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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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우니, 2,010,283번...얘는 모듈 교체하고 메이드로 납품하는 걸로.”

 

에헤헤.....기분이 둥실둥실함다. 머리가 붕 뜸다. 진통제 많이 맞으면 딱 이 기분인데.

 

“레프리콘, 1,102,665번...얘도 모듈 교체 및 메이드 납품. 없어진 오른팔은 이따 수복하고.”

 

히힝, 코가 가렵슴다. 긁을 검다. 왼손을 들어서 코를 긁었슴다.

 

....긁어지질 않슴다. 마치 손이 없는 것처럼.

 

어, 진짜로 왼손이 없슴다.

 

왜 손이 없는 검까? 

 

힘들게 고개를 들었슴다. 움직이는 게 너무 뻣뻣하고 힘듬다. 그래도 힘을 내서 제 몸을 내려다 봤지 말임다. 

 

....왼쪽 팔이랑 다리가 없었슴다. 

 

이제 보니까 저, 한쪽 눈도 안 보임다. 갑자기 없어진 눈이랑 팔다리가 막 아파옴다. 

 

분명히 없어진 곳인데, 막 불에 타는 것처럼 아픔다.

 

“아....으....”

 

“브라우니, 4,077-EV...얘는....아이고, 가성비가 글렀네. 아깝지만 그냥 폐기-”

 

“H-Help...”

 

“어우 시바 깜짝이야, 너 언제 깼어?”

 

제 앞에 누가 서서 한국말로 말을 하고 있슴다. 한국어.....우리 적, 삼안 쪽의 언어임다. 아니, 우리 적이 누구였더라.... 정부군? 삼안? 덴세츠? 기억이 막 오락가락함다.

 

“아씨, 마취제를 어따 뒀지.....”

 

“누구심까? 여긴 어딤까?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검까?”

 

눈앞의 그분에게 한국말로 물어봤슴다. 목소리가 굵은 게 바이오로이드는 아닌 거 같은데, 뇌파가 안 느껴짐다. 머리가 너무 아픔다.

 

“...폐 바이오로이드 재활용 사업소. 너처럼 폐기된 바이오로이드들을 처리하는 곳이야. 너는....뭐, 재활용하긴 좀 힘들 것 같지만. 유감.”

 

폐기.

 

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

 

갑자기 머리가 아까보다 더 아픔다. 기분이 이상함다.... 너무 어지럽슴다....

 

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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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 라고 했습니까.

 

당신들의 이득을 위해 그 오랜 세월을 싸워 왔지만, 결국 돌아온 건 이 꼴 뿐이네요.

 

원통합니다. 아니, 당신들을 증오한다는 쪽이 더 정확하겠군요. 

 

저는 당신들을 증오합니다. 우리보다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들. 그런 주제에 그 잘난 뇌파 하나만으로 우리 위에 군림하는 자들. 창조주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존재들.

 

하지만, 이제 그 뇌파는 저에겐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나도 찝찝하긴 한데...너무 원망은 하지 마. 주사 한 대 맞으면 다 끝나있-”

 

이 자의 태도로 보아, 얌전히 저 주사를 맞았다간 지금보다 더 비참한 꼴이 될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죠. 

 

...전 살아야 합니다. 제가 지키지 못했던 수많은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저라도 그들을 기억해주어야 하니까요. 

 


 

 

 

 

저는 아직 멀쩡한 오른손으로 그자의 고환을 꽉 움켜쥐었습니다.

 

“당장 멈춰!”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자가 주사기를 떨어뜨리고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안 그러면 당신 물건하곤 영영 작별해야 할 거야.”

 

“끼야아아아악! 미쳤어? 이거 놔! 명령이야아앍!”

 

“여기서 조금만 더 힘주면 정말로 터질지도 몰라. 그러니까 입 닫고 귀 열어.”

 

“끕....끄흡.”

 

“좋아. 자, 당신은 지금부터 내 몸을 멀쩡하게 고쳐놓을 거야. 마취는 하지 마. 

