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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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서의 난리를 뒤로하고, 우리는 또다시 바쁘게 산길을 걷고 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찍이 들려오던 먹먹한 포성과 제트엔진 소리는 어느새 뜸해져 있었다.

 

그동안 소완은 조용히 우리 뒤를 따랐다.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없이. 가게 단골이었다던 유미가 이따금씩 그녀와 소소한 잡담을 나눠보려고 시도했지만, 돌아온 거라곤 극히 짧고 무심한 대답 뿐이었다.

 

소완은 대화를 꺼리는 성격인 듯했다. 아니면 어떤 사정으로 그렇게 되어버렸던지. 유미는 이내 그녀와의 교류를 시도하려는 행위가 무용함을 깨닫고, 무표정한 은발의 주방장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이비는 으레 그렇듯 ‘바보 모드’로 돌아오지 않은 분위기였다. 여전히 어울리지 않게 냉철한 눈을 하고서 앞길을 살피고 있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소완의 존재 때문에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 그런듯하다.

 

이비는 이따금씩 우리가 잘 따라오나 확인하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겸사겸사 소완의 상태를 살피는 눈치였다. 간혹 둘의 눈이 마주칠 때면 소완은 이비를 향해 속내를 알 수 없는 오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흔히 말하듯, 입으로는 웃고 있으나 눈으로는 아닌. 그런 종류의 미소.

 

그녀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한 건 분명 우리고, 그녀가 우리에게 딱히 악의가 없다는 것도 알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계속해서 그녀가 신경쓰이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야 내 뒤에 있는 건 누가 봐도 음침한 (그것도 불안정한 정신상태의) 전문 칼잡이였으니까.

 

객관적으로 보면 충분히 걱정이 되고도 남을 상황이지. 게다가 혹시나 해서 이비가 그녀의 식칼을 전부 가져가 버리긴 했어도, 어디 따로 숨겨둔 게 더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뭐...내 생각엔 소완이 숨겨둔 칼로 자기 목을 찔렀으면 찔렀지, 나와 일행들을 찌를 것 같진 않지만. 

 

불길하게 새파란 빛이 도는 그녀의 눈은 흡사 살무사 같은 기운이 분명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는...악의 가득한 흉계가 아니라 깊은 회한이 담겨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건 분명 기분 탓이 아니었다. 경험적인 직감에 가깝다고나 할까. 지금 그녀의 눈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참전용사들에게서 가끔 볼 수 있는 종류의 눈빛이었으니까.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에 고통받는 공허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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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오래 걷지 않았는데도 유미와 H는 물론, 바니까지도 지쳐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그 점은 나도 동일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먼 거리를 걸어본 적이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무거운 등짐을 메고 살인 기계로부터 전속력으로 도망쳐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된 또 한 번의 짧은 휴식.

 

나는 무거운 배낭을 땅에 풀썩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묵직하고 큼직한 것이 의자 대용으로도 썩 훌륭하다. 이비도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사실은 꽤나 힘들었던 것인지, 내 바로 옆에 앉아 등을 기대어 왔다. 

 

그러자 소완도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치맛자락을 살포시 정리하며 몸을 낮추는 모습에서 고전적인 우아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어색한 분위기는 뭘까. 힐끔힐끔 옆을 쳐다보니 소완은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

 

“...그, 힘들진 않아?”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 한마디.

 

그러자 소완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아무리 힘이 든들, 이 꼴로 살아있는 것만 하겠사옵니까.”

 

픽, 조소를 보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소완은 그 묘한 푸른 눈을 반쯤 감고서 간드러진 목소리로 내게 반문해온다.

 

“손님께서는 살아있는 것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어라 생각하시는지요?”

 

.....어째 갑자기 얘기가 엄청 무거워졌네.

내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쪽잠을 청하던 이비도 어느새 소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뜬금없으면서도 무거운 주제. 괜히 말을 걸었나 싶어 후회가 밀려온다.

하지만 먼저 말을 걸어놓고 대꾸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무서우니까? 죽는 과정이 아픈 게 싫기도 할 거고.”

