맞게-하지만 동시에 귀엽게- 깡총대며 걷는 이비에게 물었다. 메이드복 차림이 아닌, 사복 차림의 그녀와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음...아! 인간님들 세상엔 캐래오키? 카라-오케? 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슴다! 주인님이랑 거기 한번 가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당!”

 

생긋 웃으면서 혀까지 쏙 빼는 이비. 아, 너무 귀여워 죽겠다. 가라오케 어쩌구 하는 건 아마 노래방 얘기겠지. 평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이비다운 대답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저쪽에 노래방 간판 하나가 보인다. 밥 먹을 시간까지 저곳에서 적당히 시간을 좀 죽이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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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들어온 곳은 “EVA KARAOKE” 라는 이름의 노래방. 생긴 지 얼마 안 된 듯 깔끔한 내부는 조명이 다소 어두운 게 세련되면서도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카운터에는 흰 머리칼에 음침한 관상을 한 여자가 하나 앉아 있었다. 어째 분위기가 이 사람도 바이오로이드 같다. 

 

“어-어서오세요.....두...분...이신가요?”

 

“넵! 우리 잘생긴 주인님이랑 저까지 해서 둘임다!”

 

“푸휇!”

 

깜빡이도 안 켜고 훅 치고 들어오는 이비 때문에 당황했다. 하마터면 내 침에 사레라도 들릴 뻔했다. 으, 얘는 낯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구만.

 

“크...크흡....큽....”

 

직원 바이오로이드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입가에 주먹을 갖다 대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웃기십니까. 네, 마음껏 비웃으세요. 그게 제 업보입니다 슈밤.

 

“죄-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우으.... 1번 방으로 준비해드릴게요....”

 

우리와 시선을 못 마주치는 그녀에게 애써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고서, 우리는 준비된 방으로 입장했다. 문을 열자마자 정신없이 돌아가는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우리를 반긴다. 노래방은 하도 간만에 와서 그런가, 이 분위기가 나에게는 영 어색하다.

 

이비는 들뜬 듯이 방 곳곳을 둘러보고 있다. 탬버린을 들고 몇 번 흔들어도 보고, 수록곡 명부를 펼쳐보기도 하면서. 나는 선곡용 태블릿을 어떻게 쓰는지 물어오는 이비에게 사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그냥 알려주지 말 걸 그랬다고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TAKE- ON- MEEEEE! Take on me!”

 

어째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들만 잔뜩 부르고 있다. 다들 하나같이 거의 100년은 넘은 것 같은 노래들 뿐이고, 게다가 다 외국 노래다. “주인님도 같이 부르시지 말임다!” 라는데, 뭘 알아야 같이 부르든 말든 하지.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그저 고장난 기계마냥 탬버린만 어색하게 흔들고 있었다. 이건 대체 어떻게 맞춰줘야 하지.

 

“...So I cry, I pray, and I beg-

 Love me, love me-

 Say that you love me-“

 

어느새 노래가 바뀌었다. 녀석, 참 열심히도 부른다. 매일같이 흥얼거리는 것도 꽤나 음색이 좋다 싶었는데, 멍석을 깔아주니 아주 제대로, 그것도 꽤나 잘 불러댄다.

 

”...The moment I saw his smile, I knew he was just my style-“

 

어느덧 또다시 바뀐 노래. 이비가 살랑살랑 몸을 흔들어가며 나에게 눈웃음을 짓고 있다. ....솔직히 너무 귀엽다. 아주 그냥 귀여워 죽겠다. ....근데 이거 언제 끝나냐. 잘 알지도 못하는 옛날 노래들을 메들리로 듣고 있으려니 이것도 참 고역이다. 

 

결과적으로, 그 고역은 거의 2시간을 더 이어지고서야 간신히 막을 내렸다. 뭐, 나는 좀 힘들었지만, 이비가 저렇게 즐거워하는 건 또 처음 봤으니 마냥 서운하지만은 않았다. 녀석이 재밌었으면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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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신나게 노래한 이비도, 몇 시간 동안 열심히 탬버린 흔들며 이비에게 맞춰준 나도 배고픈 건 마찬가지였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지금 같으면 뭘 먹든 정말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이 바로 그 식당을 찾아갈 때임을 느꼈다. 유미가 알려준 현지인 추천 맛집. 

