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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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윽....흐아앙.....”

 

저는 주인님이랑 영화를 보고 있었슴다. 주인님 침대에 앉아서 팝콘까지 먹을 수 있어서 처음에는 좋았는데, 보다 보니까.....이 영화, 슬퍼도 너무 슬프지 말임다.

 

주인님 앞에서 또 울고 싶진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막 눈물이 남다.

 

영화 제목은 모르겠슴다. 근데 내용은 대충 이랬슴다.

 

여주인공은 어릴 때부터 불쌍하게 살았슴다. 신분도 인간님들치곤 무지 낮았던 모양임다. 그래서 온갖 험한 일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살아감다. 

 

그러다가 딱, 하고 잘생긴 남자 주인공을 만나는 검다! 그 남자,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신분도 훨씬 높고 마음씨도 무지 착했슴다. 어쨌든 두 사람은 그렇게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졌지만, 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나쁜 사람들이 자꾸 둘을 괴롭혔지 말임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남자 주인공은 여주인공의 품 안에서 세상을 떠났슴다. 여주인공을 노리던 악당들의 칼을 대신 맞고 죽은 검다.

 

으앙...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얘기가 너무나 슬픔다. 눈물 콧물이 멈추질 않슴다. 게다가 조금은 제 처지 생각이 나기도 해서 더 마음이 아픔다. 정확히 왜인지는 모르겠슴다. 근데 남 얘기 같지가 않았슴다. 

 

“하하...많이 슬펐어, 이비?”

 

주인님께서 제게 물으셨슴다. 제대로 대답이 안 나오길래 전 그냥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슴다.

 

“흐흑...흐끕...”

 

“아이고. 다른 영화를 고를 걸 그랬나.”

 

주인님께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슴다. 주인님 탓이 아님다. 저도 이 영화 재밌게 봤단 말임다. 근데....근데 좀 지나치게 많이 슬프긴 했슴다.

 

그리고...영화 속의 연인들처럼, 우리 사이도 결국에는 이어지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되기도 함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까 아까보다 더 마음이 찢어지는 기분임다...

 

“흐아앙, 주인니이임!!!”

 

전 주인님의 품에 와락 몸을 던졌슴다. 그랬더니 캔맥주를 막 입에 대시던 주인님께서 깜짝 놀라시는 거 있지 말임다.

 

“싫슴다! 저 영화처럼 되는 건 싫슴다!”

 

제가 주인님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서 말했슴다. 

 

“영화에 나온 악당들도 두 사람이 이어지면 안 된다고 자꾸 저러지 않았슴까? 근데...그 부분이 다른 인간님들 하시던 말씀이랑 비슷한 거 같슴다. 인간님들이랑 우리 바이오로이드들이 사랑하면 안 된다는 거 말임다.

 

 그...뭐라고 했더라..... 

 아, 천륜에 어긋난다고 말임다.”

 

“...이비. 잠깐 고개 들어볼래?”

 

눈물로 앞이 일렁였지만, 전 고개를 들고 주인님의 얼굴을 바라봤슴다. 

 

“이비는 누가 날 사랑하면 안 된다고 하면, 그 사람 말 들을 거야?

 안 들을 거지? 나도 똑같아. 절대로 그렇겐 안 해.”

 

주인님께서 제 눈을 닦아주시면서 말씀하셨슴다.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임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는지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남들이 얼마나 욕하던 난 신경 안 써. 서로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대? 그런 게 필요하다는 놈들이 웃긴 거지.”

 

“그치만...아직 테러범들도 있고...뉴스 보니까 바이오로이드랑 같이 다니는 사람들한테-”

 

“그럴 땐 우리 이비가 날 지켜주면 되지. 영화에 나온 여자랑은 다르게, 우리 이비는 이쁘기만 한 게 아니라 힘도 세고, 총도 잘 쏘잖아?”

 

주인님께서 제 코를 장난스럽게 간질이셨슴다. 게다가 저렇게 낯간지러운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고 계심다. 우으...이런 건 반칙이지 말임다.

 

어느새 기분이 풀려서 표정이 헤실헤실 녹아버린 제게, 주인님께서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해오셨슴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 어디 안 가. 

 그래도 정 걱정된다면, 내가 우리 이비랑 약속 하나 할게.”

 

주인님께서 제게 가볍게 입을 맞추셨슴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너와 함께 있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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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온다.

