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편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자기에게 거짓을 말하고, 스스로에게 한 그 거짓말을 들으며 사는 사람은 진리를 더 이상 분별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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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탐탁치 않아했다. 대장인 내가 그랬으니 부하들도 오죽할까. 전차의 무한궤도 소리가 우리의 전동기 구동 바퀴의 소음을 덮어씌우고 뒷통수에는 대포가 겨눠진 채 이동하는 이 상황 자체가 익숙치 않으며, 심기에 거슬리는 일이었다. 


거리를 유지해라, 속도를 줄여라, 우로 가라, 멈춰라, 다시 가라. 평소라면 이동 중에도 지휘관으로서 상황을 최대한 멀리 살피고 온갖 구상을 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잊을만 하면 무전으로 지시를 내려대는 전차장 놈에게 신경이 온통 쏠린 탓에 마주하는 바람도 내리쬐는 햇살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리고 다른 행렬에 부속으로 붙어다니는 현 상황에 대해서 다른 대원들이라고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을게다. 지금까진 아무도 입 밖으로 불만을 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태양이 지평선으로 붙으며 발갛게 내려앉을 즈음이 되자 카멜 소령이 그 침묵을 깨기 위해 내 쪽으로 붙었다.


"이게 무슨 꼴이에요 대장."


"..."


"무슨 형벌부대 같잖아요. 탱크 궤도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리는 거리에서 앞서가는건 척후도 아니고 그냥 어디 도망 못가게 감시하는 꼴이네요."


"선택지가 없었다."


"그냥 그 소콜뭐시기 소장인가 하는 놈을 날려버리시지 그랬어요. 저희는 대장이 하자는대로 다 할건데."


"내가 과감한 전투는 많이 해왔다만 너희를 뻔한 사지로 내몬 적은 없지 않나?"


"하긴 그 때 싸웠으면 대장만 겨우 살아나갔을 것 같으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또 할 말은 없네요."


"이런 수모를 겪게 된 것에 대해서는 지휘관으로서 사과하겠다."


"알겠으니까 대장도 우리가 충분히 각오가 되어있다는 점은 이해해주세요."


"잘됐군. 그 각오는 자존심을 지키는 것보단 좀 더 요긴한 때에 쓰도록 하지."


겨우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걸지는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우리 대원들 모두가 공감할 터. 카멜과 나의 대화는 호드 대원 전부가 듣고 있었지만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던 것을 보면 내 결정에 대해, 그리고 카멜의 발언에 대해 적어도 필요한 수준의 동의는 얻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원들의 각오에 대한 감상은 전차장인지 장군인지 하는 놈이 무전으로 끼어들면서 끊기게 되었다.


"칸, 무전은 잘 들리나? 다음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시게."


... 이 개자식은 기회를 봐서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전 대원 전방의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대원들이 명령권도 아닌 협박에 의해 지시를 따르는 이 미친 상황을 설욕할 방법은 그것 뿐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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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과 동행하게 된 만큼 밤에는 간단하게 주둔지를 준비해서 개인 정비와 수면에 시간을 들여야 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 병사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는 것이지만, 바이오로이드라도 충분히 휴식이 주어진다면 최적의 체력 상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개인정비에 시간을 들이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위생에 이득이 된다.


필수적인 수준의 휴식만 유지하고 최대한의 속도로 이동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 하면 그 쪽이 당연히 더 빠를 것이다. 그러나 삼안 소속의 내 지휘권자는 구체적인 지시도 없이 동유럽과 북유럽 전역에 뿌려진 호드 부대를 불러모으는 명령을 내리는데 그쳤다. 세바스토폴까지는 어떻게 가도 상관이 없었고, 내려온 지시의 꼴을 보건대 그 지휘권자도 부대를 수습하는 일에 대한 관심이나 능력 둘 중 최소한 하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수준의 지시라면 지금같은 우발상황이 면책사유가 될 수도 있을거다. 아마도.


동행하던 러시아인들이 보여준 호의는 지휘관이었던 자의 태도와는 대비되어 의외의 놀라움이 있었다. 그 호의란 하나는 침낭과 천막을 세울 수 있는 자재를 받았다는 점, 다른 하나는 전투식량을 받았는데 바이오로이드들이라고 머릿수의 2배나 받았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들이 야간 경계 임무를 전부 맡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전한 사실이다. 아쉽게도 후자는 인간 병사에게 맡기기에는 못미덥다는 이유로 평소 우리가 정해둔 순서에 따라 계속 불침번을 두기로 하였지만. 저들의 의중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분명히 합당한 결론이다.


