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날이 밝았다. 침대도 침대지만 오랜만에 그 헬멧을 벗고 누운 덕에 목이 좀 편해진 것 같았다. 그동안 헬멧 쓰고 자느라 목디스크 걸릴 것만 같았는데.


아직 자고있는 히루메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거실로 나왔지만 애니가 자고 있다던 소파 위는 텅 비어있었다. 창문으로 바깥을 보니 앞마당에서 공구상자를 옆에 둔 채 바이크를 정비하고 있는 앳된 아가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방의 식탁 위에는 수통과 함께 포장도 안뜯은 건빵 봉지가 놓여져 있었다. 정황상 애니가 아침으로 때우라고 꺼내둔 것 같은데... 이 건빵 멸망 전에 만들어진 거 아녀? 유통기한 괜찮은 건가? ...에이, 괜찮겠지. 그동안 100년 된 통조림 먹은 게 한두번이 아닌데 배탈 안났던 거 보면 미래라서 보존기술도 엄청 발달했다거나 한 거겠지. 응, 퍽퍽하긴 해도 이 정도면 먹을 만 하네.


식탁 앞에 앉아 건빵을 으적으적 씹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생각했다. 헬멧이 사라졌으니 휩노스 병을 막기 위해서는... 모르겠다. 역시 사령관한테 가서 부탁하는 방법 밖에 생각이 안나네. 그보다 일단 오르카호에 연락을 취할 방법은 있나?


"아, 일어났구나!"


애니가 한 손에 공구상자를 든 채 들어오면서 반갑게 외쳤다. 공구상자를 문 옆에 내려놓고 내 옆자리에 와 앉고선 건빵을 하나 집어먹었다.


"그래서, 넌 앞으로 어쩔 계획이야?"


"지금 생각중이야. 근데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네."


"갈 데 없으면 얼마든지 더 머물러도 돼. 아님 캐나다로 몰래 빠져나가는 거 도와줄까?"


"글쎄, 그건 나중에 생각해볼게. 그러고보니 여기 연락수단은 있어? 집 안에 전화기 같은 건 안보이던데."


"음... 그게 말이지, 한번 밖에 나와볼래?"


애니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도 그녀를 따라 문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검지가 가리킨 방향을 보자 조금 먼 곳에 있는 철골로 이루어진 뾰족한 탑을 찾을 수 있었다.


"저거 보여? 통신탑이야. 저걸 이용하면 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있긴 해, 예전에 만난 펙스 난민으로부터 사용 방법도 전해들었고. 다만..."


"다만?"


"저건 펙스에서 세운 통신탑이야. 저걸 이용해서 연락을 취하면 십중팔구 펙스가 도청해."


"아, 이런. 그럼 오메가한테 전화 걸 목적이 아닌 이상 쓸 수 없겠군."


오르카호에 SOS 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걔들이 도와줄지는 둘째치고, 저걸로 전화 걸었다간 오르카호보다 펙스가 먼저 도착해서 날 픽업해가게 생겼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히루메가 눈을 비비적 거리며 방문을 열고 나오는 게 보였다. 간단한 아침인사를 하고선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어제 저녁처럼 양옆에 히루메와 애니가 자연스럽게 와서 앉았다. 어제와 다른 점은 히루메의 손에 내가 반쯤 남긴 건빵 봉지가 들려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계속 뇌세포를 쥐어짜봤지만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았다.


"우물우물... 그대여, 마음이 심란해 보이는 구나. 산책이라도 하며 머리 좀 식히는 게 어떻겠느냐?"


물 없이도 건빵을 잘 먹던 히루메가 말문을 열자 애니가 맞장구쳤다.


"맞아맞아, 계속 인상 찌푸리며 생각만 하고 있는 게 머리 위로 아지랑이가 보일 것 같았다니까? 엔진도 과열되면 시동 끄고 식혀야 하는 법이야. 오늘 하루 정도는 휴가인 셈 치고 쉬자고!"


"어... 그럴까?"


"그래! 오늘 날씨도 화창한데 둘이서 드라이브라도 가는 건 어때? 내 바이크엔 한명 더 태울 수 있어!"


"잠깐, 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지금 첩을 빼놓고 너희들끼리만 가겠다고 하는 게냐?"


"미안, 내 바이크엔 셋이나 태우면 속도가 잘 안나와서 말이지. 둘까지만 타야 질주감과 함께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거든. 한번만 봐줘, 응?"


"으음... 그이가 바람 좀 쐴 필요가 있으니 눈 감아 주겠노라. 단, 멀리 가지 말고 이 근처만 돌도록 하여라!"