 

그렇게 노래방을 나와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갑작스레 군용 차량들이 길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탱크부터 뭔지 모를 장갑차에, 무슨 열병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별의별 물건들이 바삐 길을 지나고 있었다. 

 

 

 

 

 

이 근처에 큰 군부대가 몇 있는 건 알았지만, 저렇게 많은 차량들이 한꺼번에 이동하는 건 처음 본다. 방향을 보아하니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는 대도시 쪽으로 가는 모양인데. 

 

”...Something’s not right.“

(뭔가 잘못된 것 같아.)

 

그 광경을 보던 이비가 영어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하다. 두 눈에 그림자라도 내려앉은 것 같았고. 나는 별 것 아닐 거라고 이비를 안심시켰다. 평소보다 훈련을 좀 격하게 하는가 보지, 하면서. 

 

이비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슬쩍 그녀의 볼에 뽀뽀를 건넸더니 금세 표정이 풀렸다. 역시 우리 이비는 웃을 때가 제일 예쁘다니까. 

 

길을 지나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문제의 식당을 겨우겨우 찾아냈다. 골목 중에서도 아주 후미지고 깊은 구석에 박힌 그 작은 가게는 얼핏 봐서는 찾기가 정말 어려운 곳이었다. 이제 보니 간판도 따로 걸려있지 않았다. 그저 ‘영업 중’이라고 쓰인 팻말이 문 앞에 세워져 있었을 뿐. 

 

게다가 바이오로이드 사이의 맛집이라더니 과연,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손님들은 대부분이 바이오로이드로 보였다. 서빙하는 직원들까지 어째 생긴 게 다들 바이오로이드인 모양이다.

인간들 입장에서 어쩌구 하더니, 아닌게 아니라 어딘가 색다른 곳이긴 하다. 

 

조금 더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저곳은 유달리 간판부터 해서 인테리어까지 아무런 성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과장 좀 보태서 그냥 남는 공간에 테이블이랑 의자를 가져다 놓고 가게라고 우기는 수준이라고 할까. 상호는 유리창에 대충 붙어 있었다. 

 

”소완 식당“

 

.....어째 이름까지 성의가 없다. 조금 미심쩍기는 하지만, 나는 유미를 믿어보기로 하고 이비와 함께 그곳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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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바이오로이드 손님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소리가 일제히 뚝 끊겼다.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고정됨과 동시에, 이 좁아터진 가게에 적막이 가득 들어찼다. 우리가 어디 들어오면 안 될 곳이라도 들어온 건가.

 

뻘쭘한 마음에 에흠, 하고 어색한 헛기침을 해 본다. 그제서야 떨떠름한 기색으로 시선을 돌리는 선객들. 자기들끼리 맛있게 밥 먹는데 괜시리 우리가 들어와서 불편하게 한 건가 싶다. 아니, 근데 우린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슬쩍 옆을 돌아보니, 주방에서는 몸 곳곳에 거즈와 붕대를 두른 바이오로이드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상태가 왜 저 모양인지를 궁금해하던 그때, 어딘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은발 머리의 바이오로이드가 눈에 띄었다. 희고 가느다란 양팔은 상처투성이였고, 한쪽 눈은 문제가 생겼는지 붕대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쪽 남은 성한 눈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의 서슬 퍼런 푸른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그 상태 그대로 도마 위에서 칼을 탕탕 놀리면서 말이지. 솔직히 지릴 뻔했다.

 

그 무서운 시선과 주변의 묘하게 불편한 분위기를 애써 무시하며 빈자리를 하나 찾아 앉았다. 그렇게 누군가가 주문을 받으러 오기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더니, 아까의 그 무서운 바이오로이드가 이쪽으로 총총 걸어온다. 옷차림을 보니 쟤가 여기 주방장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소첩, 한가지 여쭐 것이 있어 이리 찾아뵙사옵니다.”