 

나름대로 적당히 떠올린 대답을 건네보았다.

 

“소첩의 짧은 생각으로는, 자신들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옵니다.

 아직 생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그 끝을 두려워하는 것일 테지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렇다면 반대로, 살아갈 이유도 살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극히 두려운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소완의 눈동자가 내 눈과 마주했다. 뼛속까지 시리는 기분이다.

 

“손께서는 혹 소첩이 만들어진 이유를 아시옵니까? 

 극상의 진미와 지고의 쾌락을 주인께 드리기 위함이옵니다.

 

 ...허나 소첩은 주인을 잃었사옵니다. 

 함께 일하던 주방 식구들도 모두 잃어버렸지요. 

 뿐이옵니까. 몸뚱이는 물론, 이미 넝마가 되어버린 마음까지 철저히 난도질당했지요.

 

 허면, 여쭙겠나이다.

 모시던 주인도, 진미를 감별할 미각도, 마음 속의 즐거움조차 잃어버린 소첩에게...

 살아갈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옵니까?”

 

....거 참.

 

듣는 사람 할 말이 없어지게 만드네. 이건 뭐 어째야 하나, 슈밤 애초에 말 걸지 말고 걍 둘걸, 하며 입술을 깨물고 있으려니 이비가 소완에게 물어온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소완은 눈을 감고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잘 정돈된 눈썹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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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첩은 아직도 그 분을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옵니다.

 

소첩의 첫 주인께서는 참으로 재미난 분이셨지요.

적지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장난기 많고 천진하신 분이었사옵니다.

과장이 아니옵니다. 별 것 아닌 것에도 크게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시곤 했으니.

 

성품도 어찌나 순수하셨던지...소첩이 곁에 있어드리는 것만으로 행복해 하셨지요.

아아, 소첩의 부군께서는 실로 낭만으로 가득한 분이셨사옵니다.

 

그저 도구이자 인형에 불과했던 소첩에게, 만들어질 때 주입된 복종심이 아니라... 

함께 지내며 키워가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알려주신 그 분을...

어찌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허나, 이 각박한 세상에 그리도 순수한 분이 설 자리는 없는 법.

지나치리만큼 순수하셨던 부군께서는 오랜 친구분에게 배신을 당하셨지요.

오랜 세월 일궈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자, 부군께서는 삶을 포기하셨사옵니다.

 

소첩, 부군의 마지막 청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옵니다.

 

부군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채권자라는 자들은 향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몰려와 값나가는 것들을 모조리 처분하기에 바빴지요. 그렇게 소첩과 주방 식구들도 처분되었사옵니다.

 

소첩과 식구들이 끌려간 곳은....도살장보다도 못한 곳이었지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손님들께서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이옵니다.

 

소첩이 일찍이 부군의 손을 잡고 거닐었던 화려한 공간.

그 공간의 이면에서는 소첩과 같은 존재들이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사옵니다.

도살장의 짐승들은 적어도 눈은 빨리 감을 수 있으니...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주방 식구들이 차례로 목숨을 잃었사옵니다.

허나 소첩은 본디 몸값이 귀하여, 마지막까지도 명줄을 건사할 수 있었지요.

...오랫동안 천천히, 한 점 한 점 맛보며 즐기겠다는 이유였사옵니다.

 

그렇게 소첩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이 찢겨 버렸지요. 

 

한참이 지나, 채권단이 소첩의 값어치를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어 있었사옵니다.

그분들께서는 다급히 소첩을 그 끔찍한 곳에서 빼내었지만,

보시다시피 진작에 이런 꼴이 된 까닭에, 헐값에 경매에 부쳐졌지요.

 

그렇게 만나게 된 소첩의 두 번째 주인께서는 실로 인색하기 한량없는 분이셨사옵니다.

애꾸눈에 도려진 살갗으로도 일하는 데는 충분하다, 쓸데없이 돈을 낭비할 수는 없다.....

그런 이유로 소첩의 기억마저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셨사옵니다.