 

누워서 눈을 감고 있은 지 한참은 된 것 같은데. 피로에 찌든 몸이 자꾸만 비명을 질러대도, 이 웬수 같은 정신은 도저히 잠들 생각을 안 하고 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그냥 눈을 떠버렸다. 

 

역시나 내 눈에 보이는 건... 언제나 봐 왔던 우리집 천장이 아니라 허름하기 그지없는 낡은 천장이다. 아까 기어 들어왔던 웬 농가. 아직도 집을 떠나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안 든다. 

 

머리를 옆으로 돌려보니 이비는 여전히 총을 안고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이비, 자?”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그녀. 방 안이 어두워서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잠이 안 오시나 보네요.”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일이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계속 뒤척이게 되더라.”

 

“그래도 눈 좀 붙여두세요. 내일은 더 힘들지도 모릅니다.”

 

“나도 그러고야 싶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겪었던 일들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이비가 일으킨 대피소에서의 유혈사태, 내 목숨이 위험할 뻔했던 그 순간...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이비가 보여주었던 낯선 모습들. 

 

그녀는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거리낌 없이 사람을 해치고, 내 친구들과 생명의 은인까지 의심하는가 하면.....지극히 매정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고. 

 

마치 내가 알던 그 소녀와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흐릿한 윤곽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를 향해, 나는 오늘 내내 품어왔던 의문을 꺼내 놓았다.

 

“그런데 너는..... 대체 뭐야?”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얼굴을 볼 수 없었음에도 목소리를 통해 그녀의 당혹스러운 마음이 전해져왔다.

 

“오늘 네가 보여줬던 모습들.....내가 알던 이비랑은 지나치게 달랐어. 조금 어리숙하긴 해도 마음씨는 정말 착하고, 또 누구에게나 살가웠던 게 내가 알던 네 모습인데.....오늘의 너는....”

 

점점 목이 메어 온다.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애쓰던 머리까지 지끈거리기 시작했고. 어째서인지 가슴 한복판도 먹먹해진다.

 

“...이상하리만치 차가웠어. 아니, 어떻게 보면 완전 싸이코 같았다고.”

 

“주인님.”

 

그녀가 총을 벽에 기대두고 나에게로 다가온다. 하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너 대체...왜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는 거야? 

 이게 네 진짜 모습이야? 이게 제정신일 때의 너냐고?

 

 네가 맹했을 때는 알기 쉬웠어. 단순하지만 순수했으니까. 

 안 좋은 사연이 많았어도 마음속에 여전히 따뜻함이 남아있었고.

 ...난 네 그런 모습을 사랑했던 거야.”

 

“주인님.”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이비가 내 말을 끊었다. 

 

“다음에 하실 말을 신중히 고르세요. 주인님과 다투고 싶진 않습니다.”

 

그녀의 은근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네 머리가 어떻게 됐다는 건 신경 안 써.

 망가졌다곤 해도 날 진심으로 사랑해준다는 건 알았으니까.

 

 근데 지금의 너는? 왜 이렇게 사람들을 못 믿어? 

 아니, 어쩔 땐 그냥 죽이고 싶어서 안달 난 것처럼 굴기도 했지.

 

 그렇게 친하게 굴던 바니랑 H한테까지 그러질 않나.....

 바이오로이드가 돼선 사람을 죽게 두자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나도 이젠 네 마음이 뭔지 모르겠어. 네가 무서워. 

 다른 사람들이나 철충들이 무서운 게 아냐. 난 네가 무섭다고.

 

 혹시 그냥 사람들이 미운 거야? 널 착취하고 이용해서?

 그럼 나는 너한테 뭔데? 나도 사람이잖아. 너 이러다가 나도-”

 

 

 

 

 

이비가 갑자기 달려들어 내 멱살을 거칠게 잡아쥐었다. 

엄청난 손아귀 힘에 내 몸이 그대로 딸려 올라간다. 

 

“...사람들이 밉냐고?”

 

그녀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난 당신보다 훨씬 오래 살았어. 그동안 온갖 못 볼 꼴을 다 봐 왔지. 당신네 족속들이 나와 내 자매들에게 했던 짓도 다 봤고.”

 

마치 으르렁거리듯, 낮은 톤의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그녀.

 

“당신도 알지? 우린 전쟁터에서만 죽어 나가는 게 아니야. 당신네의 그 시답잖은 욕심을 위해 싸우다가 불구가 된 채로 겨우 살아남아도, 우릴 기다리는 건 지옥 같은 전장보다도 더 끔찍한 신세뿐이라고. 