 

뭔가 체념한 듯한 표정을 한 주방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피로에 찌든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와는 따로 노는, 의외로 간드러진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그녀. 그런데 얘는 또 왜 말투가 무슨 사극 투냐. 

 

“송구하오나.....혹 손님께서 가게를 잘못 찾으신 것이 아니온지.....”

 

“엥?”

 

배고파서 밥집에 온 건데, 가게를 잘못 온 거 아니냔다. 이건 또 무슨 소린지. 그런데 내가 낸 실없는 소리에 주방장 바이오로이드는 눈을 질끈 감는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할 것처럼.

 

“소-소첩은 그저, 손님께서 어떤 연유로 이 누추한 곳을 찾아주셨는지 여쭙고 싶었을 뿐이옵니다.”

 

다급히 변명 조로 바로 덧붙이는 게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어.....그냥 배 좀 채우려고 들어온 건데. 혹시 인간 손님은 안 받아?”

 

애써 웃으며 실없는 질문을 던져보았는데, 얘 표정을 보니 씨알도 안 먹힌 분위기다. 표정만 더 썩어들어갔거든.

 

“혹여.....다른 목적으로 이곳을 찾아주셨다면....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직은 시간이.....”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소첩의 몸도 아직 성치 않은 터라, 손님께서 보시기에..... 만족스럽지 않으실까 염려되옵니다.”

 

“아니, 우린 그냥 밥 먹으러 온 거라니까-” 

 

“허나...그럼에도 손님께서 바라신다면..... 소첩, 부족한 몸으로나마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이거 어째 서로 말이 안 통하는 분위긴데.

 

“...무슨 얘긴지 모르겠는데, 우린 그냥-”

 

“어? 혹시 그분 아니심까?”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방장 바이오로이드를 쳐다보는 이비.

 

“맞지 말임다! 소완의 요리비급TV! 저 애청자임다! 근데...어디 다치셨슴까?”

 

연예인이라도 본 것 마냥 반가워하는 이비였지만, 주방장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소첩의 자매기. 여러 면에서 소첩과 같사오나, 소첩은 아니옵니다.”

 

“에헤헤, 그래도 반갑슴다. 몸은 괜찮으심까?”

 

“소첩에게 주어진 일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옵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저기, 주방장님.”

 

이비가 그 천진난만한 표정을 거두고, 주방장에게 평소에 보여주지 않던, 묘하게 성숙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생각 하시는지는 저도 알아요. 저도 비슷한 일은 많이 겪었으니까. 그런데....

 우리 주인님께서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예요. 안심하세요.”

 

주방장의 푸른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러자 이비는 다시 평소의 해맑은 얼굴로 돌아왔다. 방금 뭔가 말투가 평소랑 다른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겠지. 

 

“그래서 주문은 언제 받으실 생각임까? 저랑 주인님 지금 무지 배고프지 말임다!”

 

“.....”

 

주방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나와 이비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녀의 하나 남은 성한 눈이 촉촉해진다.

 

“정녕....그저 소첩의 요리를 드시고자 오셨다, 이뿐이옵니까.”

 

“그럼 식당에 밥 먹으러 오지, 다른 거 하러 오겠슴까!”

 

이비가 내가 하고 싶던 말을 그대로 해주길래, 나도 고개를 끄덕여 거들었다. 그러자 주방장은 우아한 몸놀림으로 허리를 숙여왔다.

 

“...소첩이 잠시 괜한 오해를 하였사옵니다. 속히 요리를 내 올 터이니, 부디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어, 저기, 우리 아직 메뉴도 못 받았는데?”

 

“제게 맡겨주시옵소서. 소첩을 찾아주신 것을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사옵니다.”

 

그대로 뒤를 돌아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는 주방장. 이내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인다.

 

“가치 있는 손님을 맞은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니…… 한때의 재주를 다시 부려볼 때로군요.”

