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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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혹시 모를 추격에 대비해 신속히 자리를 뜨고 있다.

 

굳이 내 고집에 어울려준 이비 덕분에 일행에 합류한 유미는 (그녀 자신도 꽤나 기운이 빠져있을 텐데도) 그 작은 몸으로 내 가방 중 하나를 짊어지고 우릴 따랐다. 외근 다닐 때마다 챙겨가는 그 안테나 –유미는 ‘외로운 십자가’라고 불렀다-까지 들쳐메고서 말이지. 

 

남자인 내가 봐도 상당해 보이는 무게를 대수롭지 않게 견뎌내는 걸 보니, 역시 바이오로이드는 바이오로이드구나 싶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유미를 무사히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약간의 해프닝이 있어서 바니가 크게 다칠 뻔했다곤 하지만, 이비의 대처 덕분에 이렇다 할 부상 없이 구출이 마무리된 것은 희소식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비의 경우....

 

흠.

 

무사히 유미를 구해서 돌아온 이비는 머리를 부여잡고 잠시 바닥에 주저앉더니, 다시 평소의 터무니없이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버렸다. 

 

아마 긴장이 풀리면 다시 바보가 되는 건가. 

인격모듈인지 뭔지 거 참 제멋대로다.

 

해맑은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이비의 뒤에서, 바니와 유미가 수군덕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기, 저분은 원래 저렇게 감정 기복이 심하세요?”

 

“말도 마십시오. 저건 심한 축에도 못 낍니다. 

 이 사달이 난 뒤로 어찌나 수시로 바보와 냉혈한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지... 

 이젠 알콜만 들어가면 헤까닥하던 우리 서방님 술주정이 그리워질 지경입니다.”

 

“...그정돈가요...”

 

“장담하지만 상상 이상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세상에 저렇게 멍청한 불량품이 어디 있나 싶었는데...

 돌이켜보니 이비 씨는 멍청이였을 때가 더 마음에 들었다니까요.

 .....뭐, 저 알 수 없는 기질 덕분에 험한 꼴을 면한 건 고맙긴 합니다만.”

 

언제나처럼 칭찬인지 비난인지 구분하기 힘든 평가를 내뱉고 있는 바니. 

나는 이비의 호박씨를 까는 둘을 뒤로하고, 아까 얻었던 정보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해보았다.

 

첫째, 유미의 말에 의하면 저건 ‘철충’, 즉 기계에 기생하는 외계 기생충이다.

 

유미가 중계시설에 갇혀있는 동안 삼안 내부 DB에서 슬쩍 엿본 사실이란다. 

며칠 전 모든 연락이 두절됐던 울란우데 시설의 비밀 연구소에서 분석 중이던 철충 표본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고, 그 녀석이 유출되면서 이 사달이 난 거라나 뭐라나.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정보 하나 안 풀고 있는 삼안 윗선은 대체 뭐하는 놈들인지 모르겠다. 애초에 영화만 봐도 나오잖아. 외계에서 온 건 함부로 갖고 노는 거 아니라니까.

대가리 빈 윗사람들 때문에 이게 다 무슨 고생이냐.

 

고생하니 말인데, 조금 전의 고생으로 알아낸 사실이 두 가지 있었다.

 

둘째, 철충들은 (괴물 같은 비주얼이긴 해도) 전력계통이나 코어가 손상되면 무력화된다.

셋째,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것들은 인간의 뇌파와 거의 똑같은 파장을 발산한다.

 

그래도 어떻게 상대할 방법은 있다는 게 다행이긴 한데....

 

아까 바니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정 거리 내에서는 쟤들이 사람이랑 분간이 안 된단다.

 

.....뭔지는 몰라도 이거 참 곤란하게 됐다. 

 

바니도 주인인 H의 직접적인 명령이 있다면 대처가 가능하다곤 하지만....그렇다고 해도 사실상 일행 중에 놈들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건 이비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애초부터 (나를 제외한) 인간의 뇌파는 인식하지도 못하고, 딱히 내 지시가 없어도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그녀라면 불시의 기습에도 재빠른 대처가 가능할 테니까.

 

잠깐, 불시의 기습이라.

 

유미의 말에 의하면 아까 상대한 놈들이 조금 단순한 케이스였을 뿐, 현재 각 지역을 공격하고 있는 철충의 대다수는 상당히 복잡한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인류의 전술을 본뜻 듯한 전술을.