러시아군은 대열의 순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도로변의 야지로 나와 각자 탑승했던 전차, 장갑차, 차량에 붙여 일용할 천막을 세웠다. 우리 대원들은 이용한 차량이 없었으므로 적당히 고른 땅에 천막을 올리기로 했다. 이것도 적당히 빈 건물이나 맨 땅에서 휴식하던 때보다야 큰 개선이 있었다고 해야겠지.


천막 앞에서 주둔지 상황을 둘러보고 있자니 야영 준비를 하느라 가장 늦게 식사를 하게 된 샐러맨더 하사와 워울프 상병의 대화가 들렸다. 



"으에 이거 맛없다."


"왜? 괜찮지 않나?"


"너무 기름져."


"겨울오는데 얼어죽기 싫으면 기름지게 먹어야지."


"불지르고 다니는 년이 얼어죽기는. 그러다 살찐다."


"배부른 소리하네. 워울프는 부사관이고 병사고 하나같이 헛소리만 해."


"진짜 배부르게 된다니까?"


"네 배에 기름이 껴서 문제가 되면 내가 친절하게 워커로 태워주마."


"악! 어디다 손을 대냐!"



최소한 실없는 잡담이라도 하고 있다는 것은 부대 내 사기가 최악은 아니라는 것. 명백한 나의 지휘 실책으로 겪고 있는 유례없는 치욕에도 부대원들이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 준 셈이다.


"머리 위에 지붕이라도 올리고 자는 것도 오랫만이잖아요?"


주변을 돌아보겠다며 갔던 501번 퀵 카멜 소령이 돌아와 말을 걸었다.


"그렇지."


"원래 저 인간들이 쉰다는 소리 나오면 도망치자고 해볼 생각이었는데, 지금 보니 대장 답변이 '아니다'일 것 같아서요."


"많이 늘었군 소령. 지휘를 맡겨도 되겠어."


"에이. 대장 없는 우리 부대가 어떻게 전투를 하겠어요?"


"못 할 건 뭔가? 자네도 오리진더스트 추가 시술에 무기 바꾸고 선두에 서서 돌격하면 되겠지."


"저는 무장이 굵고 묵직한 편이 좋아서요."


"그럼 뭐 계속 내 밑에 있으셔야겠군."


카멜은 씨익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건 그렇고... 대장은 저 인간들 주둔지 좀 돌아봤어요?"


칭찬에 신난 기색이 보였기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감이 왔지만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말해봐라."


"등화관제도 제대로 안지키는 것 같고... 느낌이 허술해요."


"등화관제도 안되어있고 대열과 주둔지 배치도 어그러져있으며 편제는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이지."


"오호. 언제 돌아다니셨어요?"


"나는 뭐... 여기에서만 쓱 훑어봐도 보이지 않나."


"하긴 대장 시력은 진짜 좋으니까요."


"관록이지 시력의 문제는 아니다만."


"흐응... 그래요오."


말끝을 길게 늘이며 불만을 표하는 카멜. 물론 카멜 소령이 이런 걸로 삐질 성격은 아니다.


"그래서 저들의 의중을 파악했나? 결론은 뭐였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서 대장한테 말을 꺼낸거고요."


"아쉽구만."


"뭐가요?"


"나도 모르겠어서 자네가 답을 가져오면 칭찬해주려고 했었는데 말이지."


"저도 실망해도 됩니까?"


"그럼."


"오늘 밤에 도망치지 않는다고 하시길래 동행하는게 좋다고 감이라도 잡으신 줄 알았죠."


"밥 받고 휴식 시간이 생겼으니 좋긴 하지 않나?"


"겨우 그걸로요? 그 지휘관 말투 보니 적당히 데리고 다니다가 고기방패로 쓰일 것 같은데요."


"그럼 그 때 도망치면 된다. 우리 부대를 그렇게 적당히 던져놓을 생각이라면 저들이 도망치는 우리를 따라올 수도 없을 것 아닌가?"


"너무 임기응변 아니에요? 아무리 대장이 그 쪽으론 능하다지만."