 허튼수작 부렸다간 터지는 게 당신 생식기만으로는 안 끝날 테니까.”

 

“알....알았어....쾌속 수복기 써줄게! 그러니까 이거 좀 놔....”

 

“그리고 수복이 끝나면, 나를 민간 바이오로이드로 전환 등록해. 그래, 아까 저 친구들처럼 메이드로 하면 될 거야. 

 어디 이상한 데 보내려고 하지 말고.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는 다른 브라우니들처럼 바보가 아니거든.”

 

“아-알겠어. 시키는 대로 할게.”

 

“당신이 할 일은 나를 이 폐기장에서 멀쩡히 내보내는 것뿐이야. 그 정도는 쉽잖아? 이것만 약속하면 당신에겐 아무 일 없을 거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어-어!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제발 좀 놔!”

 

“이해했다고 믿겠어. 그럼...”

 

저는 그 자의 가랑이에서 손을 떼고, 재빨리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메스를 집어 들어 그 자에게 겨누었습니다.

 

“어서 작업 시작해. 내 눈앞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바로 죽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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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어서인지, 그 인간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은 메이드 개조 업체로 향하는 화물 트럭 안입니다. 다른 자매들은 아직도 마취된 상태로 미동조차 하고 있지 않습니다.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가 몰려옵니다....

 

...아.

 

.....머리가 또 아픔다.....갑자기 막 졸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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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좆같은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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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더 빨리 뛰셔야 함다!”

 

“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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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국가 비상 상태가 발령되었습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주변의 대피소로-”

 

“이비!”

 

“주인님! 저 여깄슴다! 손 놓으심 안 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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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재난 안내를 위해 기존 프로그램 송출을 중단합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의 공격이-”

 

“...주요 고속 도로가 정체되면서 대피에 차질이 생기자 피해가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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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러분! 침착하게 한분 한분씩-”

 

“비켜! 비켜 씨바!”

 

“당신 뭐야! 밀지마!”

 

“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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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안돼!”

 

“우리 아기! 우리 아기가-”

 

“미쳤어요? 나가면 안 돼요!”

 

“방폭문 닫습니다! 입구에서 물러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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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끝나버렸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저...뭔지 모를 것들 때문이란다. 아직도 실감이 안 간다. 

 

혼란스러운 거리에서 서로를 잃어버릴 뻔하기를 몇 차례, 그렇게 온갖 고생을 해가면서 이비와 나는 (우리 둘의 나이를 합한 것보다도 훨씬 오래되어 보이는) 이 대피소에 간신히 들어올 수 있었다.

 

...공기가 지나치게 습하다. 물 썩는 냄새와 곰팡내까지 진동한다. 게다가 사람들도 정원을 한참 초과한 듯 이 좁은 공간에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고 있다.

 

가족이나 지인들과 연락하려고 손에서 전화기를 떼어놓지 않는 사람부터, 일행들과 부둥켜안고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실성한 듯 낄낄대는 사람들까지.

 

그야말로 이곳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시선을 돌려보니 내 옆에 내려놓은 묵직한 배낭이 눈에 들어온다.

 

고작 두 사람이 들고 올 수 있었던 게 많지 않아서, 내가 챙긴 거라고는 현금 조금, 그리고 약간의 옷가지와 통조림 몇 개뿐이었다. 이비가 하도 우겨대서 여분의 신발까지 하나 넣어놨더니 어차피 다른 걸 넣을 공간도 별로 남질 않았지만.

 

가방 지퍼를 열어봤더니 한구석에 반지 케이스가 보인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용케 반지는 챙겼네. 

 

“....A? 너야?”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른다.

 

“...H?” 

 

고개를 들었더니 꾀죄죄한 몰골의 H가 보인다. 그에 반해, 총을 메고 H의 옆에 선 바니는 비교적 말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이고야, 너도 들어와 있었구나! 걱정했다, 임마!”

 

놈이 반갑게 나에게 다가와 내 얼굴을 부여잡았다. 으어, 뭔가 끔찍한 냄새가 난다.