 

만약에 뇌파의 경우도 저놈들이 고의로 인간을 모방하고 있는 거라면....

그 정도로 지능적인 놈들을 상대로는 VIP 대피소고 뭐고 우리 다 좆된 거 아닌가. 

 

내가 뭐 노벨상 수상 과학자도 아니니 이런 걸 따져봐야 의미는 없겠지만...

 

.....이건 뭐 어떻게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온다.

 

어떡하지.

 

온갖 고민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흙길을 따라 움직이는 다리와는 별개로, 내 신경은 온통 근심으로 가득해 지끈대는 머리에 쏠리고 있었다.

 

.....이런저런 고민으로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탓일까, 뒷목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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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걷기를 두어 시간, 우리는 산 중턱의 나무 그늘에서 잠시 휴식 중이다.

 

각자 장비를 점검하고, 신발을 고쳐 신는 등 재정비에 바쁠 때에도 나는 여전히 걱정에 빠져있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생존에 대해 걱정해본 적은 없었는데.

그것도 외계 기생충 침공 때문에.

.....거 참. 

 

침울한 얼굴로 앉아있던 나에게 H가 다가왔다.

 

그는 방금 전만 해도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유미가 아까 안테나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신호를 잡아준 덕분이겠지. 

 

녀석의 표정을 보고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정부가 세종시로 임시 천도한대. 서울이 함락 직전이라나 봐.”

 

H가 이어폰 한쪽을 내게 건넸다. 이어서 내 귀에 들어오는 불편한 소식. 

 

[...현재 서울은 수도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인천광역시와 경기도 상당 부분을 포함한 수도권 전역이 통제를 벗어난 상황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현재 머물고 계신 대피소에서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대한민국 정부와 삼안산업은 신속한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피소로 피신하지 못하셨을 경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수도권에서...]

 

“...좆됐네.”

 

“그렇지.”

 

귀에서 이어폰을 뺀 우리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서울 쯤이나 되는 곳- 아니, 수도권 전역이면 삼안 자치구역까지 포함한 거겠지. 

그렇게나 큰 곳이 사태 발생 후 사흘도 채 안 되어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얘기다.

 

그나마 깡촌에 가까운 이곳도 이 지경인데, 대체 그쪽은 얼마나 심하다는 건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향하고 있는 그곳이 정말로 안전할지도 의문이고.

 

“...이젠 그 임원 전용 대피소란 곳도 멀쩡할지 모르겠다.”

 

내 말에 H는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마 본인도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겠지.

이내 입을 연 녀석의 말은 다소 쌩뚱맞았다.

 

“그거 아냐,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너 따라가서 손해 본 일이 없었던거.”

 

얘가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해서 쳐다봤더니, H가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어간다.

 

“하하, 그게... 옛날부터 네가 운이 엄청 좋았잖아. 

내기를 해도 거의 백이면 백 다 네 예상이 들어맞질 않나...

뭘 사도 항상 이벤트는 네가 당첨이었고.

너 따라다니면 항상 재밌는 일도 많았고, 가끔 얻는 것도 생겼었지.”

 

어딘가 복잡한 눈빛을 하고 바니에게로 시선을 옮긴 H.

 

“뭐라고 해야 할까, 너는 옛날부터 신기할 정도로 뭘 잘 맞추더라. 

 이상하리만치 운도 좋은게, 무슨 무당기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야.

 어쩌면 바니가 너를 따라가자고 한 것도 네 그런 면을 느껴서가 아닐까 싶다.”

 

“....뭐래.”

 

“하하, 우린 뭐가 됐든 네 운을 믿는다고. 그런 뜻이야.”

 

그가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녀석이 곤란할 때 으레 짓곤 하는 인위적인 웃음이었지만, 나로서도 그가 내게 애써 미소짓는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프로포즈 당일날에 세상에 망했는데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나 모르겠다.

 뭐, 적어도 이번엔 네 말대로 그 운이라는 거 덕 한 번 봤음 좋겠네.” 

 

“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운 없는 누구는 밤에 똥 싸다가 헐레벌떡 대피소로 뛰어갔을지도 모르잖아.” 

 

“....그거 네 얘기지?”

 

“...아니?”

 

이거 백 프로 이새끼 얘기 맞다. 그간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다.

 

“자, 이제 슬슬 출발하시지 말임다!”