"나도 생각이 없는건 아니니까 안심해도 된다. 낮엔 놈이 우리를 협박하긴 했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가 놈들에게 달려들었을 때도 똑같이 전력에 충분히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 우리도 저들도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그럼 그 다음엔 철충에게 마무리 당하는 형국이지. 우리가 저들을 치지 못한 것처럼 저들도 우리를 칠 수 없다."


"그리고 어느 쪽이 되었건 죽는건 저희들이고 대장은 살아나가겠고요."


"그건 유감이군."


"헤헤... 어쨌든 대장은 살아나갈 자신이 있다고 자백을 들어서 다행이네요. 그게 걱정이었거든요."


카멜의 말에 마음 한 켠이 무겁게 짓눌리는 듯 했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믿어주는걸까.


"아 잠시만요. 저기 인간이 오네요."


인간 장교 하나가 우리의 천막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기에, 카멜과 대화를 멈추고 지휘관과 부관답게 나란히 서서 정자세를 잡았다.



"앵거 오브 호드의 지휘관 칸, 맞습니까?"


"그렇다. 무슨 일이지?"


"저는 오를로프 중위입니다. 그... 소콜롭스키 장군님께서 칸 지휘관과 면담하겠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오를로프 중위라고 소개한 젊은 사내는 소콜롭스키 장군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로 삐쩍 마른 몰골에 움푹 들어간 뺨, 높은 콧대에 기름기 없이 말라붙은 것 같은 눈썹과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나보단 키가 작아 약간 내려다볼 수 있었고, 샐러맨더나 하이에나보단 큰 것 같았다. 몸에는 군복과 방탄복, 위에 방한조끼까지 걸치고 있어 부해보이긴 했지만 그의 살과 착 붙어있을 팔목과 발목 부분의 두께를 보면 마른 사람인 것은 확실해보였다.


"지금? 어디서 만난단 말인가?"


"가급적 빠를수록 좋다고 하셨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지금 지휘전차 옆에 세워진 천막 안에 계십니다."


"그 1호차군."


야트막한 언덕을 끼고 전차포로 한 축을 받쳐 세운 가장 큰 천막이 있었다. 안에 넉넉히 20명은 들어가있을만한 크기이니 지휘소로 쓰여도 이상하지 않겠지.


언짢은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던 카멜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밤중에 왜 부른대요? 혼자 불러내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지휘관으로서 대화를 나눌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원한다면 다른 호드 대원들과 함께 오셔도 상관 없다고 하셨습니다."


카멜의 날선 참견에도 중위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어조 하나 변함 없이 꿋꿋하게 말을 전했다. 


"몇 명을 데려가도 상관 없다는 것인가?"


"예."


"잘됐네요. 겁도 없이 까부는데 다 몰려가서 박살을 내주죠."


"아직 뭐라는지 하나 듣지도 못했는데 박살낼 생각부터 하면 어떻게 하나?"


"우리 대장이 어떻게 이렇게 성격을 죽였지? 무슨 일 있어요?"


"무슨 말이지? 내가 너희들에게 화 한 번 낸 적이 없을텐데."


"아아 뭐... 전장에서는 돌격하는데 한 치도 거침없으신 분이 이렇게 신중하게 나오시니까요."



내 돌격은 완벽한 상황 파악 하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 있을 수준의 변수만을 두고 이뤄지는 것이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인간 중위가 멀뚱히 옆에 서서 듣고 있었으므로 하지 않았다.


"오를로프 중위."


"예."


"장군에게 바로 가도록 하겠네. 자네가 동행하겠나?"


"안내해드릴 수 있습니다. 준비하실 것이 있습니까? 기다리도록 하죠."


"그러지."


중위를 뒤로 하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한창 식사 중인 634번 샐러맨더 하사와 931번 워울프 상병이 천막 가운데에 있었고 427번 하이에나 상병과 738번 워울프 병장은 구석에 쌓아둔 짐에서 뭔가를 뒤지고 있었다. 아까 밖에서 다른 대원들과 개인 장구를 손질하는 것을 봤었으니 부직포라도 찾고 있는 것이리라.



"진짜 혼자 가실거에요?"


뒤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온 카멜이 내 뒤에 대고 물었다. 나는 그대로 전진하여 샐러맨더 하사의 옆을 지나 천막의 반대쪽 입구로 향했고, 그대로 나갔다. 


[덜커덩]


"아윽. 아 야. 미안하다."


