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슬레이프니르는 그리폰을 당혹스러운 눈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마찬가지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눈길을 받은 그리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뜬금없이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는 요상한 사람을 쳐다보는 듯한 기막혀하는 시선. 그리폰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스발바르 제도에 장기간 정박하고 있는 오르카 호에 불어닥친 바니걸 광풍. 삼안 산업 영업소 스발바르 지점의 토끼 귀 머리띠는 이미 동난 지 오래였고, 그 깐깐한 레오나 대장의 발할라도 임무용으로 비축한 물자창고까지 개방해서 이 광기에 뛰어들고 있었다. 대체 바니걸 복장을 멸망 전에 무슨 임무에 썼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건 다른 부대들도 이런 정신나간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리폰은 당연히 슬레이프니르가 먼저 제안할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런 아이큐 낮아 보이는 일을 무턱대고 추진하는 게 바로 그녀가 아는 전대장이었으니까. 예전에 "우리 아이돌 하자!"로 시작해서 바로 블랙 하운드에게 팩트폭격으로 두드려 맞고 찌그러졌던 선례를 떠올린 그리폰은, 당연히 이 시류에도 편승하리라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슬레이프니르는 자신과는 관계 없는 일인 양 뮤즈를 데리고 야한 속옷 몇 조각 사들고 온 것이 전부였다.


이쯤 되면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 도리어 불안해지는 쪽은 그리폰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선수를 치기로 했던 것이다. 바보짓에 어울려주기보단, 내가 총대를 매고 먼저 터뜨리는 게 낫지. 그런 심산이었겠지만, 목적의식과 묘한 조급함에 사로잡힌 나머지 항상 일을 터뜨리는 바보의 역할이 자신이 된다는 것을 간과하고 만 것이다.


자신에게로 모이는 대원들의 의아한 시선. 전대장은 이런 기분이었구나. 이상한 동질감과 함께 조금의 억울함이 그리폰의 복장에 차올랐다.


"그리폰..."


블랙 하운드의 안쓰러운 눈길.


"음... 프로듀서의 눈길을 끌고 싶은 거면, 린티가 코디나 화장품 추천해 줄까?"


거드럭거리며 선심을 쓰는 듯한 린티의 열받는 말투.


"아, 아하하... 사령관이 한가해졌으니까 지금이 적기이긴 하지..."


애써 커버를 치고 이해해주려 하는 하르페이아의 상냥한 어조.


"흐, 흐흠. 제가 또 매지컬 모모 특전 백토 굿즈가 몇 가지 있는데... 모두에게는 무리지만, 그리폰 용이라면 그래도 어떻게든..."

"필요 없어!"


항상 마이페이스인 흐레스벨그까지 끼려 하자, 그리폰이 폭발했다. 아니,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원래는 저 바보가 이렇게 쪼여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리폰의 울화는 슬레이프니르에게로 향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는 그리폰 입장에서는 정당한 분노였겠지만, 슬레이프니르로서는 이유 없는 시비였다.


"야! 전대장! 왜 가만히 있어? 이런 거, 전대장이 절대 못 참고 넘기는 이슈 아니야? 다들 이렇게나 난린데, 전대장한텐 토끼 귀 끄트머리도 안 보이는 게 이상하잖아!"

"아, 아~ 바, 바니걸?"

"그래!"

"그, 그치만 그렇게 말해도..."

"갑자기 상식적인 척 하지 말고!"


입장이 역전된 느낌. 지금 여기서 그리폰이 바보 역할이라는 걸 그리폰만 모르고 있었다.


"그리폰, 그만 해. 리더가 곤란해하잖아."

"어... 꼭 바니걸 입고 싶은 거면 내가 알아봐줄게. 그... 역? 바니? 잘 모르겠지만 그 옵션도 꼭 달아주도록 물어볼 테니까..."

"미치겠네 진짜!"


블랙 하운드와 하르페이아의 만류에 그리폰은 머리 끝까지 뻗쳐오른 열로 졸도할 지경이었다. 그때, 어물거리던 슬레이프니르의 입이 열렸다.


"어... 생각 안 한건 아닌데..."

"뭐?"

"그럼 그렇지!"


이젠 그리폰은 전대장의 바보짓 모의 실토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근데... 그 있잖아... 그게 좀..."

"그게 좀 뭐?"


눈에 핏발까지 서서 달려드는 그리폰의 기세에 슬레이프니르의 상체가 어물쩍 밀려났다. 이쯤 되면 네가 바니걸 입고 싶어하는 거 아니야? 블랙 하운드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촌철살인을 가까스로 입 안에 밀어넣었다.


망설이던 슬레이프니르는 입을 오므렸다가, 끝끝내 쥐어짜듯 내뱉었다.


"나, 난 제비인데... 자꾸들 펭귄이라고 놀리니까... 이번에 토끼까지 하면 프로듀서가 무슨 소릴 할 지..."


생각보다 훨씬 멍청한 고민이었다. 역시 그리폰이 잠깐 역할을 맡았어도, 원조는 다르구나. 순식간에 어그로가 돌려지며 모든 대원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짜게 식은 시선이 전대장에게로 몰렸다. 그래, 이래야지. 드디어 모든 게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폰의 마음에 안심감과 뿌듯함이 차올랐다.


"전대장... 차라리 바니걸 하자고 해. 그만두려는 이유가 더 한심하잖아..."