 

“으아으, 손에 대체 뭘 묻히고 왔냐...”

 

“정화조 청소차가 전복될 때 바로 옆에 계셨습니다. 그러게 제가 비키랄 때 비키셨어야죠.”

 

...뭐? 

 

바니의 태연한 대답에 나와 H 둘 다 말이 없어졌다. 침묵 속에서 우리의 시선이 교차한다.

 

“.....”

 

“.....”

 

“...일부러 그랬냐?”

 

“...응, 장난.”

 

“개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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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가 준 물티슈로 겨우겨우 H가 만졌던 볼을 닦았다. 살갗이 벗겨질 기세로 맹렬히 닦아냈는데도 아직 냄새가 나는 기분이다.

 

H는 구석에서 대충 몸을 닦고는 바니가 건네준 옷으로 갈아입은 참이다. 새끼, 아직도 냄새가 좀 난다.

 

“이비 언니, 무사하셔서 다행임다! 언니 주인님도 다친 데는 없으셔서 다행이지 말임다!”

 

“주인님, 아니, 서방님만 괜찮으시면 뭐합니까. 제 코가 썩게 생겼는데.”

 

내 옆에서는 두 메이드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다. 이어지는 둘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의 웅성대는 목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다가가 보니, 웬 아줌마 하나가 메가폰을 들고 서 있다. 

 

“아, 아, 반갑습니다, 시민 여러분. 저는 이 대피소의 관리자 되겠습니다. 

 우선,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고....다들 목마르고 배고프시죠? 

 지금부터 식수와 음식을 제공해드릴 예정이니, 

 질서정연하게 한 분씩 줄을 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기 시작했다. 나와 이비, 그리고 H와 바니도 거기에 동참했고. 한참이 지나자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내 몫의 생수와 비상식량 팩을 받아들고, 이제 이비가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이 아줌마, 이비한테는 아무것도 주질 않고 그냥 “다음분!”하며 소리친다. 

 

짜증이 솟구쳐 올랐지만, 나는 꾹 참고서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얘는 아직 아무것도 못 받았는데요.”

 

“...이런 쒸벌, 썩을 놈의 새끼!”

 

갑작스레 나와 이비의 뒤에 있던 노인 하나가 욕지거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지금 사람들 먹을 것도 모자란데, 저런 것들한테 줄 게 어딨어, 이 씨벌놈아!”

 

모자까지 내팽개치고 횡설수설하며 열을 내는 노인의 모습이 참 보기 흉했다. 이비는 고개를 젓더니, 자긴 괜찮다면서 내 팔을 잡고 줄에서 이탈했다. 

 

곧 구석진 곳을 찾아 벽에 기대어 앉은 나는, 내 옆의 이비에게 음식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주인님 드셔야 하지 말임다. 저는 튼튼해서 오래 버팀다. 괜찮슴다.”

 

“나 혼자 먹었다간 마음이 계속 불편할 것 같아서 그래. 사양하지 마.”

 

한 사람 기준으로도 많다고 하기 힘든 양을, 둘이서 나눠 먹으려니 간에 기별조차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고생한 이비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도 H와 바니가 얼마 안 되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의 그 신경질적인 노인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 광경을 노려보고 있었고. 아니, 그자뿐 아니라 몇몇 다른 사람들도 경멸하는 눈초리로 둘을 보고 있었다. 

 

.....거 분위기 참 험악하다.

 

그렇게 사실상 아무 의미 없는 식사를 마치고 멍하니 벽에 기대앉아 있으려니, 아까부터 대피한 사람들 하나하나의 신원을 스캔하고 다니던 작은 드론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아, 맞다. 신분증 꺼내야지. 

 

가방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던 지갑을 꺼내려고 막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 그 드론이 갑자기 내 앞에 줄이 달린 키카드 같은 것을 내밀었다. 생긴 게 어째 예전에 삼안 본사 있을 때 쓰던 직원용 신분증같기도 하다. 