 

이후로는 소첩과 같은 폐 바이오로이드 일손들을 데리고, 손님께서 찾아주셨던 그 작은 식당을 운영했사옵니다. 두 번째 주인께서는 인색한 데 더불어 게으르기까지 하셨던 분이오라, 운영과 투자에는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으셨으니 말이지요.

 

한때는 그 인색한 분께서 소첩의 기억을 제거하지 않으신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 덕에 이 몰골로나마 부군을 기릴 수 있는 것은 다행이라고 여기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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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은 채 무표정을 유지하던 소완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태연히 붕대 감긴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아무 일도 없던 듯 다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유감이야.”

 

나는 소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녀가 흠칫, 하며 몸을 움츠린다.

 

“그 두 번째 주인이란 작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비가 물어온다.

 

“이 난리가 시작되고 소첩과 단둘이 남으셨을 때, 불안에 떠시던 그분께서 소첩께 이리 명하셨지요. ‘쓸모없는 것, 너 좋을대로 해! 그냥 나가 죽어!’라고.”

 

소완이 싱긋, 아주 차가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 한마디가...그분께서 내리셨던 수많은 분부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사옵니다.

 소첩은 명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나가 죽으러 떠났지요.

 

 그분께서는 당황하시어 소첩을 연이어 부르시며 붙잡으시려 했지만, 

 그 간절한 외침은 되려 그 괴물 같은 것들만 끌어들이고 말았사옵니다.”

 

“그러니까...자의적인 명령 해석으로 당신 주인을 죽게 내버려 둔 겁니까?”

 

이비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꼭 그렇지만은 않지요. 애초에 그자는 제 진정한 주인도 아니었사오니.”

 

태연하게 대꾸한 소완. 이내 이렇게 덧붙인다.

 

“혹 염려가 되시옵니까? 소첩이 그런 방법으로 손님들을 위험하게 만들까 봐 말이옵니다.”

 

.....응. 솔직히 말하자면 졸라 걱정돼.

 

하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할 분위기도 아니었던 관계로, 나는 정신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수습하고 이비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두 눈으로 소완을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상으로라도 부정하지 않을까 했는데, 대놓고 너 못 믿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

아니, 이래야 ‘진지 모드’ 이비다운건가. 나도 이젠 모르겠다.

 

그러자 소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안심하시옵소서.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사옵니다.”

 

그녀가 나와 이비에게 고개를 돌렸다.

 

“손님들께선, 소첩과 부군의 그리운 시절을 떠오르게 하기에.”

 

우리 셋의 시선이 잠시 교차한다.

그동안 나는 이비가 또 권총을 뽑지 못하도록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얘가 툭하면 총부터 꺼내대서 이젠 나도 노이로제 비슷한 게 생겼다고.

 

“...믿어보겠습니다. 속는 셈 치고요.”

 

곧 이비는 다소 짜증 섞인 얼굴로 내 손을 자기 손목에서 털어냈다.

 

“하지만 수상한 짓 하시면 바로 죽일 겁니다.”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소첩에겐 달가운 말씀이옵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기류. 나는 그 사이로 손을 휘저으며 끼어들었다.

 

“아 좀 그만해, 이비야. 이제 한배를 탄 신세잖아.

 그리고 소완이도....어...부탁이니까 우리랑 잘 지내보자.”

 

“손님의 청대로 하겠나이다.”

 

소완이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나직하게 사과해오는 이비.

 

“...My apologies, ma’am. It wasn’t anything personal.”

(....사과드리겠습니다. 별다른 감정은 없었습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소첩도 기분이 상하진 않았사옵니다. 

 

그녀가 하나 뿐인 눈에 아련한 빛을 띄우며 옅게 미소지었다.

 

“....소첩의 부군께서 살아계셨다면, 소첩 또한 똑같이 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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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금 기운을 짜내어 산길을 따라 한참 이동했다. 중간중간 우리 머리 위로 나타난 드론과 헬기들을 피해 움직이느라, 움직인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늦어져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날아다니는 것들까지 감염시킨 모양이었다. 거 참 재주도 좋지.