"아... 뭐 괜찮은데. 어차피 밥먹고 개인정비 할거라."


"어 그래 지금 좀 급해서 미안."



내가 멈추지 않는 것에 당황한 퀵 카멜 소령이 허겁지겁 따라오다가 뭔가를 건드린 모양이다. 아마 하이에나가 등 뒤에 세워두었던 롤러 워커겠지.


급하다는 자신의 말을 지키려는 듯이 퀵 카멜이 천막 입구의 천을 서둘러 밀어올리고 튀어나왔다.


"대체 어딜 그렇게-"


"쉿-. 조용."


내가 입 앞에 가져다 댄 오른손 검지를 땡그랗게 뚠 눈으로 보던 카멜은 죄 지은 사람마냥 움츠렸다. 안그래도 키차이가 좀 나는데 얼굴과 얼굴 사이 거리가 더 멀어졌지만, 그냥 내가 맞춰서 같이 수그리기로 했다.


"인간놈 귀에 들어갈까봐 그러세요?"


"다른 대원들 귀도 피하려고 그러지."


"대장도 솔직히 지금 걱정하는거죠?"


"걱정할 것 까지는 아니다만."


"천막 안에 무장한 인간들 잔뜩 숨겨뒀다가 덮치면 어떻게 해요."


"멀쩡한 전차 타고 있을 때 안한 일을 이제와서 할 것 같지도 않거니와... 그 천막 안에 들어갈만한 인원이면 장비 없이도 나 혼자 처리할 수 있다."


"네 뭐 그렇겠지만...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뭐에요?"


"오늘 초번초가 누군가?"


"331번 워울프 상사요."


"취침 시간 이전까지는 자네가 장군의 천막을 감시하고, 워울프 상사가 불침번을 서기 시작하면 내가 어디로 갔는지 알리도록. 자네도 상사와 같이 대기하고. 만약 그 장군놈의 막사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나 내가 워울프 상사의 불침번이 끝나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장군의 천막을 공격하도록 해라."


"아니 그런 소리 하시는거 보면 걱정하신거 맞잖아요."


"만약의 상황에는 항상 준비를 해두는게 편한 법이니."


"그럼 어떻게, 대원들 다 짐 싸두라고 할까요? 지금 장비랑 짐들 다 풀어둔 것 같은데요."


"이제와서 무슨 일 생긴다고 해봐야 차량 옆에 막사를 펼친 놈들이 차량을 끌고오진 않을테니, 인간들과 맨 몸으로 맞서는 것 정도는 느긋하게 짐 정리하고 나서도 상대할 수 있지 않겠나."


"아이 참... 알겠어요. 4시간 뒤까지 안돌아오시면 무조건 공격하는걸로. 됐죠?"


"내가 놈과 4시간은 커녕 1시간이나 떠들게 있겠나."


"그래요. 준비할게요."


마지막 대답과 함께 카멜이 등을 쭈욱 폈고,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막에서 나가기 위해서 천막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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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로프 중위와 함께 1호차로 향하면서 인간 병사를 거의 마주치지 않았는데, 이건 1호차와 우리의 천막 사이에 다른 천막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병사들이 우리를 그리 달가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애초에 행군 대형부터 우리가 선두에 1호차가 그 뒤에 붙었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먼발치에 보이는 인간들은 물통을 옮기거나 화장실에 줄을 서거나 하며 분주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수리부속을 나르랴 식량을 나르랴 많은 인원들이 분주한 가운데 그나마 최소한의 경계를 수행 중인 병력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레이더가 작동 중인 지대공 차량과 기동 중인 정찰 장갑차 한 대를 본 덕이었다.


장군의 막사는 생각보다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애초에 호드의 천막도 10명 가까운 인원이 잘 수 있는 크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전차나 장갑차를 운용하는 인원은 한 손으로 셀 수 있는 수준이므로, 승차하는 보병들의 숙소까지 딸린 경우가 아니라면 이 정도의 크기도 상당하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그리고 장갑차도 아니고 전차에는 승차하는 보병이 없으므로.


전차를 혹으로 달고 있는 것처럼 생긴 이 막사는 생각보다 소란스러웠는데, 이 대열에 들어있는 병력의 규모를 생각하자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실제 본부 중대 역할을 하는 천막은 저 뒤에 안테나가 고슴도치마냥 잔뜩 꽂힌 장갑차와 붙어있는 놈이겠지만, 최고 지휘관의 막사 또한 제대로 된 지휘관이 들어있다면 분주해야만 한다.