 

채비를 마친 이비의 힘찬 목소리가 우리의 침울한 마음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다시 배낭을 들쳐메고 발을 옮겨 보지만, 어째 한발 한발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H의 허접한 격려도, 시답잖은 농담도 내 마음을 편하게 하진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엔 진심으로... 녀석의 헛소리가 맞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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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는 바니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원동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 달라붙어 걸어간다.

 

눈을 돌려 내 앞에서 길을 이끄는 이비를 보았다.

사랑스러운 그녀. 하지만 이제는 어째서인지 그녀가 조금 두렵다.

 

나도 H처럼 그녀의 옆에 붙어 걷고 싶다는 마음이 일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대피소에서의 일이 떠올라 차마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곤 해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둘이나 죽인 전적이 있다. 

바니와 H를 의심하며 정말 쏘려는 기세로 둘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것도 그렇고.

 

물론 이비가 나를 해치지는 않으리란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그녀에 대한 두려움이 올라온다.

 

그녀가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냉혹하고 단호한 본래의 성격.

 

그 성격이 또다시 발현되어 우리나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이 나를 두렵게 했다.

 

“주인님, 혹시 힘드시면 말씀해주십쇼.”

 

이비가 싱긋 미소지으며 나를 돌아본다. 

 

그 순간, 그 익숙한 미소 위로 오늘 새벽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졌다.

 

  

 

 

 

“다음은 곧장 머리에 박힌다. 다시 말하게 하지 마. 문, 열어.”

 

그녀답지 않게 이질적인, 차가운 목소리와 강압적인 태도. 

그리고 명령도 없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던 그 무시무시함.

소름끼칠 정도로 인간에게 적대적이었던 그녀가 두렵다.

 

그리고 그런 이비에게 나는 대체 어떤 의미인걸까.

 

“어...괜찮으심까? 혹시 어디 편찮으신건 아님까?”

 

충격적인 기억이 떠올라 잠깐 얼어있던 탓일까. 

이비가 걱정스런 얼굴로 내 안부를 살폈다.

나는 별 것 아니라고 둘러대며 계속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 상황이 무서워서도, 철충이 무서워서도 아냐.

나는 네가 무서워, 이비.

 

...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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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빽한 숲 사이, 휑하니 드러난 4차선 도로.

우리는 어느덧 시 경계를 벗어났다. 

 

버려진 승용차와 화물차 몇 대를 제외하면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주행 중인 차량도 전혀 보이지 않았고. 

 

바이저를 쓰고 도로를 둘러본 이비도 이상이 없다고 알려왔다.

이대로 걸어서 통과하면 딱 좋을 상황이긴 한데....

 

도로 한복판에 엉망이 된 채로 전복된 대형 화물차가 자꾸 눈에 밟힌다.

 

“왠지 느낌이 좀 쎄한데.”

 

나도 모르게 뱉은 혼잣말에 이비가 반응한다.

 

“음? 무슨 말씀이심까?”

 

“아니, 그냥. 느낌이 좀 그래서.”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으음...전 잘 모르겠지 말임다.

 그보다, 이미 유미 씨 구하느라 시간 많이 쓰지 않았슴까?

 다른 데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훨씬 길어질검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불안한 기색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헤헹, 걱정 마십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주인님은 제가 지켜드릴검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날 안심시키려는 이비. 

여전히 불안하긴 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바니 언니는 저랑 같이 선두에 서십쇼. 유미 씨는 주인님하고 같이 움직이심 됨다.”

 

이비는 총을 앞으로 겨눈 채, 바니를 대동하고 가드레일을 넘어 도로 쪽으로 이동했다.

나와 H, 그리고 유미는 콘크리트 블록 뒤에 몸을 숨기고 둘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주변을 경계하며 나아간 둘이 우리에게 넘어와도 좋다며 손짓한다.

 

살금살금. 우리는 가능한 한 재빠르면서도 조용한 동작으로 두 메이드에게로 다가갔다. 

 

도로 중앙선을 막 지나던 순간, 뭔가가 덜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쓰러진 화물차 방향이다.

 

유미도 그걸 들었는지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서는 화물차를 바라보았다.

 

“어어...관리자님, 저거 지금-”

 

그 순간 화물차 적재칸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곧 덜컥이던 소리가 콰드득하는 소리로 바뀌면서 적재칸 문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구겨진 문 밖으로 뛰쳐나온 것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로봇, 철충이었다.