 

이상 없다는 이비의 신호가 떨어져, 아까까지 숨어있던 덤불에서 기어나와 다시 터덜터덜 다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어딘가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크기로 보아 그렇게 먼 곳은 아닌 것 같았다.

 

“저쪽이예요!”

 

바닥에 바짝 엎드린 유미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아래쪽의 고속도로였다. 거리가 조금 있어서 선명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몇몇 사람들이 다급히 뛰어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총을 든 남자 하나와 아기로 보이는 뭔가를 안고 있는 여자 하나. 그리고 동작이 굼뜬 노인이 하나. 거기에 어린 아이까지. 일가족 전체가 필사적으로 버려진 자동차들 사이를 내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이씨...저 사람들 어떡하냐.”

 

H가 탄식하며 가리킨 곳에는 철충 세 기가 있었다. 기괴하게 뒤틀린 길쭉한 팔을 가진 것들. 윤곽으로 볼 때 아마 경찰들이 쓰던 램파트인가 뭔가였던 것 같다. 그 괴물들은 성큼성큼 걸어오며 저 일가족을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열심히 뛰어가던 노인이 바닥에 쓰러진다. 그러자 가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철충들에게 엽총을 쏘아대며 다급히 노인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선두에 선 철충 하나가 남자 쪽에게 기관총을 갈겨 제압한 후, 그가 주변의 자동차를 끼고 몸을 숨긴 사이 그대로 노인을 벌집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윽.....어떡해...”

 

유미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울먹인다. 

 

아스팔트 위에 들러붙은 핏자국과 육편이 되어버린 노인을 본 남자는, 잠시 그 자리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마 자기 부모라도 잃은 모양이었다.

 

그때, 높은 비명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선두의 철충이 남자를 묶어놓은 사이, 다른 두 놈이 우회하여 아이와 여자를 몰아붙이고 있던 것이었다.

 

남자는 그들의 외침을 듣자 다시 총을 집어 들고 재빨리 뛰쳐나갔다. 그의 뒤로 쏟아지던 기관총 세례를 운 좋게 피한 그는, 남은 가족들을 위협하던 두 철충에게 총을 쏘아대며 주의를 돌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우리 이대로 보고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눈물범벅이 된 유미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바니도 덩달아 입을 연다.

 

“사정거리가 닿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도해 볼 순 있을 것 같군요. 서방님과 친구분께서만 허락하신다면 이비 씨와 제가 여기서 지원하겠습니다.”

 

“좋아, 바니. 명령할게. 저 사람들을 도와-”

 

“아뇨. 안됩니다.”

 

이비가 단호한 목소리로 H의 말을 잘랐다.

 

“지금 사격했다간 사방에 우리 위치만 알려주는 꼴밖에 안 됩니다.

 저 셋 말고도 분명히 근방에 적이 더 있을 겁니다. 아까 지나간 드론들도 그렇고요.

 그걸 계산에서 빼더라도, 지금 우리 전력으론 저 셋조차 상대하기 힘듭니다.

 여기 개입하는 순간 우리 주인님의 생명도 위험해질 거라고요.”

 

바니가 이비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분들은 인간님들이세요, 이비씨. 그것도 가족이요.”

 

“제 대답은 같습니다.”

 

“아...아이들도 있단 말이에요...갓난 아기도...”

 

유미가 바들거리는 목소리로 거들었지만, 이비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안타깝지만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럼 저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자고?”

 

이번엔 내가 끼어들었다. 나로서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으니까.

 

“네.”

 

이비는 얼굴 하나 안 바뀌고 태연히 대꾸한다.

 

“...뭐?”

 

“지금은 전시상태나 다름없습니다. 일반적인 도덕 관념에 집착하시면 안 된다고요. 저들이 어떻게 되든 주인님의 생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차가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이비. 그리고 계속해서 퍼지는 총성과 비명. 여자와 아이 모두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지금 나서봤자 어차피 저들을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우리만 확실히 위험해질 뿐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비가 시선을 돌려 H에게 질문했다.

 

“친구분께 묻겠습니다. 친구분께는 누가 더 소중하죠? 바니 언니인가요, 아니면 일면식도 없는 저 낯선 사람들인가요?”