천막 앞에 보초를 서고 있는 두 병사는 오를로프 중위를 알아보고는 경례를 건냈고, 인사를 되돌려준 중위는 나를 돌아보며 오는 내내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장군께 도착하셨노라고 전하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천막 안으로 들어간 중위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뭐라 말을 했고, 이내 천막 안이 두런두런 시끄러워졌다. 말이 뒤섞여 분간이 되지 않는 것을 보아 꽤 많은 숫자가 안에 있는 듯 했다.


불행하게도 안에 있는 인간들의 대화는 좀처럼 끝나질 않았고, 초병 둘과 함께 잠시간 불편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초병들은 의외의 방문객인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지만, 말 한 마디 붙이는 일이 없었다. 다만 침묵 속에 쏟아진 그 눈길들은 단순한 호기심의 시선보다는 좀 더 찝찝했었지.


초병 중 계급이 낮은 쪽을 골라 시선을 쏘아 보내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없는 것에 유감을 느끼고 반쯤 자포자기했을 즈음에야 장군의 천막 안에서 반응이 있었다. 파도치듯 점차 높아지던 언성이 그치고 군홧발 소리가 우르르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천막의 크기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곧장 입구로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장군의 막사에서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중년의 남자들로, 빠르게 훑어보았을 때 높으면 중령, 낮으면 상위나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추측해보건대 여단 휘하의 중대장과 대대장들이겠지. 10명이 안되는 숫자였으므로 대대장들과 직할 중대의 중대장들 정도면 숫자가 얼추 맞을 수도 있었다. 소콜롭스키 소장의 연대가 제대로 편제 되어있기만 하다면 말이다.

 

이 장교들 중 반은 나를 본체 만체 지나가 버렸고, 나머지 반은 초병들이 했던 것처럼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갔다. 그리고 그 중 둘은 불쾌하다는 감정을 얼굴에서 숨기지 않았다. 물론 그들을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유쾌하지 못한 시간이었지만 장교들의 행렬은 금세 지나갔다. 그러나 일군의 장교들이 흩어지고 나서도 오를로프 중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중위는 장교들의 발소리가 멀어져가고 멀리서 들리는 차량의 소리와 생활 소음이 적막함을 메우고 나서도 조금 더 지나서야 손을 털며 입구에 나타났다.


"들어가시죠."


"아. 고맙다."


밖에서 하릴없이 한참 기다리게 해놓고도 사과는 커녕 미안하다는 기색 하나 없는 모습에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지만, 그렇다고 엄한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 그저 돌아선 중위의 등 뒤를 따라 천막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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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암막 용도일 천막 입구의 이중 가림막을 걷어올리고 들어서자, 접지도 않은 채 모아둔 접이식 책상과 의자가 시야에 거북하게 들어찰 정도로 쌓여있었다. 단순히 한 켠에 몰아두었다기에는 그 비중이 너무나도 커서 천막 안에 좁은 통로가 생겼기에, 마치 높으신 분의 집무실 앞 복도를 형상화해놓은 듯 했다. 내부는 사람이 많았던 덕분인지 바깥보다 훨씬 온도가 높았고, 빛이 새어나가는걸 막기 위함인지 열이 새어나가는걸 막기 위함인지 천막 둘레를 잘 눌러둔 것 같았다. 



천막 안에는 장군의 책상 위에 놓여진 전등 2개가 조명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탁상등으로, 다른 하나는 천막에 비춰 간접 조명으로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장군의 책상은 전차의 측면을 배경으로 두고, 전차에 달려있는 공구함을 서랍장처럼 사용하는 듯 했다. 전차 옆에 쌓여있는 침낭들을 보면 집무실이 곧 침실인 모양이었고, 야전 상황에서 이렇게 큰 천막의 희귀성과 용처를 고려해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낮에 달갑지 않은 만남을 가졌던 소콜롭스키 소장은 탁상 앞에 앉아있었고, 두툼하고 각진 얼굴이 상현달마냥 조명과 그림자의 대비로 인해 세로로 나뉘어져 있었다. 광원이 제한된 탓에 반달의 낮과 밤의 경계에서 크레이터가 나타나듯 그의 팔자주름과 곰보 얽은 뺨이 타투처럼 두드러지게 보였다. 