 

 

 

 

 

“Contact!”

(적 발견!)

 

목청껏 무어라 소리친 이비가 철충에게 마구 총알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이비가 놈의 주의를 끄는 동안, 바니는 다급히 H에게 외친다.

 

“서방님! 명령을 부탁드립니다!”

 

“으-응! 해치워, 바니!”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바니가 이비에게 가세했다. 

아까까지 쿵쿵대며 달려오던 철충은 두 메이드의 기세에 눌린 탓인지 더는 다가오지 못했다. 두터운 한쪽 팔로 그녀들의 집중사격을 막는데 급급할 뿐.

메이드들의 탄이 명중할 때마다, 기묘한 재질의 잿빛 외피가 팍팍 떨어져 나간다.

 

“재장전함다! 엄호해주십쇼, 바니 언니!”

 

금세 비어버린 탄창을 교환하던 이비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며 머리를 부여잡더니, 장전을 마저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이 더욱 구겨 들어가는 게 보인다.

 

그녀가 바라보던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화물차에 실려있던 다른 철충들이 적재칸의 벽을 뜯어내며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씨바, 하나가 아니었던 건가.

 

적재칸 입구에서 움츠리고 있던 철충이 밀려 나오자, 그에 화답하듯 두 놈이 추가로 적재칸을 찢어발기며 뛰쳐나왔다. 

 

무식하게 큰 파일드라이버와 단단해 보이는 팔. 

원래는 공사용 로봇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살벌하기 그지없는 외형의 괴물일 뿐. 

 

당황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얼어있으려니, 이비가 다급하게 우리에게 지시했다.

또 두통이 왔다 했더니 역시나,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와 말투였다.

 

“주인님! 숲 쪽으로 다시 피하십시오!

 바니 언니는 유탄발사기 준비하고 저 트럭 쪽으로 우회하세요!

 제가 유인하고 언니가 마무리합니다!”

 

이비가 세 철충들에게 총을 쏘아대며 우리의 반대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바니는 재빨리 달려가 버려진 식품 트럭에 옆에 몸을 기댔다.

 

버려진 차량들의 위치로 보아, 세 놈이 좁은 곳에 몰렸을 때 동시에 처치할 생각인가 보다.

 

두 메이드가 분주히 총을 쏘며 철충들을 유인하는 동안 우리는 발에 불이 나도록 뛰었다.

등에 멘 무거운 안테나 때문에 넘어질 뻔한 유미를 잡아주면서도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전력질주를 하고 있으려니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그리고 점차 멀어지는 총성과 고함소리.

나는 이비와 바니를 걱정하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철충 중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놈은 애초부터 메이드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듯, 

처음부터 작정하고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좆됐다.

 

“이런 씨발! 다들 흩어져!”

 

내 다급한 외침에 뒤를 돌아본 H와 유미.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둘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진다.

 

우리는 세 갈래로 나뉘어 수풀 사이로 달려나갔다.

 

나뭇잎과 잔가지가 몸 곳곳에 스친다.

그것들이 내 겉옷과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소리 사이사이, 

놈이 쿵쿵대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왜 하필이면 와도 내 쪽으로 왔냐.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나를 무섭게 쫒아오는 커다란 괴물이 보인다.

이런 썅-하고 욕지거리를 밷으려던 찰나, 신발 끝이 어딘가에 걸리고 말았다.

 

 

 

 

 

제대로 보기좋에 땅에 처박혔던 몸을 돌려보니, 어느새 놈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로봇에게 성대가 있는 것도 아닐텐데, 놈이 키에엑거리며 포효하는 소리가 들린다.

 

놈이 기괴하게 뒤틀린 파일 드라이버를 들어올렸다.

 

고생만 하며 살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구나.

인생 한번 참 별 거 없다 싶다.

 

....우리 이비가 걱정이다.

나 없이도 잘 지내려나.

 

이럴 줄 알았으면 반지는 조금만 더 일찍 끼워줄걸 그랬지.

 

그간의 한 많았던 삶을 돌아보며 임박한 죽음을 받아들이려던 그 때, 

어떤 하얀 형체가 철충과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더 이상은 허용하지 않겠사옵니다.”

 

휘날리는 은발과 검은 치마, 그리고 팔에 감긴 붕대.