 

H는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생존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무언가 하나씩을 포기해야 하죠.

 

그럼, 타인을 위해서 배우자와 자기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준비는 되셨습니까? 

 

본인이 위험한 상황에서조차 대의를 위해 자기 안위를 내던지는 자들을 당신네 인간들은 ‘영웅’이라 부르지요. 그리고 전 영웅이 되어보려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수두룩하게 봐 왔습니다.

 

그렇게 영웅 노릇이 해보고 싶으십니까? 친구분과 바니 언니 목숨까지 내던지면서요? 정 그러시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건 당신들 선택이니까요. 

 

하지만 그 짓거리에 제 주인님은 끼워 넣지 마세요.

두 분께선 어떨지 몰라도, 전 주인님과 손잡고 저승으로 신혼여행 갈 생각 없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들리는 소리라곤 저 먼 곳의 남자와 철충들이 울려대는 총성뿐.

 

이비를 쏘아보던 바니는 낙담한 듯 고개를 숙인 H의 등을 걱정스런 얼굴로 어루만지고 있었고, 유미는 손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소완은 예의 그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런 그녀도 저 가족이 어떻게 될지가 궁금하긴 한 듯, 조금 더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더불어, 몰인정한 이비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저 존재는 내가 사랑하던 그 이비가 맞는 걸까. 

만약 맞다면, 어째서 이다지도 그녀가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갑자기 저 멀리서 또 한 번 비명이 울렸다.

 

 

 

 

 

나는 언덕 경사 쪽으로 다가가 아까 그 도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철충 하나가 그 남자를 높이 들어 올려, 다리와 팔을 잡고 양쪽으로 잡아당기고 있다. 놈의 양팔이 벌어질수록, 그에 맞춰 비명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남자의 팔다리는 사람 몸이 저렇게 늘어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길게 늘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높은 소리의 비명과 함께 피를 뿜어내며 죽 찢어져 버렸다. 모양을 보니 어깨와 골반 관절부터 통째로 뜯겨나간 것 같았다.

 

더 애석한 것은, 저 괴물들에게 거열형을 당한 그의 희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열심히 철충들을 묶어두던 두며 탈출시킨 가족들은, 남은 두 철충의 총격에 그대로 피 안개가 되어버렸다.

 

도로 위에 남은 것은 사지가 분해된 한 가장의 몸뚱이, 옆구리 터진 김밥처럼 되어버린 한 어머니와 다진 고기처럼 변해버린 어린 아이의 시신.

 

그 광경을 본 바니와 H는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고, 유미는 주변의 나무를 짚고서 속에 든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끔찍한 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몸이 얼어붙기라도 한 건지, 눈을 질끈 감고 싶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도 차라리 어디 가서 토하는 게 낫겠다. 

 

이비의 말이 맞다는 건 알고 있었다. 바니도 저기까진 총이 닿을지 모르겠다고 했던데다, 뒤틀린 드론들을 포함해서 주변에 철충들이 꽤나 깔려 있다는 것도 분명했으니까. 실용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런데도 저 가족의 죽음이 우리 탓으로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나를 포함한 일행이 경악과 연민, 죄책감이 고루 섞인 씁쓸한 감정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그때, 소완이 정적을 깨었다.

 

“참으로 안타깝사옵니다.”

 

그렇게 말한 은발의 주방장은 어째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저 오묘한 표정으로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어서 움직입시다. 우리도 안타깝게 되지 않으려면.”

 

이비는 착잡한 얼굴로 그 현장을 내려다보더니, 곧 등을 돌려 다시 길을 재촉했다. 힘겹게 정신을 차린 바니는 축 늘어진 채 흐느적대는 H를 부축했고. 나는 아직도 흐느끼고 있는 유미의 입가를 휴지로 닦아주었다. 먹은 것도 별로 없으면서 게워내긴 많이도 게워냈더라.