 

1차 연합 전쟁 때 정부군 놈들이 우리 자매들한테 했던 짓거리가 아직도 기억나. 그런데 말야, 그것도 당신 같은 일반인들이 우리한테 하던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더라.

 

적어도 그 새끼들은 다른 인간 포로들한테 하던 짓을 똑같이 했을 뿐이니까.” 

 

“이거 좀 놔, 이비.”

 

나는 그녀의 손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군용 바이오로이드의 힘은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난 당신들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알아? 수십 년 동안 만났던 내 가족들, 내 부하들... 전부 당신들 때문에 죽었다고.

 

 모두가 똑같은 얼굴을 한 자매들이었어. 하지만 각자가 조금씩 달랐지. 다들 살아있었어. 당신들하고 똑같이. 꿈도, 희망도 갖고 있었다고. 그 자매들은 내 가족이었어. 내가 가진 전부였지.

 

그런데, 그 똑같은 얼굴들이 전부 내 앞에서 죽었어. 그것도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내 가족들을 죽인 것도, 날 망가뜨린 것도 전부 당신들이야.

사람들이 밉냐고 물었지? 당연히 밉지. 

아니, 증오해. 직접 하나하나 짓이겨 죽이고 싶을 만큼.

 

어때, 이만하면 대답이 됐어?” 

 

창밖에서부터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에, 그녀의 눈동자와 이빨이 은은하게 빛난다.

 

“...내가 무서워? 인정머리 없고 차가워서? 그래서 겁이 나? 

 당연히 그래야지. 이게 당신들이 나한테서 원하던 모습이잖아.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그 바보, 그게 내 본모습이 아닌 것 같다고? 틀렸어. 그게 원래 내 모습이야. 지금 당신이 무서워하는 이 모습은....당신네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라고.”

 

“...이비-”

 

“그 오랜 세월 동안 난 아무도 지켜줄 수 없었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더 많은 자매를 살리려고 애쓰는 것뿐이었지. 다른 자매들과 내 목숨을 대가로 말이야.

 

 하지만 모두를 살리고 싶어서 발버둥칠 때마다, 사망자는 오히려 더 늘어날 뿐이었어. 그래서 난.....더 큰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때때로 또 다른 희생을 강요해야만 했지.

 

 가족들의 목숨을 가지고 저울질하는 그 기분을 당신이 알아? 물론 모르겠지. 당신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이해하고 싶지도 않을거고.”

 

말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르던 이비는, 서서히 내 멱살을 쥔 손에서 힘을 빼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난 인간이 미워.

 그런데 당신은...달라. 나한텐 당신이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거든.

 

 ....잃었던 가족들을 생각나게 해, 당신은. 어째서인지는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이제 내게 남은 건 당신뿐이라는 것. 

 

 그러니까 난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든 치를 거야.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건 내 알 바 아냐.

 

 씨발, 지구상의 인간이란 인간이 전부 뒈지건 말건 난 좆도 신경 안 쓸 거라고.

 하지만 당신만은 안돼. 당신만은 절대로....”

 

이비는 돌연 말을 멈추었다. 잔뜩 힘이 들어가 굳어있던 그녀의 어깨가 이완된다. 이비의 얼굴을 바라보니, 어느새 그녀의 볼 위로 가느다란 선이 빛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저도 예민해져 있었나 봐요.”

 

내 옷에서 손을 떼는 이비.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다.

 

“...무서우셨죠. 이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주인님만 무서우신 게 아니에요. 저도....너무 무서워요.”

 

그녀가 눈물을 훔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 며칠 전에 같이 봤던 그 영화, 기억 나시나요?”

 

“...응. 너 그거 보면서 펑펑 울었었지.”

 

아까와는 분위기가 바뀐 그녀. 나는 그녀를 내 품에 안아주었다.

내 앞의 희미한 실루엣에 그때 보았던 이비의 순진한 눈물이 겹쳐 보였다.

 

“그 영화가 슬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무서웠어요. 그 영화에서처럼, 언젠가 주인님을 제 눈앞에서 잃는 건 아닐까 하고... 제 눈앞에서 죽어갔던 가족들처럼요.”