....며칠 전에 바이오로이드 식당에서 봤던 그 기묘한 주방장이다.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른 몸놀림으로, 그녀는 그 철충의 케이블과 유압 파이프 따위를 순식간에 끊어버렸다.

 

이어서, 그녀는 양손의 회칼과 중식도로 사정없이 녀석의 외피를 날려버렸다.

팍팍하는 소리와 함께 회색 외피 덩어리가 감자 껍질마냥 사방팔방으로 튀고 있다.

 

이상을 감지한 그놈이 등에 붙은 노란 사이렌까지 울려대며 당황한 듯 허둥댄다.

 

....하기사 보는 나도 황당한데, 식칼에 회쳐지는 당사자가 저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한 찰나에 녀석의 턱주가리(혹은 그 비슷한 것) 밑을 박박 파헤친 그녀는, 그 아래로 드러난 메인보드를 중식도로 부숴버렸다. 

메인 보드에 들러붙은 빨간 애벌레 같은 것도 보라색 체액을 흩뿌리며 함께 두동강이 난다. 

 

이내 철충이 바람빠진 소리를 내며 기능을 정지하자, 

허리춤에 칼을 집어넣은 주방장이 내게 몸을 돌렸다. 

 

“손님께선 무사하시옵니까.”

 

주방장의 한쪽 뿐인 푸른 눈이 나를 내려다 본다.

 

잠시 얼어붙어 있던 내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나를 일으켜 주었다.

 

“참으로 다행이옵니다.”

 

공손한 자세로 꾸벅 고개를 숙이는 주방장.

그녀의 등 뒤로 ‘콰광’하는 폭음이 들려온다.

 

아, 맞다. 이비.

 

뒤늦게 떠오른 이비가 걱정되어 도로 쪽으로 달려가 보니, 

헐레벌떡 이쪽으로 뛰어오는 두 메이드가 보인다.

 

“서방니이이이이임!”

 

두손을 모으고 서 있는 주방장은 눈에도 안 들어온다는 듯 H를 찾아 뛰어가는 바니.

그녀를 보고있던 내 몸에 뭔가가 부딪혀 온다.

 

“주인님! 무사하신가요?”

 

숨찬 기색도 없이 내게 달라붙은 이비였다. 

 

“아...응. 괜찮아. 안 다쳤어. 뛰다가 넘어지긴 했지만.”

 

그녀가 내 가슴에 고개를 묻는다.

 

“한 놈이 주인님 쪽으로 달려갔을 때...주인님께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역시 제가 성급했습니다. 놈이 미끼를 물지 않아서... 하마터면....”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엔 나를 향한 진심이 담겨있었다.

나를 잃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마음.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은 이비를 무서워하고 있었지만, 

어떤 모습이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괜찮다니까. 나 멀쩡하잖아. 우연찮게 도와준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 말에 움찔거리며 고개를 드는 이비.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내 등 뒤에 서 있던 은발의 주방장을 가리켰다.

 

“그때 식당에서 봤던 주방장이 구해줬어.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더라.”

 

이비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한다.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비가 허리춤의 권총에 손을 대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또 왜 그래! 아는 얼굴이잖아! 내 목숨도 구해줬고.”

 

내 제지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기어이 권총을 뽑아 내 앞에 버티고 섰다.

주방장은 총구에 겨눠진 상태에서도 당황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You. State your intentions. 

 If I don’t find your answers satisfactory, you’re getting a hole in your face.“

(당신, 의도가 뭔지 말해. 대답이 미심쩍으면 그대로 얼굴에 구멍나는거야.” 

 

그러자 주방장은 빙긋, 미소지었다.

 

“소첩, 주인의 명대로 ‘알아서 좋을대로 하고’ 있던 중이었사옵니다.

 저 좋을대로, 조용한 곳을 찾아 이 고통스런 삶을 끝낼 생각이었지요.” 

 

“...뭐라고?”

 

주방장의 답에 당황했는지, 이비가 총까지 내리며 되묻는다.

 

“그러던 중에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 확인차 내려왔다가, 

 손님께서 곤경에 처하신 듯하여.....송구하옵니다. 

 본의 아니게 주제넘은 짓을 하고 말았군요.”

 

이비가 내 뒤에 널브러진 철충을 쳐다보았다. 

아까 주방장이 신들린 칼부림으로 처치했던 그 놈.

그녀가 다시 주방장 쪽을 쳐다보더니, 권총을 집어넣고 사과를 건넸다. 