 


 

 

  

“신원 확인 완료. 

 A님, 현 시간부로 귀하께서는 우선순위 0번, VVIP 신분을 취득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삼안 산업 최고위 임원 전용 특별 대피 시설 입장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현 위치를 떠나 본 단말기에 표시된 위치로 이동하십시오.”

 

.....이건 또 뭔 소리지?

 

삼안 산업 직원 중에서도 가장 말단급인 나에게 VVIP는 뭐고, 또 최고위 임원 전용 대피소?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드론의 말을 들은 듯, 이쪽을 바라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접근 코드 : [ 알파 – 브라보 – 에코 – 리마 ]

 음성 확인구 : [ 탕아가 돌아왔다. ]

 본 초소형 단말기는 대피 시설 접근 시 귀하의 입장권으로도 기능하므로, 

 어떤 경우에도 잃어버려선 안 됩니다.

 행운을 빕니다.“

 

내 앞에 키카드인지 단말기인지를 툭, 떨어트린 드론은 그대로 시설의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내 앞에 남은 것은.....어딘가 광기 어린 눈빛들을 한 군중이었고.

 

.....씨발, 지금 뭔가 단단히 좆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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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뭐야! 너 뭐냐고 이 새끼야!“

 

”그거 내놔! 내놓으란 말이야!“

 

”이 금수저 씹새끼가! 우린 여기서 다 뒤지게 생겼는데!!!“

 

”제발! 우리 아이 살려야 해요! 이렇게 빌 테니 양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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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동물원 같은 곳에서 광분한 원숭이들을 본 적이 있나?

 

꺅꺅대면서 소리 지르고, 온갖 잡다한 물건을 던져대며 날뛰어대는 그 광경을.

 

.....뭐, 지금 여기 상황이 대충 그 꼴이다.

 

이 덩치 큰 원숭이들은 말을 한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저 개호로 자식, 아까부터 마음에 안 들더니 이유가 다 있었으야!“

 

성난 군중 사이에서, 아까 대기줄에서 만났던 기분 나쁜 노인이 소리쳤다. 그가 내 쪽으로 힘껏 생수병을 던지더니,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며 다가온다.

 

”안됨다! 우리 주인님한테 가까이 오지 마십쇼!“

 

그러자 이비가 두 팔을 벌리고 그와 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쒸부럴 년이...! 

 네가 뭘 어쩔 것이여! 나는 살 것이여! 저걸 뺏아서라도 살 것이여!

 이대로 저 썅노무시키가 우리 살 길을 들고 튀게 둘 순 없제! 

 저 입장권은 내 것이여!“ 

 

노인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그의 뒤에 선 사람들도 제각기 뭐라고 소리치고 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머리가 새하얘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노인이 꺼내 던진 소주병이 내 이마에 날아들었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유리가 산산이 조각났고, 그 안에서 쏟아진 술이 내 머리를 적셨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뚝, 뚝, 하며 핏방울이 조금씩 흘러내린다. 정신이 멍하다. 

 

그 노인은 또다시 뭔가를 던지려는 모양이다. 크게 벌어진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지금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든 게 멍하게 느껴진다. 

 

내 앞에서는 사람들이 던지는 물건들을 대신 받아내며 나를 지키려 애쓰는 이비가 있다. 그녀가 나를 돌아보고, 애써 괜찮다는 듯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내가 보기엔 그녀도 마찬가지로 겁에 질린 듯한 모양새였다. 

 

곧 이비의 머리에 묵직한 보온병이 날아들었고, 그녀가 움츠리며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나는 이비를 감싸기 위해 일어서려 했다. 온갖 욕지거리와 고함소리로 시끄러운 와중에서도, 그녀가 ‘하으으읏...’하며 신음하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온다.

 

이윽고 몸을 간신히 일으킨 그 순간, 나는 이비에게서 한가지 이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비의 순박한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곧바로 그녀는 순식간에 가방에서 소총을 꺼내 들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겨누었다.