그가 걸친 꼬질꼬질한 전투복 상의의 가슴팍에는 V. 소콜롭스키(В. Соколовский)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붉은 테가 둘러진 녹색 견장에는 소장(генерал-майор)을 뜻하는 별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단추는 풀어둔 상태라 검은 내의가 보였는데, 천막 안이 전차에서 나오는 잔열 덕분에 꽤 따듯했던 것을 고려하더라도 덩치 때문에 옷이 잘 맞지는 않는 것 같이 보였다.


그의 책상 한 켠에는 급하게 쌓아둔 것 같은 서류와 전자 패널, 그리고 삐뚤게 접힌 소축척 지도가 보였고 장군의 앞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 하나와 금속제 잔 둘, 찬합 뚜껑인 것 같은 그릇에 담긴 빵 한 조각이 있었다.



"아드릭."


"예."


오를로프 중위가 답변한 것으로 보아 아드릭이 이름인 모양이다. 아드릭 오를로프. 그렇군.


"둘만 남도록 해주게. 초병들에게도 전하고, 대기할 필요는 없네."


"예."


단 두 번의 '예'로 답변을 끝낸 중위는 다시 한 번 쌓인 책상과 의자의 옆을 지나 천막 밖으로 나가버렸다.



"환영하네, 칸. 소장."


소콜롭스키 장군은 이름과 계급 사이의 간격을 길게 늘이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래, 바이오로이드와 같은 계급장을 달고 있으니 불편하시겠지.


바이오로이드가 그렇게 불편하신 양반이 왜 굳이 계급장까지 붙여가면서 불러주는지는 이해가 안됐다. 위화감이 들지만, 의중은 잘 모르겠다.



"무슨 용건으로 불렀지?"


"서있지 말고 일단 앉아서 들게."


"우리가 마주 앉아서 조용히 담화나 할 정도로 그렇게 좋은 사이였나?"


내 날선 반응에 장군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내 사과하도록 함세. 자네들이 그렇게 평판이 좋지는 않아서 말이지."


"우리 부대에 대한 나쁜 소문이라도 전해주고 싶었던건가?"


"아니. 내 입장에선 부대원과 장교들의 평판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일세."


"인간들 사이의 알력다툼에 끼고 싶지는 않다만."


"알겠으니 일단 앉아서 들기나 하게."


장군은 오른손의 검지로 책상을 탕탕 소리나게 두들겼다. 손 앞에는 찬합 뚜껑 위의 빵, 그리고 빵 옆에는 작은 비닐봉지가 있었다. 전투식량에서 빼온 소금이었다.


"우린 이미 자네 대원들에게 먹을 것도 잠자리도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었네만, 자네도 성의는 보여줄 수 있어야지 않겠나?"



빵과 소금의 의미는 분명했다. 우리를 손님으로서 맞아주겠다는 이야기. 낮에 장군이 보였던 적대적인 태도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물론 좋은 징조이지만, 안심해도 되는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나는 인간들이 말하는 신의, 우애 같은 것은 깊게 생각해볼 일도, 그럴 의중도 없었다. 30년이 넘게 그들의 병사로써, 지휘관으로써 활동해왔지만 인간들 사이의 신경전이나 알력다툼은 물론이고 정치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관여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은 명령권자의 명령에 따라서 공격하고, 전투하고, 파괴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최종적으로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지 이런 정치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 남자의 미간이 찌뿌려지기 시작했다. 눈썹이 내려가고, 왼쪽 눈은 서서히 가늘어지고 있었다.


블랙 리버에서, 삼안에서 내가 보아왔던 인간들의 호의는 대부분 그 뒤에 다른 의중이 숨어있는 것으로, 타인을 속이고 착취하거나, 죽이고 빼앗기 위함이었다. 가끔 바이오로이드에게도 호의를 보여주는 인간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호의는 대부분은 굉장히 미약하고 작은 부분들에 관한 것이었으며, 진심인 것처럼 보였던 인간들은 오래가지 못하거나, 다른 인간들에게 비웃음을 사며 밀려나기 일쑤였다.


내게는 지금같은 아노미 상태에서 이 인간이 보이는 호의를 믿어도 되는 것인가를 답할 능력이 없었다.