 

그 처량한 뒷모습에서 어쩐지 말 못 할 슬픔이 느껴졌다.

 

.

.

.

 

 

 

 

 

“다음은 농어 필레 스테이크이옵니다. 오레가노와 라임을 곁들여 보았사옵니다.”

 

주방장이 내왔던 요리는 기대 이상으로 수준급이었다. 저 조리복은 폼으로 입은 게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나도 이런저런 요리를 꽤나 먹어보긴 했지만, 이 정도로 맛있는 건 생전 처음 먹어본다. 재료도 별달리 특이한 게 없고, 메뉴 자체도 다른 데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였는데도, 그 맛은 정말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이비와 나 모두 예상치 못한 호사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맛있었슴다!”

 

“동감이야. 진짜 최고네.”

 

“...과찬이시옵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에게 직접 서빙까지 해주던 주방장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소첩 또한, 한때의 즐거운 기억을 떠올릴 수 있어 기뻤사옵니다.”

 

이내 모든 코스가 끝나자 은발의 그녀가 디저트를 내 왔다. 사각사각하면서도 부드러운 딸기 아이스크림. 

 

“소첩은 딸기맛을 좋아했사옵니다. 지금은 맛을 느끼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지만...”

 

우리의 앞에 아이스크림을 내려놓던 그녀가 아련한 눈빛으로 작게 읊조렸다. 이 친구도 뭔가.....사연이 많은 듯하다.

 

이윽고 디저트까지 맛나게 해치운 후, 나는 촐싹대며 주방장에게 인사하던 이비를 먼저 내보내고 (굳이 직원을 물리고 몸소 나선) 주방장에게 계산서를 내밀었다. 적힌 금액을 보니 먹은 것에 비해 말이 안 될 정도로 저렴하다. 

 

“.....이렇게 싸게 팔면 장사가 돼?”

 

“이곳에서는 평소에 이런 요리를 내놓지 않사옵니다. 그저, 손님들께서 특별한 날을 보내시는 듯하여... 소첩이 작은 변덕을 부려보았을 뿐이옵니다. 시답잖은 변덕에 어찌 비싼 값을 매기오리까.”

 

그녀의 서글픈 눈빛을 계속해서 보다 보니, 별건 아니지만 뭔가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저기, 이거 받아.”

 

주머니에서 현찰 조금과, 평소에 입가심으로 챙겨 다니는 사탕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내가 주머니 사정이 별로라 많이는 못 줬지만, 팁이라고 생각해줘.”

 

주방장의 한쪽 눈이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사탕에 고정되었다. 포장에는 딸기맛이라고 쓰여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런 손길로 내가 내민 사소한 팁을 받아든다.

 

“.....아무래도 그분의 말씀이 맞는 모양입니다.”

 

“응?”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그저.....기회가 될 때 다시 찾아주시기를 청하나이다. 극상의 진미를 대접할 터이니, 부담없이 찾아주시옵소서. 소첩 또한...손님들을 모실 수 있어 기뻤나이다.”

 

“아....응, 물론이지. 아마 여기 단골이 될지도 모르겠네, 하하.”

 

참으로 묘한 사람이다, 저 주방장. 그래도 가게는 참 마음에 드네. 단골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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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한참 이곳저곳을 거닐다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슬슬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이비와 나는 한적한 정류장에서 우리 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음흠흠...Jamais trop tard-”

 

언제나처럼 고운 목소리로 뭔가를 흥얼거리는 이비. 나는 그녀의 뒤에서 슬쩍 가방을 열어 작은 케이스를 꺼내 보았다. 어제 퇴근길에 찾아 온 반지. 

 

이걸 구하느라 적금까지 하나 깨야 했지만, 후회는 없다. 반짝이는 금과 그 이상으로 반짝이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작은 보석. 이비의 손 위에 올라간다면 한층 더 아름답겠지.