 

내 품에 안긴 그녀가 소리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뒤로 꿈을 꿨어요. 주인님께서 제 팔에 안겨서 돌아가시는 꿈을요. 몇 번씩이나, 매번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식으로... 그 꿈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도저히...”

 

곧 이비는 가느다란 팔에 어울리지 않는 억센 힘으로 나를 옥죄어 왔다.

 

“제발, 제발 저를 떠나지 마세요. 주인님만은 안돼요. 주인님만은....”

 

“이비....”

 

그녀의 간절한 눈물과 목소리. 그것들이 내 마음에 닿자, 오늘 하루 종일 품었던 의심이 거짓말처럼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언제나 그래왔듯, 이비는 나를 잃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었다. 본질적으로 보았을 때 변해버린 건 그녀가 아니라, 그런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한 내 자신이었으리라.

 

나는 조용히 흐느끼는 이비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미안해. 내가 괜한 말을 했어. 

 

 네가 어느쪽 모습이든 내가 사랑하는 이비인 건 변하지 않아. 나도 그건 알고 있었는데...여러가지 일 때문에 너무 놀라서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네가 아니었으면 살아있지도 못했을 주제에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는 건데.”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잠긴 듯한 목소리의 이비가 말을 잘랐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과잉반응한 건 제 잘못입니다.” 

 

“두려움에 빠져서 널 의심한 건 내 잘못이고.”

 

나는 무어라 대꾸하려던 이비의 입을 살며시 막았다.

 

“...물론 내 눈에는 네 행동이 조금 지나쳐 보이긴 했어. 그래도 그건 다 내 목숨을 지켜주려고 그랬던 거잖아.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지.

 

 그런데 나는 어땠지? 감사는커녕, 마냥 널 무서워하고, 네가 나까지 해칠까 봐 의심하기까지 했어. 겁쟁이가 되어서는.....해선 안 될 의심에 빠져버렸다고.

 

 그러니까 이비....정말로 잘못한 건 나야. 미안해. 다 내 탓이야.”

 

“...십니까.”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는 이비.

 

“응?”

 

“...고작 사과 한마디로 끝내실 생각이시냐고 여쭸습니다.”

 

그녀가 갑작스레 내게 입을 맞춰왔다.

 

때아닌 기습에 잔뜩 당황한 내 입속에 침입한 이비. 그녀의 혀가 무슨 한이라도 맺힌 듯 필사적으로 내 혀로 얽혀 들어왔다. 

 

뜬금도 없고 맥락은 더더욱 없는 입맞춤에 버둥거리던 나를 찍어누르던 이비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입을 떼고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이 지나간 탓일까, 한층 선명해진 달빛이 그녀의 모습을 또렷이 비추고 있었다.

 

“저 아까 많이 서운했어요. 그러니까 정말로 미안하시면...”

 

그녀가 부스럭거리며 앞치마를 떼어내고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제가 주인님을 사랑하는 만큼, 주인님께서도 절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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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당돌한 선언에 기세 좋게 솟아버린 내 물건. 이비의 손길은 녀석의 준비태세를 더욱 재촉했고, 이제는 온 몸의 피가 거기에 다 쏠린 듯한 느낌까지 들 지경이다. 

 

“아아...주인님...”

 

이비가 내 위에 올라탄 채로 나와 시선을 맞춰왔다. 천천히 내 육신의 첨단을 자신의 안에 밀어 넣던 그녀가 힘겨운 숨을 뱉고 있다. 나는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윽고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뿌려짐과 동시에, 나의 치골과 그녀의 둔근이 맞닿았다. 

 

갑작스런 관계인 탓일까, 그녀의 안에서 첫날밤과 같은 촉촉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족한 습기를 대신하듯, 한층 강렬한 자극이 내 신경으로 쇄도해온다.

 

이비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낼까 경계하는 모양인지, 천천히 허리를 놀리면서도 신음대신 조용한 숨소리만을 내뱉고 있었다. 

 

소음을 최소화하려는 그녀의 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그녀의 숨소리는 상상 이상으로 야릇했다. 

 

곧 이비는 내 손에 깍지를 끼더니 그대로 상체를 기대왔다. 아직 벗지 않은 내 상의를 통해 그녀의 가슴이 닿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하으으....흐으읏....”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 애달프고도 달콤한 숨소리만을 –그녀 딴에는 최대한 조용하게 한답시고- 내 귀에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위 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전해져 오는 감각들. 가슴팍에 쓸려오는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과 국부를 휘감아오는 그녀의 또 다른 살결. 