 

아까 잠시 얼어붙어 있던 걸 제외하면, 내 정신은 이상하리만치 명료했다. 정확히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머리가 어딘가 멍한데도 생각은 또렷한 게 굉장히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혹시 그건가. 사람이 충격을 너무 받으면 되려 실감이 안 간다는 거. 만약 그렇다면, 이번 건이 대피소에서 이비에게 머리가 날아간 그 밉상들 경우보다도 충격이 훨씬 컸던 모양이다. 

 

갑자기 비틀대며 내게 기대오는 유미. 어이쿠, 지금은 잡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란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몸에 힘이 풀린 채로 뭐라고 웅얼대는 유미를 겨우 일으켜 세웠지만, 그녀는 이내 정신을 잃고 완전히 쓰러져버렸다. 살다 살다 사람이 울다가 기절하는 걸 실제로 다 보네. 난 그동안 이게 영화적 과장 같은 건 줄만 알았지.

 

나는 조심스레 이비를 불러봤지만,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어째 아까보다 눈에 띄게 어깨가 처진 느낌의 그녀. 

 

뭐, 별 수 없지. 유미는 내가 업고 가야 할 모양이다.

 

내가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메고 개고생을 해가며 유미를 등에 업는 동안, 뒤에 있던 소완은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이 그 꼴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 파란 눈동자 아래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슈밤 좀 도와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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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를 업고 가길 몇 시간. 어느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빠르게 어두워져 가는 하늘. 우리는 앞을 완전히 분간할 수 없게 되기 전에 바삐 다리를 놀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걸었던 덕분인가, 아까의 참상이 머릿속에서 조금은 지워진 듯한 기분이다.

 

정신이 들었음에도 내 등에서 내려오길 거부하던 유미도 슬슬 마음이 조금 진정된 모양인지, 어느새 호흡이 안정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현재 우리의 목적지는 저기 어딘가에 있다는 작은 집 한 채. 이비 말로는 아까 저쪽 기슭에서 멀쩡한 농가 하나를 봤다나. 이런 야산 한복판에 집이 있다니 조금 생뚱맞기도 하다. 별 이상이 없으면 그곳에서 하룻밤 자고 가잔다. 

 

기왕이면 바깥에서 노숙하는 것보단 낫겠다 싶어 모두가 동의한 참이다. 우리 중에 텐트 챙겨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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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인 것 같다더니,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강아지 귀가 달린 메이드. 이제보니 꼬리까지 달려있다. 바짝 치켜 올라간 복슬복슬한 꼬리가 꼿꼿이 서 있다. 

 

“안돼요! 들어오지 마세요!”

 

우리가 다가가자 잽싸게 뛰쳐나온 이 녀석은 대문을 가로막고 우리를 쫓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나도, H도, 바니와 이비까지도 당황한 눈치다. 철충을 봤으면 봤지, 인간 강아지(혹은 강아지 인간)와 만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으니까.

 

“아....그....저기, 혹시 이름이 뭐야?”

 

나는 우선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하치코입니당! 이제 나가주세요!”

 

시작부터 선을 그으며 단단히 버티고 선 하치코. 예상보다 단호한 태도에 내가 뒷목을 잡자, 바니가 슬쩍 앞으로 나섰다.

 

“하치코 씨.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지쳐있습니다. 하룻밤만 쉬었다가 해가 뜨면 바로 떠날 테니, 창고나 헛간에라도-”

 

“앙돼요! 모르는 사람들 함부로 들이면 큰일 나요!”

 

바니와 하치코가 몇 차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하치코는 매번 이제 가달라는 식으로만 이야기했지만), 이비는 하치코 옆에 놓인 거대한 방패와 큼직한 총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집안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세요! 그러니까 다른 곳으로 가 주세요!”

 

“Listen, pooch.”

(잘 들어, 멍멍아.)

 

이비가 소총에 손을 올리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이 상황에서 언제 나올지도 모를 민가를 찾아 돌아다니는 건 너무 위험해.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저 괴물들하고 마주치고 싶진 않거든.

 그러니 우린 그 집에 좀 들어가야겠어. 계속 비키지 않겠다면 피차 곤란해질 거야.”

 

방아쇠 근처에 걸쳐진 이비의 손가락을 본 하치코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저도 경고했어요. 다른 데로 가 주세요!”

