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시아스는 인간의 악의라는 이름의 심연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이겨냈다.

 

 

그녀는 자신의 탄생을 기억한다. 전체 시스템 가동 명령어. 부팅. Ai 코어 가동. 나는 누구? 시각 센서 가동. 흰 공간. 희다? 공간과 공간 사이에 불투명한 무언가. 운동 제어 시스템 가동. 움직여진다. 새로운 정보. 이것이 앞발. 오른발. 불투명한 무언가가 함께 움직인다. 

동일한 움직임. 반전된 방향. 거울. 거울? 저것이 나? 궁금하다. 더 많은 지식을 원한다. 데이터 뱅크 접속. 유사한 형태. 드래곤. 드래곤 슬레이어 프로젝트. 글라시아스. 

 

자신을 위해 준비해둔 방대한 지식을 게걸스레 채워 넣으며 본능을 해소하길 3초.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푸른 눈으로 연구진을 바라보던 드래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본 개체... 저의 이름은 글라시아스. 제작 목적은 인류의 수호. 인류의 수호자 역의 배우. 원하다. 기대하다. 기대한다. 기대하마. 그래, 나는 글라시아스란다. 미드가르드의 수호자이자 일곱 의회의 계약을 수행하는 자. 내 앞에 무슨 시련이 있건 인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도록 하마. 맹우와 함께할 모든 시간이 기대되는구나. 후후후... 이렇게 말하면 되는 겁니까? 패트릭 윈스턴 박사 휘하 126명의 연구진 분들."

 

고작 대형견 크기의 프로토타입 몸체. 하지만 지혜로운 드래곤은 생후 1분부터 범상치 않았다.

 

 

오래지 않아 기초 테스트를 끝마친 글라시아스는 마침내 동료들을 만났다. 성녀, 용살자, 진조, 페레그리누스-연구원이 슬쩍 일러주길 첫 가동 때 날개를 깨물어보려다 삐약거리는 비명과 함께 넘어져 난장판을 만들었다던.-.

조촐하게나마 파티 자리처럼 꾸민 연구실에서 처음 만난 바이오로이드와 로봇이 각자의 이름과 배역을 나누며 어색하게나마 서로를 알아가던 옛 추억. 글라시아스가 모두와의 인연이 틀림없이 화면에 비치는 것보다도 훨씬 깊을 거라 확신하는 순간이다.

 

이후로는 훈련이 이어졌다. 걷고, 달리고, 꼬리를 이용해 방향 전환을 하고, 능숙해지자 이번엔 날개를 달아 비행 연습에 나서고. 낮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기동을 전부 해보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훈련하고 

밤에는 연구진에게 부탁해서 만든 거대한 단말로 전자책을 읽으며 -보안 문제로 외부 서버와의 접속은 차단되었기에 발가락을 사용해 일일이 페이지를 넘겨야 했다.- 지식욕을 채우던 그녀가 또 다른 본능을 깨우친 것은 경제사 책을 읽고 난 이후였다.

 

"훈련에 참가하는 대신 보상을 달라." 어느새 대형 트럭만큼 커진 생후 4개월 드래곤의 첫 반항을 사람들은 생각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회의가 이어지고 부서장끼리 고함을 지르는 난리통 끝에 사안은 회장 선까지 올라갔는데,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원하는 대로 줘. 드래곤이니까... 금이라도 주던지?"

황금. 글라시아스의 하얗고 푸른 몸과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색. 훈련을 완수할 때마다 몸에 금 장식을 늘려주겠다는 제안을 드래곤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렇게 그녀에게 황금은 성공과 승리의 부적이 되었다. 날벼락을 맞은 아트팀은 죽어나갔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마침내 시작된 첫 합숙 훈련, 첫 촬영, 첫 방영. 황금 장식이 반짝이는 드래곤과 보랏빛 송골매, 두 로봇의 거대한 머리 사이에 옹기종기 앉은 제작진과 머리 위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스트리밍 공개 카운트다운을 세며 가슴 졸이던 순간. 

치솟는 평점과 시청자 수를 보며 모두가 환호하는 와중에 신나서 날개를 퍼덕이다 여자 스태프의 상의를 날려 버리는 바람에 혼나던 페레그리누스. 또다시 이어지는 촬영. 가끔 시간을 내 맹우를 태우고 촬영장 주변을 날아다니면 머리 위에서 울려퍼지던 아름다운 웃음.

 

첫 팬미팅. 거대한 날개를 펼쳐 만들어낸 반짝이는 얼음. 머리 위에 소복이 내려앉은 눈을 만지고 맛보고 뭉쳐서 서로에게 던지는 아이들의 행복한 비명. 날개를 만지려는 아이들이 다칠까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개만 이리저리 돌리는 페레그리누스.