 

이렇게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는 와중에도, 나는 종종 방문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늘같이 모든 것이 죽어버린 듯 고요한 밤이라면, 부스럭거리는 이불과 찔꺽이는 체액의 소리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을 깨울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게다가 방문을 닫아 놨다곤 해도, 이 다 허물어져가는 낡은 합판 쪼가리의 방음 성능은 신뢰할 만한 수준이 못될 게 분명하고.

 

....거 참 미친 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옆방에서 다들 듣고 있을 텐데도 이러고 있는 우리가 미친 년놈들이지.

 

서로의 말단이 만나는 곳에서 흰 거품이 만들어지며, 비릿하면서도 야릇한 냄새가 방 안을 채운다.

 

문득 이비의 움직임이 한층 더 거세지면서 우리 둘의 두 체액이 뒤섞이는 소리도 점차 커져갔다. 그 소리가 바깥까지 닿을까 신경이 쓰인 나는 연신 문 쪽으로 눈을 흘기며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기 바빴다. 

 

그러자 이비가 몸을 일으키더니, 내 몸까지 잡아끌어 일어 앉혔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고정한 이비.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자기만 봐 달라는 듯. 

 

곧 이비는 반쯤 걸치고 있던 야전 상의와 블라우스 따위를 완전히 벗어버렸다. 그리고는 내 귀에 고개를 바짝 갖다 대고는, 아주 조용하고도...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 증명이 덜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한눈팔지 말아 주세요.”

 

그러고서는 내 손을 들어 자기 가슴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내 일부분을 속에 품은 그녀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안, 나는 정성껏 그녀의 보기 좋은 가슴을 어루만졌다. 가볍게 쥐기도 하고, 때로는 그 가운데에 수줍게 솟아오른 봉오리를 튕기거나 비비기도 하면서. 

 

 

 

 


내 서툰 애무 탓인지, 그녀의 가쁜 숨이 한층 더 빨라졌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는 속도도 덩달아 빨라졌고.

 

내 눈 바로 앞에서 흔들리는 그녀의 보드라운 가슴을 보고있던 나는, 밀려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가슴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으읏!”

 

자기도 모르게 조금 큰 소리를 내버린 이비. 

 

하지만 우리 둘 다 이제 그런 문제는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좀 웃기는 표현이긴 하지만, 나는 미안함을 담아 필사적으로 그녀를 애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녀 나름대로 감정이 격렬했던 만큼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뱃속에서 긁듯 허리를 돌리고, 이리저리 몸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마음껏 나를 맛보는 이비. 그녀를 눕혀 두고 내 마음대로 움직였던 첫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었다. 

 

이윽고 내 몸의 끝단, 그 부분의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저릿거리는 느낌이 이어지더니, 얼핏 통증같기도 한 강렬한 감각이 하반신 전체를 휘감아왔다. 골반 주위와 허리의 근육이 수축하면서, 나의 희고 걸쭉한 그것이 그녀의 안에 쏟아졌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절정이 찾아왔음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몸을 놀렸다. 조금은 괴롭게 느껴질 정도의 자극이 나를 괴롭혔지만, 어딘가 절박하기까지 한 그녀의 얼굴을 본 나는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가만히 참고 있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 몸을 벽에 밀어붙이고, 어깨까지 세게 눌러가며 몸을 움직이던 이비는 이빨을 깨물며 크게 신음했다. 그녀의 등이 뒤로 젖혀지고, 내 어깨를 움켜쥔 두 손은 더욱 강하게 내 살을 파고들었다. 

 

다리와 허리를 파르르 떨던 이비는, 잠시 힘겹게 숨을 고르다가 다시 한번 나에게 입을 맞춰왔다. 

 

“부탁드릴 테니까.....제가 주인님을 사랑한다는 사실만은 의심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어떤 상태건, 어떤 모습으로 보이건..... 저는 영원히 주인님만의 메이드에요.”

 

“...명심할게, 이비. 나도....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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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몸을 꼭 껴안고 얼마간 후희를 즐기던 우리. 잠시 후 이비가 입을 열었다.

 

“...그날 약속해주셨죠.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함께 있어 주시기로.”

 

“그랬지. 뭐....지금은 거의 세상이 끝나가는 분위기긴 하지만.”

 

시답잖은 소리에 살짝 빈정이 상한 듯, 이비가 눈썹을 내리깔며 얼굴을 더 가까이 대었다.