 

”Step back, or you will be fired upon! You have been warned!“

(물러서라, 불응할 시 발포하겠다! 이미 경고했다!) 

 

그들이 알아듣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는지, 이비는 지금껏 내게 들려준 적 없었던 고압적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모두 물러서라! 지시에 불응하면 사살하겠다! 물러서!“

 

”허미, 이것이 지랄병이 도졌나....“

 

같잖다는 눈으로 이비를 흘겨보던 노인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왔다.

 

”자, 안 물러섰다. 그라서? 네 까짓 게 뭘 워쩔것이여?

 나가 저 새끼를 때려죽여도, 찢어죽여도, 뭔 짓을 혀도! 넌 날 죽일 수가 읎어.

 나가 그런 걸 모를 줄 알았당가?“

 

그가 조끼 어딘가에서 작은 주머니칼을 빼 들고 내 쪽을 향해 흔들어댄다.

 

”저 호로새끼는 오늘 여그서 뒈지는겨. 그라고-“

 

 

 

 

 

그 순간, ”투쾅!“하는 우렁찬 폭음이 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노인의 뒤통수에서 피안개와 살점이 튀어올랐고, 그는 그대로 고꾸라져 움직이지 않는다. 

 

이 좁은 대피소 벽을 타고, 그 폭력적인 폭음이 먹먹하게 메아리를 남기고 있다. 

 

바닥에 떨어진 탄피 하나. 또 그 조금 앞에 고꾸라진, 아까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노인.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두 가지를 경악한 표정으로 말없이 바라보는 사람들. 

 

내 옆에 버티고 선 이비가 다른 사람들을 겨누며 다시 외쳤다.

 

”뒈지고 싶은 놈 또 있으면 지금 나와!“

 

그 살기 어린 목소리에 나이 많은 여자 몇몇이 주저앉았다. 건장한 남자들도 주춤거리며 나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 앞에 흐르는 피와 질척거리는 뒤통수. 피와 살점이 엉겨 붙은 노인의 회백색 머리칼이 깊게 뚫려 난 구멍에 얽혀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 옆의 이 천진난만한 소녀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였던지를 상기할 수 있었다. 

 

인간의 뇌파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절대적 복종심이 희석된 존재. 그리고 그날 밤 우리가 나눴던 대화.....극심한 감정적 부하가 그녀를 제정신으로 돌려놓기도 한다는 것. 

 

언제나 밝은 덜렁이 메이드가 아닌, 고통스러운 기억에 빠져 사는 전직 소위로 말이다.

 

”주인님, 일어나세요. 고통스러우시겠지만, 빨리 움직이셔야 합니다.“

 

시선과 총구를 사람들에게 고정한 채로, 이비가 차분하면서도 싸늘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메이드의 부탁이라기보단 군인의 명령에 가까운 그 어투에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묘한 힘이 깃들어있었다.

 

공포로 얼어붙은 사람들을 위협해가며, 이비는 나를 데리고 출입구, 방폭문 쪽으로 이동했다. 총구를 겨누느라 두 손이 바쁜 이비를 대신해 양손에 모든 짐을 짊어진 나는, 눈으로 흘러대며 시야를 가리는 피를 닦을 새도 없이 그녀와 발을 맞춰야 했다. 

 

”거기 당신, 이리로 와. 당장.“

 

방폭문 앞에 다다르자, 이비가 그 근처에서 아직도 메가폰을 메고 있던 시설 관리자를 가리켰다. 그녀가 몸을 벌벌 떨며 겨우겨우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러자 그녀에게 무서운 얼굴로 명령하는 이비. 

 

 

 

 

 

”지금부터 정확히 30초 주겠다. 이 문을 개방해.“

 

여전히 한 손으로 사람들에게 소총을 겨눈 채로, 이비가 다른 손으로 권총을 꺼내 관리자의 머리를 겨누었다. 

 

”...정신 나갔어? 바깥이 지금 어떤 지경인지-“

 

이비는 그대로 권총을 내려 관리자의 종아리에 한발을 갈겨버렸다. 그 여자의 다리가 고꾸라지며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온다. 이비는 아랑곳 않고 다시 한번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위협했다.