장군은 아까처럼, 그러나 소리가 메아리치지는 않을 정도로 약하게, 아다지오로 느린 속도로, 다시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뒤집어 생각했을 때 내가 이 빵 몇 조각을 먹지 않는 것도 의미가 분명하겠지. 그건 우리 대원들에게 그렇게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 같지 않다. 


서두르지 않도록 천천히 의자를 끌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빵을 한 입 크기 정도 떼어냈다. 꽤 거칠었지만 그래도 밀빵이었고, 구할 수 있는 것 중 그나마 나은 편이었던 모양이다. 소금 봉지를 뜯어 빵 위에 적당히 뿌린 뒤,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짜고 목이 메어 메말라가는 내 입안과는 반대로, 소콜롭스키 소장의 표정은 한결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내가 빵을 씹어 넘기는 것을 보고는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로 말도 안통하는 깡통은 아니었군."


"먼저 대화에 불러낸 사람이 할 말로는 굉장한 실례 아닌가?"


"글쎄, 자네가 지금은 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삼안의 고위직에게 명령 한 마디만 받았더라면 별다른 생각 없이 날 죽이려 들었을 것 아닌가. 로봇과 다를 것도 없지."


"..."


무슨 생각인지,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대답할 말을 고민하느라 대답을 않자, 마주 앉은 사내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 편에 벽처럼 세워진 전차로 가서 무한궤도 위의 공구함을 열더니 뭔가를 손에 쥐고 돌아왔다.


잭 나이프와 버터였다.


"그런 의심을 하면서 동행하자는 제안은 왜 했지?"


"그거야 자네와 자네 팀... 그... 호드의 전투력을 높게 쳤기 때문이지."


"전투력이 높아봐야 네 놈 말을 따르지 않으면 무슨 쓸모가 있나?"


"그 말대로 내 부하들은 믿을 수도 없고 꼴보기도 싫은 삼안 놈들 물건이니 날려버리자고 했다만. 내가 고집을 좀 부렸지."


"왜?"


"말이 통할 것 같았거든."


소장은 잭나이프를 펼치고 버터의 포장을 열었다. 비누만한 종이 상자 안에는 반 쯤 남은 버터가 들어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여기까지 호드 부대의 편제, 이동에 대해서 정찰한 것들, 상부 제대로부터의 소식, 민간인들이 전해준 소문들을 쭉 보았다네. 꽤 막무가내로 이동하는 것 같았고, 삼안의 명령권자가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 도박을 좀 해본 것이지."


"규정 상 내 명령권자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는 해줄 수 없다."


"나도 기대는 안했네. 그래도 자네가 내 제안에 응한 것을 보면 그런 세부사항까지는 신경도 못쓰고 있는 것 아닌가? 지금 상황을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걸세."


"추측만 가지고 도박을 했단 말인가?"


"자네에게 가까운 거리를 주는건 위험한 일이 맞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건 아니니까."


"나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나?"


"포나 대전차 미사일로 못맞출까봐 지대공 미사일도 준비를 해뒀었지. 자네가 허튼 짓을 하면 바로 쏠 수 있도록."


장군은 잭나이프를 들고 입으로 '푸슈우-'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미사일이 날아가는 모습 마냥 공중으로 움직여서는, 내가 아까 쪼갰던 빵에 푹 꽂았다.


"그 정도면 됐겠나?"


"뭘 했더라도 내가 당하기 전에 당신 전차를 날려버리는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유리병을 열려던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다면 내가 부하들 말을 씹고 도박을 한 덕분에 지금 우리 둘 다 여기에 있는게로군."


장군이 유리병의 뚜껑을 돌려 열었다. 금속 잔에 내용물을 따르기 위해 병을 기울이자 알코올 냄새가 후욱 치고 올라왔다.


"잘된 것 아닌가?"


그는 술을 따른 금속 잔 하나를 내 쪽으로 밀어 넘겼다.


"그럴지도."


"좋아."


그가 잔을 들었다.


"만남을 기념하며! (За встречу!)"


나도 조용히 잔을 들어 잔을 맞췄다. 소콜롭스키 소장은 잔을 꺾으며 쭉 들이켰다. 내가 든 잔은... 이거 컵이 아닌 것 같은데. 예술적이지는 않지만 기하학적인 요철이 있는 것을 보니 어디서 떼어온 기계부품인지 뭔지 감이 오질 않았다. 곁눈질로 보니 상대의 잔도 똑같은 것 같았다.