"아, 아하하... 다들 바니걸만 찾길래 우리만 제정신 박힌 줄 알았는데, 사실 바니걸 입은 모두가 정상이고 우리가 비정상이었던 걸까...?"


한 마디씩 얹히는 대원들의 핀잔. 친숙하고 익숙한 기분이었다. 물론, 이쯤에서 전대장이 빼액 소리를 내지르며 반발하는 것도...


"몰라! 너네들은 몰라! 태어나고 수십 년 동안 몰랐던 내 기원을 간신히 알아낸 게! 이젠 온갖 놀림 끝에 기적처럼 찾아내고 지켜낼 수 있는데... 어떻게 되찾은 내 아이덴티티인데!"

"아니, 전대장에게 제비가 언제부터 그렇게나 큰 의미였어?"

"전대장 빼고 다 알고있었다는 사실은 별로 귀엽지 않네..."

"천연 속성도 이정도로 지나치면 좀 많이 깨는군요... 역시 뭐든 과유불급이죠. 또 공부가 되었습니다."


울먹이는 슬레이프니르는 제비 모양 귀걸이를 소중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출격 때 빼곤 계속 하고 있길래, 디자인이 마음에 든 줄 알았는데 그런 내막이... 그리폰의 입에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근데 왜? 토끼도 빠르잖아. 귀엽고."

"응? 그, 그렇긴 하지. 그래도... 제비만큼은 아니지만."

"그렇게 싫어하던 펭귄보단 훨씬 나은 거 아니야? 그리고... 사령관도 바니걸은 사족을 못 쓰기도 하구."

"으응? 그, 그런가? 그런 얘긴 들었긴 한데..."


슬슬 설득되고 있었다. 은근히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도 항상 비슷한 전개였다. 그리폰은 슬쩍 떠보듯 던졌다.


"그래, 뭐... 토끼 자체도 전대장이랑 닮은 면이 있으니까."

"토끼가... 나랑 닮아?"


좋아, 물었어. 어차피 대충 떠오르는 장점만 몇 가지 언급해 주면 귀가 얇은 전대장은 금방 넘어올 것이었다. 활기차다던가, 발랄하다던가... 그리폰이 적당한 말을 고르려던 때, 하르페이아는 홀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빠, 빠르긴... 하지..."

"엥? 뭐가?"

"아니, 하르페 잠깐."

"서, 설마..."

"뭐야? 뭔데? 토끼가 나랑 닮았다는 점이 뭐길래 그래?"


그리폰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다행히도 상식이 부족한 건지, 눈치가 부족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대장만 아직 무슨 얘긴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하르페이아의 인터셉트는 너무 형편없었다. 그리폰은 바닥으로 스핀까지 걸려서 뚝 떨어지는 중인 언어의 마구를 도저히 부드럽게 토스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수습하지 말자.


"...짝짓기가 3초컷이라고?"

"...!"

"그, 그리폰!"

"아니... 난 다른 말 하려고 했는데... 하르페가 멋대로..."

"야아아아아!!!"


새빨개진 슬레이프니르에게서 분노의 고성이 모두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푸하하하하!!!"

"린티, 넌 웃지 마. 네가 2등이잖아."

"하, 아하. 흐윽. 그, 그래도 난 전대장이랑 다른 케이스지! 린티가 귀여워서 프로듀서님이 듬뿍 사랑해주시는 걸 어쩌라구~"

"괜히 깝치다가 참교육 당했다는 소릴 그렇게 하기도 하는구나."

"후후, 사실은 잔뜩 귀여움받는 린티가 부러워서 그러는 거지? 다~ 알고 있다구! 하지만, 너무 귀여운 바람에 받는 시기도 린티의 숙명이니까~"

"아하, 그래요. 그래서 갈 때도 귀여움 성분을 그렇게 침대 위에 쭉쭉 지려놓는 거겠지?"

"무, 뭐...!"


짜증이 치밀어서 쏘아붙인 그리폰은, 문득 잠시 제쳐두었던 해묵은 원한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끼부린답시고 잘난 척 하다가 바로 사령관한테 깔려서 다음 타자가 된 게 내 침대 위였지... 그 덕분에 린티가 몸으로 우린 물이 매트리스까지 스며들어서 한동안 바닥에 요 깔고 자야 했고...


근데 얘는 왜 하필 그 때 내 침대 위에서 깝쳤을까? 갑자기 빡치네?


무심코 꽉 쥔 그리폰의 손에 파란 베개가 들어와 있었다.


"그래... 그 때 내 침대에 지도 그려놨던 거... 아직 덜 맞았지?"

"그, 그리폰! 잠깐! 나 페디큐어!"


붉게 상기됐던 린티는 어느새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며 화장솜을 발가락 사이에 끼운 민트색 발톱을 필사적으로 가리켰다.


"언제 그런 게 문제가 됐나?"


물론, 문제된 적은 없었다. 그리폰의 절묘하면서도 섬세한 구타는 설령 오이 팩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이고 있더라도 한 조각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이외의 부위만 자근자근 조져놓을 수 있었으니까.


"그, 그리폰 언니이! 앜! 앜!"


여느 때처럼 쳐맞는 린티와, 여느 때처럼 자폭하는 전대장. 스카이나이츠 숙소의 평범한 일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