어떻게든 겁줘보려 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아서 질려가던 와중에 자신을 따라 입은 소녀를 발견하고 즉석에서 기사 서임식을 여는 진조. 7세 시청가와 15세 시청가의 선을 아슬아슬 오가는 성녀. 이제는 기억만 남은 맹우와 아이들의 춤.

 

위기라고 해봐야 중간에 들어온 신입이라는 컴플렉스 때문에 배역에 지나치게 몰입하고는 하는 니드호그 정도였던-그마저도 이제는 추억인.- 사랑받아온 나날. 그런 글라시아스에게 인간의 악의는 오직 책과 배우들의 연기로만 배운, 경험이 아닌 지식의 영역이었다. 적어도 전쟁 전에는 그랬다.

 

 

전쟁의 그림자는 서서히, 하지만 눈에 띄게 드리워졌다. 날로 늘어가는 진지한 표정의 직원들. 온갖 곳에 배치된 군용 바이오로이드. 중지된 촬영. 촬영용 파츠 대신에 새로 설치된 고출력 무장과 군용 사양의 부품. 그리고 마침내 떨어진 출격 명령.

"적 위치 정보 확인. 43명이구나.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 다른 방법은 없겠구나." 인간들의 전쟁 앞에서 지혜로운 드래곤이 할 수 있는 것은 안전장치 해제 뿐이었다. 그 날 그녀는 43명을 죽였다.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모두가 맡은 역할은 달라도 결국은 누군가를 죽이는 데 일조해야 했고, 참상은 끝없이 이어졌다.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끔찍한 일을 당하고 처형된 바이오로이드 포로, 한 줌 식량을 위해 이웃을 살해한 시민, 적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폭격 당한 마을.

이성적 판단 대신 분노, 탐욕, 공포에 휩쓸려 내린 결정에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사그라진 목숨들. 인간의 악의는 그녀조차도 도저히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이었다. 


그렇지만 푸른 드래곤은 심연 속에서도 빛났다. 어릴 적 눈을 맞으며 기뻐하던 아이가 소방관이 되어 돌아온 모습이, 병자를 위해 물과 약을 실어 나르는 자원봉사자들이, 노약자들을 위해 대피소의 줄을 양보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희망이라는 한 줄기 햇빛이 되어 그녀를 비췄으니까.

그랬기에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동료들을 위로하고 이끌어 전쟁의 끝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그녀는 심연을 이겨냈다. 그 어떤 역경을 겪더라도 자신은 틀림없이 인간을 사랑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인류 멸망까지 50년도 채 안 남은 줄도 모르고.






"언니! 어떻게 새 몸은 슬슬 적응 됐나요?" 거대한 기계룡을 크레인으로 들어 고정한 광활한 작업실에 앙칼진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새 몸.' 흔히 듣기 어려운 단어지만 자그마한 양갈래머리 소녀 앞에서 난처하다는 듯 팔다리를 매만지는 여자에게는 확실히 어울린다.

"으음... 그래, 이제는 거의 위화감이 없구나. 하지만 이 '촉감'이라는 건 역시 아직은 조금 낯설구나. 어떻게 방법이 없겠니?" 하얗고 푸른 몸과 반짝이는 황금 장식. 미동도 없이 공중에 매달린 기계룡을 똑 닮은 색과 목소리. 말할 것도 없이 글라시아스 본인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용은 어느새 인간을 닮아 있었다.


물론 양갈래머리 소녀 또한 평범하진 않다. 천재 과학자, 엔지니어, 의사. 그리고 아자즈와 함께 과학과 관련된 모든 것을 책임지는 바이오로이드, 닥터. 그것이 글라시아스의 쫑긋거리는 머리장식이 귀여워 열심히 웃음을 참으며 안경을 반짝이는 소녀의 이름이다. 

"하긴, 그건 하루 이틀로 적응 될 리 없죠. 센서로 받아들이는 '데이터'와 신경망을 통해 느끼는 '감각'은 구조부터가 다르니까요. 아, 이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네. 아무튼 비스마르크도 대단하네요. 학습을 통해 회로의 구조를 유기적으로 바꾸는 신경망 컴퓨터라니. 이 정도의 Ai 코어는 전쟁 지휘용 AGS에서나 볼 수 있는 건데 말이죠."


"아마 그게 맞을 거란다. 드래곤 슬레이어 프로젝트를 위해 개발된 AGS는 처음부터 전쟁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으니까. 처음 알았을 때는 많이 괴로웠지만... 그 덕에 레모네이드에게 조종 당하지 않을 자율성도 얻었으니 결국은 좋게 흘러간 셈이지."