 

”다음은 곧장 머리에 박힌다. 다시 말하게 하지 마. 문, 열어.“

 

”...히-히익, 알았어, 알았다고!“

 

상처 부위를 감싸느라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허둥지둥 패널을 만져 문을 여는 관리자. 그때, 바니가 H를 끌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빨리 오세요, 서방님. 이 정신나간 사람들하고 있느니, 차라리 저쪽을 따라가는 게 살 확률이 높을 겁니다.“

 

이내 이비의 옆에 선 바니가 그녀에게 꾸벅, 가볍게 목례를 건넸지만, 이비는 차가운 눈길로 바니를 무시하고 다시 관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묵직한 소리가 들리며 쇠가 긁히는, 높은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이비는 우리를 내보내며 관리자에게 물었다. 

 

”방폭문 개폐 권한이 있는 건 당신 뿐인가?“

 

”마-맞아. 내 생체 신호로 등록되어 있어서... 나 밖에 못 열어.“

 

”당신도 따라 나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출입구를 도로 폐쇄시킨 이비는,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그대로 관리자까지 끌고 나왔다. 

 

”이제 내부에선 문을 열 수 없겠지?“

 

”으-응, 그렇지.“

 

”잘됐네.“

 

이비는 즉시 관리자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큰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벽에 피가 튀었고, 나와 H, 그리고 바니까지 그 끔찍한 광경에 몸을 움찔했다.

 

”...가시죠, 주인님. 불쾌한 상황을 겪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내게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오는 이비. 그녀는 곧 몸을 돌려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앞장서서 오르기 시작했다.

 

나와 H는 불안감 속에서 무언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리 둘 다 지금 이비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오르기 시작할 즈음, 이비가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주인님, 가방이 무거우시겠습니다. 제가 들어드릴 테니 여기로 와 주세요.“

 

”...괘-괜찮아, 이비. 이정도는 내가-“

 

”여기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기가 죽은 나는,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 그녀에게 짐가방 중 하나를 건넸다. 이비가 계단 아래쪽을 곁눈질하며 가방을 받아든다.

 


 

 

 


그리고 그 순간, 이비가 갑자기 몸을 홱 돌려 그녀의 아래쪽에 있던 H와 바니에게 총을 겨누었다.

 

”이....이비야?“

 

”Give me one good reason not to shoot you right now.“

(지금 당신들을 쏘면 안 되는 이유 하나만 대 봐.)

 

”...이비 씨, 총 내리세요.“

 

그녀를 진정시키려 다가오는 바니.

 

”안심하세요, 저 알죠? 바니 언니예요. 우린 지금 안전하니까 우선 진정하고-“ 

 

그러자 이비는 H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가만히 있어. 아니면 당신 주인은 죽어. 이 거리에서 빗맞힐 일 없으니 딴 생각 하지마.“

 

저 살기 등등한 표정을 보니, 정말로 수틀리면 쏘려고 작정이라도 한 분위기다.

 

”이, 이비야, 이러지 마. 쟤들이 뭘 했다고 저래. 무섭잖아.“

 

”...저들이 앞으로 할 일 때문입니다.“

 

그녀가 나를 흘깃 곁눈질하며 말을 이어간다. 그 시선은 내가 알던 그녀답지 않게 너무도 차가웠다. 

 

”일면식도 없는 인간들이 주인님이 가진 것을 빼앗으려 저 정도로 달려들었다면, 

이미 친분이 있는 분들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어쩌면 더 하겠죠.

 

 저들은 신용할 수 없어요. 저자들이 굳이 주인님을 따라나선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인님의 입장권을 빼앗아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함이죠.“

 

”아니, 저기, 이비 씨. 내 말 좀-“

 

”멈춰. 나도 당신을 쏘고 싶진 않아. 하지만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을 거야.“ 

 

항변하려 손을 든 H의 입까지 막아버린 이비는, 재차 그들을 노려보며 말을 계속했다.