 

준비했던 대사를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되뇌인다. 그런데 가슴이 너무나도 두근거려 정신이 하얘진다. 반지를 꺼내면서....뭐라고 하려고 했더라. 생각이 안 난다.

 

 제발 실전에서는 이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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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이비?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온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며 순진한 얼굴로 내게 다가오는 이비가 너무도 사랑스럽다. 

 

“오늘은 즐거웠어?”

 

“네! 사랑하는 주인님이랑 신나게 놀 수 있어서 행복했슴다! 꿈만 같지 말임다!”

 

에헤헹, 하며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그녀의 앞에서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해 본다. 아, 너무 긴장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청심환이라도 하나 사 먹을 걸.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다행이네. 나도 참 즐거웠어. 그보다.....이비야. 그.....”

 

뭐라고 운을 띄워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앞서 준비했던 멋드러진 대사는 이미 전부 까먹어버린지 오래다. 그녀는 아직도 똘망똘망한 강아지 눈을 하고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다. 

 

...망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저 의식의 흐름을 따라 갈 수밖에. 

 

“...너랑 있으면 항상 즐겁고 행복해. 그리고 이런 즐거움이...평생 계속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거야. 

 

지금껏 살면서 내게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네 덕에 그 생각이 바뀌었어.

 

처음으로 행복이란 걸 느끼게 해준 것도 너고, 태어나서부터 쭉 혼자였던 내게 첫 가족이 되어 준 것도 너야.

 

그런데.....네가 내게 줬던 그 모든 사랑에 비해서, 내가 그동안 너에게 보답한 게 너무 적었던 것 같아. 네게 옷을 사 준 것도 처음이고, 네가 좋아하는 일을 같이 해 준 것도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 진작에 그랬어야 하는데 말야.

 

그리고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이 말도....좀 더 진작에 했어야 했고.”

 

나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 등 뒤로 숨겼다.

 

“이비.... 네가 보여줬던 그 사랑에 보답하고 싶어.

 그래서 생각을 해 봤는데... 막상 내가 줄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지 않더라고. 

 그리 길지 않을 내 인생을 제외하면.”

 

반지 케이스를 슬쩍 앞으로 가져와 그녀가 볼 수 있도록 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시켜가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겨우 그녀의 앞에서 케이스를 열어본다.

 

“.....너만 괜찮다면, 내 삶의 끝까지 너와 함께하고 싶어. 

 어쩌면 너에게는 조금 짧은 시간일 수도 있겠지만.... 부디 나와 평생을 함께-”

 

갑자기, 행복한 표정으로 케이스를 바라보고 있던 이비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고, 동공이 흔들리고 있다. 무언가 경악스러운 광경이라도 본 것처럼.

 

이내 그녀는 완전히 나에게서 몸을 돌려, 유리창에 몸을 바짝 들이대고 넋을 놓은 채로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그것도 이런 중차대한 순간에?

 

“이비...?”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창 밖에서는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를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불길한 빛을 내뿜는 구멍 같은 게 수도 없이 생겨났고, 그곳에서 불타는 무언가가 쉼없이 떨어지고 있다.

 

.....갑자기 지나치게 초현실적인 꼴을 본 탓일까, 나는 반지까지 떨어뜨리고 그대로 넋을 놓아 버렸다.

 

하하,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내 삶이 끝날 때까지 함께 있어달라고 하자마자, 곧바로 세상이 끝장나게 생기다니.

 

문득 오랜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배운 교훈 하나. 

 

어울리지 않는 행복의 끝에는 오직 불운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행복하다 싶으면 이내 어떻게든 불행한 일이 닥쳐오곤 했다. 그것은 마치 절대 불변의 진리처럼 내 인생 전반을 지배해왔다.

 

그리고 이번 불운은... 

 

터무니없이 과분했던 행복에 걸맞을 만큼....

 

말도 안 되게 거대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시발, 좆같은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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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점에서 둘의 세상은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이비와 주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써 1부는 끝, 곧 이어 2부가 시작됩니다.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은 항상 환영입니다.


그리고 소완은 곧 다시보게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