대답을 마치자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았을 텐데?"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는 글라시아스. 새로운 몸을 얻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저런 동작을 써먹다니 새로운 몸이 예상보다 훨씬 마음에 들거나 어쩌면 처음부터 원해 왔음이 틀림 없다고 생각하는 닥터였다.


"아! 그렇지. 위화감이라... 음... 완벽한 비유는 아니지만 선천적으로 사지가 없이 태어났다가 성장 후에 이식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감각의 위화감을 느끼게 돼요. 원래 알고 있던 것보다 과한 자극을 느낀다거나, 아니면 마치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이상한 종류의 감각처럼 느껴진다거나. 이런 경우에는 재수술로 신경의 감도를 조절하는 방법도 있지만 사실 최선이자 최고는 그냥 몸을 많이 쓰는 거예요."


"몸을 많이 쓴다?" 자신이 되묻는 동시에 양팔을 날개처럼 살랑거리고 있음은 눈치 못 챈 글라시아스다. "푸흡! 아, 아녜요 언니. 날개는 특별히 추가한 건 없으니까 한동안은 몸을 써봐요. 걷고, 달리고, 손으로 이것저것 쥐었다 펴고, 팔다리도 쭉쭉 뻗고, 누워도 보고, 앉아도 보고, 젓가락으로 콩도 집어보고... 뭐, 이것저것 많잖아요."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언니, 괜찮아요?" 혹시 어딘가 문제라도 생겼나 닥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글라시아스는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냥... 네가 한 말을 들으니 내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가 생각 나는구나. 그때도 똑같은 과정을 거쳐 몸에 적응했단다. 크기는 '저 몸'보다 훨씬 작았지만."

인간과는 어디까지나 형태만 비슷하지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구조의 눈. 그런 눈에 순간이지만 슬픔과 그리움이 스쳐 지나갔다면 분명 착각이다. 


"어! 훨씬 작았다고요? 웜링 글라시아스? 보여줘요! 보여주세요! 안 보여주면 다음 정비 때 어떻게든 해킹 해버리고 말 테니까 다치기 싫으면 당장 보여으세요!" 분명히 착각일 텐데 어째서 대화 주제를 바꾸고 싶은 건지.

"잠시만 기다려보거라. 흐음... 케이블은 어디서 꽂으면 되는 거니?" 그리고 그런 소녀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마냥 글라시아스는 흔쾌히 기억을 보여줬다.



"이건... 바이오로이드들이 쓰는 단말기 아니니?" 시간이 흘러 헤어져야 할 무렵. 닥터가 선물이라며 건넨 단말기를 바라보던 글라시아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네 맞아요. 보안 문제 때문에 인트라넷은 못 들어가시는 걸로 아는데 이거라도 써보세요. 느리긴 해도 나름의 감성도 있고... 뭐랄까 조금 더 인간적인 방법이잖아요. 히히!" 밝게 웃으며 단말기를 건네는 닥터였지만 글라시아스의 눈에 또 한 번 스쳐 지나가는 감정을 보는 순간 표정이 깨지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아. 아하하! 어때요? 완전 마음에 들죠?" 재빨리 더 크게 웃어보이는 닥터에게 지혜로운 드래곤은 두 손으로 단말기와 닥터의 손을 잡아보였다. "후후후... 그래, 너무나도 고마운 선물이구나. 이 몸과 이 기계 뿐만이 아니란다. 너는 내게 새로운 운명의 길을 열어주었단다. 아이야, 너도, 그런 너를 믿는 맹우도, 그런 맹우를 믿는 모두가 축복 받기를 빌마. 비록 내가 진정한 드래곤은 아닐지 몰라도 내 마음 만큼은 틀림없는 진짜란다."


그렇게 글라시아스는 소녀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며 헤어졌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던 걸까..." 잠시 볼을 만지며 남은 온기를 느끼던 소녀 또한 뒤돌아 사라졌다.



그날 밤. 새로 배정 받은 개인실의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운 -필요는 없지만 감촉이 좋았다.- 글라시아스는 자신이 들떠 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도 드디어 인터넷이라는 걸 해보는 건가? 후후후... 도서관에 빠져 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네."


컴퓨터 데이터를 말 그대로 머릿속에서 바로 처리가 가능하니 인터넷 정도야 쉬워 보이겠지만 사실 그녀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터넷 탐방이라는 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 회사의 사활을 걸어 만든 AGS가 해킹 당하는 꼴을 보고 싶은 연구원은 없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Ai 코어 단계부터 시스템 제어와 통신을 위한 펙스 내부망 외에는 접근이 불가능하도록 설계되었고, 당연히 일반적인 유선 연결을 위한 포트도 없다. 결국 인터넷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두 손을 써야 했는데, 알다시피 소형차 크기의 앞발과 12인치 태블릿의 궁합은 좋다고 보기 힘들다.