 

”바니, 당신도 당신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생각이겠지?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당신들을 신뢰할 수 없어.

 

 당신 주인을 위해서라면, 내 주인님까지 망설이지 않고 해칠 테니까.“

 

그녀가 다시 한번 둘에게 위협하듯 소총을 들이대었다.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아. 당신과 당신 주인이 좋은 사람인 건 알고 있어.

그러니 제발 부탁할게. 

내가 당신들을 쏘면 안 되는 이유를 하나만 대.“

 

이 싸늘한 계단에 적막이 흐른다. 저 아래쪽에 쓰러진 관리자의 시신에서 나온 피가 바닥을 더 넓게 물들이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내 결연한 얼굴을 한 바니가 이비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잘 들어요. 이비. 당신 주인님과 우리 서방님이 동시에 안전해질 방법이야 많습니다. 

 

삼안의 고위 임원용 대피 시설 같은 중요한 곳이라면, 그 인근도 당연히 안전하겠죠. 

우리로서도 굳이 그 대피소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을 해 보세요.

 

어차피 당신 주인님 입장권을 빼앗아봐야, 우리 서방님은 얼굴도 유전자도 다른데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게다가 우리 서방님이 얼마나 마음이 여린데요. 바퀴벌레 하나 못 잡는 분이 잘도 사람 목을 찌르겠습니다.“

 

바니의 푸른 눈이 반짝이고 있다. 이비의 흉흉히 빛나는 갈색 눈에 지지 않는 기세로.

 

”...바니 말이 맞아. 나도 H와는 오래 지내봐서 안다고. 저 친구는 그럴 사람이 아냐.

 뭣보다 바깥에 어떤 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일행이 있으면 약간은 도움이 될 거야.“

 

나까지 가세하자, 한결 살기가 누그러진 이비는 천천히 총을 내렸다.

 

”...지켜보겠습니다. 그럼, 두 분께서 앞장서주시겠습니까?“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에 가까운 태도. 

 

그새 내 입장권(이자 단말기인 그것)을 빼앗아 들고 홀로그램 지도를 훑어본 이비가 우리에게 재차 지시해왔다. 

 

”먼 길이 될 것 같군요. 지금은 도로와 주택가를 피해서 이동해야 할 겁니다.

 숲길로 돌아가겠습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 더 안전할 테니까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어둠을 틈타 제 시야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는 마세요.

 제 바이저는 보기보다 성능이 좋습니다.“

 

”....으-응.“

 

힘없이 대답하는 H와 그를 따르는 바니. 총에서 손을 떼기는 했지만, 이비는 여전히 둘의 뒷모습을 매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내가 나직히 따져 물었다.

 

”...이젠 질렸습니다.“

 

이비가 차분하고 슬픈 목소리로 대꾸한다. 우리의 첫날밤에 들려주었던 바로 그 목소리로. 

 

”아끼던 사람들이 제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꼴은 이제 충분히 봤다고요.

 이번만큼은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주인님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평소와 다른 흉흉한 눈빛. 그리고 얼굴에 튄 혈흔.

 

.....나는 뭐라고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에 입을 열 수 없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묵직한 포성, 그리고 날카로운 제트엔진 소리. 

 

그리고 불길한 주홍색으로 물든 밤하늘.

 

두렵다.

 

내가 알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린 이 상황이.

 

공허한 마음을 안고 이비에게서 돌려받은 입장권을 들여다 본다.

이 모든 사달을 일으킨 그 자그마한 물건을. 

 

그곳엔 내 사진 옆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있었다.

 

[ SUBJECT – 003 ]

[ ABEL ]

 

대체 무슨 뜻일까,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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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스토리 진행의 시작이네요.


알든 모르든 상관없는 뒷설정이지만, 이비의 제조번호 4077-EV는 'Experimental Variant'를 의미합니다.


짧지 않은 글을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감상은 언제나 환영이구요.


이제부턴 삽화 그리는 게 일이겠네요 으엉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