"그건 걱정하지 마! 가자. 그... 음, 너를 뭐라고 부르는 데 좋을까?"


"그냥 좋을대로 불러."


"그럼 보스라고 부를게! 이제야 자경단이 아닌 보안관이 된 느낌이네!"


"아니, 보안관이면 정의의 편인데 보스는 보통 악당두목 부르는 말 아녀?"


"시시콜콜한건 따지지 말고, 가자 보스!"


"조심히 다녀오거라! 너무 오랫동안 나가있지 말고!"


"아핫, 꼭 무슨 엄마같아!"


"누, 누가 엄마라는 것이냐!"


애니한테 한쪽 팔을 붙잡혀 반쯤 끌려가다시피 집 밖으로 나오자 새것처럼 광택이 나는 호버 바이크가 우릴 맞이해줬다. 애니가 바이크 위에 앉고 나는 자연스레 그녀의 뒤에 앉았다.



"둘이서 하는 드라이브는 처음이야! 어때 보스, 바이크 타본 적 있어?"


"아니, 한번도."


"그래? 그럼 빠르게 달리면서 바람 쐬본 적도 없겠네?"


"비슷한 경험은 해봤어."


운전석 창문 깨진 지프차 운전하느라고 말이지.


"흐음, 그럼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해주기 위해서 내가 힘 좀 써야겠는데? 꽉 잡고 있어!"


...왠지 안좋은 예감이 드는데, 혹시 도발로 받아들인건가.


"애니, 뭘 어쩌려ㄱ으아아악!?"


예고도 없이 바이크를 급발진했을 뿐더러 앞바퀴를 든 채 달리자 나도 모르게 애니의 허리를 꽉 끌어앉았다.


"아하하하! 보스, 너무 달라붙는 거 아냐!?"


뭐가 그리도 신난건지 실컷 웃은 뒤 도로 앞바퀴를 수평으로 내려놓고 나서야 팔에 힘을 풀 수 있었다.


"윌리라는 기술이야! 어때, 끝내주지!"


"한순간 염통이 쫄깃해졌어... 근데 이거 떠다니는 호버 바이크인데 앞바퀴 드는게 의미가 있나?"


"그야 멋있잖아!"


"...갑자기 헬멧 안쓰고 나온 게 후회되기 시작하는데."


"왜이래, 내 실력 못믿어? 나로 말하자면 100년 넘게 무사고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이거야! 그야말로 인마일체의 경지지!"


"알았으니까 평범하게 달리자... 이러다 심장마비로 먼저 죽겠어."


"내게 맡겨둬! 드라이브는 즐거워야지!"


"그리고 이 시끄러운 엔진소리 좀 끌 수 없어? 어차피 녹음된 소리잖아."


"뭐? 어째서! 요란하게 엔진소리 내면서 바이크 모는 건 로망 아니야!?"


"영화에서 볼 땐 그랬는데 직접 타보니 귀청 떨어질 것 같다..."


"치, 재미없게. 볼륨 줄일테니 그걸로 봐줘."


평범하게 광할한 도로를 달리면서 얼굴에 찬바람 좀 쐬자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물론 히루메한테 걱정 끼치지 않게 멀리 가진 않고 애니의 집이 시야 안에 남아있을 거리 안에서만 돌아다녔다.


"그런데 보스, 혹시 바이크 운전에 관심 없어? 돌아가는 길은 나 대신 핸들 잡아볼래?"


"아니 난 딱히... 할 줄도 모르고."


"걱정마, 자동주행 시키면 되니까 그냥 떨어지지 않게 핸들 잡고만 있으면 돼."


"자동주행 기능이 있어?"


"내가 클래식한걸 좋아한다고 기능까지 다운그레이드 시킨 건 아냐. 요즘 나온 차량엔 자동주행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다는 건 상식이잖아?"


그 요즘의 기준이 어디인지는 모르겠다만, 무슨 차량이든 자동운전이 기본옵션이라니 새삼 미래구나 하고 느꼈다.


*


"하아... 주인님도 무심하기도 하시지..."


전날까지만 해도 마키나의 낙원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지금은 잔해밖에 안남은 비스마르크 도시. 블랙 리리스는 한 폐허 건물 옥상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페로에게 입단속을 시키긴 했었으나 결국 리리스의 독단으로 두번째 인간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사령관의 귀에 들어가버렸다. 이에 사령관은 노발대발하며 리리스에게 처벌기간동안 혼자서 비스마르크 도시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목상으론 외부 거점 방어였지만 실제로는 귀양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치코는 리리스를 말린 덕에 가벼운 근신 처분으로 끝났다는 점이다. 다만 듣기로는 하치코가 선의로 한 일이긴 하나 두번째 인간의 흔적이었던 소방도끼와 은폐장를 줘버린 탓에 추적이 힘들어졌다고 한다.