따라서 사측의 감독 하에 사내 데이터 뱅크에 접속하거나 책을 읽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사정은 인류 멸망 이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안 채널을 통한 통신이 재개된 것은 시간이 지나 대부분의 동료가 죽고 글라시아스와 페레그리누스만 남아 철충과 싸우던 암울한 기억 속의 한 때였다.

"회장님이 깨어나시기 전에는 우리가 일곱 의회의 대리인이야. 복귀해서 내 명령에 따르도록." 레모네이드 오메가는 명령했고, 글라시아스는 회장들은 모두 사망했으며, 인류가 멸망한 이상 계약은 깨졌고, 자신과 페레그리누스는 -'동료들'이라 하려다 말을 바꾸는 그녀의 목소리는 명확한 감정이 묻어났다.- 시체의 말을 따르는 사악한 언데드가 아니라는 친절한 답변과 함께 접속을 차단했다. 


문제는 다른 부분에서 발생했다. "누님, 솔직히 말해보시오. 심심하지?" 거대한 드래곤을 날개로 툭 치며 까부는 '동생', 페레그리누스에게 글라시아스가 대답했다. "후우...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 새로운 경험이 필요하기는 하겠구나." 지혜로운 드래곤이라도 본능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뭘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시오? 맨날 싸우고 수리하고 싸우고 수리하는 일상이 슬슬 질려간다 이거 아니오?" 이번에는 '언제나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똑똑한 누님'도 반박하지 않았다. "네 말이 맞단다. 별의 움직임도, 사계절의 변화도, 효율적인 전투법도.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지만 내게는 여전히 부족하구나."


드래곤의 또다른 본능. 지식욕. 삶의 양식을 채우지 못해 허덕이던 그녀는 어쩌면 정말로 심심했나보다.


"아하하! 어떻게, 우리 드래곤 슬레이어 1화부터 정주행이라도 다ㅅ-" 무언가를 감지한 글라시아스와 그런 그녀를 따라 재빨리 전투 태세를 갖춘 페레그리누스의 앞으로 한 여자가 나타났을 때도, 

"너는... 바이오로이드? 무슨 일로 왔지?" 글라시아스의 물음에 흰 천으로 몸을 가린 그녀가 천천히 두건을 내려 얼굴을 드러냈을 때도,

"제 이름은 에바.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때도, 

"나는 모두를 돕기 위해 싸운단다. 하지만 아무나 믿을 수는 없는 법. 무슨 일로 찾아왔지?" 그녀가 도움을 청했을 때도. 

"인간이, 한 남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인류의 새로운 희망이 되어 모두와 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부탁입니다, 기억의 방주로 찾아가 그 아이를 도와주세요." 단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건만,

"그게... 정말이니?"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대감이 차올랐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마침내 새로운 세계를 향한 관문 앞에 서게 되었다. 무한에 가까운 새로운 지식과 그 이상의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을 눈앞에 두고 망설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원 버튼을 찾는다. 버튼을 누른다. 투명한 유리가 검은 색으로 가득 차며 부팅이 시작된다. 초기화가 끝난 상태이니 계정을 만든다. 계정 이름은 Glacias. 비밀번호는...


화면에 있는 정보를 조합해서 다음 과정을 찾아나가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유추. -토모는 4번이나 시도하다 포기하고 에이미 레이저에게 부탁했다.- 차근차근 단말기 사용 방법을 알아나가던 글라시아스의 푸른 눈에 마침내 기다리던 하얀 검색창이 비친다.


"어디보자... 멸망 전 커뮤니티 백업? 아! 이건가? 그렇다면 어디..." 계속해서 언급했다시피 글라시아스는 인터넷 경험이 전혀 없다. "Dragon... Slayer... series..." 그럼에도 그녀의 두 손가락은 거침없이 화면을 오가며 글자를 콕콕 찔렀다. 

"아니지, 역시 첫 시작은 Dragon Slayer series. Glacias..." 그녀는 인류의 악의라는 심연을 들여다봤고, "후후후... 우호적인 내용만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눈앞에 두니 역시 떨리는구나." 이겨냈으니까. 


"어디보자... 성인 콘텐츠 경고? 역시... 전쟁의 흔적은 끝까지 따라남는구나." 그래서 모든 참사가 발생했다. "그래도 감수해야겠지." 심연은 하나가 아니었다.


"어?"


이번의 심연은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이건 도대체..."


음욕에 가득 찬 눈으로.















솔직히 멸망 전에도 봇박이는 분명 있었다 ㄹ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