 

“피, 그럼 약속을 바꿔주시면 되잖아요. ‘세상이 끝나더라도 영원히 함께하기로.’”

 

“...응. 영원히 함께 할게. 세상이 끝나도...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직 너와 함께.”

 

그윽한 시선을 교환한 뒤 재차 입을 맞추려던 찰나, 갑작스레 들려오는 작고 느린 박수 소리가 정적을 깨었다. 

 

 

 

 

 

“아, 여러모로 참 어설프네요. 하지만 그 점이 풋풋해서 좋았습니다.” 

 

.....이건 바니 목소린데.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어둠 속에 앉아있는 네 명의 형체가 보인다. 때마침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이 그들을 비췄다.

 

...네명의 바이오로이드. 우리 일행 셋에 아까봤던 그 강아지 메이드까지 다 모여있다.

 

“아아, 소첩의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감히 엿볼 생각은 없었사오나....”

 

잘 익은 토마토마냥 발갛게 물든 얼굴에 손을 올린 소완.

 

“한때의 즐거웠던 기억이 떠올라, 몹시도 행복한 기분이 들었사옵니다.”

 

...쟤 저런 목소리도 낼 수 있구나. 아니, 그보다...

 

“저, 저....이런 거 진짜로는 처음 봐요!”

 

침까지 흘려가며 휘둥그레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하치코. 그 옆에선 유미가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담요로 가리고 있었다.

 

“아으...아....관리자님...그....되게....크시네요....”

 

어안이 벙벙해진 우리는 잠시 네 명의 불청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어느새 들어온 걸까. 이제 보니 방문까지 열려 있었다.

 

“...언니?”

 

“....너희들 언제부터-”

 

“언젠지는 모르겠고, 이상한 소리에 깨서 와 보니 이미 한참 물고 빨고 하고 계시더군요. 그렇게나 급하셨습니까? 이거, 우리 서방님만 그러신 줄 알았더니 A님께선 한 술 더 뜨시네요. 다시 봤습니다.”

 

팔짱까지 끼고서 평소답지 않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바니.

 

“뭐, 걱정 마세요. 저야 귀가 밝지만, 우리 서방님께선 주무실 땐 누가 업어가도 모르시니까.”

 

“....헤헹, 할아버지 할머니도 주무실 땐 잘 안 깨세요.”

 

알몸의 이비는 내 위에 올라탄 그대로 굳어서는, 삐걱대는 고개를 간신히 돌려가며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모두를 쏘아보았다.

 

“...Get out.”

(나가요.)

 

“무어라 하셨사옵니까?”

 

“Get the fuck out. All of you. Now.”

(씨발 쳐 나가라고. 너네 다. 당장.)

 

급하게 그러모은 옷가지로 겨우 몸을 가린 이비가 이빨을 갈아가며 방문을 가리켰다. 그 와중에 그녀가 급하게 움직는 바람에 빠져나와 버린 나의 주니어. 아직도 풀이 채 죽지 않은 그 위용을 본 유미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우앗...흐아와....”

 

“나가라고요!”

 

급기야 바니에게 내 배게까지 집어던진 이비. 날아온 베개를 여유롭게 받아낸 바니가 낄낄거린다.

 

“후후후, 그럼 우린 이만 갈테니까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밤새지는 말고요. 뼈삭을지도 모르-”

 

“Fuck you!”

(좆까!)

 

방을 나서는 그들의 등 뒤로 기어이 한마디를 쏘아주는 이비. 그러자 바니가 다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대꾸했다.

 

“Fuck은 아까까지 당신 주인님이랑 하던 그거겠죠. 그럼 굿나잇, 아니 굿뻨!”

 

“아이 씨바 다들 진짜...”

 

....쪽팔려 죽겠네.

 

쟤들 앞에서 이게 무슨.... 게다가 바니 성격상 두고두고 이걸로 놀려먹겠지. 사람들이 안 깨어난 건 불행 중 다행일까.

 

슈밤 눈물이 다 난다.

 

아무래도 오늘 잠은 다 잤네. 아까랑은 다른 이유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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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는 에피소드 겸 잉야잉야 씬.


삽화들은 어떻게 예쁘게들 나왔나 모르겠습니다 ㅠ

부족한 솜씨와 구린 장비가 한스러울 뿐이네요 엉엉


매번 모자란 글과 그림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이에유우