 

“네 주인님을 해칠 생각은 없다니까. 이제 비켜.” 

 

“안 돼!”

 

아까까지만 해도 맹하던 녀석의 눈빛이 순식간에 매섭게 변했다. 아이처럼 앳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노기 어린 외침이다. 

 

급격히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하치코는 근처에 놓인 방패 쪽으로 달려갈 태세였고, 이비는 이미 방아쇠에 반쯤 손가락을 걸쳐놓고 있었다.

 

그 순간, 하치코의 뒤에서 대문이 열리더니 웬 노부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치야, 무슨 일이냐? 저 사람들은 누구고?”

 

“할아버지! 들어가계세요! 지금 나오시면 위험해요!”

 

하치코는 당황하며 노부부를 안쪽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어르신!”

 

유미가 잽싸게 쪼르르 달려와 노부부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에헤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애덤 커뮤니케이션즈’ 소속의 유미라고 해요. 여기 계신 분들은 우리 직원분들하고 일행들이시고요.” 

 

훌륭한 영업용 미소를 만면에 띄운 그녀가 청산유수처럼 말을 이어간다. 퍽 앙증맞은 외형과 목소리를 지닌 그녀에게 안심한 듯, 노부부는 유미의 인사를 받아주고 있었다. 그동안 하치코는 불안한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지만.

 

“어르신도 아시다시피 지금 재난사태 선포가 되었잖아요? 그래서 긴급 통신망 유지 보수를 위해서 이동 중이었는데, 상황이 상황이라 산길로만 다니다 보니 다들 지쳐있어서요. 

 

 그래서 말씀인데...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오늘 밤만 어르신 댁에서 쉬어가도 될까요? 

 꼭 집안에 들이시지 않더라도...창고나 헛간 같은 데라도 좋으니까....”

 

동정심을 자극하는 말투와 표정. 저 능수능란한 처세술은 과연 보통이 아니구나 싶었다. 유미의 솜씨가 먹혀든 것인지, 아직도 잔뜩 경계하는 하치코와는 달리 노부부의 표정은 어느새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아이고, 젊은 아가씨가 고생이 많네요. 추우니까 어서 들어와요. 

 집안이 넓으니, 다들 자고 가기엔 충분할 거예요.”

 

“할머니!”

 

하치코가 항의했지만, 노부부는 하치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착하지, 얌전히 있거라.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으니 도와주자꾸나. 

 애초에 우리도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온 신세 아니냐.”

 

“할아버지...그래도요...”

 

“자, 자, 어서들 들어와요.”

 

할머니의 환대를 받으며 우리는 허름한 농가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어쨌든 일이 잘 풀려 다행이다. 유미가 대뜸 우리 본래 목적을 말해버리면 어쩌나 걱정도 했었는데, 괜한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노부부가 묵는 안방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에 각자 짐을 풀고 몸을 뉘었다. 생각보다 남아있던 침구류도 풍부해서 추위에 떨 걱정도 없어 보였다.

 

H와 바니는 거실에, 유미와 소완은 화장실 근처의 작은 방, 그리고 이비와 나는 거실 옆의 빈방에 자리를 잡았다. 

 

하치코는 안방 문 앞에 앉아 우리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한참 쏘아보더니,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목소리도 그렇지만 하는 짓이 참 어리숙해 보였다.

 

나는 가방을 베개삼아 베고 이불을 덮었다. 온몸에 피로가 가득 쌓인 것이 절절히 느껴졌지만, 어째 생각보다 잠이 오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이비는 여전히 총을 안은 채로 창문 바깥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불침번이라도 서겠다나 뭐라나. 

 

아직도 이 사태에 적응이 안된다. 날이 밝으면 또 어떻게 될까 걱정도 들고.

 

.....아마도 내일은 더 힘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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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련된 사회인 커넥터 유미.

그리고 철충은 사람을 찢어요잉


다들 설날은 잘 보내셨나요.

모자란 글과 그림이지만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당


그리고 다음화는 18탭 달고 올릴 듯 합니다 히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