전쟁터에서 그런게 대수랴. 나도 쭉 들이켜 잔을 비웠다. 예상대로 보드카였다.


크흐. 입안의 소금기는 가셨지만 목이 탄다.


"지휘하면서 술을 마시나? 당신 판단에 수많은 장병들의 목숨이 걸렸을텐데 두렵지 않은가?"


내 말을 들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내게 반문했다.


"자네는 자네가 지휘하는 부하를 잃은 적이 없나?"


"30년을 넘게 이 자리에 있었는데 그럴리가 있겠나? 비록 인간은 아니지만 많이 잃었지."


"슬프지 않았고?"


"물론 많이 슬프지만, 술에 의존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장군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잔을 채웠다.


"자넨 강한 지휘관이군. 부럽구만."


"그리고 애초에 잘 취하지도 않는다."


"그건 부럽지 않군."


그는 아까 꽂아둔 잭나이프로 빵을 자르고 버터를 발라 자신의 잔 위에 올렸다.


"오해를 살까봐 말하자면 나도 단순히 작전 중에 인명손실이 있었다고 술을 들이키지는 않았다네."


이어서 빵을 왼손으로 들고 잔을 다시 비우고, 입에 빵을 밀어넣었다.


"지휘 중에 음주를 하지 않았었지."


"그럼 지금은?"


"군인으로서 예상했던 것 그 이상을 보고 있자니 결국 손이 가더군."


그는 다시 잔을 채우고, 내게 병을 넘겼다. 나도 내 잔을 채우며 물었다.


"뭘 보았나?"


"...."


그는 멈추지 않고 연신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나도 그에 맞춰서 내 잔을 비웠고,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이번엔 내가 먼저 잔을 채웠다.


"입에 담고 싶지 않군."


오래 시간을 끈 것에 비해 시시한 답변을 내뱉은 사내는 유리병을 낚아채듯 가져가 거칠게 잔에 술을 부어넣었다.


"어차피 자네도 우리와 동행할테니 곧 직접 보게 될 것인데."


사내가 피식 웃더니 또다시 잔을 비웠다.


"그래서 지금 내가 술을 주는 것 아니겠나."


개새끼. 웃음이 나오나?


"무섭다고 애들처럼 징징거리면서 술이나 마시려고 부른 것인가?"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을 좀 해주려고 했지."


"당신의 부하들이 우리와 동행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당신은 우리의 무력이 필요해서 억지로 끌어들였고, 그 이유가 댁들의 상황이 나빠서라는 것. 맞나?"


병은 나에게 넘어왔고, 다시 잔을 채웠다.


"말하자면 그렇겠지만, 자네가 아무리 날을 세워도 자네 부대의 상황이 나쁘다는 사실까진 숨길 수는 없네."


사내는 다시 한 번 빵을 자르고 칼 위에 꽂아, 내 잔 위에 올려주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런 말도 있지 않나."


"기독교도인가?"


남자는 내 물음에 빵을 썰던 칼질을 멈췄다. 그의 멈춘 손이 잠깐 짬을 두었다가, 칼질을 다시 시작하며 입을 열었다.


"무신론자일세. 죄많은 사람이지."


"그렇군. 거짓말쟁이가 경구까지 읊길래 문제가 많은 사람인가 했었는데."


"무슨 말이지?"


내 말에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버터를 가르던 칼이 멈췄다.


"내가 기억하는 당신네 군대의 지휘 체계에 따르면, 소콜롭스키 소장은 완편 전투 여단을 지휘하던 사람이다. 정찰 중대 하나 제대로 쓸 줄 모르고 여단급 제대의 주둔지 급편 전개도 못하는 사람이 흉내내는건 좀 무리가 있지."


"..."


남자는 손에 쥐고 있던 잭나이프를 탁상 위에 올려두었다. 왼눈가의 주름이 돋보이게 찡그린 채로 나를 노려보더니, 소콜롭스키 소장의 전투복 상의를 벗겨냈다. 그는 소콜롭스키 소장의 외투 안에도 다른 군복을 걸치고 있었다.


"이거야 원. 듣던대로 뛰어나구만."


"당신 입으로 그래서 불렀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그렇지."


대령 계급장을 어깨에 두른 남자는 내가 오늘 천막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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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