페로를 원망할 생각은 없다, 자신과 주인님을 저울에 올리면 주인님을 선택하는 게 당연히 옳은 일이니까. 리리스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이 처벌에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주인님에게 미움 받았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슬플 뿐이었다. 두번째 인간에게 미안한 마음이 눈꼽만큼 들기도 했으나 자신의 불쌍한 처지와 슬픔에 파묻혀 그쪽에 관해선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산만해진 탓일까, 리리스는 저 하늘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찰형 인터셉터가 소리없이 비스마르크 도시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


오메가는 이미 비스마르크 도시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전략적 가치가 없었기에 방치해두고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땐 폐허 뿐이었기에 야생 바이오로이드가 몇명 모여서 살고있겠거니 하고 짐작했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제부터 그 도시에서 사용되고있던 전력이 뚝 끊겨버리자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정찰기를 파견했고, 그 폐허 위에 블랙 리리스 한 명만이 남아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블랙 리리스... 여럿 양산되는 개체도 아니니, 오르카호의 그 리리스겠군."


어째서 혼자 무리에서 떨어져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건 기회임이 분명했다. 저 리리스는 경호원으로서 사령관을 옆에서 지켜봐왔을테니 사령관이 어떻게 휩노스 병을 극복했는지 알고 있을 거다. 또한 그 사령관의 성격상 리리스를 인질로 삼는다면 거래해서 치료법을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오메가는 즉각 비스마르크 도시로 군대를 파견했다, 목표는 블랙 리리스의 생포다.


*


"우후훗... 그대여, 식사부터 하겠느냐? 아님 목욕부터? 아니면... 첩을...?"


"...꽤나 클래식한 선택지구만."


애니와 같이 바이크를 타고 여기저기 구경하며 돌아다니다가 점심시간 즈음에 집에 돌아오자 히루메가 반색하며 맞이해주었다.


"근데 그거 저녁에 쳐야하는 대사 아녀? 게다가 밥이래봤자 통조림이고 목욕이래봤자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몸 닦는 것밖에 더 되냐."


"참고로 오늘 점심밥은 옥수수 캔이야!"


"에이잇, 분위기 깨뜨리긴...! 그, 그럼 첩은 어떻느냐?"


"미안합니다 스미마셍. 물론 너는 멋진 여자긴 한데 까놓고 말해서 내가 식욕부터 잘 못채우고 있다보니 성욕은 뒷전이라서 말이야."


"치... 이러면 기운이 날 거라 생각해서 해본 것이거늘..."


"너희들이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충분히 기운 나니까 그 부분은 걱정마셔."


히루메가 입을 삐쭉 내밀었지만 그 이상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셋이 식탁에 앉아 끼니를 때우고, 왠지 나른해졌기에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다같이 옹기종기 누워 낮잠이나 자기로 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리도 그리웠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리디아, 트레저가 내 눈 앞에 있었다.


그들은 죽어있었다. 총탄에 맞고 칼에 찔린 처참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손목을 잡았다. 땅바닥 만큼이나 차가운 손목에는 아무런 박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상실감이, 절망감이, 그리고 공포심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칠 치던 중 무언가가 발에 채이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히루메와 애니의 시체였다. 비참하게 이목구비에서 피를 쏟은 채 널부러져 있었다. 그들에게서 나온 피 웅덩이가 내 발을 적셨다.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땅을 스멀스멀 기어오는 정체불명의 촉수가 내 다리를 휘감았으니까.


어둠 속에서 지구의 생물이 아닌 것 같은 이형의 고깃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수히 많은 눈알들이 일제히 나를 응시했다.

이윽고 내 몸을 휘감던 촉수는 내 목까지 올라와 목을 졸랐다.

압박감에 숨을 쉴 수가 없다.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다.


죽는다.

모두 죽었다, 나도 곧 죽는다.

의식이 점점 흐려진...














"그대여! 정신 차리거라!"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다. 히루메가 울상이 된 얼굴로 나를 붙들고 있었으며 애니 또한 안색이 창백해진 채 바라보고 있었다.


"히루메... 애니...?"


"괜찮다... 다 괜찮다... 첩은 여기 있니라..."


"일어났구나. 보스가 자면서 끙끙대기 시작해서 엄청 놀랐고... 걱정했어..."


상체를 일으켜세워 창문을 보니 어느새 밤이었다. 방금 꾼 그 꿈은...


"...악몽을 꿨어..."


그 말에 히루메와 애니가 경직되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분명했기 때문이다.


휩노스 병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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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후반부 들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