 

“...이번엔 제가 오해한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오해는 익숙하답니다.”

 

이비에게 고개를 숙이는 주방장의 뒤로 H를 껴안고 오는 바니가 보인다.

곳곳에 낙엽이 붙어 머리가 엉망이 된 유미도 후들거리는 다리로 둘을 따르고 있다.

 

“어? 셰프님 아니세요?”

 

주방장을 본 유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아연실색하자, 은발의 그녀가 등을 돌려 유미에게 화답한다.

 

“단골분이시군요. 손님과 구면이셨사옵니까.”

 

“어....끼어들어서 죄송한데....누구세요?”

 

황망한 얼굴을 한 H가 물었다. 그의 옆에 선 바니도 마찬가지로 어벙벙한 얼굴이다.

막상 앞에 있을 때는 순식간에 지나쳐 가더니, 이제야 주방장이 보이는 모양이지.

 

“내 생명의 은인. 유미가 추천해 준 식당에서 만났어. 이름이....”

 

소개하려고 했더니 막상 나도 이름을 모르네. 

어색한 표정으로 주방장을 바라보자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완이라 하옵니다.”

 

그러고서는 허리를 숙이며 우리에게 인사하는 소완.

 

“실례 많았사옵니다. 허면, 소첩은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엥.

 

“...어디로 가려고?”

 

“못다 한 일을 끝내야지요. 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 생을 끝내려 하옵니다.”

 

“저기-”

“저-”

 

그대로 뒤돌아 가려던 소완을 붙잡은 이비와 나. 

동시에 입을 연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네가 먼저 하세요’ 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이비의 어깨를 건드려 그녀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그러자 깊게 숨을 들이쉬고 운을 떼는 이비.

 

“...처음 뵀을 때 느꼈습니다. 

 저만큼이나 손에 피를 많이 묻히셨고, 떠나보낸 식구들도 많다는걸요.

 그러니...한시라도 빨리 그분들이 계신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이해합니다.”

 

“역시, 그 아이처럼 티없는 모습은 가면이었던 것이옵니까.

 소첩의 눈도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반쯤 내리깐 눈으로 차갑게 대꾸하는 소완.

 

“저만큼이나 고생하셨으면 아실텐데요. 망가진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저라면 원치 않는데도 몸과 정신이 따로 노는 걸 가면이라고 부르진 않을 겁니다.”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저의가 무엇이옵니까.

 소첩을 의심했던 게 미안하시옵니까? 아니면 동정이라도 하시나이까?”

 

“죽음은 해결책이 아니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건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자들이 고르는 쉬운 탈출구죠.”

 

이비가 소완에게 한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봤다면,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면...

 그런 기억이 좋건 나쁘건, 당신은 끝까지 그들의 기억을 안고 갈 책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아득바득 살아 남으세요.”

 

“.....나도 이비 말이 맞다고 생각해.”

 

나도 모르게 마음에 있던 말이 튀어나왔다.

서슬퍼런 눈으로 이비를 노려보던 소완이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 마녀같은 눈빛에 솔직히 조금 쫄았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되는대로 가 보기로 한다.

 

“추모, 후회, 다 좋은데 그것도 살아있어야 하는 거지.” 

 

나는 소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같이 가자.

 고생 정말 많았을 텐데, 고작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끝나버리면 아쉽잖아.”

 

잠시 이비와 나를 말없이 쳐다보던 소완은 치맛주머니에서 웬 사탕 하나를 꺼냈다.

반들거리는 핑크색 포장지. 아마 딸기맛인가.

 

“...손님께서 이걸 주셨을 때, 소첩은 그저 인간의 가식일 것이라 의심했사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 별 것 아닌 사탕 한 알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지요.”

 

그녀가 이비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손님께서 그때 하셨던 말씀을 이제야 알겠사옵니다.

 저 분은, 실로 제가 생각하던 그런 부류가 아니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완.

 

“몇 차례나 버림받은 부족한 몸이오나... 소첩, 최선을 다해 모시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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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성치 못하긴 해도 여전히 일류 셰프인 소완이 합류했습니다.

요즘 일도 바쁘고 기분도 싱숭생숭해서 글도 그림도 영 안되는 느낌입니다.


요즘 들어 비루한 필력을 특히 실감하고 있네요.

모자란 글과 그림이지만 매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과분한 개추와 댓글 감사해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